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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람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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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타람 술탄국은 16세기 말 자바 섬에 건국되어 18세기 중반 분열된 이슬람 왕국이다. 키아이 그데 파마나한이 파장의 통치권을 받아 건국되었으며, 수타위자야(세노파티) 시대에 파장을 병합하고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술탄 아궁 시대에는 자바 섬 대부분을 통일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갈등과 왕위 계승 분쟁으로 쇠퇴했다. 결국 여러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며 요크야카르타 술탄국과 수라카르타로 분열되었고, 이후 망쿠느고로와 파쿠알라만으로 분열되며 멸망했다. 마타람은 힌두-불교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자바 문화와 현대 인도네시아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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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람 술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마타람 술탄국
현지 명칭ꦤꦒꦫꦶꦩꦠꦫꦩ꧀ (나가리 마타람) - 자바어
نَاڮَارِي كَسُلْطَانَن مَاتَارَام (나가리 카술타난 마타람) - 페곤 문자
종교수니 이슬람 (혼합주의)
마타람 술탄국 국기
국기
역사
건국1586년
멸망1755년 2월 13일
주요 사건건국: 즉위
멸망: 기얀티 조약
이전 국가파장 왕국
계승 국가수라카르타 수난국
족자카르타 술탄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토
술탄 아궁 통치 기간 동안 마타람 술탄국의 최대 영토
술탄 아궁 통치 기간 동안 마타람 술탄국의 최대 영토 (1613년–1645년)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국왕 칭호수수후난 / 술탄
주요 지도자초대: 세노파티 (1586년–1601년)
말대: 파쿠부워노 2세 (1743년–1749년)
수도코타 게데 (1586년–1613년)
카르타 (1613년–1645년)
플레레드 (1646년–1680년)
카르토수로 (1680년–1755년)
언어 및 통화
공용어자바어
통화불명
현재
현재 국가인도네시아

2. 역사

마타람 술탄국의 역사를 밝히는 주요 자료는 바바드(Babad)라 불리는 자바 지역의 역사 기록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네덜란드 기록이다. 전통적인 자바 바바드는 연대가 불분명하고 모호하며, 비역사적이고 신화적이며 환상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자바 역사 기록은 통치자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바바드 타나 자위(Babad Tanah Jawi)에서는 수타위자야(파넨바한 세나파티)와 자바의 남해(인도양)의 지배자인 신화적인 라투 키둘(Ratu Kidul) 사이의 신성한 유대감을 주장한다.

술탄 아궁 통치 기간 동안 바타비아 공방전 이전의 사건에 대한 연대는 결정하기 어렵다. 여러 연대기에는 자바력(A.J., Anno Javanicus)으로 사건과 연대표가 나와 있지만, 자바 자료들 자체 간의 일치도 완벽하지 않다. 자바 자료들은 사건에 연대를 부여하는 데 매우 선택적이다. 크라톤(궁궐)의 흥망, 중요한 왕자의 죽음, 큰 전쟁 등의 사건만이 연대를 기록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되어, 찬드라생칼라(candrasengkala)라는 시적인 공식(연대기)을 사용하여 연대를 기록한다. 나머지는 단순히 날짜 없이 서술적으로 연속해서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찬드라생칼라가 항상 연대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바타비아 공방전(1628~1629년) 이후부터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04년)까지는 외국인이 참여한 사건의 연도를 확실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바 버전의 이야기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1704년~1755년 기간의 사건은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마타람의 일에 깊이 개입했기 때문에 더 큰 확실성으로 연대를 정할 수 있지만, 크라톤 내부의 사건은 일반적으로 정확한 연대를 정하기 어렵다.

마타람 술탄국은 섬나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생산지였던 자와 섬 중부의 비옥한 농업 지역을 지배하고, 그 수출항으로 자와 섬 북부의 항구 도시 국가들을 영향 아래에 두어 17세기에 자와 섬 중부와 동부에서 강성을 자랑했다. 바타비아, 반텐 왕국을 제외한 자와 서부도 강력한 영향 아래에 두었지만,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개입으로 1755년 족자카르타와 술탄국 수라카르타의 두 왕국으로 분할되면서 마타람 술탄국이라는 국호는 사라졌다.

