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14세 요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칼 14세 요한은 본래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군인으로 복무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스웨덴 왕세자가 되어 1818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동군 연합을 이루고, 중립 외교 정책을 펼치며 스웨덴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내정에서는 경제 발전과 사회 간접 자본 투자를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스웨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웨덴의 나폴레옹 전쟁 참전 군인 - 악셀 폰 페르센
악셀 폰 페르센은 18세기 스웨덴의 귀족, 군인, 외교관으로서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프랑스 혁명 시기 왕정 복구에 헌신하고 스웨덴 왕국의 원수까지 올랐으나 왕세자 독살설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 1813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이자 원수로, 워털루 전투 승리에 기여했으며 '전진 원수'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용맹함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인물이다. - 1813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알렉세이 예르몰로프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고 코카서스 지역 사령관으로 러시아의 코카서스 정복에 기여한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러시아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 스웨덴의 왕족과 귀족 - 칼 16세 구스타프
칼 16세 구스타프는 1973년 즉위한 스웨덴 국왕으로, 1974년 헌법 개정 이후 의례적인 국가 원수 역할을 수행하며 스웨덴 사회의 변화와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보수적인 성향에 대한 비판과 과거 논란 및 사생활 의혹도 존재한다. - 스웨덴의 왕족과 귀족 -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7세기 스웨덴 국왕으로, 능숙한 외교와 군사적 재능으로 스웨덴을 이끌고 중앙집권적 행정 시스템 구축, 중상주의 정책 추진, 30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이끌며 혁신적인 군사 전략으로 승리하는 등 스웨덴의 대국 시대를 연 "북방의 사자"이다.
칼 14세 요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칼 14세 요한 |
다른 이름 | 칼 3세 요한 |
로마자 표기 | Karl XIV Johan |
프랑스어 이름 | Jean-Baptiste Jules Bernadotte |
스웨덴어 이름 | Karl Johan Baptist Julius |
직함 | 스웨덴 국왕 및 노르웨이 국왕 |
![]() | |
통치 | |
스웨덴 국왕 즉위 | 1818년 2월 5일 |
노르웨이 국왕 즉위 | 1818년 2월 5일 |
퇴위 | 1844년 3월 8일 |
이전 국왕 | 칼 13세 & 2세 |
다음 국왕 | 오스카르 1세 |
대관식 | |
스웨덴 대관식 | 1818년 5월 11일 스톡홀름 대성당 |
노르웨이 대관식 | 1818년 9월 7일 니다로스 대성당 |
생애 | |
출생 | 1763년 1월 26일 |
출생지 | 프랑스 피레네자틀랑티크 포 |
사망 | 1844년 3월 8일 |
사망지 | 스웨덴 스톡홀름 |
매장일 | 1844년 4월 26일 |
매장지 | 리다르홀름 교회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데지레 클라리 (1798년 결혼) |
자녀 | 오스카르 1세 |
아버지 | 앙리 베르나도트, 칼 13세 (입양) |
어머니 | 잔 드 생장 |
왕조 | 베르나도테 왕가 |
종교 | |
종교 | 루터교 (이전: 로마 가톨릭) |
서명 | |
![]() | |
군사 경력 | |
소속 |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공화국 프랑스 제국 스웨덴 왕국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
복무 기간 | 1780년–1844년 |
계급 | 프랑스 원수, 스웨덴군 총사령관 |
지휘 | 하노버 총독 안스바흐 총독 한자 도시 총독 라인 방면군 (1798년) 서부 방면군 제1군단 제9군단 안트베르펜 방면군 북부 연합군 스웨덴군 최고사령관, 노르웨이군 최고사령관 |
주요 전투 |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스웨덴-노르웨이 전쟁 (1814년) |
훈장 | 세라핌 훈장 그랜드 마스터 검 훈장 그랜드 마스터 북극성 훈장 그랜드 마스터 바사 훈장 그랜드 마스터 레지옹 도뇌르 대훈장 철십자 대십자장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 1급 철왕관 훈장 코끼리 훈장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개선문 이름 목록 |
기타 활동 | |
기타 활동 | 국무원 빈 주재 대사 및 헝가리 왕 |
퐁테코르보 공작 | |
재임 기간 | 1806년 6월 5일 – 1810년 8월 21일 |
후임자 | 뤼시앵 뮈라 |
프랑스 공화국 전쟁부 장관 | |
재임 기간 | 1799년 7월 2일 – 1799년 9월 14일 |
이전 장관 | 루이 마리 드 밀레 드 뮈로 |
다음 장관 | 에드몽 루이 알렉시 뒤부아크랑세 |
2. 생애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는 1763년 프랑스 남부 포에서 태어나 1780년 프랑스 왕국군에 사병으로 입대했다.[50][51][60] 프랑스 혁명 발발 후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794년 장군이 되었다.[583][84]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 여러 전투와 전역에서 활약했으며, 잠시 빈 주재 대사와 육군 대신을 역임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과는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쿠데타에 협력하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1804년 프랑스 제1제국 수립 후 그를 제국 원수로 임명했다.[193]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고,[208] 점령지 하노버 등에서 온건하고 유능한 통치로 명성을 얻었다.[194][128][195][196][197][4] 그러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불참 논란, 바그람 전투 이후 독자적 포고령 발표 등으로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결국 지휘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1810년, 자녀가 없는 고령의 카를 13세의 후계자를 찾던 스웨덴 의회는 베르나도트를 왕위 계승자로 선출했다.[12] 이는 당시 스웨덴이 처한 상황과 베르나도트 개인의 명성, 그리고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베르나도트는 '칼 요한'(Karl Johan)이라는 이름으로 루터교로 개종하고 스웨덴 왕세자 겸 섭정이 되었다.[21] 그는 핀란드 탈환 대신 덴마크령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1812년 정책'을 추진했고,[318][319] 1812년 프랑스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 영국과 동맹을 맺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했다.[18] 연합군 북방군 총사령관으로서 라이프치히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나폴레옹의 몰락에 기여했다.[399][400]
전후 킬 조약(1814년)을 통해 노르웨이를 획득했으나, 노르웨이의 독립 선언으로 짧은 전쟁을 치른 후 모스 협약을 통해 노르웨이의 독자적인 헌법과 자치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을 수립했다.[21][19]
