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동 정영국 가옥
1. 개요
만리동 정영국 가옥은 1936년 일제강점기 신흥 자본가 정영국이 건립한 상류층 도시형 한옥이다. 이 가옥은 1930년대 경성부 주택난 해결을 위해 개발된 만리동에 위치하며, 전통 한옥의 조형미를 계승하면서도 20세기 건축 양식을 반영한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곁채 등 4개 동으로 구성되었으며, 문짝 장식, 조경 등에서 전통과 20세기의 조형미를 보여준다. 5대가 거주하며 민속 생활사적 가치를 지니며, 20세기 전반기 서울의 주생활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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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만리동 정영국 가옥 |
|---|---|
| 한자 이름 | 萬里洞 鄭榮國 家屋 |
| 국가 | 대한민국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 2가 207 외 |
| 유형 | 민속문화재 |
| 지정 번호 | 32 |
| 지정일 | 2006년 5월 1일 |
| 시대 | 일제강점기 |
| 수량 | 4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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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작품 -
피터와 늑대
피터와 늑대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어린이들에게 오케스트라 악기를 소개하기 위해 작곡한 음악극으로, 등장인물마다 특정 악기와 연결된 고유한 주제 선율을 가진다. -
서울 중구의 문화유산 -
와룡묘
와룡묘는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시대에 건립되어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으며, 제갈량상, 관우상, 단군상 등을 모시고 한국 토속 신앙과 결합된 무속 신앙의 형태를 띤다. -
서울 중구의 문화유산 -
숭례문
숭례문은 1398년에 완공된 조선 시대 서울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으나 방화 사건으로 훼손되어 복구되었고, 다양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
와룡묘
와룡묘는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시대에 건립되어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으며, 제갈량상, 관우상, 단군상 등을 모시고 한국 토속 신앙과 결합된 무속 신앙의 형태를 띤다. -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
가회동 백인제 가옥
가회동 백인제 가옥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지어진 대규모 한옥으로, 한국 중부 지방 한옥 배치에 서양과 일본의 건축 양식을 수용하여 독특한 구조를 가지며, 현재는 서울특별시가 매입하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1936년 만리동에 건립된 이 가옥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겪었다. 구(舊) 가옥대장에 따르면, 건립 당시에는 지하 1층(13.2m2)과 지상 1층(125.6m2) 규모의 목조와즙(木造瓦葺) 건물이었다. 이후 1949년에는 서쪽에 지상 2층, 총 62.8m2 규모(1층 36.4m2, 2층 26.4m2)의 목조토단즙(木造釷丹葺) 건물이 증축되었다. 그러나 이후 뒷길 확장 공사로 증축된 2층 건물의 일부가 철거되어 규모가 축소되고 외관도 변형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안채, 사랑채, 문간채 등 주요 건물들은 큰 구조적 변형 없이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 문짝의 장식(아자무늬, 완자무늬, 마름모꼴 문양 등), 쪽마루, 붙박이 찬장 등 세부적인 의장 요소와 조경의 일부 역시 건립 당시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신흥 자본가의 주거 생활과 미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5대에 걸쳐 한 집안이 거주해 온 역사를 지녀 민속 생활사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20세기 전반기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과 변화, 그리고 당시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시 많은 도시형 한옥들이 전통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ㄷ'자형이나 'ㅁ'자형으로 변화하던 것과 달리, 공간 배치와 구조 면에서 전통 한옥의 조형미를 계승하면서도 의장과 조경에서는 외래 요소가 복합적으로 적용된 양상을 보여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는 만리동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의 20세기 전반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2.1. 건립 배경
1930년대 후반,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주택난이 심각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주거 단지들이 개발되었는데, 만리동 (일제강점기 당시 봉래정 4정목) 역시 이 시기에 개발된 지역 중 하나이다. 만리동 정영국 가옥은 바로 이 만리동 지역에 1936년 신축된 한옥이다. 이 집은 당시 상류층을 위한 도시형 한옥으로 지어졌다.
이 가옥을 처음 지은 사람은 정영국(鄭榮國)이다. 그는 흥국생명을 창립하고, '활표 고무신'으로 유명했던 동명고무와 삼정광업 등을 운영하며 부를 쌓은 일제강점기의 신흥 자본가였다. 그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이러한 상류층 주택을 건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 건축학적 특징
만리동 정영국 가옥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경성부(현 서울)의 인구 급증에 따라 새로 개발된 주거지인 만리동에 신흥 자본가 정영국이 건립한 상류층 도시형 한옥이다. 건립 당시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였으나 1949년 서쪽에 2층 건물을 증축하였다.