2. 1. 건국과 초기 발전 (16세기 말 ~ 17세기 초)

키아이 구데 파마나한은 술탄 하디위자야의 명을 받아 족자카르타(Yogyakarta) 지역 마타람에 세력을 확장했다.[3] 그의 아들 수타위자야(Sutawijaya)(세노파티)는 1584년경 아버지를 계승하여 마타람을 파장(Pajang)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노파티는 파장을 병합하여, 수출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파넨바한 세다 크라프야크는 세노파티의 아들로 동자바의 수라바야를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코타 게데(Kota Gede), 1582년 수타위자야(Sutawijaya)(파넨바한 세나파티)가 건설한 마타람 술탄국의 옛 수도.


초기 마타람 술탄국의 역사는 역사 기록과 신화의 경계가 모호하며, 특히 후대 통치자들이 조상을 만들어내면서 합법적인 계보를 확립하려는 시도의 흔적이 보인다.[3]

2. 2. 술탄 아궁 시대의 전성기 (17세기 전반)

판엠바한 인 알라가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야심 찬 지도자였으며, 자바 섬을 마타람의 깃발 아래 통일하기를 열망했다.[5] 그는 1613년부터 1646년까지의 장기 집권 기간 동안 광범위한 군사 정복으로 마타람의 엄청난 확장과 지속적인 역사적 유산에 책임이 있었다.[6] 그의 통치 하에 있던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에 대한 마타람의 지배의 절정이자 다음 세기 유럽 식민화 이전의 토착 자바 세력의 황금기로 널리 기억된다.

술탄 아궁 치하에서 마타람은 자바 북부의 여러 항구 도시들을 점령한 후 자바 섬 대부분을 영토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1] 1625년, 수라바야와 마두라 섬을 지배하게 되면서 자바 섬 중동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19]

1628년 마타람 술탄 아궁에 의한 바타비아 공방전


자와 서부에서는 반텐과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식민지가 아궁의 지배 밖에 남아 있었다. 아궁은 자바 통일을 위해 마타람을 역사적으로 반텐을 속국으로 두었던 드막의 계승 국가로 주장했다. 그러나 반텐 술탄국은 독립 국가로 남기를 선호하며 아궁의 주장에 반대했다. 아궁은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지배를 마타람 패권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텐으로 가는 길에 바타비아를 공격하려 했다.[2]

1628년, 아궁과 그의 군대는 바타비아 공방전을 시작했다.[1] 초기 작전은 아궁의 군대에 대한 물류 지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아궁은 자바 서부 해안 북쪽에 농업 정착지를 건설하여 마타람 군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선박과 스파이에 의해 발각되면서 자바 선박과 곡창의 작전은 결국 중단되거나 불타 없어졌다.[2] 그 결과, 많은 수의 마타람 군대가 기아에 시달렸고, 아궁의 바타비아 침공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1625년까지 마타람은 자바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이 시기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문화 발전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2. 3. 쇠퇴와 분열 (17세기 후반 ~ 18세기 중반)

술탄 아궁 사후, 그의 아들 아망쿠라트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으나, 지방 세력과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9] 그는 수라바야의 귀족과 자신의 장인, 치레본 왕 등을 살해하고 항구를 폐쇄하여 해안 도시의 성장을 막았다.[9] 이는 자바 해안 경제를 황폐화시켰고, 마타람을 농업 중심의 내륙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5,000~6,000명의 울라마(이슬람 성직자)와 그 가족들을 학살하기도 했다.[10]

1670년대 중반, 왕에 대한 불만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왕세자(미래의 아망쿠라트 2세)는 아버지의 첩을 취한 후, 아버지에게 위협을 느껴 라덴 트루나자야에게 반란 자금을 지원했다. 트루나자야의 반란은 1677년 마타람의 수도 플레레드를 함락시켰다.[2] 왕은 도망쳤고, 그의 차남 팡에란 푸거는 플레레드에서 왕위에 올랐다.