1818년 카를 13세가 사망하자 스웨덴 국왕 칼 14세 요한, 노르웨이 국왕 칼 3세 요한으로 즉위했다.[452][453][454][455] 그는 스웨덴 중립 정책의 기초를 다지고,[515] 스칸디나비아 반도 외부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장기간의 평화를 유지했다.[21] 내정에서는 경제 안정화, 부채 상환,[471][472] 금본위제 도입,[474] 농업 생산성 향상,[475][476] 예타 운하 건설 등 사회 기반 시설 확충,[481][482] 의무교육 도입(1842년) 등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점차 보수화되어 자유주의 세력의 개혁 요구에 소극적이었고 언론 통제 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21]
그는 1844년 3월 8일 8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외아들 오스카르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창시한 베르나도테 왕조는 현재까지 스웨덴 왕실로 이어지고 있다.[579]
2. 1. 프랑스 혁명 시대
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는 1763년 1월 26일, 프랑스 남서부 베아른의 포(Pau)에서 법률가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50][51] 아버지는 검사 장 앙리 베르나도트, 어머니는 잔 드 생장이었다.[51] 14세 때 지역 변호사 밑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했으나,[57] 17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법률가의 길을 포기했다. 1780년 9월 3일, 그는 왕립 해군 연대(Régiment Royal–La Marine)에 사병으로 입대하여[60] 코르시카 등지에서 복무했다. 성실한 근무 태도로 꾸준히 진급하여 1790년 초에는 구체제 하 부사관의 최고 계급인 연대 부관(중대장(Adjutant-Major))이 되었다.[68]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왕립군 하사관이었다. 혁명은 베르나도트와 같이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는 이를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584] 하지만 혁명 초기에는 군인으로서 군율 준수를 강조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르세유 주둔 당시 혁명에 반감을 가진 민중에게 위협받던 귀족 출신 연대장을 동료들과 함께 구출하기도 했으며,[71] 혁명에 동조하는 병사들의 봉기를 막기도 했다. 1792년부터 1794년경까지는 주로 독일 전선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하며 파리의 급진적인 혁명 분위기와는 거리를 두었다.

혁명으로 인해 부사관과 장교 사이의 신분 장벽이 철폐되자, 1792년 소위로 임관한 베르나도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583] 그는 대담한 공격 지휘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부대를 결집시킨 일화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후퇴하던 부대 앞에서 자신의 견장을 찢어 던지며 "도망쳐서 수치를 당하겠다면, 나는 더 이상 너희의 대령이기를 거부한다!"라고 외쳐 병사들을 다시 전열에 서게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79] 1794년 상브르-에-므즈 군에 배속되어 준장으로 승진했고, 같은 해 6월 플뢰뤼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워 사단장(소장급)이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84] 이후 네덜란드와 벨기에 점령에 크게 기여했으며, 독일 전선에서도 활약했다. 특히 타이닝겐 전투(1796년) 후퇴 시 후위를 맡아 3배가 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막아내며 프랑스군의 안전한 철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91][92] 그는 점령지 민간인을 존중하고 군율을 엄격히 적용하여 약탈을 금지하는 등 규율을 중시하는 지휘관으로 알려졌다.[85][86]
1797년 초, 총재정부의 명령으로 2만 명의 증원군을 이끌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원정군에 합류했다. 혹한 속에 알프스를 넘는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이탈리아 원정군 내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밀라노에서는 주둔군 사령관 도미니크 마르탱 뒤푸이와의 갈등으로 나폴레옹의 참모장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와도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102] 만토바에서 나폴레옹과 처음 만났으며, 이후 탈리아멘토 강 도하 전투와 그라디스카 요새 점령 등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점차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였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야심과 정책을 경계했고,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독립적인 성향과 인기를 불편하게 여겼다.[112] 프뤼티도르 18일 쿠데타 당시 나폴레옹의 의도와 달리 독자적으로 총재정부에 보고서를 보내는 등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115] 나폴레옹은 캄포 포르미오 조약 이후 베르나도트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고, 총재 폴 바라스가 베르나도트를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하자 이를 막고 빈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124]
빈 대사 시절, 대사관에 프랑스 삼색기를 게양한 일로 빈 시민들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여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했다.[128][131] 1798년 8월 17일, 파리에서 마르세유 상인의 딸인 데지레 클라리와 결혼했다.[586] 데지레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처제이자, 한때 나폴레옹의 약혼녀였다.[587] 이 결혼으로 베르나도트는 보나파르트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베르나도트는 군 내부뿐 아니라 민중에게도 인기가 높았으며, 한때 나폴레옹의 경쟁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자코뱅파와 관계를 맺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1799년 7월 2일부터 9월 14일까지 잠시 육군 대신을 맡아 군 재건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144][145] 그의 인기와 자코뱅파와의 연관성을 경계한 시예스 등에 의해 해임되었다.[150]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당시,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그는 공화국 헌법 수호를 내세우며 중립을 지켰다.[155] 그는 쿠데타에 가담하지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음으로써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156] 이로 인해 나폴레옹 집권 이후에도 정치적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 정치의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157]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능력과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1800년 국무원 의원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부터 1801년 8월까지 반란이 잦았던 방데 지역의 서부 방면군 사령관을 맡아 온건한 정책으로 지역 안정에 기여했다.[162]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 출정 전, 자신이 전사할 경우 베르나도트에게 공화국의 운명을 맡긴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158] 그러나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와 종신 집정관 취임 등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긴장 상태에 있었다.[166]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프랑스 정치 중심에서 멀리 두기 위해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총독직이나[182] 미국 대사직을 제안했지만,[185] 베르나도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외부 요인으로 무산되었다.[3]
