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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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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프랑스 해군 제독으로, 1750년 로슈포르쉬르메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7년 전쟁에 참전하여 해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육군에서 복무하다가 해군으로 복귀하여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라투슈 트레빌은 라파예트를 미국으로 수송하고, 여러 해전에서 활약했으며, 1780년에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국민 제헌 의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진보적인 입장을 보였고, 해군으로 복귀하여 나폴리, 생도맹그, 불로뉴 함대를 지휘했다. 그는 툴롱 함대 사령관으로 복무하던 중 사망했으며, 그의 이름은 개선문에 새겨졌고, 프랑스 해군은 그의 이름을 딴 함선들을 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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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르주 루제가 그린 라투슈-트레빌의 초상화 (1840년)
조르주 루제가 그린 라투슈-트레빌의 초상화 (1840년)
본명루이 르네 마들렌 르 바소르 드 라투슈 트레빌
출생1745년 6월 3일
출생지샤랑트마리팀주 로슈포르
사망1804년 8월 19일 (59세)
사망지툴롱, 프랑스
군사 경력
소속프랑스 해군
복무 기간1758년–1804년
최종 계급해군 중장
주요 참전7년 전쟁
키베롱 만 해전
미국 독립 전쟁
1780년 6월 7일 전투
1781년 7월 21일 전투
1782년 9월 5일 전투
1782년 9월 15일 전투
프랑스 혁명 전쟁
불로뉴 기습
생-도맹그 원정
나폴레옹 전쟁
훈장
훈장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기타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짐
가족
아버지루이-샤를 르 바소르 드 라투슈
삼촌샤를-오귀스트 르 바소르 드 라투슈-트레빌

2. 초기 생애 및 경력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샤랑트마리팀의 로슈포르쉬르메르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 루이샤를르 르 바소르 드 라투슈는 1762년 마르티니크 침공 전까지 마르티니크의 총독이었으며, 로슈포르 해군 사령관이었다.[3] 그의 삼촌인 샤를오귀스트 르바소르 드 라투슈-트레빌은[4] 1780년 오르빌리에 휘하의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경(輕) 함대를 지휘하는 후방 제독으로 복무했다.[2]

2. 1. 가문 배경

2. 2. 초기 해군 복무 (7년 전쟁)

라투슈는 13세의 나이에 해군 근위대(Gardes de la Marine)에 입대하여[2] 7년 전쟁 동안 여러 해상 작전에 참여했다. 1758년 하르디(Hardi)호에 승선하여 캐나다로 병력을 수송했으며,[5] 1759년에는 삼촌의 지휘 아래 드래곤(''Dragon'')에 탑승하여 키베론 만 해전에 참전했다.[2] 또한 바지선 루이즈(Louise)호에서 복무하며 1760년 10월 일 드 엑스(Île-d'Aix)를 봉쇄하는 영국 함대를 괴롭혔다.[6] 1762년에는 앵트레피드(Intrépide)호와 토낭(Tonnant)호에서 복무했다.

1763년 파리 조약 이후, 라투슈는 샤를 엑토르 다스텡 백작(Charles Hector, comte d'Estaing) 제독의 지휘 아래 훈련에 참여하여[7] 1763년 가론(Garonne)호, 1765년에는 하르디(Hardi)호와 브리콜(Bricole)호에서 복무했다.

1768년 9월, 23세의 나이로 소위로 진급했다. 빠른 진급을 원했던 가족의 압력[7] 또는 해군 개혁으로 인해[8] 해군에서 사임하고 육군에 입대했다.[7] 빅토르-테레즈 샤르팡티에(Victor-Thérèse Charpentier) 총독의 보좌관이 되었으며,[8] 마르티니크 총독으로 임명된 샤르팡티에는 그를 기병 대위로 임명했다.[8] 1771년, 용기병 연대인 라 로슈푸코-드라공 연대(Régiment de La Rochefoucauld-Dragons)의 대위로, 루이-플로랑 드 발리에 후작(Louis-Florent, marquis de Valière) 총독의 부관이 되었다.[9][10]

1772년, 해군 장관 피에르 에티엔 부르주아 드 보이네(Pierre Étienne Bourgeois de Boynes)는 라투슈 가족의 요청을 수락해,[9] "브륄로 대위"로 해군에 복귀했다.[2] 플루이트(fluyt) 코르티에(Courtier)호를 지휘했다.[9] 1774년, 호주를 세계 일주하여 뉴 홀랜드와 뉴 사우스 웨일스가 해협으로 분리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탐사 원정을 제안했지만, 해군부는 모리셔스(Île de France)를 전진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여 거부되었다.[11] 1775년과 1776년에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과 탐사 계획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았다.[12]

2. 3. 육군 복무 및 해군 복귀

13세의 나이에 라투슈는 해군 근위대(Gardes de la Marine)에 입대하여 7년 전쟁 동안 수많은 해상 작전에 참여했다.[2] 1758년 하르디(Hardi)호에 승선하여 캐나다로 병력을 수송했으며,[5] 1759년에는 삼촌의 지휘 아래 드래곤(''Dragon'')에 탑승하여 키베론 만 해전에 참여했다.[2] 또한 바지선 루이즈(Louise)호에서 복무하며 1760년 10월 일 드 엑스(Île-d'Aix)를 봉쇄하는 영국 함대를 괴롭혔다.[6] 1762년에는 앵트레피드(Intrépide)호와 토낭(Tonnant)호에서 복무했고, 그해 여름에는 2척의 포격정을 지휘하여 영국 군함 2척과 2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7]

1763년 파리 조약 이후, 라투슈는 삼촌 라투슈-트레빌과 샤를 엑토르 다스텡 백작(Charles Hector, comte d'Estaing) 제독의 지휘 아래 훈련에 참여했다.[7]

1768년 9월, 소위로 진급했으나, 더 빠른 진급을 원했던 가족들의 압력[7] 또는 해군 개혁[8]으로 인해 해군에서 사임하고 육군에 입대했다.[7] 빅토르-테레즈 샤르팡티에(Victor-Thérèse Charpentier) 총독의 보좌관이 되었으며,[8] 마르티니크 총독으로 임명된 샤르팡티에는 그를 기병 대위로 임명했다.[8] 1771년, 라 로슈푸코-드라공 연대(Régiment de La Rochefoucauld-Dragons)의 용기병 대위로 전임되었으며, 생도맹그에서 루이-플로랑 드 발리에 후작(Louis-Florent, marquis de Valière) 총독의 부관이 되었다.[9][10]