아망쿠라트 2세 (오른쪽 위)가 운퉁 수라파티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탁(Tack) 선장과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아망쿠라트 1세는 네덜란드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던 중 사망했고, 아망쿠라트 2세가 왕이 되었다.[2]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에 세마랑(Semarang) 항구를 주겠다고 약속하며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2] 네덜란드는 마타람을 지원하여 1678년 트루나자야를 격퇴했고, 1681년에는 푸거가 아망쿠라트 2세에게 왕위를 양보하도록 했다. 네덜란드의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마타람은 세마랑 외에 보고르(Bogor), 카라왕(Karawang), 프리아항(Priangan)을 네덜란드에 넘겨주었다.[2] 치레본 또한 네덜란드의 보호령이 되었다. 아망쿠라트 2세는 수도를 카르타수라(Kartasura)로 옮겼고, 네덜란드는 카르타수라에 요새를 세웠다.[2]

아망쿠라트 2세는 네덜란드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여러 음모를 꾸몄다. 1685년, 바타비아는 탁(Tack) 선장을 파견하여 운퉁 수라파티를 체포하려 했으나, 탁은 아망쿠라트 2세의 계략으로 살해당했다.

아망쿠라트 2세가 1703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망쿠라트 3세가 즉위했다.[2]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의 삼촌 팡에란 푸거를 지지했고,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팡에란 푸거는 파쿠부와나 1세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1704년 즉위했다. 1705년, 파쿠부와나 1세는 카르타수라를 점령했고, 아망쿠라트 3세는 1708년 항복 후 실론으로 유배되었다.

파쿠부와나 1세는 네덜란드와 협정을 맺어 마타람의 많은 이권을 넘겨주었다. 1719년 파쿠부와나 1세가 죽고 아망쿠라트 4세가 즉위했으나,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1723년, 반란군 지도자들은 항복하거나 유배되었다.

파쿠부워노 2세는 1746년 수도를 수라카르타(솔로)로 옮겼다. 그러나 그의 왕위는 안전하지 않았고, 1749년 망쿠붐미의 반란이 일어났다. 파쿠부와나 2세는 174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에 마타람의 "주권"을 넘기는 계약에 서명했다.

1755년, 기얀티 협정에 따라 마타람 왕국은 요크야카르타 술탄국(망쿠붐미 통치)과 수라카르타(파쿠부워노 3세 통치)으로 분할되었다.[2] 1757년에는 팡에랑 아리아 아디파티 망쿠네가라가 솔로에서 독립하여 망쿠네가란 왕족을 세웠다.

3. 정치

세나파티는 '파넨바한(숭배받는 자)'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왕권을 확립하고, 솔로 강을 따라 동쪽으로 원정을 떠났다. 1586년 수라바야가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하지 못했고, 대신 1590~1591년에 마디운을 정복했다. 이후 케디리와 포노로고를 정복하고, 지팡(현재의 보요네고로)과 자가라가(현재의 마게탄 북쪽)도 점령했다.[4] 파수루안까지 동쪽으로 진출했으며, 1595년에는 서부 자바의 치레본과 갈루를 복속시켰다.[2] 1597년 반텐 정복은 실패했고, 이후 드막과 파티의 반란을 진압했다.[2] 1601년 세나파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스 졸랑(Mas Jolang)이 왕위를 이었다.[2]

마스 졸랑, 즉 파넨바한 아뇨크로와티는 동부 자바의 강국 수라바야와 전쟁을 벌였다. 새로 정복한 드막(1601~1604년), 포노로고(1607~1608년), 케디리(1608년)에서 친척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1612년 수라바야가 다시 반기를 들자, 모조케르토를 정복하고 그레식을 파괴하며 수라바야 주변 마을들을 불태웠지만, 수라바야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다.[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와 마타람의 최초 접촉은 아뇨크로와티 시대에 이루어졌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안 무역에 주력했기에 내륙 왕국과의 교류는 제한적이었지만, 1613년 수라바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아뇨크로와티는 1613년 사냥 중 사망했다.[2]

