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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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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담은 후한 말의 군벌로, 원소의 장남이다. 청주 자사로 임명되어 세력을 키웠으나, 아버지 원소 사후 동생 원상과의 후계 다툼에서 조조와 연합했으나 배신당해 패망했다. 205년 남피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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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원담
로마자 표기Won Dam
현사
직업장군, 정치가, 군벌
사망일205년 정월 (추정)
사망 장소난피현, 허베이성
사망 원인전사
경력
청주자사알 수 없음 ~ 202년
거기장군 (자칭)202년 ~ 203년
가족 관계
아버지원소 (생부, 이후 백부의 양자로 입적)
형제원희 (이복 형제)
원상 (이복 형제)
자녀딸 1명
관련 인물
적수원상 (동생)
조조
관련 활동원상, 조조와 하북 쟁탈전을 벌이다 패망

2. 생애

원담은 아버지 원소의 명으로 백부의 양자가 되었고,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 청주로 파견되었다.[9][10] 공손찬이 청주 자사로 임명했던 전개와 청주 자사였던 공융을 공격하여 청주를 평정하고 청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원담은 뛰어난 인재 초빙을 즐겼지만, 실제로는 간신의 말만 듣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왕수와 같은 뛰어난 인물을 초빙해도 청주 통치에 혼란을 초래할 뿐이었다.[11]

200년 관도 대전에 원담도 아버지 원소를 따라 참전했다. 조조에게 대패했을 때는 아버지 원소를 따라 북쪽으로 도망쳤다. 202년 원소가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고 병사하자, 곽도신평은 원담을, 봉기심배원상을 후계자로 밀었다. 원담은 으로 돌아왔지만 원상에 반발하여 거기장군을 자칭했다. 조조가 쳐들어오자 원담은 원상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분노한 원담은 봉기를 살해했다.

203년 원담과 원상은 조조와의 전투 끝에 려양을 포기했다. 조조는 업까지 진격했지만 패퇴했고, 원담은 원상을 비난하며 조조 추격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곽도 등의 조언으로 원담은 업성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남피로 철수했다. 왕수가 형제끼리 다투지 말라고 간언했지만 원담은 듣지 않았다.

원상은 원담을 평원군으로 몰아넣었고, 원담은 곽도의 진언으로 조조에게 항복하여 그의 딸은 조정과 혼인했다. 204년 조조가 업을 포위하자 원담은 여러 지역을 공략하고 원상을 격파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조조는 원담을 맹약 위반으로 비난하고 딸을 돌려보낸 후 토벌했다. 205년 원담은 남피에서 조조에게 패하고, 조순에게 목숨을 구걸했으나 참수당했다.[13]

2. 1. 청주 자사 시절

원소나이 어린 삼남 원상을 총애해 후계자로 삼고자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임의로 청주자사를 맡겨 내보냈다.[15] 당시 원소의 청주에서의 직접적 영향력은 평원국의 일부에 그칠 뿐이었다. 원담은 우선 공손찬에 의해 청주자사로 앉아있던 전해를 북쪽으로 몰아냈다. 196년(건안 원년), 북해상(―相) 겸 후임 청주자사 공융도 격퇴하고 그 가족을 사로잡았다.[16] 바닷가까지 무력을 과시하여 백성들의 지지도 얻었다. 조조가 표를 올려 정식으로 자사가 되게 해주었다.

원담은 콧대가 높아지고 사치와 유흥에 취하였다. 명예를 사모하여 빈객을 접대하고 선비를 공경하기는 했지만 농정(農政)을 등한시했으며 화언(華彦, 華彥), 공순(孔順)과 같은 아첨하는 소인배들을 신임해 곁에 두었다. 왕수 등은 그저 관직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처남은 군대를 거느리고 안쪽에 있어 도적들이 바깥의 과 들을 노략하였다. 다른 부하에게는 모병을 시켰는데 뇌물을 받으면 면해주고, 없으면 징용하여 가난하고 약한 자들만 많았다. 이를 피해 숨으면 장병을 동원해 짐승을 잡아들이는 것처럼 험하게 색출하였다. 읍(邑)에 일만 호가 있어도 호적에 등록된 것은 수백 호를 넘지 않았고 세금 수입도 3분의 1이 되지 않았다. 인재들은 초빙해도 응해오지 않았다.[17]

