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후이탕
1. 개요
리후이탕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선수, 감독, 행정가로 활동한 중국 축구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사우스 차이나 AA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홍콩 1부 리그에서 여러 차례 우승했으며,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5번의 극동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여 아시아 국가 최초로 올림픽 축구 토너먼트에 출전했으며, 선수 겸 감독으로 1934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후 중화민국 (타이완) 대표팀 감독으로 1954년과 1958년 아시안 게임에서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아시아 축구 연맹 창립 멤버이자 사무총장, 국제 축구 연맹(FIFA) 부회장을 역임하며 아시아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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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이름 | 리와이통 |
|---|---|
| 출생일 | 1905년 10월 16일 |
| 출생지 | 영국령 홍콩 홍콩섬 타이항 |
| 사망일 | 1979년 7월 4일 |
| 사망지 | 영국령 홍콩 구룡 성 테레사 병원 |
| 키 | 1.80 미터 |
| 포지션 | 축구 공격수 (스트라이커) |
| 유소년 클럽 연도 | 1922년 |
|---|---|
| 유소년 클럽 | 사우스 차이나 AA |
| 클럽 연도 | 1923–1926 |
|---|---|
| 클럽 | 사우스 차이나 AA |
| 클럽 연도 | 1926–1930 |
| 클럽 | 루어 화 |
| 클럽 연도 | 1930-1932 |
| 클럽 | 사우스 차이나 AA |
| 클럽 연도 | 1932-1933 |
| 클럽 | USM 바타비아 |
| 클럽 연도 | 1933-1947 |
| 클럽 | 사우스 차이나 AA |
| 국가대표 연도 | 1923–1941 |
|---|---|
| 국가대표팀 | 중국 |
| 국가대표 출장 | 13회 |
| 국가대표 골 | 13골 |
| 감독 연도 | 1926–1930 |
|---|---|
| 감독 클럽 | 푸단 대학 |
| 감독 연도 | 1934년 |
| 감독 클럽 | 중국 |
| 감독 연도 | 1948년 |
| 감독 클럽 | 중국 |
| 감독 연도 | 1954–1960 |
| 감독 클럽 | 중화민국 |
| 감독 연도 | 1966–? |
| 감독 클럽 | 밍촨 대학 (여자) |
-
1960년 AFC 아시안컵 참가 감독 -
김용식 (축구인)
김용식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축구 선수, 지도자, 행정가로 활동하며 일본 국가대표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고,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 겸 감독으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서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은퇴 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
중화 타이베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이마이 도시아키
이마이 도시아키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에는 와세다 대학 축구부와 가와사키 프론탈레에서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는 여러 J리그 팀과 국가대표팀을 지도했다. -
중화 타이베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이태호 (축구인)
이태호는 대한민국의 은퇴한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공격수로서 K리그의 대우 로얄즈에서 활약하며 K리그 우승 3회 등을 기록하고 국가대표로도 1986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8년 AFC 아시안컵 득점왕 등을 차지했으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활약을 펼쳐 '불굴의 투혼'을 상징하는 선수로 평가받는다. -
대만의 축구 감독 -
저우타이잉
중화 타이베이의 전직 여자 축구 선수이자 감독인 저우타이잉은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AFC 여자 아시안컵 3회 우승과 MVP를 수상하고, 독일과 일본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은퇴 후에는 대학 및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
대만의 축구 감독 -
리슈친
리슈친은 타이둥 현 출신의 대만 여자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대학 축구 리그 우승과 골든슈를 수상하고, 타이완 뮬란 풋볼 리그에서 팀의 주장을 맡아 골든슈를 수상했으며, 중화 타이베이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도 활동했다.
2. 선수 경력
리후이탕은 1922년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AA 유소년팀에 입단하며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공격수로 빠르게 성장하여 사우스 차이나 AA와 상하이의 지역 클럽에서 활약했으며, 중화민국 대표팀의 주축 선수로 활동했다. 특히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도 참가하는 등 중화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으나, 전쟁 후 다시 그라운드로 복귀하여 1948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2.1. 클럽 경력
리는 처음 아버지의 건설 회사를 돕기 위해 학교를 일찍 그만두었으나, 1922년 홍콩 1부 리그 팀인 사우스 차이나 AA에 유소년 선수로 입단하며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성장하여 1923년에는 성인팀으로 승격되었고, 뛰어난 스트라이커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리는 1923-24 홍콩 1부 리그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925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당시 중국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중국 축구 선수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성공 이후, 리는 중국으로 돌아와 상하이의 푸단 대학에서 체육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교, 상하이 자오퉁 대학교, 후장 대학교, 지난 대학교 및 푸단 대학 선수들로 구성된 지역 연합팀 '로 화'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이 팀은 주로 지역 및 지방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는 당시 아마추어 시대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열리는 연례 대회였다.
