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메디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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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메디 학살은 1944년 12월 17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벨기에 말메디 근처에서 84명의 미군 포로를 학살한 사건이다. 요아힘 파이퍼가 이끄는 독일군 부대는 연합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포로들을 살해했으며, 이 사건은 미군의 전투 의지를 고취시키고, 이후 슈노뉴 학살과 같은 보복으로 이어졌다. 전후,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재판의 공정성 논란과 함께 판결이 수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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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메디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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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사건 명칭 | 말메디 학살 |
일부 | 벌지 전투의 일부 |
위치 | 말메디, 벨기에 |
날짜 | 1944년 12월 17일 |
유형 | 기관총 및 머리 총격에 의한 대량 살인 |
사망자 | 제285 야전 포병 관측대대의 미군 전쟁 포로 84명 다른 부대의 미군 전쟁 포로 수백 명 |
가해자 | 제1 SS 기갑 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요아힘 파이퍼 베르너 포치케 제프 디트리히 |
관련된 부대 | |
부대 | 무장친위대 |
전투 그룹 | 무장친위대 캄프그루페 파이퍼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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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말메디에서의 시체 안치소 운영 —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얻은 교훈 |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의 격전 중 하나인 벌지 전투에서,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이끄는 독일군은 연합군의 항공 지원이 시작되기 전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빠른 진격을 해야 했다. 1944년 12월 17일, 말메디 근방에서 미군 제7기갑사단 병사 12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진격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 하에 이들 중 84명을 사살했다.[2][3][4] 이 소식은 미군 측에 빠르게 퍼져나가 독일군에 대한 전투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다.
2. 1. 정치적 배경
히틀러는 서부 전선(1939-1945)에서도 소련의 동부 전선(1941-1945)에서 붉은 군대와 싸울 때와 같은 무자비한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도록 명령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후반, 제3제국의 제네바 협약 위반 전쟁 범죄는 연합군과 미 육군의 병사들에게 국방군과 친위대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3]2. 2. 군사적 배경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이끄는 독일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격전 중 하나인 벌지 전투에서 연합군의 항공 지원이 시작되기 전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빠른 진격을 해야 했다.
제3제국의 아르덴느 공세(1944년 12월 16일~1945년 1월 25일)의 목표는 SS 장군 제프 디트리히가 지휘하는 제6 SS 기갑군이 몬쇼와 로스하이머그라벤 사이의 연합군 전선을 돌파하여 뫼즈 강을 건너 앤트워프시를 공격하고 점령하는 것이었다.[2][3]
아르덴느 공세에서 카프트그루페 파이퍼는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는 제6 SS 기갑군 좌익의 기갑 선봉대였다. 무장친위대 보병이 미군 전선을 돌파한 후, 파이퍼는 그의 전차와 장갑차를 리뉴빌로 진격시켜 스타브로, 트루아퐁, 베르보몽을 통과하여 위시 인근의 뫼즈 강 다리를 점령할 계획이었다.[2][3][4] 아르덴느 공세 전략은 가장 강력한 도로를 제1 SS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의 전차 대부분의 통행에 할애했기 때문에, 카프트그루페 파이퍼의 차량들은 티거 II 전차와 같은 중장비 군용 차량의 무게에는 부적합한 약한 지방도로를 이용해야 했다.[2][3][4]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라인의 방어” 작전을 개시하여 벨기에 남부에서 프랑스 동부에 배치된 연합군에 대해 룬트슈테트 공세(연합군 측 명칭 “벌지 전투”)로 알려진 대공세를 시작했다. 같은 날, 아헨에서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육군 제285야전포병관측대대 B중대 중대장 레온 스카버로 대위는 6시 부로 중대가 제7군단에서 제8군단으로 이동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잔크트 피트의 새로운 포병사령부에 다음날 출두하게 되었다. 17일, 스카버로는 부관들에게 이동 명령을 전달한 후 9시경 사령부에 출두하여, 추가로 룩셈부르크의 제4보병사단 부속 포병사령부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중대에 자신에게 합류하도록 추가로 지시했다.[17]