199년, 이전에 황제를 칭했었던 원술이 그 처지가 궁핍해져 청주를 통해 원소한테 가려 했다. 원담이 사람을 보내 맞이하려 했으나 조조가 유비주령을 출격시켜 차단하는 바람에 원술은 오지 못하였다.[18]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죽여 서주를 차지하고 원소와 통하였다.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토벌당하여 청주로 피신해왔다. 전에 유비로부터 무재(茂才)로 천거받았었던 원담이 유비를 맞아들이고 원소에게 갈 수 있게 해주었다.[19] 원소가 관도(官渡)에서 조조와 대전을 벌일 때 원담도 참전하였다. 원소군이 참패하여 원소와 같이 퇴각하였다.

2. 2. 원상과의 후계 다툼

202년 5월(음력),[20] 아버지 원소가 병사하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심배봉기원상을, 신평곽도는 원담을 밀었다. 여론은 맏아들이라는 이유에서 원담을 지지하였다. 평소 원담과 사이가 나빴던 심배와 봉기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 원소의 본래 뜻이라 핑계 대며 원상을 추대하였다. 원담은 불만을 품고 멋대로 거기장군을 자칭하고는 위군 여양현(黎陽縣)에 주둔하였다. 원상은 원담에게 적은 병력만을 쥐어주면서 봉기를 파견하였다. 원담은 증원을 청했으나 심배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를 죽였다.

202년 9월, 조조황하를 건너 북상해오자 원상은 원담에게 다급함을 알렸다. 원상은 원담이 원군 병력을 가로챌까 우려하여 본거지인 업현은 심배에게 맡겨두고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203년 2월까지 근교에서 대판 싸운 끝에 으로 패퇴하였다. 203년 3월의 어느 날 , 포위당한 성에서 업성으로 탈주하였다. 203년 4월, 조조가 업까지 진격해왔다. 203년 5월, 조조를 막아내는 데에 성공하여 조조가 철군하였다.[18]

원담은 원상에게 “내 갑옷이 보잘것없어 조조한테 졌었다. 패주하는 조조군이 채 도하하기 전에 엄습한다면 궤멸시킬 수 있다”고 헌책했으나 거부당했으며 병사는커녕 갑옷도 받지 못했다. 원담은 대노하였고 곽도와 신평은 원소 생전에 원담이 백부의 대를 잇게 된 것도 심배의 모략이었다고 진술하였다. 원담은 업성을 공격했다가 패하여 발해군 남피현으로 도주하였다. 별가(別駕) 왕수가 원담을 보필하러 관민들을 데리고 청주로부터 달려왔다. 반면에 유순(劉詢)은 평원국 탑음현(漯陰縣, 濕陰縣)에서 반기를 들었고 많은 성들이 호응할 정도로 청주가 흔들렸다. 동래태수 관통이 처자식을 포기하고 빠져나왔으므로 낙안태수(樂安太守)로 삼았다.[21]

원담은 여전히 원상을 치려 하였다. 왕수는 “형제란 양과 같습니다. 오른손을 자르고 싸움에 임하면서 이길 것이라 자신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형제도 저버리는 이를 천하의 그 누가 친밀히 대하겠습니까? 하루아침의 이득을 갈망하여 형제를 싸우도록 이간하는 자들의 를 막고 듣지 마소서. 간신들을 참하고 다시 친목한다면 천하도 횡행할 수 있습니다.”라며 간하였으나 원담은 듣지 않았다.

2. 3. 조조와의 연합과 배신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었으나, 원소는 막내 원상을 총애하여 원담을 형의 양자로 보내고 청주자사로 임명했다.[14][15] 196년, 원담은 공융을 격파하고 청주를 장악했다.[16]

199년, 원술이 청주를 통해 원소에게 가려 했으나, 조조가 보낸 유비주령에게 저지당했다.[18]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청주로 오자, 원담은 유비를 원소에게 보냈다.[19] 관도 대전에서 원소군이 패배한 후, 원상은 원담을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원담은 곽도의 제안으로 조조에게 원상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22] 조조는 요청을 받아들여 북진했고, 원상은 평원에서 철수했다. 원상의 장수 여광여상은 조조에게 항복했다.[18] 원담은 이들에게 장군인을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여광이 이를 조조에게 보고했다.[23] 조조는 원담의 딸과 자신의 아들 조정을 결혼시켜 안심시킨 후 귀환했다.