2. 2. 나폴레옹 전쟁 시대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이 1799년 11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돕기를 거절했지만, 쿠데타 성공 후 나폴레옹은 그를 포섭하려 했다. 1800년 2월,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국무원으로 임명하여 그의 행정 능력과 영향력을 인정했다. 같은 해 4월부터 1801년 8월까지는 반란이 일어난 방데의 서부군 사령관직을 맡아 성공적으로 평화를 회복시켰다.[588]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면서 베르나도트에게 파리 근처의 군대를 맡겼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전사할 경우 베르나도트가 공화국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인기를 가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802년에는 루이지애나 총독직을 제안받았으나, 나폴레옹이 추가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이를 거절했다.[3]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베르나도트는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93] 이는 나폴레옹이 과거 약혼자였던 데지레 클라리에 대한 미안함도 작용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588] 1804년 6월부터 1805년 9월까지 하노버 총독으로 재직하며 독립성, 청렴함, 온건함 및 행정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하노버의 경제는 번영했으며, 괴팅겐 대학교를 보호하고 학자들과 교류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94][128][195][196][197][4]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는 하노버 병력과 바이에른군으로 구성된 제1군단을 지휘하여 대육군의 좌익을 맡았다.[200] 그는 울름 전투로 이어지는 기동에 참여하여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로를 차단하는 데 기여했으며,[201] 10월 12일에는 뮌헨을 점령하여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를 복위시켰다.[201] 10월 30일에는 잘츠부르크를 점령했다.[204][6]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년 12월 2일)에서는 중앙에 배치되어 연합군의 포위 시도를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08] 이 공로로 1806년 6월 5일, 이탈리아 남부의 폰테코르보 공국의 초대 군주인 퐁테코르보 공으로 임명되었다.
180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0월 14일)에 그의 군단이 참가하지 못한 일로 나폴레옹에게 질책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가 아우어슈테트에서 고전하던 다부 원수를 고의로 돕지 않았다고 비난했지만, 베르나도트는 도른부르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명령 전달 체계의 혼선과 나폴레옹의 상황 오판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는 반론도 강력하게 제기된다.[220][221][222][223][7] 전투 후 추격전에서는 10월 17일 할레 전투에서 프로이센 예비군을 격파했고,[224] 이후 뮈라, 술트와 함께 블뤼허 장군을 추격하여 뤼베크에서 11월 7일 항복을 받아냈다.
뤼베크 함락 당시 프랑스군의 약탈이 심했지만, 베르나도트는 질서 유지에 힘써 도시 당국으로부터 감사를 받았다.[227][228] 이때 포로로 잡힌 1,600명의 스웨덴 군인들을 정중하게 대우하고 귀국시킨 일은 훗날 그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추대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30] 이후 폴란드 전역에서는 모헝겐 전투(1807년 1월 25일)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232] 그러나 나폴레옹의 작전 변경 명령을 전달받지 못해 아일라우 전투(1807년 2월 7-8일)에는 참가하지 못했다.[235] 이후 전투에서 목에 총상을 입는 중상을 당해 전역의 나머지 기간 동안 후방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238]
틸지트 조약 이후 1807년 7월, 한자 도시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함부르크에 부임했다.[8] 그는 대륙 봉쇄령을 집행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도시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정책을 운용하여 상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241] 또한 덴마크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 침공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수송 문제와 반도 전쟁 발발로 인한 스페인 부대의 탈영 등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243] 덴마크 주둔 당시 엄격한 군율 유지와 현지인에 대한 좋은 대우로 덴마크 왕실과 민중의 호감을 얻어 코끼리 훈장을 받기도 했다.[9] 이 시기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스페인 국왕 후보로 고려하기도 했으나, 베르나도트 본인이 거절했다.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베르나도트는 주로 작센 군인들로 구성된 제9군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외국군 지휘의 어려움과 베르티에 참모총장을 통해 전달되는 명령의 혼선 등에 불만을 표하며 여러 차례 군무 해제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47][248][249][251] 바그람 전투(1809년 7월 5-6일)에서 그의 군단은 격렬한 전투 끝에 큰 피해를 입고 무너졌다. 전투 후, 베르나도트는 작센 군인들의 용기를 칭찬하는 독자적인 포고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공식 발표와 내용이 달라 황제의 분노를 샀다. 결국 그는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파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온 직후, 영국군의 왈헤런 원정이 시작되자 푸셰의 추천으로 안트베르펜 방어 임무를 맡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262] 그러나 방어 성공 후 발표한 또 다른 포고문이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려 다시 해임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를 카탈루냐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베르나도트가 거절했고, 이후 로마 총독직을 제안받았으나 건강을 이유로 휴식을 원하며 사실상 공직에서 물러난 상태가 되었다.[270][271] 이로써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오랜 긴장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 것으로 보였다.