한편, 공세의 주력을 맡은 독일 제6SS기갑군의 선봉, 요아힘 파이퍼 친위대 중좌가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은 보네 근처 교차로(파이브 포인츠)로 진군하고 있었다. 전투단은 파이브 포인츠의 남동쪽을 이동 중이었고, 원래는 이 남쪽을 통과하려는 진로를 취하고 있었지만, 차량 이동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동쪽 도로로 나왔다.[18] 파이퍼 전투단은 오전에 미국군으로부터 예상을 초월하는 반격을 받은 직후였고, 작전은 예정에서 12시간이나 지연되었다. 베르너 슈테른에베크 SS중위가 이끄는 선도 소대도 피해를 입어, 원래 전차 7대와 1개 공병소대(하프트랙 탑승)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전차 2대와 하프트랙 2대만 남았다.[17]
3. 독일군의 서부 진격
제2차 세계 대전 중 벌지 전투에서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이끄는 무장친위대 SS 부대는 연합군의 항공 공격 이전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빠르게 진격했다. 1944년 12월 17일, 독일군은 말메디 근처에서 미군 제7기갑사단 병사 약 120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진격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이들 중 84명을 사살했다. 이 소식은 미군에 퍼져 독일군에 대한 전투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다.[17]
3. 1. 독일군의 공격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라인의 방어” 작전을 개시하여 벨기에 남부에서 프랑스 동부에 배치된 연합군에 대해 룬트슈테트 공세(연합군 측 명칭 “벌지 전투”)로 알려진 대공세를 시작했다.같은 날, 아헨에서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육군 제285야전포병관측대대 B중대는 제7군단에서 제8군단으로 이동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잔크트 피트의 새로운 포병사령부에 다음날 출두하게 되었다. 17일, B중대는 8시 00분경 출발했다. 차량 행렬은 지프, 무기 수송차, 2.5톤 트럭 등 총 30대였고, 2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12시 15분경, 말메디 시에 도착했다.[17] 이때, 시를 확보하고 있던 제291공병대대 지휘관으로부터 시 동쪽에 있을 독일군 부대와의 조우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받았지만, 중대는 행군을 계속하기로 했다.[18]
한편, 공세의 주력을 맡은 독일 제6SS기갑군의 선봉, 요아힘 파이퍼 친위대 중좌가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은 보네 근처 교차로(파이브 포인츠)로 진군하고 있었다. 파이퍼 전투단은 오전에 미국군으로부터 예상을 초월하는 반격을 받은 직후였고, 작전은 예정에서 12시간이나 지연되었다.[17]
당시 파이브 포인츠 근처에 있던 건물은 남서쪽의 카페, 그 너머의 2개 농장 외에 북쪽의 농장, 동쪽의 2개 민가 등이었다. 12시 45분경, 파이브 포인츠를 통과했다. 그들이 남쪽 도로로 나왔을 때, 독일군 전차의 포격이 시작되어, 선도차와 카페 앞을 통과 중이던 중대 후미 차량이 파괴되었다. 최초의 포격은 베르너 슈테른에베크 SS중위의 차량이 행했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전차들도 각각 5발에서 6발씩 포격한 후, 선도 소대는 즉시 남쪽 도로로 향했다.[17]
3. 2. 미군의 반격
독일군은 북부 전선, 즉 불지 작전에서 전선의 돌출부에서 벌어진 아르덴 반격이 미 육군으로부터 예상 밖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놀랐다. 하루 대부분 동안 미군 정찰 소대 22명(보병 18명, 포병 관측병 4명)이 벨기에 란제라트 마을에서 약 500명의 Waffen-SS|바펜-SSde 낙하병과 싸우며 그들의 진격을 지연시켰다.[5] 정찰 소대의 마을 방어는 Kampfgruppe Peiper|캄프그루페 파이퍼de의 탱크와 장갑차 부대의 진격을 거의 하루 종일 저지하여 뫼즈 강과 앤트워프 시로 향하는 진격을 늦추었다. 이 지연은 미 육군이 예상되는 Waffen-SS|바펜-SSde의 공격에 대비하여 증원할 시간을 벌어주었다.[6]해질 무렵, 독일 제9 낙하산 연대(제3 낙하산 사단)는 포위 공격을 받았고, 싸움을 계속할 탄약이 부족하여 철수하는 미군 정찰 소대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로써 란제라트 마을을 통과하는 캄프그루페 파이퍼의 진격이 잠시 멈추었다. 이 전투에서 Waffen-SS|바펜-SSde 낙하병들은 포병 관측병 1명을 사살하고 다른 미군 병사 14명을 부상시켰다. 미군 정찰 소대를 사로잡은 후, 낙하병들은 더 많은 미군 보병과 탱크가 숲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신중하게 공격을 멈추었다. 12시간 이상, 지나치게 신중한 제9 낙하산 연대 병사들은 파이퍼의 탱크가 란제라트에 도착할 때까지 행동하지 않았다. 그 후 Waffen-SS|바펜-SSde 낙하병들은 숲을 수색했지만 미군 병사들을 찾지 못했다.[6]
4. 학살
2차 세계 대전의 벌지 전투에서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이끄는 독일군 무장친위대는 연합군의 공습 이전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빠르게 진격했다. 1944년 12월 17일, 말메디 근방에서 미국 제7기갑사단 소속 병사 약 120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진격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으로 84명을 사살했다.[3][7] 이 소식은 미군에 빠르게 퍼져 독일군에 대한 전투 의지를 고조시켰다.