곽가는 원씨 형제들이 외부의 적이 없으면 서로 싸울 것이라고 조언했고, 실제로 원담과 원상은 싸움을 벌였다. 원담은 조조와 동맹을 맺었지만, 조조는 원담을 이용하여 원상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6]

202년 원소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자, 곽도신평은 원담을, 봉기심배는 원상을 지지했다. 원담은 으로 돌아왔지만 원상에 반발하여 거기장군을 자칭했다. 조조가 쳐들어오자 원담은 원상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분노한 원담은 봉기를 살해했다.

203년 원담과 원상은 조조와의 전투 끝에 려양을 포기했다. 조조는 업까지 진격했지만 패퇴했고, 원담은 원상을 비난하며 조조 추격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곽도 등의 조언으로 원담은 업성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남피로 철수했다. 왕수가 형제끼리 다투지 말라고 간언했지만 원담은 듣지 않았다.

원담은 원상에게 몰려 평원군으로 쫓겨나자 조조에게 항복하고, 그의 딸은 조정과 혼인했다. 204년 조조가 업을 포위하자 원담은 여러 지역을 공략하고 원상을 격파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조조는 원담을 맹약 위반으로 비난하고 딸을 돌려보낸 후 토벌했다. 205년, 원담은 남피에서 조조에게 패배하고, 조순에게 목숨을 구걸했으나 참수당했다.[13]

2. 4. 최후

204년 3월, 원상평원으로 출진하면서 업에는 심배를 남겼다. 심배는 편지로 그간의 사정을 변명하고 모든 문제의 원흉을 곽도로 지목하며 그를 베라고 하였다. 원담은 눈물을 흘렸지만 곽도의 강권과 그간 흘린 가 너무나 많아 돌이킬 수 없었다.[24] 그 사이 조조는 업에서 공성전을 벌였다. 7월,[18] 업의 전황이 심각해져 원상이 철수하였다. 원담은 감릉국(舊 청하국), 안평군, 발해군, 하간국을 정복하였다. 원상은 조조에게 완파되어 중산군으로 도망쳤고, 원담이 이마저 분쇄하여 원상을 기주에서 완전히 내쫓고 그 잔병을 거두어들였다. 원상은 유주자사인 형 원희에게 의지하고자 탁군 고안현(故安縣)으로 도피했다.

조조는 원담의 딸을 돌려보내고 진군해왔다.[18] 원담은 용주(龍湊)에서 맞섰다가 섣달, 남피로 물러나 청하를 끼고 항전하였다. 205년 정월, 완패하여 말을 몰아 달아났지만 조순호표기가 추격해와 뿌리치지 못하고 낙마하였다. 달려온 기병에게 자신을 풀어준다면 부귀를 주겠다고 제안하려는데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가 잘려 에 떨어졌다.[25] 남은 처자도 주륙당했으며 원담의 시체는 왕수가 조조의 허락을 받고 수습해 장사지냈다.[18]

204년, 원상은 다시 원담을 공격했으나 조조가 업을 포위했기 때문에 원담은 위기를 벗어났다. 조조가 업을 포위하는 동안 원담은 감릉(현재의 칭허 현, 허베이 성), 안핑 현, 발해군 (현재 창저우 부근), 허젠을 공략했다. 게다가 업을 포기하고 중산군으로 도주한 원상을 격파하고, 원상이 거느리던 군병을 병합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조조는 원담의 맹약 위반을 비난하고, 원담의 딸을 돌려보내면서 인척 관계를 해소한 후 그를 토벌했다. 원담은 평원에서 도주하여 남피로 달아났다.