2. 3. 스웨덴 왕세자 시대

1809년 스웨덴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 제국에 핀란드를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던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폐위되고, 그의 숙부인 칼 13세가 왕위에 올랐다.[589] 그러나 칼 13세는 고령이었고[590], 지명되었던 왕위 계승자 칼 아우구스트마저 1810년 급사하면서[10] 새로운 후계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유능한 나폴레옹의 원수 중 한 명을 왕위 계승자로 맞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칼 오토 뫼르네르 남작은 개인적인 판단으로 베르나도트에게 왕위 계승 가능성을 제안했다. 베르나도트는 과거 뤼베크에서 스웨덴군 포로에게 보여준 관대한 처우[591]와 하노버 등 독일 영지에서의 성공적인 통치 경험 덕분에 스웨덴 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128] 스웨덴 의회는 베르나도트가 루터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11] 그를 왕위 계승자로 맞이하기로 결정했고, 베르나도트 역시 이를 수락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 문제에 거리를 두려 했으나, 스웨덴 측의 의사를 확인하고는 마지못해 베르나도트의 입후보를 승인했다.[592] 1810년 8월 21일, 외레브로에서 열린 삼부회는 베르나도트를 새로운 왕세자로 선출했다.[12]
1810년 11월 2일, 베르나도트는 스톡홀름에 공식 입성했고, 11월 5일 삼부회에서 충성 맹세를 하고 칼 13세 국왕의 양자가 되어 '칼 요한'(Karl Johan)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시에 로마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했다.[21] 그는 곧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고, 양아버지인 칼 13세와 샬럿 왕비의 신임을 얻었다.[13] 국왕의 건강 악화로 인해 칼 요한은 섭정으로서 사실상 국정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첫 공식 연설에서 "평화야말로 현명하고 계몽된 정부의 유일한 영광스러운 목표입니다. 국가의 힘과 독립을 구성하는 것은 국가의 크기가 아니라 그 법률, 상업, 산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 정신입니다."[312]라고 말하며 평화의 중요성과 국가 정신을 강조했다.
섭정으로서 칼 요한은 먼저 심각한 상태였던 스웨덴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프랑스 원수 시절 모은 개인 재산을 사용하여 국가 부채를 상당 부분 상환하고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16] 대외 정책에서는 핀란드 탈환 대신 덴마크령 노르웨이를 획득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핀란드 탈환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장기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노르웨이 병합을 통해 보다 방어하기 쉬운 국경선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훗날 '1812년 정책'으로 알려지게 된다.[318][319]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프랑스에 맞서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지만,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에 대한 의무를 이유로 거절했다. 나폴레옹은 또한 칼 요한에게 대륙 봉쇄령 준수와 영국에 대한 전쟁 선포를 강요했다. 스웨덴은 마지못해 영국에 선전포고했지만, 이는 양국 모두에게 명목상의 전쟁으로 여겨졌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812년 1월, 프랑스군이 예고 없이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와 뤼겐 섬을 침략한 사건이었다.[17] 이 침략은 국제법 위반이자 명백한 적대 행위로, 스웨덴 여론을 격분시켰고 칼 요한이 반(反)나폴레옹 노선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18] 그는 나폴레옹에게 ''"정치에 있어서 우정도 증오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운명의 신이 명령한 대로 조국에 대한 의무만이 존재한다."''[369]라는 친서를 보내 결별의 뜻을 비추었고, 1812년 러시아 및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1812년 7월 18일 외레브로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과 스웨덴,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러시아, 영국, 스웨덴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만들었다. 이 조약은 스웨덴이 프랑스와 싸우고 스웨덴 포메라니아를 해방시키는 대가로 러시아와 영국이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하는 것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한 칼 요한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반나폴레옹 기운이 높아지자 연합군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합류했다. 그는 프랑스군 내부 사정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했다. 1813년 트라헨베르크 계획 수립에 기여하며 연합군의 전략 구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연합군 북방군 총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방어에 성공했으며, 그로스베렌 전투와 덴네비츠 전투에서 각각 우디노와 네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참전하여 스웨덴군을 포함한 북방군이 프랑스군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데 기여했으며,[399][400] 라이프치히에 가장 먼저 입성한 연합군 군주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연합국들로부터 최고급 훈장을 수여받았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칼 요한은 덴마크를 압박하여 노르웨이를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짧은 군사 작전을 통해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1814년 1월 킬 조약을 통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받았다.[21]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국왕으로 선출했다.[21][19] 이에 칼 요한은 군사 작전을 개시하여 노르웨이를 빠르게 제압했다.[21][19] 이 전쟁은 스웨덴 역사상 마지막 전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노르웨이의 독자적인 헌법과 정치적 자치권을 인정하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고,[21][19] 그 결과 1814년 을 통해 스웨덴-노르웨이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칼 요한을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지지하기도 했다.[20]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는 그가 조국을 배신하고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는 인식 때문에[593] 왕위 계승에 대한 지지를 얻기 어려웠고, 결국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복위했다.[594]
2. 4. 스웨덴 국왕 시대


1818년 2월 5일 카를 13세가 사망하자 칼 요한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스웨덴 국왕으로는 칼 14세 요한, 노르웨이 국왕으로는 칼 3세 요한으로 즉위했으며, 두 나라 모두에서 처음에는 인기가 많았다.[452][453][454][455] 그의 통치 아래 민주적 과정과 세력은 국왕의 제한된 집행 권력 하에서 꾸준히 성숙해졌다.