1931년, 리는 사우스 차이나로 복귀하여 1932-33 홍콩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1934-35 홍콩 1부 리그와 1935-36 홍콩 1부 리그에서도 연이어 우승하며 팀 역사상 첫 리그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의 축구 경력은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리는 일본의 홍콩 점령 시기까지 사우스 차이나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나, 이후 광둥으로 탈출하여 중화민국 육군에 합류했다. 그는 군 복무 중 전쟁 기금 마련을 위한 시범 경기를 열기도 했다. 스포츠 부문에서 소장 계급까지 진급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사우스 차이나로 돌아왔다. 그는 팀에서 여러 시즌을 더 보낸 뒤 1948년, 43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23년 5월, 17세의 나이로 리후이탕은 중화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1923년 극동 선수권 대회 축구에 참가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속팀에서의 뛰어난 득점력을 인정받아 대표팀에 합류했으며, 이는 이후 20년간 이어질 화려한 선수 경력의 시작이었다. 대회 마지막 경기였던 5월 24일 일본과의 경기에서 리후이탕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당시 17세 217일이었던 그는 국제 대회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펠레만이 17세 241일로 이 기록에 근접했을 뿐이다. 중화민국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리후이탕은 젊은 스타로 주목받았다. 1925년 다음 대회에서는 총 5골을 기록했는데, 일본을 상대로 2골, 필리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중화민국의 통산 6번째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화민국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리후이탕이 이끈 팀은 1923년부터 1936년까지 13년간 공식 경기에서 패배하지 않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중화민국을 이끌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이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올림픽 축구 본선에 진출한 사례였다. 하지만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올림픽 참가에 필요한 경비 220 중 170만 지원할 수 있었고, 부족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표팀은 동남아시아 순회 친선 경기를 치러야 했다. 대표팀은 베트남,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말라야, 버마, 인도 등지를 돌며 경기를 펼쳤고, 목표했던 경비를 마련하여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 리후이탕은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고 대회 16강전에서 영국과 맞붙었으나 패배하여 탈락했다.
리후이탕은 중화민국 대표팀 소속으로 총 13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했다.
3. 감독 경력
리후이탕은 선수 시절부터 감독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로화 팀 선수 시절 푸단 대학교 축구팀을 지도했다. 당시 중화민국 대표팀 주장이었던 그는 전담 감독이 없어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이끌고 1934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에는 중화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48년 런던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대회 참가를 위해 필리핀과 태국에서 자비로 훈련 캠프를 마련하여 3개월간 선수들을 지도했다. 하지만 올림픽 본선 1라운드에서 터키에 0-4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올림픽 이후 중국 국공 내전이 격화되면서 리후이탕은 감독직을 잠시 중단했다.
국공 내전 이후 중화민국(타이완) 대표팀의 초대 전담 감독으로 부임하여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어서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도 대표팀을 지휘했으며, 결승전에서 대한민국을 3-2로 누르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감독 외에 축구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1954년 아시아 축구 연맹(AFC) 창설에 기여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65년에는 FIFA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이 자리에 오른 최초의 중국인이 되었다.
4. 수상 내역
리후이탕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여러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선수 시절에는 사우스 차이나 소속으로 홍콩 1부 리그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으며, 중화민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다수의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감독으로서는 중화민국 대표팀을 이끌고 1954년과 1958년 아시안 게임에서 2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하는 업적을 달성했다.
4.1. 선수
사우스 차이나
* 홍콩 1부 리그: 1923-24, 1932-33, 1934-35, 1935-36, 1937-38, 1938-39, 1939-40, 1940-41
중화민국
* 극동 선수권 대회: 1923, 1925, 1927, 1930, 1934
4.2. 감독
중화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1954년 아시안 게임과 1958년 아시안 게임에서 팀을 이끌고 두 차례 우승(금메달)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