카르타수라 함락 후, 파쿠부와나 2세는 1746년 수라카르타(솔로)에 새 크라톤을 건설했다. 그러나 라덴 마스 사이드를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파쿠부와나 2세는 반란 진압에 대한 대가로 3000 가구를 약속했고, 그의 동생 망쿠붐미가 1746년 마스 사이드를 격퇴했다. 그러나 VOC 총독 반 임호프는 망쿠붐미를 "너무 야심만만하다"고 비난하며 갈등을 유발했고, 결국 망쿠붐미는 1746년 5월 마스 사이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2]

1749년 망쿠붐미의 반란 중 파쿠부와나 2세는 VOC에 마타람의 "주권"을 넘기는 계약에 서명했다. 1749년 12월, VOC는 파쿠부와나 2세의 아들을 파쿠부와나 3세로 즉위시켰지만, 망쿠붐미도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며 반란은 더욱 거세졌다. 1753년에는 수라카르타 왕세자까지 반군에 합류했다.

1754년, 전쟁에 지친 양측은 협상을 시작했고, 1755년 기얀티 조약을 통해 마타람 왕국은 요크야카르타 술탄국(망쿠붐미 통치)과 수라카르타(파쿠부와나 통치)로 분할되었다.[2] 그러나 마스 사이드는 여전히 강력했고, 1756년 요크야카르타를 거의 점령할 뻔했다. 1757년 2월, 그는 파쿠부와나 3세에게 항복하고 팡에랑 아리아 아디파티 망쿠네가라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로써 정치적 투쟁은 궁궐 내로 제한되었고, 1812년까지 평화가 유지되었다.

3. 1. 중앙 집권화와 한계

세나파티(Senapati)는 "파넨바한(Panembahan, 숭배받는 자)"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왕권을 확립했다.[2] 그의 후계자 마스 졸랑(Mas Jolang)은 더욱 심한 반란에 직면했다.[2] 세나파티의 아들인 파넨바한 아뇨크로와티(Panembahan Anyokrowati, 약 1601~1613년)는 동부 자바의 주요 강국이었던 수라바야와의 전쟁과 새로 정복한 지역의 친척들의 반란에 직면했다.[2]

술탄 아궁 통치하의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에 대한 마타람 지배의 절정이자, 유럽 식민화 이전 토착 자바 세력의 황금기로 널리 기억된다. 1630년, 마타람은 클라텐 남동쪽 템바야트(Tembayat)의 반란을 진압했고, 1631년부터 1636년까지 서자바의 수메당(Sumedang)과 우쿠르(Ukur)의 반란을 억압했다.[7]

아궁의 아들 수수후난 아망쿠라트 1세는 즉위 후, 마타람 왕국의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 복종하지 않는 지역 지도자들을 살해하려 했다.[9] 그는 항구를 폐쇄하고 자바 해안 도시의 배들을 파괴하여 부를 통해 그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이는 자바 해안 경제를 황폐화시켰고, 싱하사리와 마자파힛 시대 이후 발전해 온 자바의 해양 실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 때문에 마타람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내륙 왕국이 되었다.[9] 그는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5,000~6,000명의 율마(ulema)와 그들의 가족을 학살하기까지 했다.[10]

1670년대 중반, 왕에 대한 불만은 공개적인 반란으로 바뀌었고, 동자바에서 시작하여 내륙으로 파고들었다. 라덴 트루나자야는 마카사르 출신 유랑 전사들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2] 트루나자야의 반란은 1677년 중반 마타람 플레레드에서 왕궁을 점령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1703년, 암앙쿠라트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암앙쿠라트 3세가 잠시 뒤를 이었다.[2] 그러나 네덜란드가 그의 삼촌인 팡에란 푸거를 지지하면서,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팡에란 푸거는 1704년 6월 파쿠부와나 1세라는 칭호로 즉위했다.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은 파쿠부와나 1세와 암앙쿠라트 3세 사이의 갈등은 5년 동안 지속되었다.[2]

1719년 파쿠부와나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암앙쿠라트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형제들이 왕위 계승을 다투면서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1723년 이후 상황은 안정되는 듯 보였으나, 1726년 아망쿠라트 4세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파쿠부와나 2세로 즉위했다.