이 가옥은 비탈진 부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곁채 등 여러 건물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특히 동선을 의도적으로 꺾어 이동에 따라 공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하는 등 전통 한옥의 조형미를 계승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당시 많은 도시형 한옥들이 'ㄷ'자나 'ㅁ'자 형태로 변화하던 것과 달리, 이 가옥은 전통적인 공간 배치 원리를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를 지닌다.
구조적으로는 각 건물이 당시 잘 지어진 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큰 변형 없이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의장과 장식 면에서는 아자무늬, 완자무늬, 마름모꼴 문양 등 당시 유행했던 조형 언어를 잘 보여주는 요소들과 함께, 대청 상부의 시렁, 붙박이 찬장 등에서 전통미와 20세기적 조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문간 처리 방식이나 딱지소로 사용 등에서는 전통 기법을 살리려는 노력을, 가늘게 처리된 기둥 등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조경 역시 집 앞 계단의 등나무, 문간채 앞 바깥마당, 안채 뒤 화계 등에서 전통적인 요소와 20세기적 시도가 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종합적으로 정영국 가옥은 일제강점기 신흥 자본가의 주거 생활과 미의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5대에 걸쳐 한 집에서 살아온 생활사적 의미도 지닌다. 창건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20세기 전반기 전통 건축 및 생활사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제공한다. 공간 배치, 건축 구조, 의장, 조경 등 여러 면에서 전통 한옥의 발전과 외래 요소 도입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주어 학술적 가치가 높으며, 서울의 20세기 전반기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3.1. 건물 배치
만리동 비탈진 부지에 약 2m 이상 높이의 단을 조성하여 남향으로 건립되었다. 그리 넓지 않은 부지이지만 땅을 잘 활용하여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곁채 등 4동의 건물을 배치하였다.
한옥 정면에는 3칸 규모의 'ㅡ'자형 행랑채를 두었고, 그 앞에는 옆으로 돌계단을 설치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간이 나오는데, 동쪽으로 반 칸이 더 큰 사랑채가 있어 담장과 함께 공간을 나눈다. 중문간채는 사랑채에 덧붙여진 모습이다. 중문간 안쪽으로는 안마당이 있으며, 그 뒤편에 'ㄱ'자 형태의 안채를 배치했다.
서쪽 담장 밖 뒷길과의 사이에는 1949년에 증축된 2층 곁채가 있었으나, 이후 뒷길 확장 공사로 인해 축소되고 외관이 변형되었다. 중문간채와 행랑채 서쪽에는 안마당보다 한 단 낮은 곳에 정원 공간 또는 텃밭을 조성하고 담장으로 공간을 구분했다.
이 가옥은 대문을 통해 공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대문 앞 계단과 대문간, 중문간의 축을 일부러 일치시키지 않아 동선이 자연스럽게 꺾이도록 설계했다. 이는 이동하면서 공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전통 한옥의 조형미를 보여주는 특징이다. 대문간을 전통적인 방식처럼 2간으로 구부리지 않고 단칸으로 처리하면서도, 시선 차단을 위해 유리창이 달린 아자 무늬 중문을 설치한 것은 20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방식이며, 이 가옥에서는 그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당시 일반적인 도시형 한옥들이 'ㄷ'자형이나 'ㅁ'자형으로 변화하던 것과 달리, 이 가옥은 공간 배치 면에서 전통적인 한옥의 특징을 비교적 잘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3.2. 구조 및 양식
산등성이의 비탈진 땅에 약 2m 이상 높이의 단을 쌓아 남향으로 지은 한옥이다. 부지가 넓지는 않지만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곁채 등 4동의 건물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였다. 한옥 정면에는 3칸 규모의 'ㅡ'자형 행랑채를 두고 그 앞에 옆으로 돌계단을 설치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간(中門間)이 나오는데, 동쪽으로는 반 칸 정도 큰 사랑채가 있어 담장과 함께 공간을 나눈다. 중문간채는 사랑채에 덧붙여진 형태이다. 중문간 안쪽에는 안마당이 있으며, 뒤쪽에는 'ㄱ'자 형태의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서쪽 담장 밖으로는 뒷길이 나 있어 뒷문이 설치되었고, 한국전쟁 직전에 증축된 2층 곁채가 그 사이에 있었으나, 이 건물은 뒷길 확장 공사로 인해 3분의 1 규모로 축소되어 외관이 크게 변형되었다. 중문간채와 행랑채 서쪽, 안마당보다 한 단 낮은 곳에는 정원이나 텃밭으로 사용되었을 공간이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대문을 통해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누고, 대문 앞 계단, 대문간, 중문간의 축을 일부러 어긋나게 배치하여 동선이 꺾이면서 느껴지는 공간의 변화는 전통 한옥의 조형미를 잘 보여준다.
