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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가브리엘 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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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가브리엘 쉬셰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장군이다. 리옹 출신으로 혁명 발발 후 군에 입대하여 툴롱 공방전, 이탈리아 전역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00년 앙드레 마세나의 부사령관으로 제노바 포위전을 방어하고 마렝고 전투 승리에 기여했다. 스페인 반도 전쟁에서 아라곤 지방을 통치하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고, 1811년 원수, 알부페라 공작에 임명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귀족 작위를 받았다가 박탈당했으나, 백일천하 기간 동안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그는 뛰어난 전술 지휘관이자 행정가로 평가받으며, 나폴레옹에게 높은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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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가브리엘 쉬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장-바티스트 폴랭 게랭의 초상화
존칭 접두사프랑스 제국 원수
이름루이 가브리엘 쉬셰
존칭 접미사알뷔페라 공작
출생일1770년 3월 2일
사망일1826년 1월 3일 (55세)
출생지리옹, 프랑스
사망지마르세유, 프랑스
별칭해당 사항 없음
충성


부르봉 왕정복고 (1814–1815)
군대육군
복무 기간1792년–1815년
계급프랑스 제국 원수
지휘해당 사항 없음
주요 참전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스위스 침공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반도 전쟁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훈장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크루아
전투 목록
제1차 대프랑스 동맹툴롱 공방전
로아노 전투
제2차 데고 전투
로디 전투
보르게토 전투
카스틸리오네 전투
바사노 전투
아르콜레 전투
리볼리 전투
타르비스 전투
프랑스의 스위스 침공해당 사항 없음
제2차 대프랑스 동맹노비 전투
포촐로 전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울름 전투
쇤그라베른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제4차 대프랑스 동맹잘펠트 전투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푸우투스크 전투
오스트로웽카 전투
아일라우 전투
반도 전쟁사라고사 공방전
알카니스 전투
마리아 전투
벨치테 전투
예리다 공방전
메키넨사 공방전
토르토사 공방전
타라고나 공방전
몬세라트 전투
사군툼 전투
발렌시아 공방전
카스탈랴 전투
타라고나 공방전
오르달 전투
제7차 대프랑스 동맹해당 사항 없음

2. 초기 생애 및 혁명 전쟁

쉬셰의 리옹 출생지


루이 가브리엘 쉬셰는 1770년 3월 2일 리옹에서 비단 상인인 장-피에르 쉬셰(Jean-Pierre Suchet)와 안-마리 자키에(Anne-Marie Jacquier)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때 사망했다.[1] 당시 많은 나폴레옹 전쟁의 원수들이 비교적 평범하거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것과 달리, 쉬셰는 부유한 가정 환경 덕분에 탄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1] 1787년,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사업에 합류하여 2년간 견습생으로 일하며 가업을 이을 준비를 했다.[1]

1789년 1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쉬셰는 형 가브리엘-카트린(Gabriel-Catherine)과 함께 ''Maison Suchet frères프랑스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확장하려 했다.[1] 그러나 같은 해 발발한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깊이 공감하게 되면서, 그는 안정된 상인의 길 대신 격동의 시대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1791년, 쉬셰는 리옹의 국민 방위군 기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 이는 그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하면서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2. 1. 초기 군 경력

리옹의 부유한 비단 방직업자 아들로 태어난 쉬셰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예정이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그 사상에 동조하여 1792년 국민 방위군 기병대에 자원 입대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 그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빠르게 승진했으며, 병사들의 선거를 통해 중령으로 진급했다.

1792년, 빈센트-니콜라 라베라(1834년 작)가 그린 4 아르데슈 대대 중령 시절의 쉬셰


1793년 8월의 '''레베앙마스''' 이후, 쉬셰는 4 아르데슈 대대의 사령관(중령)으로 임명되었다.[2] 그는 이 부대를 이끌고 툴롱 공방전에 참전하여 영국군 장군 찰스 오하라를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다.[2] 같은 해 고향인 리옹 봉기 진압에도 참여했다. 1794년 5월에는 자신의 대대 병력 250명을 이끌고 프랑스 남동부 베당 마을에서 발생한 반혁명 봉기를 진압했다.[1]