자바 전쟁 (1741~1743) 이후, 파쿠부와나 2세는 수라카르타로 추방되었다. 1749년 파쿠부와나 2세가 사망하자 파쿠부와나 3세가 즉위했으나, 파쿠부와나 2세의 동생이 반대하여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파쿠부와나 3세를 지원했으나, 1755년 전비 증가로 중도에 지원을 포기했다. 그 결과, 1755년 기얀티 조약에 따라 마타람 왕국은 요크야카르타 술탄국과 수라카르타로 분할되었다.[2]

3.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관계

마타람 술탄국은 초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제한적인 교역 관계를 맺었다. 수수후난 아뇨크로와티 시대(약 1601~1613년)에 최초의 접촉이 있었는데, 당시 네덜란드의 활동은 해안 정착지에서의 무역에 국한되어 내륙 왕국과의 상호 작용은 제한적이었다.[2] 그러나 1613년 네덜란드와 수라바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도 했다.[2]

술탄 아궁 시대(1613~1646년)에는 바타비아 공방전을 일으키는 등 네덜란드와 적대적인 관계를 보였다.[1] 반텐 술탄국과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식민지는 아궁의 지배 밖에 있었는데, 아궁은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지배를 마타람 패권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2] 1628년, 아궁은 바타비아 공방전을 시작했으나,[1] 물류 지원 부족과 네덜란드의 방해로 인해 실패했다.[2]

쇠퇴기에는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유지했으나, 그 대가로 많은 영토와 이권을 상실했다. 암왕쿠라트 2세는 왕국을 되찾기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상당한 양보를 했고, 네덜란드는 그를 복위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2] 그는 네덜란드에 군대를 빌려준다면 세마랑 항구 도시를 주겠다고 약속했다.[2] 네덜란드는 마타람을 지원하여 왕위 탈환을 도왔고, 그 대가로 세마랑 외에 보고르, 카라왕, 프리아항을 할양받았다.[2] 치레본 술탄국 또한 마타람에서 네덜란드로 충성을 바꾸도록 강요받아 네덜란드의 보호령이 되었다.[2]

암왕쿠라트 2세는 네덜란드의 지배력 증가에 불만을 품고 여러 음모를 꾸몄으나, 재정적 부채와 군사력 위협 앞에서 무력했다.[2] 이후에도 네덜란드는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을 왕위에 앉히고, 더 많은 영토와 이권을 얻어냈다.

결국 네덜란드의 개입으로 인해 마타람 술탄국은 분열되고, 사실상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기얀티 조약으로 마타람 왕국은 요크야카르타 술탄국과 수라카르타로 분할되었다.[2] 1757년에는 수라카르타에서 망쿠네가란이 분리 독립하는 등, 마타람 왕국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으로 쪼개졌다.

4. 문화

세림피 춤. 오늘날 궁궐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자바 궁정 예술 양식과 춤의 많은 부분이 마타람 시대에 발전했다.


마타람 술탄국은 이슬람 왕국이었지만, 힌두-불교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이슬람 문화와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술탄 아궁 통치 시기에 이러한 융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슬람과 자바 관습을 결합한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기도 했다.[1]

마타람의 자바 궁정 의식, 문화, 의례는 힌두-불교 요소를 유지했으며, 가믈란, 바틱, 크리스, 와양 쿨릿, 자바 춤과 같은 자바 문화적 요소가 이 시기에 형성되고 체계화되었다. 이러한 문화 유산은 수라카르타와 욕야카르타 궁정, 망쿠네가란과 파쿠알라만 공국으로 이어졌다.

4. 1. 힌두-불교와 이슬람의 융합



마타람 술탄국은 이슬람 왕국이었지만, 힌두-불교 전통을 완전히 배척하지 않고 이슬람 문화와 융합했습니다. 정치 제도는 이전 자바 힌두 문명과 이슬람 요소가 융합된 혼합주의에 가까웠습니다. 술탄 아궁 통치 기간에 이슬람을 힌두-자바 전통에 맞춰 조정하고, 1633년 이슬람과 자바 관습을 기반으로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는 등 문화 융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1] 아궁 술탄 통치 시대의 예술은 이슬람과 힌두-자바 요소가 혼합된 것이었습니다.[1] 주류 신앙 체계는 케자웬 전통이었고, 이슬람 신앙은 궁궐 모스크 근처 카우만(Kauman) 지역에 모여 있는 소수의 키야이(kiyai) 또는 율마 종교 엘리트가 믿었습니다. 마타람의 자바 궁정 의식, 문화, 의례는 여전히 힌두-불교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믈란, 바틱, 크리스, 와양 쿨릿, 자바 춤과 같은 자바 문화적 요소는 이 기간 동안 형성, 체계화되어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수라카르타와 욕야카르타 궁정, 망쿠네가란과 파쿠알라만 공국에 계승되었습니다.