1772년, 해군 장관 피에르 에티엔 부르주아 드 보이네(Pierre Étienne Bourgeois de Boynes)는 라투슈 가족의 요청을 수락하여[9] "브륄로 대위"로 해군에 복귀했다.[2] 이후 플루이트(fluyt) 코르티에(Courtier)호를 지휘했다.[9] 1774년, 라투슈는 호주를 세계 일주하는 탐사 원정을 제안했지만, 해군부는 모리셔스(Île de France)를 전진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여 계획은 거부되었다.[11] 1775년과 1776년에는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과 탐사 계획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았다.[12]

2. 4. 탐사 제안

1774년, 라투슈는 해군부에 호주세계 일주하여 뉴 홀랜드뉴 사우스 웨일스가 해협으로 분리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탐사 원정을 제안했지만, 해군부는 그러한 작전의 전진 기지로 모리셔스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여 계획은 거부되었다.[11] 라투슈는 1775년과 1776년에 탐사 계획에 대해 제임스 쿡 선장과 서신을 주고받았다.[12]

3. 미국 독립 전쟁 참전

1777년 5월, 라투슈 트레빌은 중위로 진급하여 20문 코르벳 로시뇰[2]의 지휘를 맡아 호송선을 호위하고 메시지를 전달했다.[7] 그는 영국 사략선 2척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2][9] 생 루이 기사단 기사로 임명되었으며,[2][7] 26문 프리깃 ''에르미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

1779년 5월 28일, ''에르미온''은 영국 사략선을 발견하고 밤에 도망치는 척하여 함정을 유인했다. 라투슈는 피곤한 추격을 유도하기 위해 배의 등대를 간헐적으로 보여준 뒤, 아침에 공격하여 18문 사략선 디피던스를 나포했다.[13] 다음 날, 또 다른 18문 영국 사략선이 공격해 오자 같은 계략으로 나포한 후,[13][14] 두 척의 전리품과 많은 수의 포로들과 함께 로슈포르로 돌아갔다.[13]

1780년 3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15] 라투슈는 길버트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을 프랑스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대서양 횡단 항해에 동행했다.[2][13] 이후, 스투슈 제독의 지휘 아래 함대에 합류하여 바라스와 테르네의 명령을 받아[9] 로드아일랜드 방어를 위한 여러 포병 부대의 건설을 지휘했다.[13]

포대 건설 완료 후, 롱아일랜드 해역에서 순항하며 선박을 나포하여 뉴욕 시로 향하던 중,[13] 1780년 6월 7일, 프리깃 HMS ''아이리스''와 세 척의 소형 군함과 교전(1780년 6월 7일의 교전)을 벌여 머스켓 총알에 팔을 맞았고,[2] ''에르미온''은 10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다.[16][17]

1781년 3월 16일, 체서피크 만 어귀에서 벌어진 케이프 헨리 해전에 참여했다.[19] 1781년 4월 13일, 아버지 루이-샤를 르 바소르 드 라 투슈가 파리에서 사망하여 "라투슈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다.[28]

오귀스트-루이 드 로셀 드 세르시가 그린 루이부르 해전 (1781년 7월 21일)


이후 라 페루즈 제독의 지휘 아래 편대의 일원으로서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순항을 계속했으며, 기함은 ''아스트레''였다.[2]

1781년 7월 21일, 노바스코샤 해안에서 영국 호송선과 조우하여 루이부르 해전이 발발했다. ''아스트레''와 ''에르미온''은 HMS ''찰스타운''에게 깃발을 내리게 했지만, 나포에는 실패하여 밤에 도망가도록 했다.[2][21] 그러나 14문 호위함 ''잭''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 보스턴으로 가져갔다.[21]

3. 1. 에르미온 함 복무

1777년 5월,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중위로 진급하여 20문 코르벳 ''로시뇰''[2]의 지휘를 맡아 호송선을 호위하고 메시지를 전달했다.[7] 그는 영국 사략선 2척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2][9] 생 루이 기사단 기사로 임명되었고,[2][7] 26문 프리깃 ''에르미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

1779년 5월 28일, ''에르미온''은 영국 사략선 디피던스를 발견하고 밤에 도망치는 척하여 함정을 유인했다. 라투슈는 피곤한 추격을 유도하기 위해 배의 등대를 간헐적으로 보여준 뒤, 아침에 상대를 공격했다.[13] 다음 날, 또 다른 18문 영국 사략선이 공격해 오자, 라투슈는 같은 계략을 사용하여 그 배 역시 나포하고 두 척의 전리품과 많은 수의 포로들과 함께 로슈포르로 돌아갔다.[13][14]

1780년 3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15] 라투슈는 길버트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을 프랑스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대서양 횡단 항해에 동행했다.[2][13] 그 후, 스투슈 제독의 지휘 아래 함대에 합류하여 바라스와 테르네의 명령을 받아[9] 로드아일랜드 방어를 위한 여러 포병 부대의 건설을 지휘했다.[13]

포대 건설을 완료한 후, 라투슈는 롱아일랜드 해역에서 순항하며 선박을 나포하여 뉴욕 시로 향했다.[13] 그는 재빨리 두 척의 전리품을 나포한 후, 1780년 6월 7일에 4개의 돛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프리깃 HMS ''아이리스''와 세 척의 소형 군함이었다.[13] 이어진 1780년 6월 7일의 교전에서 라투슈는 머스켓 총알에 팔을 맞았고,[2] ''에르미온''은 10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다.[16][17] 그의 상대인 제임스 호커 선장은 나중에 그가 현장에서 도망갔다고 비난했는데, 라투슈는 "내가 불쌍한 상태에서 당신을 추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싸움을 계속하지 않았는가?"라고 대답했다.[18]

1781년 3월 16일, 라투슈-트레빌은 체서피크 만 어귀에서 일어난 케이프 헨리 해전에 참여했다.[19] 이 작전은 라투슈-트레빌이 "''체서피크''와 교전(1781년 3월)"했다는 흔하지만 잘못된 보고로 이어졌다.[20] 4월 13일, 라투슈의 아버지 루이-샤를 르 바소르 드 라 투슈가 파리에서 사망하여 라투슈는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이후 "라투슈 백작"이라고 불렸다.[28]