1795년, 쉬셰는 이탈리아 원정군에 배속되어 이후 7년 동안 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게 된다.[2] 그는 앙드레 마세나 휘하에서 원정군의 첫 번째 전역 중 11월 로아노 전투에 참전했다.[2] 1796년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로디 전투, 카스티글리오네 전투, 바사노 전투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2] 그러나 10월 11일 체레아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잠시 파리로 가서 휴가를 보냈지만, 곧 군대로 복귀했다.[2]

1797년 5월, 쉬셰는 18 보병 반여단의 세 명의 중령 중 한 명으로, 승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는 군복 구입을 위해 베네치아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지배를 예상한 베네치아인들로부터 왕족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두 달간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1797년 10월 28일, 앙드레 마세나 사단의 장교들이 연 만찬에서 32선발 대대 대령 도미니크 마르탱 듀푸이가 쉬셰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소개하며 대령 승진을 요청했다. 나폴레옹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듀푸이는 자신의 견장을 떼어 쉬셰에게 달아주며 즉석에서 대령으로 임명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 행동이 효과를 거두어 나폴레옹은 즉시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에게 쉬셰의 대령 승진 임명장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쉬셰는 이틀 전인 10월 26일에 이미 18 반여단 (''demi-brigade프랑스어'')의 지휘권을 받은 상태였다.[2]

1798년 3월, 쉬셰는 기욤 마리 안느 브륀 장군 휘하에서 스위스 원정에 참전했다.[2] 이 원정이 끝날 무렵 그는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적에게서 빼앗은 깃발을 프랑스 디렉토리에 봉헌하는 영예를 안았다.[2][3] 본래 이집트 원정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브뤼네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이탈리아 군대의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에 남겼다. 쉬셰는 브뤼네의 후임이자 친구인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장군 휘하에서도 참모총장직을 유지했다.[2] 1799년 2월 21일 잠시 다뉴브 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이탈리아의 주베르 휘하로 돌아와 사단장으로 승진했다.[2] 노비 전투에서 주베르가 전사한 후에는 후임 사령관인 장 빅토르 마리 모로와 장-에티엔 샹피옹네 아래에서도 참모총장으로 계속 복무했다.[2]

1800년, 쉬셰는 앙드레 마세나 장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마세나 군대의 좌익을 지휘하며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노련하게 저항했다. 이는 우익과 중앙 부대가 제노바에서 포위되었을 때 오스트리아군의 프랑스 본토 침입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보나파르트의 알프스 횡단 작전 성공과 6월 14일 마렝고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6월 15일 알레산드리아 협정 조인 후, 쉬셰는 제노바루카의 행정을 맡았다.[2] 그는 트레비소 휴전까지 이탈리아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이후 뤼네빌 조약과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종전까지 파두아의 총독으로 복무했다.[2] 1801년 7월 24일에는 보병 감찰장으로 임명되었다.[2]

2. 2. 나폴레옹과의 관계

툴롱 공방전은 나폴레옹이 명성을 얻게 된 계기였지만, 당시 포병 소령이었던 나폴레옹과 보병 대대를 이끌고 영국군 장군 찰스 오하라를 사로잡는 등[2] 공을 세운 쉬셰는 서로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쉬셰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그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장 외에서는 게으르고 횡포한 것으로 알려진 앙드레 마세나와의 감정적 대립을 겪으면서 나폴레옹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1797년 10월, 앙드레 마세나 사단의 한 만찬에서 동료 장교 도미니크 마르탱 듀푸이가 쉬셰의 대령 승진을 나폴레옹에게 직접 요청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곧입니다. 알아보겠습니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으나, 듀푸이가 자신의 견장을 떼어 쉬셰에게 달아주며 재치 있게 행동하자 결국 쉬셰의 승진 임명장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1800년, 쉬셰는 마세나의 부사령관으로서 나폴레옹의 알프스 횡단 작전 성공에 기여했으며, 마렝고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쉬셰는 이미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사단장이었지만, 제1제정 시기에는 그의 공화주의적 성향이나 마세나와의 관계 때문인지 승진이 다소 늦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장 라뉴 원수 휘하에서 활약하며 신임을 얻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독일 원정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에 의해 귀족에 봉해졌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을 지지하여 1815년 귀족 작위를 박탈당했다.

