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대프랑스 동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은 1806년에서 1807년까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작센, 스웨덴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결성한 동맹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리 이후 나폴레옹의 라인 동맹 결성으로 프로이센의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어 동맹이 결성되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영국, 작센, 스웨덴이 참여하여 1806년 10월 6일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성립되었다. 동맹군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베를린이 함락되었고, 틸지트 조약 체결로 동맹은 해체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베스트팔렌 왕국과 바르샤바 공국을 건국하고, 대륙 봉쇄령에 불참한 스웨덴을 공격하여 북유럽까지 장악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06년 프랑스 - 뤼베크 전투
뤼베크 전투는 1806년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군에게 쫓기던 프로이센군이 중립 도시 뤼베크에서 벌인 전투로, 격렬한 시가전 끝에 프로이센군이 항복하고 뤼베크 시에 큰 피해를 남겼으며,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 1806년 분쟁 -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1805년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프랑스 제1제국에 대항하여 결성했으며,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프랑스 패배, 울름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승리를 거쳐 오스트리아가 동맹에서 이탈하고 라인 동맹 결성으로 이어졌다. - 1807년 분쟁 - 반도 전쟁
반도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로, 프랑스 제국과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연합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인 전투로, 대륙 봉쇄령과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민들의 저항, 게릴라전, 영국군의 개입으로 장기화되었으며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유럽 역사와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07년 분쟁 - 단치히 공방전 (1807년)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의 주요 항구 도시 단치히를 포위 공격하여 러시아 지원 실패 속에 프로이센군이 항복,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난 전투로, 나폴레옹의 동유럽 지배 강화와 대륙 봉쇄령 시행에 기여했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 | |
명칭 (프랑스어) | Guerre de la Quatrième Coalition (게르 드 라 콰트리에므 코알리시옹) |
관련 | 나폴레옹 전쟁 대프랑스 동맹 |
교전 기간 | |
날짜 | 1806년 10월 9일 – 1807년 7월 9일 |
장소 | |
위치 | 중앙유럽 |
교전 세력 |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시칠리아 스웨덴 작센 (1806년 12월 11일까지) 셉틴술라르 공화국 (1807년 6월 17일부터) |
프랑스 진영 | 프랑스 라인 동맹 에트루리아 홀란트 이탈리아 나폴리 작센 (1806년 12월 11일부터) 폴란드 군단 스위스 연방 스페인 폴란드 반군 |
지휘관 |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카를 빌헬름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루이 페르디난트 오이겐 프리드리히 폰 칼크로이트 백작 안톤 빌헬름 폰 레스토크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에른스트 폰 뤼첼 폰 타우엔치엔 백작 루트비히 요르크 알렉산드르 1세 레빈 아우구스트 폰 베니히센 미하일 카멘스키 표트르 바그라티온 드미트리 골리친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라이 드 톨리 드미트리 세냐빈 윌리엄 그렌빌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구스타브 4세 아돌프 한스 헨리크 폰 에센 |
프랑스 진영 | 나폴레옹 1세 피에르 오주로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제롬 보나파르트 루이-니콜라 다부 장 란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앙드레 마세나 에두아르 모르티에 조아생 뮈라 미셸 네 장드디외 술트 루이 1세 외젠 드 보아르네 조제프 1세 얀 헨리크 동브로프스키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
병력 규모 |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총 동원 병력 | 422,000명 |
프로이센 | 254,000명 |
러시아 | 135,000명 |
작센 | 18,000명 |
스웨덴 | 15,000명 |
프랑스 진영 총 동원 병력 | 237,500명 |
독일 주둔 프랑스군 | 192,000명 |
라인 동맹 | 27,000명 |
폴란드 | 18,500명 |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 | 40,000명 (참전 X) |
나폴리 주둔 프랑스군 | 40,000명 (참전 X) |
홀란트 주둔 프랑스군 | 18,000명 (참전 X) |
피해 규모 | |
프로이센 | 사망 및 부상: 65,000명 포로: 150,000명 대포 2,000문 이상 |
프랑스 | 사망: 28,300명 부상: 81,800명 |
프랑스 진영 총 사상자 | 110,100명 |
결과 | |
결과 | 프랑스 승리 |
영향 | 틸지트 조약 체결 포젠 조약 체결 프로이센 프랑스에 점령 프랑스-러시아 동맹 결성 대륙 봉쇄령 수립 바르샤바 공국 및 베스트팔렌 왕국 수립 프로이센, 영토 절반 이상 상실 |
2.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의 형성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승리와 제3차 동맹 붕괴 이후, 나폴레옹은 영국, 러시아와의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윌리엄 피트 사후에도 영국은 프랑스에 강경했다. 양국 간 평화 협상은 하노버 문제 등으로 결렬되었다. 하노버는 영국 왕가가 다스리던 독일 지역으로, 프랑스가 점령 중이었다. 이는 영국과 프로이센 모두에게 전쟁 명분이 되었다.[4] 스웨덴 또한 하노버 문제로 참전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고립시키고 독일 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1806년 7월,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중부 독일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의 안스바흐 침범과 나폴레옹의 하노버 관련 이중적 태도에 분노했다.[5] 1806년 8월, 독일 민족주의자 요한 필립 팔름 처형은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6] 10월 1일, 프로이센은 최후통첩 후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정했다.