그는 라 페루즈 제독의 지휘 아래 편대의 일원으로서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순항을 계속했는데, 그의 기함은 ''아스트레''였다.[2]

7월 21일, 노바스코샤 해안에서 영국 호송선을 만난 결과 발생한 루이부르 해전에서 ''아스트레''와 ''에르미온''은 HMS ''찰스타운''에게 깃발을 내리게 했지만, 그녀를 나포하는 데 실패하여 밤에 도망가도록 했다.[2][21] 그러나 그들은 14문의 호위함인 ''잭''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 보스턴으로 가져갔다.[21]

3. 2. 라파예트 수송 및 해전

1777년 5월, 그는 중위로 진급하여 20문 코르벳 ''로시뇰''[2]의 지휘를 맡아 호송선을 호위하고 메시지를 전달했다.[7] 그는 영국 사략선 2척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 생 루이 기사단 기사로 임명되었고,[2][7][9] 26문 프리깃 ''에르미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

1779년 5월 28일, ''에르미온''은 영국 사략선을 발견하고 밤에 도망치는 척하여 함정을 유인했다. 라투슈는 피곤한 추격을 유도하기 위해 배의 등대를 간헐적으로 보여준 뒤, 아침에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그 사략선은 팰머스에서 온 18문 디피던스였다.[13] 다음 날, 또 다른 18문의 영국 사략선이 공격해 왔고, 라투슈는 같은 계략을 사용하여 그 배 역시 나포한 뒤, 두 척의 전리품과 많은 수의 포로들과 함께 로슈포르로 돌아갔다.[13][14]

1780년 3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15] 라투슈는 길버트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을 프랑스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대서양 횡단 항해에 동행했다.[2][13] 그 후, 스투슈 제독의 지휘 아래 함대에 합류하여 바라스와 테르네의 명령을 받아[9] 로드아일랜드 방어를 위한 여러 포병 부대의 건설을 지휘했다.[13]

포대 건설을 완료한 후, 라투슈는 롱아일랜드 해역에서 순항하며 선박을 나포하여 뉴욕 시로 향했다.[13] 그는 재빨리 두 척의 전리품을 나포한 후, 1780년 6월 7일에 4개의 돛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프리깃 HMS ''아이리스''와 세 척의 소형 군함이었다.[13] 1780년 6월 7일의 교전에서 라투슈는 머스켓 총알에 팔을 맞았고,[2] ''에르미온''은 10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다.[16][17] 그의 상대인 제임스 호커 선장은 나중에 그가 현장에서 도망갔다고 비난했는데, 라투슈는 "내가 불쌍한 상태에서 당신을 추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싸움을 계속하지 않았는가?"라고 대답했다.[18]

1781년 3월 16일, 라투슈-트레빌은 체서피크 만 어귀에서 일어난 케이프 헨리 해전에 참여했다.[19] 1781년 4월 13일, 라투슈의 아버지 루이-샤를 르 바소르 드 라 투슈가 파리에서 사망하여 라투슈는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이후 "라투슈 백작"이라고 불렸다.[28]

의 루이부르 해전(1781년 7월 21일)]]

그는 라 페루즈 제독의 지휘 아래 편대의 일원으로서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순항을 계속했는데, 그의 기함은 ''아스트레''였다.[2] 7월 21일, 두 척의 프리깃은 노바스코샤 해안에서 영국 호송선을 만났다. 루이부르 해전에서 ''아스트레''와 ''에르미온''은 HMS ''찰스타운''에게 깃발을 내리게 했지만, 그녀를 나포하는 데 실패하여 밤에 도망가도록 했다.[2][21] 그러나 그들은 14문의 호위함인 ''잭''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 보스턴으로 가져갔다.[21]

3. 3. 케이프 헨리 해전 및 루이부르 해전

1777년 5월, 라투슈 트레빌은 중위로 진급하여 20문 코르벳 로시뇰[2]의 지휘를 맡아 호송선을 호위하고 메시지를 전달했다.[7] 그는 영국 사략선 2척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2][9] 생 루이 기사단 기사로 임명되었으며,[2][7] 26문 프리깃 ''에르미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

1779년 5월 28일, ''에르미온''은 영국 사략선을 발견하고 밤에 도망치는 척하여 함정을 유인했다. 라투슈는 피곤한 추격을 유도하기 위해 배의 등대를 간헐적으로 보여준 뒤, 아침에 공격하여 18문 사략선 디피던스를 나포했다.[13] 다음 날, 또 다른 18문 영국 사략선이 공격해 오자 같은 계략으로 나포한 후,[13][14] 두 척의 전리품과 많은 수의 포로들과 함께 로슈포르로 돌아갔다.[13]

1780년 3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15] 라투슈는 길버트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을 프랑스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대서양 횡단 항해에 동행했다.[2][13] 이후, 스투슈 제독의 지휘 아래 함대에 합류하여 바라스와 테르네의 명령을 받아[9] 로드아일랜드 방어를 위한 여러 포병 부대의 건설을 지휘했다.[13]

포대 건설 완료 후, 롱아일랜드 해역에서 순항하며 선박을 나포하여 뉴욕 시로 향하던 중,[13] 1780년 6월 7일, 프리깃 HMS ''아이리스''와 세 척의 소형 군함과 교전(1780년 6월 7일의 교전)을 벌여 머스켓 총알에 팔을 맞았고,[2] ''에르미온''은 10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다.[16][17]

1781년 3월 16일, 체서피크 만 어귀에서 벌어진 케이프 헨리 해전에 참여했다.[19] 1781년 4월 13일, 아버지 루이-샤를 르 바소르 드 라 투슈가 사망하여 "라투슈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다.[28]

이후 라 페루즈 제독의 지휘 아래 편대의 일원으로서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순항을 계속했으며, 기함은 ''아스트레''였다.[2]

1781년 7월 21일, 노바스코샤 해안에서 영국 호송선과 조우하여 루이부르 해전이 발발했다. ''아스트레''와 ''에르미온''은 HMS ''찰스타운''에게 깃발을 내리게 했지만, 나포에는 실패하여 밤에 도망가도록 했다.[2][21] 그러나 14문 호위함 ''잭''과 상선 3척을 나포하여 보스턴으로 가져갔다.[21]