카를 14세 요한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강대국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외부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수세기 동안 이어진 스웨덴의 팽창주의와 대조적이었으며, 그는 181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왕국을 평화 상태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21] 특히 영국과 러시아 간의 갈등을 우려하여, 1834년 동방 문제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자 미리 중립을 선포했는데, 이는 스웨덴 중립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515] 그는 중립 유지를 위해 군사력 강화가 필수라고 여겨 칼스보르그 요새 건설에 착수하고 군대를 재편성하여 병력을 크게 증강했다.[516][517] 이러한 중립 정책은 스웨덴 국민의 지지를 얻어 현대까지 이어지는 중립주의(무장 중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내정 면에서는 경제 육성과 사회 간접 자본 투자에 중점을 두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웨덴은 국가 부채를 상환하고,[471][472] 금본위제 도입(1834년)으로 금융 안정을 이루었다.[474] 농업 분야에서는 농업 학교 설립, 기술 도입, 개간 등을 통해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켜 1820년대에는 농작물 수출국으로 전환했다.[475][476] 예타 운하 건설(1832년 완공), 도로 포장, 전신 도입 등 인프라가 확충되었고,[481][482] 저축은행과 상업은행 설립으로 신용 공급이 확대되어 산업 발전을 촉진했다.[478][479] 또한 교육 분야에 힘써 학교 수를 대폭 늘리고 1842년 의무교육을 도입했으며, 병원 확충, 의료 인력 양성 등 의료 및 복지 시스템 개선에도 노력했다.[490][491][492]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젊은 시절의 급진적 성향과 달리 점차 보수화되었다. 국내 자유주의 세력의 요구를 외면하고 의회 개혁 등 정치 개혁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며, 언론 검열과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21] 이는 1823년 이후 특히 비판을 받았으며, 1830년대에는 언론인 마그누스 야코브 크루센스톨페(Magnus Jacob Crusenstolpe)의 모독죄(Lèse-majesté) 유죄 판결 이후 라부리스트 폭동(Rabulist riots)이 발생하고 퇴위 요구까지 나오는 등 인기가 하락하기도 했다.[21] 그의 보수화에는 스웨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해 통역(주로 아들 오스카르 1세)에 의존해야 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귀족 측근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언어적 장벽도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 있다.[567][570]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의회에 의해 선출된 통치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며,[458] 시민 사회에 비교적 이해심 있는 태도를 보여 농민과 중산층의 인기는 유지했다.[571]
노르웨이와의 관계에서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노르웨이 헌법은 스웨덴보다 의회(스토팅)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국왕의 거부권도 절대적이 아닌 유예적 거부권에 불과했다.[19][525] 칼 14세 요한은 절대 거부권을 요구했지만 관철시키지 못했고, 1821년에는 노르웨이 의회가 추진한 귀족제 폐지를 결국 수용해야 했다.[528][526] 그는 양국의 완전한 통합을 위해 노르웨이 헌법 개정을 시도했으나(1824년) 의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532] 또한 처리 과정에서 노르웨이의 독자적 외교권 부재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고,[536] 5월 17일을 노르웨이 제헌절로 기념하려는 움직임에도 반대하여 갈등을 빚었다. 오슬로 왕궁 건설 자금 지원을 둘러싼 의회와의 마찰도 있었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14세 요한 개인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의 인기는 비교적 높게 유지되었으며,[541] 말년에는 노르웨이 상선에 노르웨이 국기 게양을 허용하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오슬로의 중심 거리인 칼 요한스 가테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23]
말년에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대두되었으나, 그는 독일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564] 친러시아 정책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프랑스와의 관계는 점차 해소되어 파리 개선문에는 그의 이름 '베르나도트'가 새겨졌다. 젊은 시절 "왕후를 죽여라"라는 문신을 했다는 소문(근거는 희박함[39][40][41])과 달리 보수적인 군주로 군림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평가받는다. 그는 빈 체제를 충실히 따랐으나, 나폴레옹의 몰락을 지켜본 후 1830년 이후에는 온건한 입헌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칼 14세 요한은 퇴위 논란 속에서도 1843년 즉위 25주년(은혼식)을 큰 축하 속에 맞이했다.[195] 그는 1844년 1월 26일 81세 생일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채 3월 8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스톡홀름의 리다르홀름 교회에 국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외아들 오스카르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확립한 베르나도테 왕조는 여러 유럽 왕조들이 몰락하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고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579]
3. 유산
칼 14세 요한의 통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근대 스웨덴 발전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정책은 이후 스웨덴이 추구하게 될 무장 중립, 복지, 교육 중심 국가 모델의 기반이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칼 14세 요한은 강대국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외부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21] 이는 수 세기 동안 주변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스웨덴의 이전 확장 정책과는 뚜렷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181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평화 상태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1834년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동방 문제로 악화되었을 때, 양국 정부에 각서를 보내 미리 중립을 선언했는데, 이는 스웨덴 중립 정책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1818년 즉위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정책과 이익 모두 스칸디나비아 두 국가와 무관한 어떤 논의에도 신중하게 참여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우리 내정에 대한 간섭을 결코 허용하지 말 것"이라고 밝히며 중립과 내정 불간섭 원칙을 강조했다.
내정 면에서는 경제 발전과 사회 간접 자본 투자에 힘썼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어진 장기간의 평화는 국가 번영의 밑거름이 되었다. 26년(1810년부터 1818년까지의 섭정 기간을 포함하면 34년)에 걸친 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스웨덴의 인구는 크게 늘어, 핀란드를 할양하기 전 스웨덴과 핀란드를 합친 인구수와 비슷해졌다. 국가 부채는 상환되었고, 민법과 형법 개정안이 마련되었으며, 교육이 장려되었다. 농업, 상업, 제조업이 발전했고, 예타 운하 건설과 같은 내부 통신 수단도 확충되었다. 섭정 시대를 포함한 33년 동안 스웨덴의 GNP는 60% 증가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젊은 시절 급진적이었던 것과 달리 왕위에 오른 후에는 보수주의자로 변모했으며, 특히 언론 검열과 같은 그의 독재적인 통치 방식은 1823년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830년대에는 언론인 마그누스 야코브 크루센스톨페의 모독죄 유죄 판결을 계기로 라부리스트 폭동이 일어나고 퇴위 요구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떨어지기도 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좋은 평판을 가진 군주라는 점 때문에 그의 왕조가 심각한 위협을 받지는 않았다.[21]
노르웨이와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노르웨이 헌법은 의회인 스토팅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칼 요한은 스웨덴에서와 달리 노르웨이에서는 절대 거부권이 아닌 유예 거부권만 가졌다. 그는 스토팅에 절대 거부권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 또한 오슬로 왕궁 건설 과정에서 스토팅이 비용 문제로 예산 지원을 중단하는 등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 궁전은 칼 요한 사후인 1849년에야 아들 오스카르 1세에 의해 완공되었다.[22]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웨덴인과 노르웨이인 사이의 초기 적대감은 점차 우호적인 관계로 변해갔다.
