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카생
1. 개요
르네 카생은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인권 운동가로, 1887년 프랑스 바욘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장애인 참전 용사 연맹을 설립하는 등 전간기 활동을 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샤를 드골 장군과 함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하여 활동했고, 종전 후에는 세계 인권 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유럽인권재판소 재판장을 역임했으며, 유대인 단체 협의회를 설립하여 인권 증진에 기여했다. 196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제센터가 설립되고, 여러 기관과 상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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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욘 출신 -
프레데리크 바스티아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는 자유주의 경제 사상과 자유 시장 경제를 옹호하며 정부 개입의 부정적 결과를 비판한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다. -
바욘 출신 -
디디에 데샹
디디에 데샹은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챔피언스리그와 세리에 A 우승을 경험하고, 프랑스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1998년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2000에서 우승했으며, 감독으로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2018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
1976년 사망 -
마르틴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는 1889년에 태어나 1976년에 사망한 독일의 철학자이며, 현상학과 실존주의, 언어와 기술 비판을 탐구했고, 대표작으로 『존재와 시간』이 있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나치즘 협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1976년 사망 -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군사 전략가, 공산주의 이론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아버지로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을 통치했고, 마오쩌둥 사상의 창시자로서 그의 정책과 통치는 중국 사회, 경제, 문화, 외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노벨 평화상 수상자 -
나르게스 모하마디
이란의 인권 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나르게스 모하마디는 여성 인권과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활동하며 이란 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2023년에는 이란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수감 중에도 저술 활동을 통해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
노벨 평화상 수상자 -
지미 카터
지미 카터는 해군 장교와 땅콩 농장 운영을 거쳐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도덕적, 진보적 이미지로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퇴임 후 카터 센터 설립과 인도주의 활동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르네 카생은 1887년 10월 5일 프랑스 바욘에서 세파르디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니스에서 성장했으며, 리세 마세나(Lycée Masséna)에서 공부하고 17세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방스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헌법사, 로마법을 전공하여 법학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받았고, 법학부 경쟁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국제 평화 회의에서 초청 연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4년 파리에서 법학, 경제학,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카생은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뫼즈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한 작전에서 적진 공격을 이끌던 중 기관총 사격으로 팔, 옆구리,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의무병이 그의 목숨을 구했으나, 10일 후 안티브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는 Croix de Guerre프랑스어 훈장을 받았지만, 부상이 너무 심각하여 현역으로 복귀할 수 없었고, 전쟁 부상자로 제대했다.
4. 전간기 활동
그는 좌파 평화주의 참전용사 단체인 연방 노동 조합(Union fédérale) 설립을 도왔다.
카생은 1918년 프랑스 장애인 참전 용사 연맹을 설립하여 1940년까지 회장직을 역임한 후 명예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많은 비정부기구(NGO)를 이끌었다.
1920년 릴 대학교 법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929년부터 1960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강의했다.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와 제네바 국제관계대학원 등에서도 강의했다.
1924년부터 1938년까지 국제 연맹 프랑스 대표로 활동하며 군축 진전과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기구 개발을 촉구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과 자유 프랑스
1940년 6월 24일, 휴전을 거부한 카상은 생장드뤼즈에서 영국 선박 SS Ettrick영어호에 승선하여 런던의 샤를 드골 장군에게 합류,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데 기여했다. 카상은 드골 장군에게 합류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드골 장군은 자유 프랑스 규약 초안 작성을 위한 법률 지원이 필요했기에 카상의 런던 도착은 매우 환영받았다.
카상은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지만,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 등 저명한 학자 및 정치인들과 교류했다. 1941년 4월, 카상은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세속적인 관점에서 연설하며,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가 유대인에게 제공해 온 완전하고 평등한 보호를 상기시켰다. 그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하여 그 빚을 갚도록 촉구했다. 1942년, 비시 프랑스는 카상의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하고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6. 전후 활동 및 인권 운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네 카생은 국제연합에 배정되어 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그는 캐나다 법학 교수 존 험프리가 작성한 권리 목록을 바탕으로 수정된 초안을 작성하고 텍스트를 확장했다.
그는 유엔 인권 위원회와 헤이그 상설 중재 재판소에서 활동했다. 또한 유럽인권재판소의 위원(1959년~1965년)이자 재판장(1965년~1968년)을 역임했다. 스트라스부르에는 그의 이름을 딴 '르네 카상 길'이 있다.
1945년, 샤를 드골 장군은 르네 카생에게 유대인을 도울 것을 제안했고, 카생은 세계 이스라엘 동맹(AIU)의 회장이 되었다. AIU는 오스만 제국에 거주하는 세파르디 유대인들에게 현대 프랑스 교육을 제공하는 단체였다. 카생은 미국 유대인 위원회, 영국 유대인 협회와 협력하여 유대인 단체 협의회를 설립하고 인권 증진에 힘썼다.
1947년, 카생은 프랑스 행정과학연구소(IFSA)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프랑스 행정법 학설 발전에 기여했다.
1950년 11월 10일, 카생은 카림 아즈쿨 등과 함께 유엔 라디오에서 프랑스어 사용 국가를 위한 원탁 토론에 참여했다.
7. 유산 및 평가
2001년, 르네 카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유대교적 관점에서 보편적 인권을 증진하는 레네 카센 국제센터(CCJO René Cassin)가 설립되었다.
CCJO는 인권에 뛰어난 세계적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레네 카센 메달을 수여한다. 카생은 프랑스 이스라엘 동맹의 수장으로서 유대인의 시민권을 위해 노력했으며 활동적인 시오니스트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한 고등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2003년, 바스크 정부는 인권 증진, 옹호 및 보급에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를 인정하고 보상하기 위해 레네 카센 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세계 인권 선언 기념일인 12월 10일에 수여된다.
파리 1 팡테옹-소르본 대학교의 법학 캠퍼스는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