3. 4. 아글 함 복무 및 포획

프랑스로 돌아온 라투슈는 1781년 6월 20일 해군 대령으로 진급했다.[21] 1782년, 그는 ''아글''과 ''글로르''로 구성된 2척의 프리깃함 전대를 이끌고, 다량의 자금[22][23]과 장비를 미국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21]

1782년 9월 5일, 라투슈의 전대는 74문 함선 HMS ''헥터''를 만나 이틀간의 전투를 벌였다. 두 척의 프리깃함은 ''헥터''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나, 영국 전대가 나타나면서 포획에는 실패했다. 라투슈는 퇴각했고, ''헥터''는 며칠 후 침몰했다.[21][22]

이후 라투슈는 브리그함 을 나포하고[24] 델라웨어 강으로 향했으나, HMS ''Vestal'', , 그리고 노획된 ''소피''가 의 G.K. 엘핀스턴 선장의 지휘 아래 추격해 왔다. 라투슈는 프리깃함의 보트를 이용하여 승객과 보물을 상륙시켰고,[24] 델라웨어 강 어귀의 둑을 넘어 탈출하려 했지만, ''Aigle''이 좌초되었다.[24] ''Gloire'' 또한 바닥에 닿았지만, 간신히 빠져나와 수로에 도달했다.[24] 썰물이 빠지면서 ''Aigle''은 더욱 단단히 좌초되었고, 포대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라투슈는 돛대를 자르고 선체를 관통시킨 후 승무원을 대피시켰다.[24] 몇 명의 선원과 남아 선미 추적포에서 몇 발의 포탄을 발사한 후 깃발을 내렸다.[1][24][25] 영국군은 ''Aigle''을 회수하여 HMS ''Aigle''로 사용했다.

라투슈는 뉴욕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영국으로 이송되어[28] 1783년 파리 조약까지 포로로 남아 있었다.[1] 한편, 보드뢰유 제독은 해군 장관 카스트리에게 라투슈가 첩을 배에 태우고 다녔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26][27]

4. 프랑스 혁명 시기 활동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프랑스로 돌아와 로슈포르 항구 관리직에 임명되었고, ''Hydrographie française''의 첫 번째 권에 게재된 올레롱 섬의 지도를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28][29][30] 1784년 브뤼니 당트르카스토의 뒤를 이어 항구 및 해군 무기고의 부국장이 되었고, 1787년까지 재직 후 루이 필리프 2세의 재무관이 되었다.[28] 그는 해군 사관학교의 포술 학교 감독관으로도 근무했고,[28] 1786년 해군 법전을 공동 집필했다.[2][29] 1786년 7월, 옹플뢰르에서 르아브르까지 호위함을 타고 루이 16세를 수송했다.[28]

라투슈-트레빌의 편지


1788년 삼촌 샤를 오귀스트 레바소 드 라 투슈-트레빌이 사망하여 그의 이름을 유증했고, 이후 라투슈는 "트레빌"을 추가하여 "라투슈-트레빌 백작"이 되었다.[28]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라투슈-트레빌은 몽타르지 관할 구역에서 신분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국민 제헌 의회에 참석하여 1791년 10월 10일 해산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28] 라투슈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제3신분과 힘을 합친 최초의 귀족 중 한 명이었다.[1] 1791년 9월, 루이 16세가 새 헌법을 승인한 후 국민 제헌 의회가 해산되자, 라투슈-트레빌은 해군 활동을 재개했다.

앙투안 모랭의 라투슈-트레빌 초상화


라투슈는 1790년 12월 20일 해군 개혁 이후 부제독의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28] 1792년 브레스트에서 4척의 함대를 지휘했고,[1] 기함 ''랑그도크''를 타고 브레스트에서 툴롱으로 출항하여 로랑 장 프랑수아 트뤼게 휘하 지중해 함대에 배속되었다.[1] 이탈리아 원정군 동안 오넬리아, 칼리아리, 니스에 대한 습격에 참여했고,[29] 1792년 10월 사르데냐 공격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툴롱으로 돌아왔다.

|thumb|upright|''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는 나폴리에 대한 라투슈의 임무를 보도한다.]]

1793년 1월 1일 부제독으로 진급한 라투슈-트레빌은 나폴리에 임무를 맡았다.[1] 페르디난도 1세에게 사과를 받아낸 후[31] 출발했으나 강풍으로 인해 수리를 위해 나폴리로 되돌아가야 했고, 1793년 2월 8일 트뤼게와 만났다.[31] 2월 14일, 칼리아리에 6,000명의 지원병을 상륙시켰으나, 이틀 후 포격과 폭풍 속에서 재승선해야 했다.[31] 그 후 함대는 다시 툴롱으로 돌아왔다.[31]

1793년 3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라투슈는 "대양 해군" (브레스트 함대)을 지휘했으나, 혁명적인 부하들은 그를 귀족이라고 비난했다. 공포 정치 절정기인 9월 15일,[32] 공안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혐의자"로 체포되었고,[32] 10월 3일에 면직되었다.[1][33] 라 포스 감옥에서 1년을 보냈고,[32]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1794년 9월 20일에야 석방되었다.[32]

석방된 라투슈는 몽타르지로 돌아와 지역 국민 방위대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2] 그는 프리메이슨이었으며, 몽타르지 로지 ''Les Disciples d'Heredom et de la Madeleine Réunis''에서 ''베네라블''로 승진했다.[34] 프랑스 총재정부 하에서 복권되어 1795년 12월에 계급을 되찾았지만,[1] 5년 동안 해군 지휘권을 받지 못했다.[1] 1797년부터 1798년까지 선주 친구와 함께 해군 장비를 관리했으며, 1799년 ''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에 사략선 선장직을 구하는 광고를 냈다.[35] 1799년에야 현역으로 복귀했다.[32]

4. 1. 혁명 초기 활동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프랑스로 돌아와 로슈포르 항구 관리직에 임명되었고, ''Hydrographie française''의 첫 번째 권에 게재된 올레롱 섬의 지도를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28][29][30] 1784년 브뤼니 당트르카스토의 뒤를 이어 항구 및 해군 무기고의 부국장이 되었고, 1787년까지 재직 후 루이 필리프 2세의 재무관이 되었다.[28] 그는 해군 사관학교의 포술 학교 감독관으로도 근무했고,[28] 1786년 해군 법전을 공동 집필했다.[2][29] 1786년 7월, 옹플뢰르에서 르아브르까지 호위함을 타고 루이 16세를 수송했다.[28]

1788년 삼촌 샤를 오귀스트 레바소 드 라 투슈-트레빌이 사망하여 그의 이름을 유증했고, 이후 라투슈는 "트레빌"을 추가하여 "라투슈-트레빌 백작"이 되었다.[28]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라투슈-트레빌은 몽타르지 관할 구역에서 신분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국민 제헌 의회에 참석하여 1791년 10월 10일 해산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28] 라투슈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제3신분과 힘을 합친 최초의 귀족 중 한 명이었다.[1] 1791년 9월, 루이 16세가 새 헌법을 승인한 후 국민 제헌 의회가 해산되자, 라투슈-트레빌은 해군 활동을 재개했다.