각 건물의 구조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안채: 전형적인 5칸 전후퇴집 구조이다. 동쪽부터 건넌방, 중앙에 2칸 대청, 서쪽으로 꺾여 안방, 그 앞으로 부엌이 배열되어 있다.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건넌방 서쪽 머리퇴 상부는 개조되었으나 아래에 쪽마루가 설치되어 머릿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은 1990년대에 입식으로 개조되었지만, 지하로 통하는 구조로 보아 하부는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사랑채: 2칸 전후퇴집으로 규모는 작다. 옆으로는 맞배지붕 형태의 2칸 중문간채가 덧붙여져 있다. 중문간채 서쪽에는 중문간방이 있으며, 안마당에서 출입하도록 설계되었다.
* 행랑채 (문간채): 맞걸이 3량 구조의 3칸 집이다. 중앙에 문간을 두고 동쪽에 문간방을 두었다. 문간방 출입을 위한 쪽마루 시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 곁채: 1949년에 증축된 안채 서쪽의 2층 건물로, 비록 축소되고 변형되었지만 당시의 건축 구조법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각 건물은 당시 잘 지어진 집의 전형적인 구조 형식을 보여주며, 큰 구조적 변형 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한옥은 배치와 구조 외에도 의장(意匠, 디자인)과 조경 면에서 당시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 문짝 장식: 대청 앞의 아(亞)자 무늬 미서기문, 부엌의 완자(卍) 무늬 문, 안방 샛문과 대문 상부 등 각종 고창(高窓, 높은 곳에 낸 창)에 사용된 마름모꼴 문양은 당시의 조형 언어를 잘 보여준다. 문간방 앞, 부엌 앞, 건넌방 머리퇴 등의 쪽마루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안채의 의장: 고창의 마름모 문양, 긴 보(梁) 5량 구조의 아름다움, 뒤퇴의 판문(板門, 널빤지로 만든 문), 안방 장지문(障子門, 문살에 종이를 바른 문)의 그림, 대청 상부의 시렁(선반), 건넌방 미닫이창의 아자 무늬, 안채 부엌과 사랑채 사이에 설치된 붙박이 찬장 등에서 전통미와 20세기적 조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대문간: 2칸으로 구부리지 않고 단칸으로 처리하면서도 유리창이 달린 아자 무늬 중문을 설치하여 시선을 차단하는 방식은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식으로, 이 집에서는 그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전통 기법: 대문간이나 중문간채에 딱지소로를 붙이거나 맞걸이 3량 방식으로 가공한 모습에서 전통미를 살리려 했던 장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기둥 두께 등이 상대적으로 가늘게 처리된 것도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사랑채와의 연결 통로인 쪽문 시설도 간결하면서 아름답다.
조경 면에서도 특징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다.
* 집 앞 계단 위를 등나무가 타고 오르도록 한 배치는 20세기 정원 양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 문간채 앞에 작은 바깥마당을 둔 것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 것이다.
* 안마당 서쪽에 심어진 몇몇 관목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국 정원사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 문간채 서쪽으로 한 단 낮게 별도로 배치된 머리정원은 독특하지만 상당 부분 원형을 잃었다.
* 안채 뒤쪽에 조성된 화계(花階, 계단식 화단) 역시 많이 훼손되었으나, 옛 서민들의 조경 의식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전반적으로 이 가옥은 공간 배치와 건축 구조 면에서 전통 한옥의 조형미를 계승하면서도, 건축 의장과 조경에서는 전통 요소와 20세기 초반의 새로운 양식이 복합적으로 적용된 모습을 보여준다.