칼 14세 요한은 퇴위 논란을 극복하고 1843년, 즉위 25주년 기념 은혼식을 스웨덴과 노르웨이 양국에서 성대하게 치렀다.[195] 그는 1844년 3월 8일 8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지켰다. 임종 직전 그는 자신의 선택이 유럽의 자유 회복에 기여했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580][581] 그의 왕위는 아들 오스카르 1세가 계승했다.
칼 14세 요한이 이룩한 평화와 경제 성장은 다음 세대가 근대 스웨덴을 건설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77] 이후 유럽의 여러 왕조들이 격변기를 거치며 몰락한 것과 달리, 그가 세운 베르나도테 왕조는 200년 이상 안정적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스웨덴의 입헌 군주제를 지탱하고 있다.[579]
그를 기리는 여러 기념물과 장소가 남아있다.
명칭 | 위치 | 명명 연도 | 비고 |
---|---|---|---|
칼 요한 거리 (Karl Johans gate) | 오슬로 | 1852년 | 오슬로의 주요 거리 |
칼 요한스베른 (Karljohansvern) | 호르텐 | 1854년 | 전 노르웨이 왕립 해군 주요 기지 |
칼스보리 요새 (Karlsborgs fästning) | 칼스보리 지방자치구 (베스트라 예탈란드주) | ||
베르나도트 막사 (Caserne Bernadotte) | 프랑스 파우 | 1875년 | 군사 건물 |
칼 14세 요한 기마상 | 오슬로 왕궁 앞 | 1875년 |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청동상[26] |
참조
[1]
서적
Allt vi trodde vi visste men som faktiskt är FEL FEL FEL!
Bokförlaget Semic
[2]
뉴스
Sweden celebrates 200 years of peace
https://www.thelocal[...]
2021-09-14
[3]
학회논문
Bernadotte, Bonaparte, and Louisiana: the last dream of a French Empire in North America
https://hal.archives[...]
Brill
2018-11-11
[4]
서적
Bernadotte: A Biography
Jarrolds
[5]
문서
[6]
문서
[7]
서적
Napoleon's Marshals
Methuen & Co.
[8]
문서
2022-10-00
[9]
문서
2022-10-00
[10]
웹사이트
Charles XIII | king of Sweden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06-14
[11]
서적
Napoleon's Empire: European Politics in Global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8-12-27
[12]
서적
Ancienneté och Rang-Rulla öfver Krigsmagten år 1813
https://books.google[...]
[13]
서적
Hedvig Elisabeth Charlottas dagbok. 9, 1812–1817
Norstedt
[14]
논문
Late Gustavian Autocracy in Sweden: Gustav IV Adolf and his Opponents, 1792–1809
[15]
서적
A Concise History of Swede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
서적
Memoirs and Campaigns of Charles John, Prince Royal of Sweden
C.J. Barrington
[17]
서적
Bernadotte: A Biography
Jarrolds
[18]
웹사이트
Napoleonic Marshals : Jean-Baptiste Bernadotte : Napoleonic Wars : France
http://www.napoleong[...]
2018-12-27
[19]
웹사이트
Norway | Facts, Points of Interest, Geography, & History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06-14
[20]
문서
2022-10-00
[21]
웹사이트
Charles XIV John | king of Sweden and Norway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06-14
[22]
웹사이트
History of the Royal Palace
http://www.kongehuse[...]
2018-08-14
[23]
웹사이트
King Carl Johan (1763–1844)
http://www.kongehuse[...]
2018-08-14
[24]
웹사이트
Olof_Sjostrom-_Karl_XIV_Johan_laid_the_foundations_for_modern_Sweden
http://Olof_Sjostrom[...]
2016-11-00
[25]
문서
[26]
웹사이트
The statues in the Palace Park
https://www.royalcou[...]
2021-08-26
[27]
서적
Der Elephanten-Orden und seine Ritter: eine historische Abhandlung über die ersten Spuren dieses Ordens und dessen fernere Entwicklung bis zu seiner gegenwärtigen Gestalt, und nächstdem ein Material zur Personalhistorie, nach den Quellen des Königlichen Geheimen-Staatsarchivs und des Königlichen Ordenskapitelsarchivs zu Kopenhagen
https://books.google[...]
Gedruckt in der Berlingschen Officin
[28]
웹사이트
Posttidningar
http://magasin.kb.se[...]
2018-03-27
[29]
웹사이트
Posttidningar
http://magasin.kb.se[...]
2018-03-27
[30]
웹사이트
Riksarkivet – Sök i arkiven
https://sok.riksarki[...]
2020-07-27
[31]
서적
Liste der Ritter des Königlich Preußischen Hohen Ordens vom Schwarzen Adler
https://www.digitale[...]
2023-04-04
[32]
서적
Staatshandbuch für den Freistaat Sachsen: 1839
[33]
서적
Almanach de la cour: pour l'année ... 1817
https://books.google[...]
l'Académie Imp. des Sciences
[34]
웹사이트
Hof- und Staatshandbuch des Kaiserthumes Österreich
1814
[35]
웹사이트
Guía de forasteros en Madrid para el año de 1835
http://hemerotecadig[...]
En la Imprenta Nacional
[36]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https://digital.blb-[...]
(출판사 정보 없음)
1834
[37]
웹사이트
Grand Crosses of the Order of the Tower and Sword
https://geneall.net/[...]
2018-09-21
[38]
서적
The Court Journal: Court Circular & Fashionable Gazette
https://books.google[...]
Alabaster, Pasemore & Sons, Limited
2018-07-19
[39]
서적
1,339 QI Facts To Make Your Jaw Drop: Fixed Format Layout
https://books.google[...]
Faber & Faber
[40]
서적
La Solidaridad
https://books.google[...]
Fundación Santiago
1995
[41]
서적
The Complete Prophecies of Nostradamus
https://books.google[...]
Sterling Publishing Company, Inc.
[42]
서적
Beethoven Essay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8
[43]
문서
Library of Congress
[44]
웹사이트
Désirée
https://web.archive.[...]