라투슈는 1790년 12월 20일 해군 개혁 이후 부제독의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28] 1792년 브레스트에서 4척의 함대를 지휘했고,[1] 기함 ''랑그도크''를 타고 브레스트에서 툴롱으로 출항하여 로랑 장 프랑수아 트뤼게 휘하 지중해 함대에 배속되었다.[1] 이탈리아 원정군 동안 오넬리아, 칼리아리, 니스에 대한 습격에 참여했고,[29] 1792년 10월 사르데냐 공격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툴롱으로 돌아왔다.

|thumb|upright|''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는 나폴리에 대한 라투슈의 임무를 보도한다.]]

1793년 1월 1일 부제독으로 진급한 라투슈-트레빌은 나폴리에 임무를 맡았다.[1] 페르디난도 1세에게 사과를 받아낸 후[31] 출발했으나 강풍으로 인해 수리를 위해 나폴리로 되돌아가야 했고, 1793년 2월 8일 트뤼게와 만났다.[31] 2월 14일, 칼리아리에 6,000명의 지원병을 상륙시켰으나, 이틀 후 포격과 폭풍 속에서 재승선해야 했다.[31] 그 후 함대는 다시 툴롱으로 돌아왔다.[31]

1793년 3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라투슈는 "대양 해군" (브레스트 함대)을 지휘했으나, 혁명적인 부하들은 그를 귀족이라고 비난했다. 공포 정치 절정기인 9월 15일,[32] 공안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혐의자"로 체포되었고,[32] 10월 3일에 면직되었다.[1][33] 라 포스 감옥에서 1년을 보냈고,[32]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1794년 9월 20일에야 석방되었다.[32]

석방된 라투슈는 몽타르지로 돌아와 지역 국민 방위대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2] 그는 프리메이슨이었으며, 몽타르지 로지 ''Les Disciples d'Heredom et de la Madeleine Réunis''에서 ''베네라블''로 승진했다.[34] 프랑스 총재정부 하에서 복권되어 1795년 12월에 계급을 되찾았지만,[1] 5년 동안 해군 지휘권을 받지 못했다.[1] 1797년부터 1798년까지 선주 친구와 함께 해군 장비를 관리했으며, 1799년 ''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에 사략선 선장직을 구하는 광고를 냈다.[35] 1799년에야 현역으로 복귀했다.[32]

4. 2. 해군 복귀 및 지중해 함대 지휘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프랑스로 돌아와 로슈포르 항구 관리직을 맡았다.[28] 또한 ''Hydrographie française''의 첫 번째 권에 게재된 올레롱 섬의 지도를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28][29][30] 1784년 브뤼니 당트르카스토의 뒤를 이어 항구 및 해군 무기고의 부국장이 되었고, 1787년까지 이 직책에 있다가 루이 필리프 2세의 재무관이 되었다.[28] 그는 해군 사관학교의 포술 학교 감독관으로도 근무했으며,[28] 1786년 해군 법전을 공동 집필했다.[2][29] 1786년 7월, 옹플뢰르에서 르아브르까지 호위함을 타고 루이 16세를 수송했다.[28]

1788년, 그의 삼촌 샤를 오귀스트 레바소 드 라 투슈-트레빌이 사망하여 그의 이름을 유증했고, 이후 라투슈는 "트레빌"을 추가하여 "라투슈-트레빌 백작"이 되었다.[28]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몽타르지의 관할 구역에서 신분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국민 제헌 의회에 참석하여 1791년 10월 10일 해산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28] 라투슈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고 제3신분과 힘을 합친 최초의 귀족 중 한 명이었다.[1] 1791년 9월, 루이 16세가 새 헌법을 승인한 후 국민 제헌 의회가 해산되었고, 라투슈-트레빌은 해군 활동을 재개했다.

라투슈는 1790년 12월 20일 해군 개혁 이후 부제독의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28] 1792년 브레스트에서 4척의 함대를 지휘했고,[1] 기함 ''랑그도크''를 타고 브레스트에서 툴롱으로 출항하여 로랑 장 프랑수아 트뤼게 휘하의 지중해 함대에 배속되었다.[1] 이탈리아 원정군 동안 오넬리아, 칼리아리, 니스에 대한 습격에 참여했고,[29] 1792년 10월 사르데냐 공격에 참여했으나 원정군이 격퇴되면서 실패했다. 이후 툴롱으로 돌아왔다.

|thumb|upright|''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는 나폴리에 대한 라투슈의 임무를 보도한다.]]

1793년 1월 1일 부제독으로 진급한 라투슈-트레빌은 나폴리에 임무를 맡았다.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로부터 사과를 받아낸 그는 강풍으로 인해 수리를 위해 나폴리로 되돌아가야 했고, 1793년 2월 8일에 트뤼게와 만났다.[31] 2월 14일, 6,000명의 지원병을 칼리아리에 상륙시켰으나 이틀 후 포격과 폭풍 속에서 재승선해야 했다.[31] 그 후 함대는 다시 툴롱으로 돌아왔다.[31]

1793년 3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대양 해군" (브레스트 함대)을 지휘했지만, 혁명적인 부하들은 그를 귀족이라고 비난했다. 9월 15일, 공포 정치의 절정기에 공안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혐의자"로 체포되었고,[32] 10월 3일에 면직되었다.[1][33] 라 포스 감옥에서 1년을 보냈고,[32]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1794년 9월 20일에야 석방되었다.[32]