자바에서 이슬람은 원래 자바 문화에 적응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적응은 자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고, 이슬람의 토착화는 자연스럽고 자바 공동체 자체의 문화적 과정을 통해 빠르게 발전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12]

4. 2. 예술과 문화의 발전



이슬람 술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타람은 이슬람 문화, 제도, 기관을 완전히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치 제도는 이전 자바 힌두 문명과 이슬람 요소가 융합된 혼합주의에 가까웠습니다. 주요 형성은 술탄 아궁의 통치 기간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슬람을 힌두-자바 전통에 맞춰 조정하고 1633년 이슬람과 자바 관습을 기반으로 새로운 달력을 도입했습니다.[1] 아궁 술탄의 통치 시대 예술은 이슬람과 힌두-자바 요소가 혼합된 것이었습니다.[1] 주류 신앙 체계는 케자웬 전통이었고, 이슬람 신앙은 궁궐 모스크 근처 카우만(Kauman) 지역에 모여 있는 소수의 키야이(kiyai) 또는 율마 종교 엘리트가 믿었습니다. 마타람의 자바 궁정 의식, 문화, 의례는 여전히 힌두-불교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믈란, 바틱, 크리스, 와양 쿨릿, 자바 춤과 같은 자바 문화적 요소는 이 기간 동안 형성되고, 체계화되고, 현재의 형태를 취했으며, 수라카르타와 욕야카르타의 궁정, 그리고 망쿠네가란과 파쿠알라만의 공국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자바에서 이슬람은 원래 자바 문화에 적응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적응은 자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슬람의 토착화는 자연스럽고 자바 공동체 자체의 문화적 과정을 통해 자바에서 이슬람이 빠르게 발전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12]

4. 3. 자바인의 왕권

자바의 왕권은 서구의 왕권과 다르다. 서구의 왕권은 국민으로부터의 정통성(민주주의) 또는 신으로부터의 정통성(신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자바어에는 이러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다. 자바 왕국의 개념은 중심 위치와 중심 존재라는 의미에서 세계의 중심인 만달라로, 왕(스리 부파티(Sri Bupati), 스리 나렌드라(Sri Narendra), 상 아지(Sang Aji), 프라부(Prabu) 등으로 불림)의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왕은 반신적인 존재, 신성과 인간적인 측면의 결합(''binathara'', "bathara"(신)의 수동태)으로 여겨진다. 자바의 왕권은 특정 영토나 인구가 아니라 왕실의 신성한 존재의 문제이다. 반신적인 왕들의 계승에 있는 왕국의 정체성을 방해하지 않고 사람들은 오고 갈 수 있다. 왕권을 포함한 권력은 두쿤이나 샤먼의 힘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훨씬 강력하다. 자바의 왕권은 단일 개인의 정통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누구든 타파 또는 금욕을 통해 권력에 도전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마타람의 왕들에게 도전했다.

5. 유산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현대 인도네시아 정치에도 여러 영향을 미쳤다.

마타람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지배 이전 자바 섬의 마지막 주요 토착 정치체였으며, 수라카르타와 욕야카르타의 궁정, 그리고 망쿠네가란과 파쿠알라만 공국으로 분열되기 전의 정치체였다.[13] 특히 욕야카르타와 수라카르타 출신 중부 자바인들에게 마타람 술탄국, 특히 술탄 아궁 시대는 마자파힛 이후 지역 패권국이자 자바 섬을 거의 통일하고 네덜란드를 몰아낼 뻔했던 영광스러운 과거로 기억된다. 그러나 동자바의 수라바야인, 마두라인, 블람반간인, 그리고 서자바의 프리안간과 치레본 사람들에게는 마타람 시대가 중부 자바인의 지배 시대로, 봉건적 자바 정권의 권위주의와 독단성으로 특징지어진다.[13] 이는 마두라와 중부 자바 간의 적대감을 심화시켰고, 프리안간과 마타람의 대립을 야기했다.[13]