1944년 12월 17일, 파이퍼는 뷔링겐의 연료 저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지정된 경로를 벗어나 미군 포로 수십 명을 즉결 처형했다.[2][3][8] 이후 서쪽으로 진격하여 리뉴빌을 점령하고, 뫼더샤이트, 쇼펜, 온덴발, 티리몽 마을은 우회했다.[9]
말메디 학살 생존자들은 약 120명의 미군 포로들이 무장친위대의 기관총 사격을 받을 때 농부의 들판에 서 있었다고 증언했다.[2][3] 기관총 사격에 놀란 일부는 도망쳤지만, 무장친위대 병사들은 나머지를 사살했다. 일부는 땅에 쓰러져 죽은 척했고, 무장친위대 병사들은 시체 사이를 걸으며 부상자를 찾아 머리에 총을 쏘았다.[3][7] 도망친 일부는 보뉴 삼거리의 카페로 숨었으나, 무장친위대는 카페에 불을 지르고 탈출하는 미군들을 사살했다.[3]
학살의 정확한 경위와 책임 소재는 논란이 있다. 일부 생존자들의 과장된 증언, 파이퍼의 포로 불허 명령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 다만, 파이퍼가 포로를 부담으로 여기는 부대 문화를 조성한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4. 1. 뷔링겐에서의 학살
1944년 12월 17일 오전 4시 30분, 제1 SS 기갑사단은 예정보다 약 16시간 늦게 란체라트 마을을 출발하여 혼스펠트 마을로 서쪽으로 이동했다.[7] 혼스펠트를 점령한 후, 파이퍼는 뷔링겐에 있는 작은 연료 저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지정된 경로를 벗어났고, 그곳에서 무장 친위대(Waffen-SS) 보병들이 미군 포로 수십 명을 즉결처형했다.[2][3][8]4. 2. 보네 교차로에서의 학살
1944년 12월 17일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 요아힘 파이퍼 친위대 중좌가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Kampfgruppe Peiperde)은 벨기에 말메디 시 남동쪽 2마일 지점에 있는 보뉴(Baugnez) 삼거리에 접근했다. 한편, 제285 야전 포병 관측 대대 B 중대 소속 미 육군 차량 30대의 수송대가 삼거리를 통과하여 리뉴빌(Ligneuville)과 생비트(St. Vith)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미국 제7기갑사단에 합류하려 하고 있었다.[3][7] 독일군이 먼저 미군 수송대를 발견했고, Kampfgruppe Peiperde의 선봉대는 선두 및 후미 차량에 사격을 가해 파괴하여 수송대를 무력화시키고 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7]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열세였던 제285 야전 포병 대대 병사들은 Waffen-SSde에 항복했다.[2][3]

짧은 전투 후, Kampfgruppe Peiperde 수송대의 전차와 장갑차는 서쪽 리뉴빌(Ligneuville)로 계속 이동했다. 보뉴(Baugnez) 삼거리에서 Waffen-SSde 보병들은 항복한 미군 포로들을 농부의 들판에 모아 그날 이전에 포로로 잡은 다른 미군 포로들과 합쳤다.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벌지 전투로 알려진 대공세를 시작했고 같은 날, 미국 육군 제285야전포병관측대대 B중대는 잔크트 피트의 새로운 포병사령부에 다음날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시 15분경, 말메디 시에 도착했을때 제291공병대대 지휘관에게 독일군 부대와의 조우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중대는 행군을 계속하기로 했다.[18]
한편, 공세의 주력을 맡은 독일 제6SS기갑군의 선봉, 요아힘 파이퍼 친위대 중좌가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은 보네 근처 교차로(파이브 포인츠)로 진군하고 있었다. 파이퍼 전투단은 오전에 미군으로부터 예상을 초월하는 반격을 받은 직후였고, 작전은 예정에서 12시간이나 지연되었다.
