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1. 개요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양손녀이자 159년 집정관 플라우티우스 퀸틸리우스의 아들이다. 그는 141년 집정관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스틀로가 프리스키누스에게 입양되었다. 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결혼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이자 콤모두스 황제의 매형이 되었으며, 177년에 콤모두스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고, 이후 콤모두스의 주요 참모 중 한 명이 되었다. 콤모두스 암살 후, 다섯 황제의 해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대한 제안을 반대했다. 20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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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
|---|---|
| 로마자 표기 | Marcus Peducaeus Plautius Quintillus |
| 출생 | 서기 70년경 |
| 사망 | 서기 138년경 |
| 가문 | 플라우티우스 씨족 |
| 집정관 | 159년 |
|---|---|
| 임페라토르 | 안토니누스 피우스 |
| 아버지 | 루키우스 티무스 |
|---|---|
| 어머니 | 플라우티아 |
| 형제자매 |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라미아 실바누스 |
| 배우자 | 케이오니아 파비아 |
| 자녀 |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집정관, 1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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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우티우스 씨족 -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라미아 실바누스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라미아 실바누스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으로 루키우스 포블리콜라 프리스쿠스와 함께 보충 집정관을 지냈으며, 루키우스 푼다니우스 라미아 아일리아누스의 아들이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
205년 사망 -
원담
원담은 후한 말 군벌 원소의 장남으로, 동생 원상과의 후계 다툼, 조조와의 동맹과 배신 끝에 조조에게 패배하여 남피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이다. -
205년 사망 -
곽도
곽도는 후한 말 원소 휘하의 모사로, 신평과 함께 원소에게 기주를 넘기는 데 기여했으나, 간사한 계략으로 원씨 가문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3세기 로마인 -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는 2~3세기 로마 제국의 법학자로, 파피니아누스의 제자로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시기에 근위대장관까지 지냈으나 살해되었으며, 그의 법학 이론은 로마법 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공법과 사법의 구분을 제시하고 "원수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라는 법 해석을 남겼다. -
3세기 로마인 -
로마의 히폴리투스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2-3세기 로마 교회의 지도자이자 신학자로, 양태론을 비판하고 로고스 교리를 옹호했으며, 윤리적 관점 차이로 대립 주교로 선출되었고,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2. 가계 및 초기 생애
플라우티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 사망한 그의 첫 양아들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자녀였다. 플라우티우스의 친아버지는 159년에 집정관을 지낸 플라우티우스 퀸틸리우스로 여겨진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141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스틀로가 프리스키누스의 후계자로 입양되었다. 친부모와 양아버지를 통해, 그는 최고위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
2.1. 가계
플라우티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첫 양아들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아들이었다. 그의 친아버지는 159년에 집정관을 지낸 플라우티우스 퀸틸리우스로 추정된다. 그는 141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스톨가 프리스키누스에게 입양되었다. 친부와 친모, 양아버지를 통해 그는 최고위 귀족 가문 출신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2.2. 초기 생애
플라우티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 사망한 그의 첫 양아들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자녀였다. 플라우티우스의 친아버지는 159년에 집정관을 지낸 플라우티우스 퀸틸리우스로 여겨진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 141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스틀로가 프리스키누스의 후계자로 입양되었다. 친부모와 양아버지를 통해, 그는 최고위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
3. 안토니누스 왕조 시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혼인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이자 콤모두스의 매형이 되었다. 177년에 콤모두스와 함께 정규 집정관직을 수행했고, 이후 콤모두스 재위 기간(180년-192년) 중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 다시 한번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아우구르 직책을 맡기도 했다.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하자 콤모두스가 황위를 계승했고, 플라우티우스는 콤모두스의 주요 조언자 중 한 명이 되었다.
3.1. 혼인 및 가족 관계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혼인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이자 콤모두스의 매형이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 퀸틸루스와 딸 플라우티아 세르빌라 두 자녀가 있었다.
3.2. 정치 활동
플라우티우스는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혼인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이자 콤모두스의 매형이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 퀸틸리우스와 딸 플라우티아 세르빌라, 이렇게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177년, 플라우티우스는 콤모두스와 함께 정규 집정관직을 수행했고, 콤모두스 재위 기간(180년-192년) 중,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 다시 한번 콤모두스와 함께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그는 또한 아우구르 직책을 맡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후, 콤모두스가 황위를 계승했고, 플라우티우스는 콤모두스의 주요 조언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4. 다섯 황제의 해와 죽음
192년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후, 로마 제국은 다섯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내전 상황에 돌입했다. 내전의 승자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격하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원로원과 베스타 신녀들을 보내 세베루스를 맞이할 것을 제안했고, 플라우티우스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플라우티우스는 이후 자신의 사유지에 있는 저택으로 은퇴하였다. 205년, 델라토르(밀고자)의 모함을 받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로부터 처형 명령을 받았다. 그는 유언을 앞두고 향을 피웠으며, "세르비아누스가 하드리아누스에게 했던 기원을 하였다"라고 했는데, 이는 세베루스가 언젠가는 죽고 싶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였다.
4.1. 다섯 황제의 해
192년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후, 로마 제국은 다섯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내전 상황에 돌입했다. 내전의 승자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격하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원로원과 베스타 신녀들을 보내 세베루스를 맞이할 것을 제안했다. 플라우티우스는 이 제안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4.2. 은퇴와 죽음
플라우티우스는 이후 자신의 사유지에 있는 저택으로 은퇴하였다. 205년, 그는 델라토르(밀고자)의 모함을 받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로부터 처형 명령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듣고 플라우티우스는 자신의 장례 수의를 찾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수의가 낡은 것을 보고 "우리 모두 낡았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자결을 준비하며, 그는 유언을 앞두고 향을 피웠다. "세르비아누스가 하드리아누스에게 했던 기원을 하였다"라고 했는데, 이 기원은 세베루스가 언젠가는 죽고 싶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였다. 그 당시에 파딜라가 여전히 살아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5. 평가
플라우티우스의 일생은 로마 제정 시대 귀족 가문이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흥망성쇠를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황제의 친인척이자 유력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적의 모함과 황제의 의심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격했을 때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베스타 신녀 탄원 제안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후 사유지에서 은퇴했으나, 205년 델라토르(밀고자)의 대상이 되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처형 명령을 받았다. 죽기 전, 그는 세베루스가 죽음을 원해도 그럴 수 없기를 바라는 세르비아누스의 기원을 언급하며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공포 정치와 권력 암투의 단면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