마타람 술탄국은 여러 경쟁하는 ''크라톤''으로 분열되었고, 이는 수라카르타-욕야카르타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마타람의 역사 마지막 시기의 잦은 왕위 계승 전쟁, 반역, 봉기, 궁정 음모는 마타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우아함, 세련됨, 미묘함, 예의, 정중함, 간접성, 감정 억제, 사회적 지위 의식과 같은 자바인의 행동과 결합된 마타람의 정치는 매우 복잡하고 기만적이었다. 그 결과, 불성실, 기만, 배신, 사회 계층 경직성, 권위주의, 독단성과 같은 현대 인도네시아 정치의 자바화의 부정적인 측면은 지위 과시와 오만함에 대한 애정과 함께 '마타람화'라고 불리기도 한다.[14]

1755년 기얀티 조약으로 마타람 술탄국은 욕야카르타와 수라카르타로 분할되었고, 이후 망쿠네가란 공국과 파쿠알라만 공국으로 다시 분할되었다. 이 네 개의 왕가는 차투르 사고트라(Catur Sagotra)라고 불리며, 마타람 조상들의 동일한 문화 철학과 역사적 연관성이라는 유대감 속에서 하나로 묶여있다.[15]

5. 1. 자바 문화의 중심지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가믈란, 바틱, 크리스, 와양 쿨리트, 자바 춤과 같은 자바 문화의 많은 요소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고, 체계화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후계 keraton|케라톤jv들에 의해 보존되었다.[13] 17세기 전반 마타람 술탄국의 전성기 동안 자바 문화는 확장되었고, 자바 서부와 동부 지역의 상당 부분이 자바화되었다. 마타람의 확장에는 순다족의 프리안간 고지대의 여러 공국, 즉 갈루 찌아미스, 수메당, 반둥, 찌안주르가 포함된다. 순다인들이 자바의 케자웬 문화에 더욱 노출되고 동화된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와양 골렉은 자바의 와양 쿨리트 문화를 받아들인 순다인들의 것이며, 가믈란바틱과 같은 유사한 공유 문화도 번성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순다어가 자바어에 반영된 것처럼 정중함을 나타내는 어휘의 계층적 수준을 채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한 자바 문자가 ''차차라칸''으로 순다어를 쓰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마타람 왕국은 섬나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생산지였던 자와 섬 중부의 비옥한 농업 지역을 지배하고, 그 수출항으로 자와 섬 북부의 항구 도시 국가들을 영향 아래에 두어 17세기에 자와 섬 중부와 동부에서 강성했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개입으로 1755년 욕야카르타와 수라카르타의 두 왕국으로 분할되면서 마타람 왕국이라는 국호는 사라졌다. 네덜란드 지배하의 분할 통치로 정치적으로는 약화되었지만, 욕야카르타와 수라카르타의 왕가는 자바 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욕야카르타 술탄가의 하멩쿠부워노 9세는 공화국 측에 협력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 후에는 욕야카르타 특별주 주지사를 오랫동안 역임했고, 한때 공화국의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부통령에 취임했다. 현 당주인 하멩쿠부워노 10세도 그 뒤를 이어 욕야카르타 특별주 주지사와 술탄을 겸임하고 있다.

5. 2. 현대 인도네시아 정치에 미친 영향

마타람 술탄국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와 왕위 계승 분쟁은 현대 인도네시아 정치에 குறிப்பிடத்தக்க 영향을 미쳤다.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의 마지막 주요 토착 정치체였으며, 수라카르타와 욕야카르타의 궁정, 그리고 망쿠네가란과 파쿠알라만 공국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정치체였다.[13]