석방된 라투슈는 몽타르지로 돌아와 지역 국민 방위대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2] 그는 프리메이슨이었으며, 몽타르지 로지 ''Les Disciples d'Heredom et de la Madeleine Réunis''에서 ''베네라블''로 승진했다.[34] 프랑스 총재정부 하에서 복권되어 1795년 12월에 그의 계급을 되찾았지만,[1] 5년 동안 해군에서 지휘권을 받지 못했다.[1] 1797년부터 1798년까지 선주 친구와 함께 해군 장비를 관리했으며, 1799년에는 ''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에 사략선 선장직을 구하는 광고를 냈다.[35] 1799년에야 현역으로 복귀했다.[32]

4. 3. 나폴리 임무 및 칼리아리 원정 실패

1793년 1월 1일,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부제독으로 진급했다.[1] 그는 나폴리에 임무를 맡았는데,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 주재 나폴리 왕국 대사가 프랑스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하여 외교적 갈등을 야기했기 때문이었다. 라투슈 트레빌은 도시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31] 이후 출발했으나 강풍으로 인해 수리를 위해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야 했고, 1793년 2월 8일 로랑 장 프랑수아 트뤼게와 합류했다.[31] 2월 14일에는 6,000명의 지원병을 칼리아리에 상륙시켰으나, 이틀 후 포격과 폭풍 속에서 재승선해야 했다.[31] 그 후 함대는 툴롱으로 귀환했다.[31]

4. 4. 체포 및 투옥

루이 르네 마들렌 드 라투슈 트레빌은 프랑스로 돌아와 로슈포르 항구 관리직을 맡았고, ''Hydrographie française''의 첫 번째 권에 게재된 올레롱 섬의 지도를 그렸다.[28][29][30] 1784년 브뤼니 당트르카스토의 뒤를 이어 항구 및 해군 무기고의 부국장이 되었고, 1787년까지 이 직책을 역임하다가 루이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의 재무관이 되었다.[28] 해군 사관학교의 포술 학교 감독관으로도 근무했으며,[28] 1786년 해군 법전을 공동 집필했다.[2][29] 1786년 7월, 옹플뢰르에서 르아브르까지 호위함을 타고 프랑스의 루이 16세를 수송했다.[28]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몽타르지 관할 구역에서 신분회 대의원으로 선출,[1] 국민 제헌 의회에 참석하여 1791년 10월 10일 해산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28] 라투슈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고 제3신분과 힘을 합친 최초의 귀족 중 한 명이었다.[1]

1790년 12월 20일 해군 개혁 이후 부제독의 계급을 가지고 있던 그는,[28] 1792년 브레스트에서 4척의 함대를 지휘, 기함 ''랑그도크''를 타고 브레스트에서 툴롱으로 출항하여 로랑 장 프랑수아 트뤼게 휘하의 지중해 함대에 배속되었다.[1] 이탈리아 원정군 동안 오넬리아, 칼리아리, 니스에 대한 습격에 참여했고,[29] 1792년 10월 사르데냐 공격에도 참여했다.[1]

|thumb|upright|''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는 나폴리에 대한 라투슈의 임무를 보도한다.]]

1793년 1월 1일 부제독으로 진급한 후,[1] 나폴리에 임무를 맡아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31]

1793년 3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라투슈는 "대양 해군" (브레스트 함대)을 지휘했지만, 혁명적인 부하들은 그를 귀족이라고 비난했다. 공포 정치의 절정기인 9월 15일,[32] 공안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혐의자"로 체포되었고,[32] 10월 3일에 면직되었다.[1][33] 라 포스 감옥에서 1년을 보냈고,[32]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1794년 9월 20일에야 석방되었다.[32]

석방된 라투슈는 몽타르지로 돌아와 지역 국민 방위대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2] 프리메이슨이었으며, 몽타르지 로지 ''Les Disciples d'Heredom et de la Madeleine Réunis''에서 ''베네라블''로 승진했다.[34] 프랑스 총재정부 하에서 복권되어 1795년 12월에 계급을 되찾았지만,[1] 5년 동안 해군에서 지휘권을 받지 못했다.[1] 1799년에야 현역으로 복귀했다.[32]

4. 5. 복권 및 불로뉴 함대 지휘

1799년, 라투슈는 브레스트에서 해군 사단을 지휘하며 74문 함선인 몽블랑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32] 곧 그는 브레스트 함대 전체를 지휘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고, 그의 기함을 110문 함선인 테리블로 옮겼다.[32] 라투슈 트레빌은 정부가 브레스트 해군을 해산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항구를 방어했고, 이후 4척의 군함을 로슈포르로 항해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해군 장관 포르페의 조언을 받은[1] 제1통령 보나파르트는 라투슈 트레빌에게 불로뉴 함대를 조직하고 지휘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함대는 표면적으로는 영국 침공을 위한 것이었지만,[1][32] 실제로는 영국을 압박하여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만 전술이었다.[36] 이는 프랑스 군대의 진정한 목표인 오스트리아 침공을 위해 불로뉴에 군대를 집결시키는 것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37] 1801년 8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불로뉴를 공격해 왔으나, 라투슈 트레빌은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

불로뉴 습격 삽화

5. 생도맹그 원정 및 툴롱 함대 사령관 복무

아미앵 조약이 체결된 동안, 라투슈 트레빌은 빌라레 드 조와유즈 제독의 함대에서 6척의 전열함, 6척의 프리깃함, 2척의 코르벳으로 구성된 로슈포르 해군 전대[38]를 지휘하는 임명을 받았다.[32] 이 함대는 생도맹그 원정을 위해 라인 군대 병력 3,000명을 수송했다.[32] 라투슈는 포르토프랭스 항구로 진입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병력을 상륙시켰다.[32] 그는 부데 장군과 함께 포르토프랭스와 레오간을 점령했다. 라투슈 트레빌은 라플룸 장군을 평화적으로 항복시켰고, 남부에서는 르클레르 장군이 투생 루베르튀르와 크리스토프에게 프랑스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39]

빌라레 드 조와유즈가 1802년 4월에 떠난 후, 라투슈 트레빌은 생도맹그에 4척의 전열함, 9척의 프리깃함, 5척의 코르벳과 함께 머물렀다.[39] 프랑스가 1802년 5월 20일에 노예 제도를 부활시킨 후, 새로운 반란이 발발하여 황열병으로 고통받는 르클레르 군대를 압도했다. 라투슈 트레빌은 남부의 항구를 방어하며 윌로메를 생도맹그 서부 해군 기지에 임명했다.[39] 1803년 5월 영국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시작한 후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했다. 윌로메는 1803년 6월 28일 해전에서 손상된 프리깃함을 수리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영국군은 생도맹그 봉쇄를 실시하여 로샹보 군대를 완전히 파멸시켰다.[39] 1803년 10월, 라투슈 트레빌은 건강 악화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자유 통행권을 얻어 프랑스로 돌아갔다.[38][39]

1803년 부제독으로서의 라투슈-트레빌의 초상화. 루이필리프는 1835년 베르사유 역사 박물관을 위해 이 그림을 의뢰했고, 조르주 루제가 1840년에 그렸다.