1806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작센, 스웨덴 왕국이 프랑스에 대항,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2. 1. 동맹 결성의 배경
나폴레옹의 유럽 패권 확대와 라인 동맹 결성으로 프로이센은 위기감을 느꼈다. 1795년 바젤 조약 이후 10년간 중립을 지켜왔던 프로이센은, 전년도 전쟁 중 프랑스군이 안스바흐 영토를 침범하면서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었다.[5] 게다가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협상에서 프로이센령 하노버를 영국에 넘기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5]1806년 7월,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프로이센 내에서는 루이즈 왕비와 같은 인물들이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6]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 등을 포함한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1806년 10월 6일에 성립되었다.
2. 2. 동맹국

프로이센은 1795년 바젤 조약 이후 10년간 중립을 유지했지만, 프랑스군이 프로이센 영토인 안스바흐를 침범하고,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협상에서 프로이센령 하노버를 영국에 넘기려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었다.[5]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프로이센은 1806년 7월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10월 6일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성립되었다.[5]
3. 독일-폴란드 전역 (1806년 - 1807년)
1806년 8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왕비 루이즈와 베를린 내 전쟁 지지파의 영향으로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강대국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결정했다.
1806년 10월 9일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 15만 병력으로 튀링겐을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즉시 20만 병력으로 바이에른에서 작센 방면을 향해 진격하였다. 10월 10일, 잘펠트 전투에서 장 란 군단이 프로이센군 선봉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를 전사시켰다.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본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예나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주력이 프로이센군의 후위 부대를 격파했고,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주력은 2배의 병력으로 다부 군단을 공격하였지만 격퇴되었다.
프랑스군은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10월 25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하였다. 10월 27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했다. 개전부터 불과 19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묘를 방문한 나폴레옹은 "그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1월 6일, 마그데부르크 수비대가 항복했고, 사실상 프로이센군은 소멸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에 몽진하여 쾨니히스베르크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는 10만 명의 원군을 동프로이센에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군했고, 폴란드는 나폴레옹을 조국의 해방자로 열렬히 환영했다.
1807년 1월, 추위를 뚫고 프랑스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침공하였다. 2월 7일-8일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과 아일라우 전투에서 충돌했다. 블리자드 속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어려운 전투였고,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철수로 신승을 거두었으나,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일단 후퇴하여 오주로를 사령관으로 3월 18일부터 단치히 공방전을 시작했고 5월 27일 프로이센군 수비대가 항복했다.
러시아군도 조직을 정비하고 6월 활동을 재개했다. 6월 10일 하일스베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대해 전략적 승리를 거두기 위해 후퇴를 선택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 출격 거점을 타격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로 군을 이동시켰다. 러시아군은 가장 동쪽으로 진격해온 장 란 군단을 공격하려 시도했지만,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주력에 포착되었고,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6월 16일 술트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고, 프로이센은 완전히 패배했다.
3. 1.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806년 10월 14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왕비 루이제 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와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 같은 반나폴레옹 인사들의 설득으로 전쟁을 결정했다.프로이센군은 동원되었지만, 작전 계획과 지휘권 부재로 동원이 지연되었다. 1806년 9월 26일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에게 독일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지만, 이는 9월 25일 나폴레옹이 파리를 떠난 후였다. 이러한 프로이센군의 초기 대응 지연은 프랑스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10월 9일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 후 15만 병력으로 튀링겐을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즉시 20만 병력으로 바이에른에서 작센 방면으로 진격했다. 10월 10일, 잘펠트 전투에서 장 란 군단은 프로이센군 선봉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를 전사시켰다.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본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예나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주력은 프로이센군의 후위 부대를 격파했고,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주력은 2배의 병력으로 다부 군단을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특히,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 군단은 수적으로 우세한 프로이센군 주력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등 프로이센군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어, 프로이센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
3. 2. 베를린 함락 (1806년 10월 27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급격히 붕괴되었다. 프랑스군은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10월 25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했다.[1] 10월 27일 나폴레옹도 베를린에 입성했는데, 이는 개전 후 불과 19일 만의 일이었다.[1] 프리드리히 2세 (대왕)의 묘소를 방문한 나폴레옹은 "그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3. 3. 아일라우 전투 (1807년 2월 7-8일)
1807년 1월, 추위를 뚫고 프랑스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침공했다. 2월 7일-8일,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과 아일라우 전투에서 충돌했다. 블리자드 속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매우 치열했으며,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철수로 간신히 승리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전투는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1] 프랑스군은 일단 후퇴했다.[1]3. 4. 프리틀란트 전투 (1807년 6월 14일)
6월 10일 하일스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에 대해 전술적 승리를 거두고 후퇴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추격하는 대신, 그들의 출격 거점을 공격할 것을 계획하여 쾨니히스베르크로 군대를 향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 중 가장 동쪽으로 진격하던 장 란 군단에 공격을 가했지만,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주력에게 포착되어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1] 6월 16일 술트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여 프로이센은 완전히 패배했다.[1]4. 전후 처리
틸지트 조약 이후에도 영국과 스웨덴은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다. 러시아는 영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영국의 코펜하겐 공격 이후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 편에 서서 전쟁(''군함 전쟁'')에 참여하여 스웨덴을 상대로 새로운 전선을 열었다. 1808년 5월, 존 무어 경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스웨덴으로 파견되어 프랑스-덴마크의 침공을 막았다.