당시 파이브 포인츠 근처에는 남서쪽의 카페 보다르베(Café Bodarwé), 그 너머의 2개 농장 외에 북쪽의 농장, 동쪽의 2개 민가 등이 있었다. 12시 45분경, 밀스 등이 탄 지프와 헌병 차량이 파이브 포인츠를 통과했고 독일군 전차의 포격이 시작되어, 선도차와 카페 보다르베 앞을 통과 중이던 중대 후미 차량이 파괴되었다.
짧은 전투 후, 독일군 전차가 접근하는 것을 확인한 B중대는 항복했다.[18] 파이브 포인츠에 있던 B중대원 중 11명은 이 충돌 중 전사했다.
말메디 학살에서 살아남은 포로들은 약 120명의 미군 포로들이 Waffen-SSde가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할 때 농부의 들판에 서 있었다고 증언했다.[2][3] 기관총 사격에 놀란 일부 포로들은 도망쳤지만, Waffen-SSde 병사들은 나머지 포로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일부 미군들은 땅에 쓰러져 죽은 척했다.[3] Waffen-SSde 병사들은 포로 시체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부상당한 생존자들을 찾아 머리에 총을 쏘아 죽였다.[3][7] 도망친 일부 포로들은 보뉴(Baugnez) 삼거리의 카페로 달려가 숨었다. 그러자 Waffen-SSde는 카페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한 모든 미군 포로들을 사살했다.[3]
B중대 미군들이 카페 보다르베 남쪽 밭에 집결할 무렵, 말메디에서 이동 중이던 미군 트럭과 구급차가 근처를 지나가다 독일군의 총격을 받았고, 일부 승무원이 포로가 되었다. 14시까지 113명의 미군이 밭에 집결되었다. 14시 15분경, 포로에 대한 총격이 시작되었다.[17]
4. 3. 학살의 양상
2차 세계대전 중 벌지 전투에서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이끄는 독일군은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출격하기 전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빠르게 진격했다. 1944년 12월 17일, 말메디 근방에서 미군 제7기갑사단 병사 12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진격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으로 84명을 사살했다.[3][7] 이 소식은 미군 측에 퍼져 독일군에 대한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1944년 12월 17일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 Kampfgruppe Peiperde는 벨기에 말메디 남동쪽 2마일 지점 보그네즈(Baugnez) 삼거리에 접근했다. 제285 야전 포병 관측 대대 B 중대 소속 미 육군 차량 30대의 수송대가 삼거리를 통과, 리뉴빌(Ligneuville)과 생비트(St. Vith)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미국 제7기갑사단에 합류하려 하고 있었다.[3][7] 독일군이 먼저 발견, Kampfgruppe Peiperde의 선봉대가 선두 및 후미 차량에 사격을 가해 파괴하여 수송대를 무력화시키고 진격을 저지했다.[7] 수적, 화력으로 열세였던 제285 야전 포병 대대 병사들은 Waffen-SSde에 항복했다.[2][3]
짧은 교전 후, Kampfgruppe Peiperde 수송대의 전차와 장갑차는 서쪽 리뉴빌로 이동했다. 보그네즈 삼거리에서 Waffen-SSde 보병들은 항복한 미군 포로들을 농부의 들판에 모아 다른 미군 포로들과 합쳤다. 생존자들은 약 120명의 미군 포로들이 Waffen-SSde의 기관총 사격을 받을 때 들판에 서 있었다고 증언했다.[2][3] 기관총 사격에 놀란 일부는 도망쳤지만, Waffen-SSde 병사들은 나머지를 사살했다. 일부는 땅에 쓰러져 죽은 척했다.[3] 기관총 사격 후, Waffen-SSde 병사들은 시체들 사이를 걸으며 부상자를 찾아 머리에 총을 쏘았다.[3][7] 도망친 일부는 보그네즈 삼거리의 카페로 숨었으나, Waffen-SSde는 카페에 불을 지르고 탈출한 미군들을 사살했다.[3]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라인의 방어” 작전을 개시, 벨기에 남부에서 프랑스 동부에 배치된 연합군에 대해 룬트슈테트 공세(“벌지 전투”)를 시작했다.