2008
[45]
서적
A Queen's Fortune: A Novel of Desiree, Napoleon, and the Dynasty that outlasted the Empire
Ballantine Books
2020
[46]
웹사이트
Charles XIV John king of Sweden and Norway
https://www.britanni[...]
[47]
서적
(제목 없음)
1990
[48]
서적
(제목 없음)
1879
[49]
서적
(제목 없음)
1823
[50]
서적
(제목 없음)
1990
[51]
서적
(제목 없음)
1999
[52]
서적
(제목 없음)
1990
[53]
서적
(제목 없음)
1990
[54]
서적
(제목 없음)
1999
[55]
서적
(제목 없음)
1990
[56]
서적
(제목 없음)
1990
[57]
서적
(제목 없음)
1990
[58]
서적
(제목 없음)
2009
[59]
서적
(제목 없음)
1990
[60]
서적
(제목 없음)
1930
[61]
서적
(제목 없음)
1990
[62]
서적
(제목 없음)
1990
[63]
서적
(제목 없음)
1990
[64]
서적
(제목 없음)
1930
[65]
서적
(제목 없음)
1990
[66]
서적
(제목 없음)
1990
[67]
서적
(제목 없음)
1990
[68]
서적
(제목 없음)
1990
[69]
서적
(제목 없음)
1930
[70]
서적
(제목 없음)
1990
[71]
서적
[72]
서적
[73]
서적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80]
서적
[81]
서적
[82]
서적
[83]
서적
[84]
서적
[85]
서적
[86]
서적
[87]
서적
[88]
서적
[89]
서적
[90]
서적
[91]
서적
[92]
서적
[93]
서적
[94]
서적
[95]
서적
[96]
서적
[97]
서적
[98]
서적
[99]
서적
[100]
서적
[101]
서적
[102]
서적
[103]
서적
[104]
서적
[105]
서적
[106]
서적
[107]
서적
[108]
서적
[109]
서적
[110]
서적
[111]
서적
[112]
서적
[113]
서적
[114]
서적
[115]
서적
[116]
서적
[117]
서적
[118]
서적
[119]
서적
[120]
서적
[121]
서적
[122]
서적
[123]
서적
[124]
서적
[125]
서적
[126]
서적
[127]
서적
[128]
서적
The American Cyclopædia
[129]
서적
[130]
서적
[131]
서적
[132]
서적
[133]
서적
[134]
서적
[135]
서적
[136]
서적
[137]
서적
[138]
서적
[139]
서적
[140]
서적
[141]
서적
[142]
서적
[143]
서적
[144]
서적
[145]
서적
[146]
서적
[147]
서적
[148]
서적
[149]
서적
[150]
서적
[151]
서적
[152]
서적
[153]
서적
[154]
서적
[155]
서적
[156]
서적
[157]
서적
[158]
서적
[159]
서적
[160]
서적
[161]
서적
[162]
서적
[163]
서적
[164]
서적
[165]
서적
[166]
서적
[167]
서적
[168]
서적
[169]
서적
[170]
서적
[171]
서적
[172]
서적
[173]
서적
[174]
서적
[175]
서적
[176]
서적
[177]
서적
[178]
서적
[179]
서적
[180]
서적
[181]
서적
[182]
서적
[183]
서적
[184]
서적
[185]
서적
[186]
서적
[187]
서적
[188]
서적
[189]
서적
[190]
서적
[191]
서적
[192]
서적
[193]
서적
[194]
서적
[195]
백과사전
Encyclopedia Britannica/ Charles XIV Johan
[196]
서적
[197]
서적
[198]
서적
[199]
서적
[200]
서적
[201]
서적
[202]
서적
[203]
서적
[204]
서적
[205]
서적
[206]
서적
[207]
서적
[208]
서적
[209]
서적
[210]
서적
[211]
서적
[212]
서적
[213]
서적
[214]
서적
[215]
서적
[216]
서적
[217]
서적
[218]
서적
[219]
서적
[220]
서적
[221]
서적
[222]
서적
[223]
서적
[224]
서적
[225]
서적
[226]
서적
[227]
서적
[228]
서적
[229]
서적
[230]
서적
[231]
서적
[232]
서적
[233]
서적
[234]
서적
[235]
서적
[236]
서적
[237]
서적
[238]
서적
[239]
서적
[240]
서적
[241]
서적
[242]
서적
[243]
서적
[244]
서적
[245]
서적
[246]
서적
[247]
서적
[248]
서적
[249]
서적
[250]
서적
[251]
서적
[252]
서적
[253]
서적
[254]
서적
[255]
서적
[256]
서적
[257]
서적
[258]
서적
[259]
서적
[260]
서적
[261]
서적
[262]
서적
[263]
서적
[264]
서적
[265]
서적
[266]
서적
[267]
서적
[268]
서적
[269]
서적
[270]
서적
[271]
서적
[272]
서적
[273]
서적
[274]
서적
[275]
서적
[276]
서적
[277]
서적
[278]
서적
[279]
서적
[280]
서적
[281]
서적
[282]
서적
[283]
서적
[284]
서적
[285]
서적
[286]
서적
[287]
서적
[288]
서적
[289]
서적
[290]
서적
[291]
서적
[292]
서적
[293]
서적
[294]
서적
[295]
서적
[296]
서적
[297]
서적
[298]
서적
[299]
서적
[300]
서적
[301]
서적
[302]
서적
[303]
서적
[304]
서적
[305]
서적
[306]
서적
[307]
서적
[308]
서적
[309]
서적
[310]
서적
[311]
서적
[312]
서적
[313]
서적
[314]
서적
[315]
서적
[316]
서적
1930
[317]
서적
1951
[318]
서적
1995
[319]
서적
1951
[320]
서적
2009
[321]
서적
1943
[322]
서적
2009
[323]
서적
1930
[324]
서적
2009
[325]
서적
2009
[326]
서적
2009
[327]
서적
1990
[328]
서적
2009
[329]
서적
2009
[330]
서적
1990