1808년 9월~10월, 에르푸르트 회의에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러시아가 스웨덴을 대륙 봉쇄령에 가담하도록 강요하기로 합의했고, 이는 핀란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으로 스웨덴은 보트니아 만을 기준으로 동쪽의 핀란드 대공국을 러시아에 넘겨주게 되었다.
뤼베크 전투 이후 포로로 잡힌 스웨덴인들과의 협상에서 베르나도트 원수는 스웨덴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는 결국 그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어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이 되는 일련의 사건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틸지트 조약 이후, 프랑스 제국은 겉보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오랫동안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포르투갈의 이베리아 항구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협력하여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곧 스페인 왕족 내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고, 결국 스페인 대중은 프랑스 점령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반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4. 1. 틸지트 조약 (1807년 7월 7-9일)
7월 7일 - 9일,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강화, 동맹에서 탈퇴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서 할양받은 영토에 베스트팔렌 왕국을 건국하고,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또한 폴란드를 독립시켜 바르샤바 공국을 건국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중앙유럽 및 동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이후, 대륙봉쇄령에 참여를 거부한 스웨덴에 대해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회담을 했고, 다음 해인 1808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북유럽도 제압했다.

4. 2. 스웨덴과의 관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 참여를 거부한 스웨덴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회담을 가졌다. 1808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통해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북유럽을 제압하였다.[1]5. 결과 및 영향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강화하고 동맹에서 탈퇴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서 할양받은 영토에 베스트팔렌 왕국을 건국하고,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또한 폴란드를 독립시켜 바르샤바 공국을 건국했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중앙유럽 및 동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대륙봉쇄령에 참여를 거부한 스웨덴에 대해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회담을 했고, 다음 해인 1808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북유럽도 제압했다.
틸지트 조약 이후, 영국과 스웨덴은 프랑스와 여전히 전쟁 중인 두 주요 연합국으로 남았다. 러시아는 곧 영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코펜하겐에 대한 영국의 공격 이후,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군함 전쟁'')하여 스웨덴을 상대로 두 번째 전선을 열었다.
에르푸르트 회의 (1808년 9월~10월)에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러시아가 스웨덴을 대륙 봉쇄령에 가담하도록 강요하기로 합의했고, 이는 1808년~1809년의 핀란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또한 스웨덴은 보트니아 만에 의해 분리된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고, 동쪽 부분은 러시아 핀란드 대공국이 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틸지트 조약 이후, 제국은 겉보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오랫동안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포르투갈의 이베리아 항구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807년 10월 27일, 스페인의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와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했다. 1807년 11월, 포르투갈의 주앙 6세가 대륙 봉쇄령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장-안도슈 주노 장군 휘하의 군대를 스페인으로 파견했고, 결국 스페인 대중은 프랑스 점령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반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조
[1]
논문
The Coalition of Europe Against Napoleon
1919-07
[2]
서적
Napoléon Bonaparte: a reference guide to his life and works
Rowman & Littlefield
2019
[3]
서적
Jena 1806: Napoleon destroys Prussia
Osprey
2007
[4]
논문
The Continental System of Napoleon
1898-06-01
[5]
서적
Napoleon and Russia
A&C Black
2014
[6]
서적
Napoleon's Conquest of Prussia – 1806
https://books.google[...]
John Lane
1914
[7]
서적
1966
[8]
서적
2000
[9]
서적
Conflicts that Changed the World
https://books.google[...]
Canary Press eBooks
2008
[10]
서적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Clarendon Press
1996
[11]
웹사이트
Maps of Napoleon's Campaign In Poland 1806–07
http://www.mipoloni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