특히 욕야카르타와 수라카르타 출신 중부 자바인들에게 마타람 술탄국, 특히 술탄 아궁 시대는 마자파힛 이후 지역 패권국이자 자바 섬을 거의 통일하고 네덜란드를 몰아낼 뻔했던 영광스러운 과거로 기억된다. 그러나 동자바의 수라바야인, 마두라인, 블람반간인, 그리고 서자바의 프리안간과 치레본 사람들에게는 마타람 시대가 중부 자바인의 지배 시대로, 봉건적 자바 정권의 권위주의와 독단성으로 특징지어진다.[13]

마타람 영토 내에서는 마타람 술탄국의 여러 경쟁하는 ''크라톤''으로의 분열은 수라카르타-욕야카르타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예술과 문화 측면에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문화에 불멸의 흔적을 남겼다. 가믈란, 바틱, 크리스, 와양 쿨리트, 자바 춤과 같은 자바 문화의 많은 요소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고, 체계화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후계 왕가들에 의해 힘써 보존되었다.[13]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마타람 역사 마지막 시기에 자바 마타람 ''크라톤''의 끊임없는 계승 전쟁, 반역, 봉기, 궁정 음모는 마타람을 다소 좋지 않은 방식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우아함과 세련됨, 미묘함, 예의 바름, 정중함, 간접성, 감정 억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식과 같은 자바인의 행동과 결합하여 마타람의 정치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며 기만적이었다. 그 결과, 불성실함, 기만성, 배신, 사회 계층의 경직성, 권위주의, 독단성과 같은 현대 인도네시아 정치의 자바화의 부정적인 측면은 지위 과시와 오만함에 대한 애정과 함께 종종 '마타람화'라고 불린다.[14]

5. 3. 차투르 사고트라(Catur Sagotra)

차투르 사고트라(Catur Sagotra)는 하나의 뿌리 친족을 공유하는 네 개의 세력을 의미하며, 이슬람 마타람 왕조를 계승한 왕족들을 가리킨다. 이 네 왕국은 수라카르타의 수나난국, 요크야카르타의 술탄국, 망쿠나가란 공국, 파쿠알라만 공국이다.[15]

차투르 사고트라는 스리 수수후난 파쿠 부워노 12세, 스리 술탄 하멩쿠 부워노 9세, 스리 파쿠 알람 8세, 스리 망쿠 나고로 8세의 공동 아이디어로 2004년에 시작되었다. 수라카르타의 국왕 스리 수수후난 파쿠 부워노 12세(사망 전)는 나니 수다르소노 여사에게 차투르 사고트라의 고귀한 이상을 계승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차투르 사고트라는 마타람 조상들의 동일한 문화 철학과 역사적 연관성이라는 유대감 속에서 네 왕가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15]

참조

[1] 웹사이트 Mataram, Historical kingdom, Indonesia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15-01-01
[2] 서적 Babad Tanah Jawi
[3]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4]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5]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6]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7]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8]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9]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10] 뉴스 Saat 6.000 Ulama dan Keluarga Dibantai Sultan Mataram Islam https://tirto.id/saa[...] Tirto.id 2018-05-26
[11] 서적 Pengantar Sejarah Kebudayaan Indonesia 3 Kanisius
[12] 웹사이트 Kesultanan Mataram Islam https://ilmusaku.com[...] 2021-04-25
[13] 서적 A History of Modern Indonesia Since C. 1200
[14] 서적 Chapter 3. Javanization, Inside Indonesian Society: Cultural Change in Java https://books.google[...] Kanisius 2013-11-07
[15] 뉴스 Catur Sagotra Nusantara, untuk Melestarikan Empat Keraton https://tekno.kompas[...] KOMPAS.com 2021-02-01
[16] 서적 Mataram 건국에 관해서는 자료적 제약으로 불확실한 점이 많다. 하지만, Mataram 왕국의 연대기와 함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기록에 의해 고증한 결과에 따르면, 16세기 말 네덜란드인이 자바에 왔을 무렵에는 이미 Mataram이 강대한 권세를 뽐내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1993
[17] 서적 交易の時代と近世国家の成立 山川出版社 1999
[18] 문서 아궁이 "술탄"을 자칭하는 것은 1639년에 사절을 메카에 파견하여 그 칭호를 얻은 이후의 일이다.
[19] 서적
[20] 서적 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の覇権 2001
[2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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