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르기스 오헤크트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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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코르기스 오헤크트 칸은 15세기 몽골 북원의 칸으로, 1448년 타이순 칸과 에센 타이시의 누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1455년 8세의 나이로 칸으로 옹립되었으나 실권은 없었고, 부족장들의 꼭두각시였다. 재위 기간 중 보라이와의 갈등 끝에 1465년 보라이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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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르기스 오헤크트 칸 | |
---|---|
기본 정보 | |
칭호 | 몽골의 카간 |
이름 | 마하코르기스 |
다른 이름 | 우케그투 칸 |
통치 | |
재위 기간 | 1455년 – 1465년 |
계승 | 북원의 카간 |
선대 | 에센 |
후대 | 몰론 칸 |
출생과 사망 | |
출생 연도 (추정) | 1448년 |
출생지 | 외몽골 |
사망 연도 | 1465년 (16-17세) |
사망 장소 | 외몽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타이숭 칸 토그토아 부카 |
어머니 | 사마르 타이푸 |
왕조 | |
가문 | 보르지긴 |
왕조 | 북원 |
2. 생애
1448년[6][7] 타이순 칸(토크토아 부하)과 오이라트의 족장 에센 타이시의 누이(소 하툰 삼루 태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센 타이시는 처음에는 자신의 조카인 마르코르기스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타이순 칸이 다른 아내가 낳은 아이를 세우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다. 타이순 칸은 병사를 이끌고 에센 타이시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울량하이 부로 도망쳤지만, 샤브단(사불단)이라는 자에게 살해되었다(1451년).[8]
타이순 칸을 멸망시킨 에센 타이시는 북원의 황족을 모두 죽이고 오이라트인을 어머니로 둔 자들만을 살려주었는데, 이 때문에 마르코르기스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453년, 에센 타이시는 칭기스 통치 원리를 무시하고 칸의 자리에 올라 "대원천성대칸"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1454년 아라크 친(아랄지위안)의 반란으로 패배하여 도주 중에 살해되었다.[9]
1455년, 보라이(발래) 등 몽골 부족장들에 의해 8세의 나이로 칸으로 옹립되었고,[10] 우케크트 칸으로 명명되었다.[11]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명나라는 그를 "소왕자"라고 불렀으며,[10] 이후 중국에서 "소왕자"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칸을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12] 그는 실권이 없었고, 부족장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13]
마르코르기스 우케크트 칸의 재위 기간 동안 보라이는 명나라와 교류하고 침입 및 약탈을 하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마르코르기스와 보라이는 적대 관계였다.[14] 1465년[15], 보라이에 의해 살해되었다.[16] 보라이는 곧 옹구트의 모리하이(마골리카이, 물라카이 옹)에 의해 살해되었고, 모리하이가 모란(몰란)[17]을 칸으로 옹립했다.[18]
2. 1. 생애 초반
1446년 혹은 1448년 출생이며 정확한 생일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타이손 칸과 오이라트부 출신 세첸 카툰(에센 타이시의 누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 경우 압단이 그의 친형제가 된다. 타이순 칸의 다른 후비 사무르 카툰이 마르코르기스의 생모라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다른 후비 소생으로, 에센의 오이라트 4부의 공격을 받고 죽은 여자가 그의 생모라는 설도 있다. 에센 타이시가 타이손 칸의 일족을 살해할 때, 그는 수레 밑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구했다 한다.[6][7] 에센 타이시와 오이라트 4부가 항가이(Хангай)와 자브항(Завхан)을 공격할 때 타이손 칸의 카툰 중 1명을 살해했다. 이때문에 그의 몽골어식 존호가 오헤크트, 죽음의 칸이라는 존호가 붙었다 한다.