같은 날, 아헨 근처 주둔 미국 육군 제285야전포병관측대대 B중대장 레온 스카버로 대위는 중대가 제7군단에서 로 이동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잔크트 피트의 포병사령부에 다음날 출두했다. 17일, 스카버로는 부관들에게 이동 명령을 전달 후 사령부에 출두, 룩셈부르크 제4보병사단 부속 포병사령부로 출두 명령을 받고 중대에 합류를 지시했다.[17]
B중대는 셰펜휘테를 출발했다. 차량 행렬은 지프, 무기 수송차, 2.5톤 트럭 등 총 30대였고, 2개 집단으로 나뉘었다. 선두 지프에는 부중대장 로저 밀스 대위가 탑승했다. 말메디 시에 도착,[17] 제291공병대대 지휘관 데이비드 A. 퍼그린 중령으로부터 독일군 부대 조우 경고를 받았지만, 중대는 행군을 계속했다.[18]
제6SS기갑군 선봉, 요아힘 파이퍼 친위대 중좌의 파이퍼 전투단은 근처 교차로(파이브 포인츠)로 진군했다. 전투단은 파이브 포인츠 남동쪽 이동 중, 차량 이동 효율을 위해 동쪽 도로로 나왔다.[18] 파이퍼 전투단은 오전 미군 반격으로 작전이 12시간 지연되었다. 베르너 슈테른에베크 SS중위의 선도 소대는 전차 7대와 공병소대(하프트랙 탑승) 구성이었으나, 전차 2대와 하프트랙 2대만 남았다.[17]
당시 파이브 포인츠 근처 건물은 남서쪽 Café Bodarwé, 2개 농장, 북쪽 농장, 동쪽 2개 민가 등이었다. 밀스 등의 지프와 헌병 차량(제7기갑사단 잔여 선도)이 파이브 포인츠 통과, 남쪽 도로로 나왔을 때, 독일군 전차 포격이 시작, 선도차와 Café Bodarwé 앞 통과 중대 후미 차량이 파괴되었다. 최초 포격은 슈테른에베크 차량, 다른 전차들도 5~6발씩 포격 후, 선도 소대는 남쪽 도로로 향했다.[17]
짧은 전투 후, 독일군 전차 접근에 B중대는 항복했다.[18] 파이브 포인츠 B중대원 11명은 충돌 중 전사했다. 슈테른에벡은 도랑에 숨은 미군에 항복 종용 목적 기관총 사격, 항복 미군을 파이브 포인츠로 이동, 파이퍼 도착을 기다렸다. 파이퍼는 작전 지연에 격분, 린외빌(Ligneuville) 진군 명령, 주력 부대와 남쪽 진군 재개했다.[17]
B중대 미군들이 카페 보다르베 남쪽 밭에 집결할 무렵, 미군 트럭과 구급차가 근처를 지나다 독일군 총격, 일부 승무원 포로가 되었다. 14시까지 미군 113명 집결: 제285대대원 91명(B중대 소속 아닌 3명 포함), 구급차 탑승 10명, 헌병 1명, 공병 1명, 전투단 호송 11명. 14시 15분경, 포로 총격 시작.[17]
학살 양상은 불확실하다. 언론 관심은 일부 생존자 과장 증언을 유발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미군 포로 불허 명령이 학살로 이어졌다는 설 지지자도 있지만, 파이퍼는 17일 오전 전투에서 포로를 후송했다. 전후 재판에서 명령서 등 증거는 없었다.[17]
12월 17일 생존자 21명 증언은 사실에 가깝다. 항복 후 파이브 포인츠 남쪽 밭 집결, 독일군 기관총, 라이플 총격. 대부분 생존자는 총격 시작 전 권총 발사 소리 두 번, 독일군이 밭에 들어가 생존자 사살, 시체 확인 증언. 독일군 철수, 차량 총격. 생존자 한 명 제외, 최초 총격 전 탈주 시도 없었다 증언, 탈주는 독일군 완전 철수 후. 어떤 증언자는 최초 총격 전 탈주, 숲 도망 증언. 총격 전 밭 혼란, 권총 발사 소리 때 혼란 정점, 미군 장교 "그 자리 지켜라!"(Stand fast!) 외침 증언.[17] 래리 증언, 게오르크 플렙스 SS대원, 처음 권총 2발 발사.[20]