205년, 원담은 남피에서 조조를 격파했지만, 재전에서 패했다. 원담은 말을 달려 도주했지만 낙마했고, 추격해 온 조순에게 "나는 너를 부귀하게 해줄 수 있다"고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원담의 일족도 몰살되었고, 원담의 수급은 옥문에 걸렸다. 왕수는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옥문 아래에서 통곡하며, 조조에게 원담의 유해 매장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13]

3. 평가

원담은 뛰어난 인재를 초빙하는 것을 즐겼지만, 실제로는 간신의 말만 듣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왕수와 같은 뛰어난 인물을 초빙해도 거의 의미가 없었고, 청주 통치에서도 혼란을 초래할 뿐이었다.[11] 청주는 매우 황폐하여, 만 호가 있는 도시도 호적에 등록된 것은 수백 호 정도였고, 조세 납부는 3분의 1 이하였다.[11] 한편, 빈객들을 잘 대우하고 명사들을 존중하기도 했다. 동래군에서는 태산, 동해와 접해 있었기 때문에 황건적이 평정되지 않고 호족 다수가 반역했으나, 원담은 그들에게 관직을 보내 회유했다.

후계자 다툼에 관해서, 원담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간부급에서는 지지자는 곽도, 신평 등 영천 출신자뿐이었다. 반대로 기주 출신은 심배, 저수(원소 사망 당시에는 이미 사망)였으며, 심배는 물론 저수의 아들 저각도 원상에게 종사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원담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원담은 원소의 장자이자 청주자사로 나온다. 서주를 잃고 청주로 도주해 온 유비를 영접하면서 처음 등장한다. 창정 전투여양 전투에 참전했는데, 원상에게 후계 자리를 뺏겨 서로 반목한다. 조조와의 첫 전투에서 가공의 부하 왕소(汪昭)가 서황에게 목숨을 잃고, 그로 인해 전투에서 패배하여 여양성으로 후퇴한다. 원상은 겨우 5,000명만 원군으로 보냈는데, 그마저도 악진이전에게 전멸당한다. 원담은 진영에 있던 봉기를 닦달하여 편지를 쓰게 했지만, 원상이 지원을 거절하자 봉기를 죽이고 조조에게 항복하려 한다. 그제서야 원상이 직접 도우러 온다. 이후의 전개는 큰 틀에서 정사와 비슷하게 진행된다. 중간에 가공의 부하 잠벽(岑璧)이 원상의 장수 여광과의 대결에서 쓰러지기도 한다. 조조와는 사돈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비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변경되었다. 남피 전투에서 가공의 부하 팽안(彭安)이 서황과 교전하여 쓰러지는 등 상황이 좋지 않자 신평을 보내 항복 의사를 밝힌다. 교섭에 실패하고 돌아온 신평을 의심한 탓에 신평이 분사한다. 원담은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지만 조홍에게 최후를 맞는다.[1]

삼국지연의 제33화에서 원담은 남피에서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청하기 위해 신평을 조조에게 사신으로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신평이 돌아오자 원담은 그의 형 신비가 조조의 진영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그를 반역죄로 고발했다. 부당한 비난에 신평은 격분하여 곧 죽었고, 원담은 크게 후회했다.[1]

다음 날 아침, 원담은 밤사이에 급하게 무장한 백성들을 군대 앞에 배치하고 조조와 성 밖에서 전투를 벌였다. 원담은 결국 전투에서 조홍에게 죽임을 당했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항복하러 간 사자 신평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몰아세워 분사하게 하는 등 무능한 장수로 묘사된다. 남피 전투에서는 조홍에게 토벌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1]

5. 가계

관계이름
친부원소
친형제원희, 원상, 원매



원담의 가계도

6. 섬긴 사람들

이름비고
곽도
관통
공순(孔順)
신비
신평
엄경(嚴敬)원상 쪽인지, 원담 쪽인지 불확실
왕수
유순(劉詢)
유헌(劉獻)
이부
화언(華彥, 華彦)


참조

[1] 기타
[2]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6
[3] 기타
[4] 문서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5] 기타
[6] 문서 Records of Three Kingdoms
[7] 기타
[8] 기타
[9] 문서 後漢書
[10] 문서 魏書
[11] 문서 九州春秋
[12] 문서 蜀書
[13] 문서 後漢書
[14] 기타
[15] 문서 《후한서》74권上 열전 제64上 원소
[16] 문서 《후한서》70권 열전 제60 공융
[17] 문서 《구주춘추》
[18] 문서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19] 문서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20] 문서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21] 문서 《삼국지》11권 위서 제11 왕수
[22] 문서 《영웅기》
[23] 문서 《위서》
[24] 문서 《전략》
[25] 문서 《삼국지》9권 위서 제9 조인 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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