마르코르기스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르네 그로세트(René Grousset)가 쓴 몽골의 역사서 《초원제국(草原帝國)》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기독교의 성인 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성 마르코, 마가의 이름을 몽골어화 한 것이라 한다. 마르코르기스가 성 게오르기오스의 이름을 시리아어화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처음, 에센 타이시는 자신의 조카인 마르코르기스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타이순 칸이 다른 아내가 낳은 아이를 세우려 하자 에센 타이시는 이에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자 타이순 칸은 병사를 이끌고 에센 타이시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패배했다. 타이순 칸은 인척인 울량하이 부로 도망쳤지만, 샤브단(사불단)이라는 자에 의해 살해되었다(1451년).[8]
타이순 칸을 멸망시킨 에센 타이시는 북원의 황족을 모두 죽이고 오이라트인을 어머니로 둔 자들만을 살려주었다. 이 때문에 마르코르기스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453년, 에센 타이시는 칭기스 통치 원리를 무시하고 칸의 자리에 올라 "대원천성대칸"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1454년 아라크 친(아랄지위안)의 반란으로 패배하여 도주 중에 살해되었다.[9]
1455년, 보라이(발래) 등 몽골 부족장들에 의해 마르코르기스는 8세의 나이로 칸으로 옹립되었고,[10] 우케크트 칸으로 명명되었다.[11]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명나라는 그를 "소왕자"라고 불렀으며,[10] 이후 중국에서 "소왕자"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칸을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12] 즉위 후 그는 실권이 없었고, 부족장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13]
마르코르기스 우케크트 칸의 재위 기간 동안 보라이는 명나라와 교류를 하고, 침입 및 약탈을 하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마르코르기스와 보라이는 적대 관계였다.[14]
2. 2. 몽골 북원의 대칸
1454년 에센 칸이 살해당하자 몽골 귀족들의 도움으로 즉위했으며, 어린 나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는 소왕자라고 불렀다.[10] 그러나 실권은 하르친의 볼라이 타이시에게 있었다. 몽골어식 존호 오헤크트는 죽음, 살해되었다는 뜻이다.즉위 직후 몽골 부족장들의 도움을 얻어 오이라트인들을 몽골 서부로 몰아냈다. 그는 실권이 없고 몽골 부족장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몽골 귀족들은 수시로 전쟁을 하였다.[13] 카라친의 볼라이 타이시와 투메드의 도골란 타이지는 수시로 분쟁했다. 1460년 볼라이 타이시는 그를 대신하여 1460년부터 1462년까지 명나라의 변경을 계속 공략, 중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성과는 없었으나 1462년 볼라이는 명나라 천순제에게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몽골 귀족들은 자주 분쟁을 벌이다가 1465년[15] 그는 몽골 귀족들의 분쟁에 휩쓸려 몽골진 아이막에서 옹니구트부의 모하라이(또는 볼라이) 혹은 곽랑 타이지(郭朗台吉)에 의해 살해되었다.[16] 투메드 7부의 수령이자 카치운의 후손 도골란 혹은 돌란(Доголон, 몽골어로 절름발이라는 뜻) 태사 등도 마르코르기스 칸 암살에 가담했다. 일설에는 그를 암살한 인물은 카치운의 후손 도골란 혹은 돌란 태사라는 설도 있다.
2. 3. 사후
결혼과 자녀 여부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이후 북원의 대칸은 옹니구트부의 모하라이 혹은 투메드의 도골론이 그의 이복 형 멀런 칸을 추대하였다.1475년 만돌 칸은 마르코르기스 오헤크트 칸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 출병하여 투메드부의 돌란 타이지를 사살하고 투메드부를 점령했다.
3. 연호
참조
[1]
서적
Societas Uralo-Altaica - Ural-Altaische Jahrbücher, Volumes 7–8
[2]
서적
明実録、明史 韃靼伝
[3]
서적
明史 韃靼伝
1973
[4]
서적
1999
[5]
서적
2004
[6]
서적
蒙古源流
2004
[7]
서적
2010
[8]
서적
2004
[9]
서적
2004
[10]
서적
1997
[11]
서적
2004
[12]
서적
1973
[13]
서적
2010
[14]
서적
1973
[15]
서적
明史 韃靼伝
[16]
서적
蒙古源流
2004
[17]
서적
蒙古源流
[18]
서적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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