3.3. 의장 및 장식
이 한옥은 배치와 구조뿐만 아니라 의장과 조경 면에서도 당시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우선 문짝의 장식에서 당시의 조형미를 잘 보여준다. 대청 앞의 아자무늬 미서기문, 부엌의 완자무늬 문, 안방 샛문과 대문 상부 등 여러 고창에 시설된 마름모꼴 문양은 당시 유행했던 조형 언어를 잘 시사하고 있다. 또한 문간방 앞, 부엌 앞, 건넌방 머리퇴 등에 설치된 쪽마루도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안채의 경우, 고창의 마름모 문양, 긴 보 5량 구조가 드러내는 아름다움, 뒤퇴의 판문, 안방 장지문의 그림, 대청 상부의 시렁, 건넌방 미닫이 창의 아자 문양, 그리고 안채 부엌과 사랑채 사이에 설치된 붙박이 찬장 등에서 전통적인 요소와 20세기적인 조형미가 함께 나타난다.
대문간의 처리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전통적인 방식처럼 2칸으로 구부리지 않고 단칸으로 처리하면서도, 유리창이 달린 아자 중문을 설치하여 내부 시선을 차단하는 방식은 20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이 가옥에서는 그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문간이나 중문간채에 딱지소로를 붙이거나 맞걸이 3량으로 가공한 모습에서는 전통미를 살리려 했던 당시 장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기둥 분수 등이 가늘게 처리된 것 역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특징이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쪽문 시설 또한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의장적 요소이다.
3.4. 조경
이 가옥은 조경 면에서도 당시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문간채 앞에는 작은 바깥마당을 설정하여 한옥의 전통미를 따르고 있다. 안마당 서쪽에는 몇몇 관목을 심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 비록 완벽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정원사에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문간채 서쪽으로 한 단 아래에는 별도의 머리정원을 배치한 점이 특이하지만, 현재는 원형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안채 뒤편에 조성된 화계(花階) 역시 분위기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당시 조경 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집 앞 계단 위로 등나무가 타고 올라가도록 배치한 것은 20세기 [[정원]]사에 기록될 만한 방식이다. 이처럼 정영국 가옥의 조경은 전통적인 요소와 함께 20세기적인 새로운 요소가 복합적으로 적용된 양상을 보여주며, 일제강점기 서울의 주거 문화와 조경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4. 생활사적 가치
이 집은 일제강점기 신흥 자본가였던 정영국이 건립한 이후, 5대에 걸쳐 후손들이 계속 거주해 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 집에서 여러 세대가 생활하며 이어온 삶의 모습과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속 생활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건립 당시의 모습이 큰 개조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20세기 전반기 한옥의 건축미와 주생활 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까지 엿볼 수 있다.
당시 다른 도시형 한옥들이 전통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ㄷ’자나 ‘ㅁ’자 형태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인 것과 달리, 이 가옥은 공간 배치와 건축 구조 면에서 전통 한옥의 특징을 비교적 잘 계승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동시에 건축 세부 디자인이나 조경에서는 전통적인 요소와 함께 당시 새롭게 유입된 외래 요소가 복합적으로 적용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영국 가옥은 민속 생활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사, 조경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리동 지역은 물론 서울 전체의 20세기 전반기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역사적 건축물이다.
5. 결론
일제강점기 신흥 자본가였던 정영국이 건립한 이 가옥은 당시 상류층의 주거 생활과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한 집에서 5대가 이어 살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어 민속 생활사 연구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특히 건립 당시의 모습이 큰 변화 없이 잘 보존되어 있어, 20세기 전반 한옥의 건축 양식과 그 이전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많은 도시형 한옥들이 편의를 위해 'ㄷ'자나 'ㅁ'자 형태로 변형되던 추세와 달리,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곁채 등을 갖춘 전통적인 공간 배치와 구조를 유지하며 한옥 고유의 조형미를 계승하고 있다. 건축 의장과 조경에서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살리면서도 20세기의 새로운 요소를 조화롭게 받아들인 모습을 보여주어 학술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문짝의 다양한 문양(아자무늬, 완자무늬, 마름모꼴 문양), 쪽마루, 고창, 시렁 등은 당시의 조형 언어를 잘 보여주며, 대문간 처리 방식이나 등나무를 활용한 조경 등에서는 시대적 특징이 나타난다.
이처럼 만리동 정영국 가옥은 민속 생활사, 건축사, 조경사 등 다방면에서 높은 보존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만리동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의 20세기 전반기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건축물을 잘 보존하고 연구하는 것은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의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