3. 나폴레옹 전쟁 시기

루이 가브리엘 쉬셰 알부페라 공작의 문장


쉬셰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크게 명성을 높였다. 1799년 7월 이탈리아에서 주베르 휘하의 사단장 겸 참모장이 되었고, 1800년에는 마세나에 의해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나폴레옹알프스산맥 횡단 작전에 기여했다. 같은 해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제1제정 수립 이후, 뛰어난 사단장으로 명성을 얻었음에도 공화파로서의 경력과 마세나와의 대립 등으로 인해 초기 출세가 다소 늦어졌다. 하지만 주어진 임무는 확실히 수행하며 점차 신임을 얻었다. 1804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에는 원수의 제4군단 사단장으로서 울름 전투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는 제5군단 소속으로 다시 란 원수 휘하에서 복무하며 잘펠트 전투,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푸우투스크 전투, 그리고 1807년 오스트로우엥카 전투에 참전했다.[2] 특히 란 원수에게 깊은 신임을 받아 그의 부장격으로 활약했다.

틸지트 조약 이후에는 러시아 장군들과 함께 새로운 바르샤바 공국의 국경 설정 작업에 참여했다. 1808년 3월 19일 백작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6월 24일 제국 백작으로 정식 임명되었다.[2] 이후 실레시아 주둔 제5군단 사령관을 맡았다.[2]

1808년 말부터는 스페인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전 상관이었던 란 원수의 추천으로 1809년 아라곤 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스페인에서의 공적으로 원수로 승진하고 1812년 알뷔페라 공작 작위를 받았다. (스페인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은 아래 문단 참고)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쉬셰는 점령지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후퇴해야 했다. 왕정 복고루이 18세에 의해 귀족으로 봉해졌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을 지지하면서 1815년 귀족 자격을 박탈당했다.

3. 1. 스페인 반도 전쟁

1811년 1월 2일 쉬셰가 토르토사 항복을 받는 모습(세부), 장-샤를-조제프 르몽(약 1836년) 작


비센테 로페스 포르타냐가 그린 스페인의 쉬셰 원수 초상화, 1813년경


쉬셰는 1808년 11월 스페인 반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스페인에 배치되었다.[2] 그는 사라고사 공성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1809년 4월 아라곤 군 사령관 겸 총독으로 임명되어 군사적 능력과 효율적인 행정을 통해 해당 지역을 성공적으로 안정시켰다. 알카니스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1809년 6월 14일 마리아 전투에서 블레이크 이 호예스가 이끄는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1810년 4월 22일에는 레리다 공성전에서 오도넬에게 승리했으며, 5월에는 메키넨사를 점령했다.[3]

1811년 1월 2일 토르토사를 함락시켰고,[2] 같은 해 5월부터 6월까지 타라고나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7월 8일 나폴레옹으로부터 제국의 원수 칭호를 받았다.[2] 이후 발렌시아 지방을 침공하여 10월 15일 사군툼 전투에서 다시 블레이크 군을 패배시키고, 1812년 1월 9일 발렌시아의 항복을 받아냈다.[2] 이 공적으로 1812년 1월 24일 알부페라 공작( duc d'Albuféra프랑스어 ) 작위를 받았다.[3]

그러나 프랑스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쉬셰는 점령지를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2] 그는 카탈루냐와 피레네 산맥을 거쳐 프랑스로 후퇴했으며, 1814년 4월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 남서부 프랑스 방어에 참여했다.[2]