[331]
서적
1930
[332]
서적
1990
[333]
서적
2014
[334]
서적
1930
[335]
서적
1988
[336]
서적
1990
[337]
서적
2010
[338]
서적
2004
[339]
서적
1829
[340]
서적
2010
[341]
서적
2010
[342]
서적
2009
[343]
서적
2009
[344]
서적
2009
[345]
서적
2009
[346]
서적
1999
[347]
서적
1943
[348]
서적
2010
[349]
서적
1930
[350]
서적
1930
[351]
서적
[352]
서적
[353]
서적
[354]
서적
[355]
서적
[356]
서적
[357]
서적
[358]
서적
[359]
서적
[360]
서적
[361]
서적
[362]
서적
[363]
서적
[364]
서적
[365]
서적
[366]
서적
[367]
서적
[368]
서적
[369]
서적
[370]
서적
[371]
서적
[372]
서적
[373]
서적
[374]
서적
[375]
서적
[376]
서적
[377]
서적
[378]
서적
[379]
서적
[380]
서적
[381]
서적
[382]
서적
[383]
서적
[384]
서적
[385]
서적
[386]
서적
[387]
서적
[388]
서적
[389]
서적
[390]
서적
[391]
서적
[392]
서적
[393]
서적
[394]
서적
[395]
서적
[396]
서적
[397]
서적
[398]
서적
[399]
서적
[400]
서적
[401]
서적
[402]
서적
[403]
서적
[404]
서적
[405]
서적
[406]
서적
[407]
서적
[408]
서적
[409]
서적
[410]
서적
[411]
서적
[412]
서적
[413]
서적
[414]
서적
[415]
서적
[416]
서적
[417]
서적
[418]
서적
[419]
서적
[420]
서적
[421]
서적
[422]
서적
[423]
서적
[424]
서적
[425]
서적
[426]
서적
[427]
서적
[428]
서적
[429]
서적
[430]
서적
[431]
서적
[432]
서적
[433]
서적
[434]
서적
[435]
서적
[436]
서적
[437]
서적
[438]
서적
[439]
서적
[440]
서적
[441]
서적
[442]
서적
[443]
서적
[444]
서적
[445]
서적
[446]
서적
[447]
서적
[448]
서적
[449]
서적
[450]
서적
[451]
서적
[452]
서적
[453]
서적
[454]
서적
[455]
서적
[456]
뉴스
Populär Historia
2003-12-29
[457]
서적
1903
[458]
서적
2010
[459]
서적
1960
[460]
서적
1840
[461]
서적
2010
[462]
서적
2010
[463]
서적
1903
[464]
서적
1994
[465]
서적
2007
[466]
기관
Sveriges riksbank
[467]
기관
Ambassade de France en Suede
[468]
서적
2010
[469]
서적
1960
[470]
서적
1943
[471]
서적
1943
[472]
서적
1903
[473]
서적
2010
[474]
서적
2009
[475]
서적
1903
[476]
서적
2010
[477]
서적
2010
[478]
서적
2010
[479]
서적
1931
[480]
서적
2011
[481]
서적
1990
[482]
서적
1903
[483]
서적
2011
[484]
서적
1903
[485]
서적
2011
[486]
서적
1903
[487]
서적
1903
[488]
서적
1903
[489]
서적
2010
[490]
서적
2010
[491]
서적
[492]
서적
[493]
서적
[494]
서적
[495]
서적
[496]
서적
[497]
서적
[498]
서적
[499]
서적
[500]
서적
[501]
서적
[502]
서적
[503]
서적
[504]
서적
[505]
서적
[506]
서적
[507]
서적
[508]
서적
[509]
서적
[510]
서적
[511]
서적
[512]
서적
[513]
서적
[514]
서적
[515]
서적
[516]
서적
[517]
서적
[518]
서적
[519]
서적
[520]
서적
北欧の外交
[521]
서적
北欧の外交
[522]
서적
[523]
서적
[524]
서적
[525]
서적
[526]
서적
[527]
서적
[528]
서적
[529]
서적
[530]
서적
[531]
서적
[532]
서적
[533]
서적
[534]
서적
[535]
서적
[536]
서적
[537]
서적
[538]
서적
[539]
서적
[540]
서적
[541]
서적
[542]
서적
[543]
서적
[544]
서적
[545]
서적
[546]
서적
[547]
서적
[548]
서적
[549]
서적
[550]
서적
Terra Buskerud-Historieboka
[551]
서적
[552]
서적
[553]
서적
[554]
서적
[555]
서적
[556]
서적
[557]
서적
[558]
서적
[559]
서적
[560]
서적
[561]
서적
[562]
서적
[563]
서적
[564]
서적
[565]
서적
[566]
서적
[567]
서적
[568]
서적
[569]
서적
[570]
서적
[571]
잡지
History Today
[572]
서적
[573]
서적
[574]
서적
[575]
서적
[576]
서적
[577]
서적
[578]
서적
[579]
서적
[580]
서적
[581]
서적
[582]
웹사이트
칼 14세
https://terms.naver.[...]
[583]
웹사이트
칼 요한 14세
[584]
서적
Bernadotte : the first pahse 1763-1799
[585]
서적
Bernadotte : the first pahse 1763-1799
[586]
서적
나폴레옹
교양인
[587]
서적
The American Cyclopædia
[588]
서적
나폴레옹
교양인
[589]
웹사이트
칼 요한 14세
https://terms.naver.[...]
[590]
웹사이트
칼 13세와 칼 14세 요한
https://terms.naver.[...]
[591]
웹사이트
카를 14세
https://100.daum.net[...]
[592]
서적
나폴레옹
교양인
[593]
문서
베르나도트의 라인 전선 활약
[594]
서적
The Amazing Career of Bernadotte 1763 to 184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