라투슈 트레빌은 1803년 12월 부제독이 되었다.[38]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지중해 연안 총감으로 임명된 후, 새로 건조된 80문 부상퇴르에 기함기를 게양하고 툴롱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38] 당시 함대는 전열함 7척과 프리깃함 4척으로 구성되었고, 기강이 매우 해이해져 있었다.[38] 특히 해군 장교들은 의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을 때만 배에서 잠을 잤다.[38] 라투슈 트레빌은 자신의 배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사기는 그의 모범과 지도력 아래 빠르게 개선되었다.[38]

라투슈 트레빌은 한 척의 전함 또는 프리깃함을 3일씩 교대로 항구 밖에 순찰시키고, 다른 함선은 첫 신호에 언제든지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41] 또한 툴롱 항구에 우세한 영국 해군이 진입하여 프랑스의 활동을 정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함대가 다른 프랑스 군함을 지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출동했다.[41] 시간이 지나면서 함대는 전열함 3척과 프리깃함 3척을 증원받았다.[41]

1804년 6월 말, 라투슈 트레빌은 생도맹그에서 얻은 건강 악화가 재발했다.[42]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상륙을 거부하며 "제독은 그의 배의 깃발 아래에서 죽을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3][41] 실제로 그는 10일간의 투병 끝에 8월 19일, ''부상퇴르''에서 사망했다.[41] 넬슨은 나중에 "프랑스 신문들은 그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신호대에 너무 자주 걸어 다니느라 죽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그것이 그의 죽음이라고 말했다."라고 썼다.[44]

5. 1. 생도맹그 원정 참여

아미앵 조약이 체결된 동안, 라투슈 트레빌은 빌라레 드 조와유즈 제독의 함대에서 6척의 전열함, 6척의 프리깃함, 2척의 코르벳으로 구성된 로슈포르 해군 전대[38]를 지휘하는 임명을 받았다.[32] 이 함대는 생도맹그 원정을 위해 라인 군대 병력 3,000명을 수송했다.[32] 라투슈는 포르토프랭스 항구로 진입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병력을 상륙시켰다.[32] 그는 부데 장군과 함께 포르토프랭스와 레오간을 점령했다. 라투슈 트레빌은 라플룸 장군을 평화적으로 항복시켰고, 남부에서는 르클레르 장군이 투생 루베르튀르와 크리스토프에게 프랑스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39]

빌라레 드 조와유즈가 1802년 4월에 떠난 후, 라투슈 트레빌은 생도맹그에 4척의 전열함, 9척의 프리깃함, 5척의 코르벳과 함께 머물렀다.[39] 프랑스가 1802년 5월 20일에 노예 제도를 부활시킨 후, 새로운 반란이 발발하여 황열병으로 고통받는 르클레르 군대를 압도했다. 라투슈 트레빌은 남부의 항구를 방어하며 윌로메를 생도맹그 서부 해군 기지에 임명했다.[39] 1803년 5월 영국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시작한 후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했다. 윌로메는 1803년 6월 28일 해전에서 손상된 프리깃함을 수리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영국군은 생도맹그 봉쇄를 실시하여 로샹보 군대를 완전히 파멸시켰다.[39] 1803년 10월, 라투슈 트레빌은 건강 악화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자유 통행권을 얻어 프랑스로 돌아갔다.[38][39]

5. 2. 생도맹그 잔류 및 방어

아미앵 조약이 체결된 동안, 라투슈 트레빌은 빌라레 드 조와유즈 제독의 함대에서 6척의 전열함, 6척의 프리깃함, 2척의 코르벳으로 구성된 로슈포르 해군 전대[38]를 지휘하는 임명을 받았다.[32] 이 함대는 생도맹그 원정을 위해 라인 군대 병력 3,000명을 수송했다.[32] 라투슈는 포르토프랭스 항구로 진입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병력을 상륙시켰다.[32] 그는 부데 장군과 함께 포르토프랭스와 레오간을 점령했다. 라투슈 트레빌은 라플룸 장군을 평화적으로 항복시켰고, 남부에서는 르클레르 장군이 투생 루베르튀르와 크리스토프에게 프랑스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39]

빌라레 드 조와유즈가 1802년 4월에 떠난 후, 라투슈 트레빌은 생도맹그에 4척의 전열함, 9척의 프리깃함, 5척의 코르벳과 함께 머물렀다.[39] 프랑스가 1802년 5월 20일에 노예 제도를 부활시킨 후, 새로운 반란이 발발하여 황열병으로 고통받는 르클레르 군대를 압도했다. 라투슈 트레빌은 남부의 항구를 방어하며 윌로메를 생도맹그 서부 해군 기지에 임명했다.[39] 1803년 5월 영국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시작한 후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했다. 윌로메는 1803년 6월 28일 해전에서 손상된 프리깃함을 수리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영국군은 생도맹그 봉쇄를 실시하여 로샹보 군대를 완전히 파멸시켰다.[39] 1803년 10월, 라투슈 트레빌은 건강 악화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자유 통행권을 얻어 프랑스로 돌아갔다.[38][39]

5. 3. 툴롱 함대 사령관 복무 및 사망

라투슈-트레빌은 1803년 12월 부제독이 되었다.[38]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지중해 연안 총감으로 임명된 후, 새로 건조된 80문 부상퇴르에 기함기를 게양하고 툴롱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38] 당시 함대는 전열함 7척과 프리깃함 4척으로 구성되었고, 기강이 매우 해이해져 있었다.[38] 특히 해군 장교들은 의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을 때만 배에서 잠을 잤다.[38] 라투슈-트레빌은 자신의 배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사기는 그의 모범과 지도력 아래 빠르게 개선되었다.[38]