3. 1. 1. 아라곤 통치와 행정



1809년 4월, 사라고사 공성전에서 복무한 후[2] 쉬셰는 아라곤군 사령관 겸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이전 상관이었던 원수가 나폴레옹에게 주노 대신 쉬셰를 추천한 결과였다. 쉬셰는 주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랑의 휘하를 떠난 것에 실망했었으나, 이 임명으로 염원하던 군단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쉬셰는 총독으로서 아라곤 지방의 안정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피폐해진 군단을 단기간에 재건하고, 엄격하게 약탈을 금지했으며 파괴된 사라고사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또한 지역 주민을 최대한 배려하는 유연한 통치 방식을 통해 2년 만에 아라곤 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그의 통치는 용맹함뿐만 아니라 현명함과 능숙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라곤의 평온함은 당시 스페인 전선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으며, 이는 쉬셰가 행정가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을 증명한다. 그는 게릴라 소탕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군사적 성공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과 협력하여 소탕 작전을 펼치는 등 지역 주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보기 드문 지휘관이었다. 그의 공정하고 현명한 통치는 적들에게도 존경을 받아, 한 적장은 쉬셰의 젊은 아내(스페인으로 데려온 20세 연하의 아내)가 머무는 숙소는 포격 대상에서 제외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4. 나폴레옹 몰락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쉬셰는 1814년 6월 4일 루이 18세 국왕에 의해 프랑스 귀족(peer of France)이 되었다.[2] 그러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엘바섬에서 탈출하자 미셸 네이의 권유로 다시 나폴레옹 휘하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1815년 7월 24일 귀족 작위를 박탈당했다.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은 쉬셰를 알프스 방면군(Army of the Alps)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 방면과 프랑스 본토 방위를 맡겼다. 이 임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술트 대신 쉬셰가 참모총장에 더 적합했다거나, 주 전선인 서부 전선에서 그의 능력을 활용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나폴레옹 자신도 훗날 "그루시 대신 쉬셰를 기용했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쉬셰는 알프스 지역에서 공세를 펼치며 약 두 달간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냈으나, 워털루 전투 패배 소식을 듣고 고향인 리옹으로 후퇴하여 7월 12일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2]

왕정 복고 이후 네이의 탈출을 도우려 했으며,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추방되었으나 곧 복권되어 1819년 3월 5일 상원 의원으로 복귀했다.[2] 이후 공직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다른 원수들을 비판했지만, 쉬셰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유지했다.[3]

그는 1826년 1월 3일 마르세유 근처의 생조셉-몽트레동 성(현재의 생쥐스트 성)에서 사망했다.[2][4]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사라고사 시민들은 추도 미사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들 루이-나폴레옹(1813~1877)이 알부페라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5. 유산 및 평가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자신의 부하 중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 누구냐는 질문에 "어려운 질문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쉬셰일 것이다"라고 답했다.[8] 또한 "쉬셰가 두 명 있었다면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평정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평가도 있다. 처세술이 서툴렀던 탓에 승진이 늦었지만, 전술 지휘관으로서도 뛰어났으며,[9] 행정가로서는 동료 중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9] 어떤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원수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성품도 온화해서 병사들에게도 존경받았다고 전해진다(장교들에게는 엄격했다고 한다).

수셰의 묘,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


그의 회고록 (''Mémoires sur Ses Campagnes en Espagne프랑스어'')는 1829년부터 1834년까지 두 권으로 출판되었으며, 스페인 전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닭 요리인 ''poularde à la d'Albuféra''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가족 관계

쉬셰는 1808년 11월 16일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의 아내인 쥘리 클라리(Julie Clary)의 조카인 오노린 앙투안 드 생조셉(Honorine Anthoine de Saint-Josephfra) (마르세유, 1790년 2월 26일 ~ 파리, 1884년 4월 13일)과 결혼했다.[5][6]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7]


  • 루이즈 오노린(Louise-Honorinefra) (1811년 ~ 1885년)
  • 루이 나폴레옹(Louis-Napoléonfra) (1813년 ~ 1877년)
  • 딸 (이름 미상) (1820년 ~ 1835년)

참조

[1] 서적 Conqueror And Administrator:: Civil And Military Actions Of Marshal Louis-Gabriel Suchet In The Spanish Province Of Aragon, 1808 Pickle Partners
[2] 서적 Dictionnaire des parlementaires français https://gallica.bnf.[...]
[3] 웹사이트 SUCHET, Louis-Gabriel, (1770-1826), duc d'Albufera, maréchal https://www.napoleon[...]
[4] 웹사이트 Castle of Saint-Joseph http://www.napoleon-[...]
[5] 서적 Les sénateurs du consulat et de l'empire https://books.google[...] H. Champion 1895
[6] 서적 La carrière du Maréchal Suchet duc d'Albufera: documents inédits https://books.google[...] Didot 1900
[7] 서적 Titres, anoblissements et pairies de la restauration 1814-1830 https://archive.org/[...] Chez l'auteur et chez H. Champion 1906
[8] 문서 나폴레옹의 원수 평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9] 문서 노트에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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