라투슈-트레빌은 한 척의 전함 또는 프리깃함을 3일씩 교대로 항구 밖에 순찰시키고, 다른 함선은 첫 신호에 언제든지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41] 또한 툴롱 항구에 우세한 영국 해군이 진입하여 프랑스의 활동을 정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함대가 다른 프랑스 군함을 지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출동했다.[41] 시간이 지나면서 함대는 전열함 3척과 프리깃함 3척을 증원받았다.[41]

1804년 6월 말, 라투슈-트레빌은 생도맹그에서 얻은 건강 악화가 재발했다.[42]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상륙을 거부하며 "제독은 그의 배의 깃발 아래에서 죽을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3][41] 실제로 그는 10일간의 투병 끝에 8월 19일, ''부상퇴르''에서 사망했다.[41] 넬슨은 나중에 "프랑스 신문들은 그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신호대에 너무 자주 걸어 다니느라 죽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그것이 그의 죽음이라고 말했다."라고 썼다.[44]

6. 유산

라투슈 트레빌은 툴롱 묘지에 묻혔다. 1810년, 라투슈 트레빌이 마지막 해에 영국군을 관찰했던 케이프 세페의 세마포르 드 라 크루아 데 시그노에 7미터 높이의 피라미드형 묘소가 세워졌다.[45] 1902년 10월 14일, 군 당국은 묘소를 생 망드리 쉬르 메르의 군 묘지로 옮기기로 결정했으며,[46] 유해는 1903년 4월 29일에 이장되었다.[47]

라투슈는 개선문에 새겨져 있다 (왼쪽 열, 위에서 10번째)


프랑스 작가와 역사가들은 라투슈 트레빌을 넬슨과 자주 비교했는데, 부분적으로는 그가 불로뉴 습격에서 넬슨과 싸워 물리쳤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가 죽지 않았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과 맞섰을 것이기 때문이다.[48] 그의 명예를 기려 '라투슈'라는 이름이 개선문 북쪽에 새겨졌다.[49]

프랑스 해군의 세 척의 배가 그의 명예를 기려 ''라투슈-트레빌''로 명명되었다. 1860년의 증기 아비소 ''라투슈-트레빌''; 1892년의 장갑 순양함 ''라투슈-트레빌''; 현재 취역 중인 F70형 구축함 ''라투슈-트레빌''.

6. 1. 평가 및 기념

라투슈 트레빌은 툴롱 묘지에 묻혔다. 1810년, 라투슈 트레빌이 마지막 해에 영국군을 관찰했던 케이프 세페의 세마포르 드 라 크루아 데 시그노에 7미터 높이의 피라미드형 묘소가 세워졌다.[45] 1902년 10월 14일, 군 당국은 묘소를 생 망드리 쉬르 메르의 군 묘지로 옮기기로 결정했으며,[46] 유해는 1903년 4월 29일에 이장되었다.[47]

프랑스 작가와 역사가들은 라투슈 트레빌을 넬슨과 자주 비교했는데, 부분적으로는 그가 불로뉴 습격에서 넬슨과 싸워 물리쳤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가 죽지 않았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과 맞섰을 것이기 때문이다.[48] 그의 명예를 기려 '라투슈'라는 이름이 개선문 북쪽에 새겨졌다.[49]

프랑스 해군의 세 척의 배가 그의 명예를 기려 ''라투슈-트레빌''로 명명되었다. 1860년의 증기 아비소 ''라투슈-트레빌''; 1892년의 장갑 순양함 ''라투슈-트레빌''; 현재 취역 중인 F70형 구축함 ''라투슈-트레빌''.

6. 2. 함선 명명

라투슈 트레빌의 이름은 개선문 북쪽에 새겨져 있으며, 프랑스 해군은 그의 명예를 기려 세 척의 배를 ''라투슈-트레빌''로 명명했다.[49]

  • 1860년 증기 아비소 ''라투슈-트레빌''

  • 1892년 장갑 순양함 ''라투슈-트레빌''

  • 현재 취역 중인 F70형 구축함 ''라투슈-트레빌''


라투슈-트레빌은 툴롱 묘지에 묻혔으며, 1810년에는 그가 마지막 해에 영국군을 관찰했던 케이프 세페의 세마포르 드 라 크루아 데 시그노에 7미터 높이의 피라미드형 묘소가 세워졌다.[45] 1902년 군 당국은 묘소를 생 망드리 쉬르 메르의 군 묘지로 옮기기로 결정했고,[46] 유해는 1903년에 이장되었다.[47] 프랑스 작가와 역사가들은 라투슈-트레빌을 넬슨과 자주 비교하는데, 이는 그가 불로뉴 습격에서 넬슨과 싸워 물리쳤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과 맞섰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48]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Les Marins illustres
[4] 서적 Les Marins illustres
[5] 서적
[6] 서적 Les Marins illustres
[7] 서적 Les Marins illustres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Les Marins illustres
[14] 서적 Les Marins illustres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Les Marins illustres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Les Marins illustres
[25] 간행물 London Gazette 1782-11-12
[26] 서적
[27] 인용
[28] 서적 Les Marins illustres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Les Marins illustres
[33] 서적 Histoire maritime de France
[34] 서적 Dictionnaire des marins francs-maçons, Gens de mer et professions connexes aux XVIIIe, XIXe et XXe siècles L'Harmattan
[35] 서적
[36] 서적 Farrère
[37] 서적 Granier
[38] 서적 Hennequin
[39] 서적 Granier
[40] 서적 Les Marins illustres
[41] 서적 Hennequin
[42] 서적 Hennequin Biographie maritime, Levot Gloires maritimes de la France, Guérin Marins illustres and Taillemite Dictionnaire des marins français
[43] 인용 Un amiral est trop heureux lorsqu'il peut mourir sous le pavillon de son vaisseau.
[44] 서적 Bradford
[45] 서적 Granier
[46] 인용 Allegedly, because they saw the mausoleum as a potential [[daymark]] for an enemy fleet. Emmanuel Davin, Les amis du vieux Toulon
[47] 웹사이트 ville-saintmandrier.fr http://www.ville-sai[...]
[48] 서적 Latouche-Tréville, 1745–1804 : l'amiral qui défiait Nelson éditions SPM
[49] 서적 Notice historique sur l'Arc de Triomphe et l'Étoile https://books.google[...] Rosselin 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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