파이퍼는 사건 관련 전후 증언, 리뉴빌로 향하는 미군 3개 그룹: 손 든 자, 땅/도랑 (전사자/죽은 척), 죽은 척 하다 숲 도망. 파이퍼는 후자 2개 그룹 경고 사격. 제1SS기갑사단 전 대원, 파이퍼 부관 한스 그루레 증언 지지. 본대 도착은 슈테른에베크 도착 10분 후. 파이브 포인츠 이동 미군, 호송 같지 않고, 북쪽 향해, 본대 전투 부대 착각 총격. 그루레는 차량 행렬 후방, 상황 목격 불가. 독일 측 증언 과장, 미군 무기 되찾아 공격.[17]
처음 회수 72구 시체 부검, 20구 자동 화기 총상 외 근접 머리 총격, 치명상. 머리 총상 주위 화상. 20구 머리 소화기 총상, 화상 없음, 거리 총격. 10구, 라이플 개머리판 폭행 흔적. 미군 학살 단정. 독일군 귀중품 강탈 증언, 시체 대부분 귀중품 소지. 대부분 시체 인식표 분실, 신원 확인 사물.[17]
파이브 포인츠 독일군, 현실 문제 직면. 리뉴빌 공격, 미군 사령부 점령 임무 12시간 지체, 파이퍼, 빨리 본대 합류 명령. 소규모 차량 부대, 포로 인계 보병 부대 근처 전개. 100명 넘는 포로 무장 해제, 감시 어려움. 전투단 도로 따라 미군 세력권 관통, 길 양쪽 적 전개 가능성, 후방 행진 독일군 항복 명령 불가. 말메디 미군 부대 남하 위험. 총격 명령 불확실.[17]
증언, 상황, 학살 계획적 X, 포로 처리 결단 요구 독일 측 판단, 미군 혼란/탈주 시도 우발적.[17]
4. 4. 학살의 책임
2차 세계 대전의 벌지 전투 중,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이끄는 독일군 무장친위대(Waffen-SS)는 연합군의 항공 공격 전에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944년 12월 17일, 말메디 근방에서 약 120명의 미군 제7기갑사단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으나, 진격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84명을 사살했다.[3][7]이 소식은 미군 측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미군은 독일군에 대한 전투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미군이 항복한 독일군을 사살하는 슈노뉴 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1944년 12월 17일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 파이퍼 전투단(Kampfgruppe Peiperde)은 벨기에 말메디 시 남동쪽 약 3.22km 지점의 보그네즈 삼거리에 접근했다. 이 때, 미 육군 제285 야전 포병 관측 대대 B 중대 소속 차량 30대의 수송대가 삼거리를 지나 생비트(St. Vith)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미국 제7기갑사단에 합류하려 하고 있었다.[3][7] 독일군은 미군 수송대를 먼저 발견하고 선두 및 후미 차량을 공격하여 수송대를 멈추게 했다.[7] 수와 화력에서 밀린 미군 병사들은 항복했다.[2][3]
짧은 교전 후, 파이퍼 전투단의 전차와 장갑차는 서쪽 리뉴빌로 이동했다. 보그네즈 삼거리에서 무장친위대 보병들은 항복한 미군 포로들을 농부의 들판에 모아 다른 미군 포로들과 합쳤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약 120명의 미군 포로들이 들판에 서 있을 때 무장친위대가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2][3] 기관총 사격에 놀란 일부 포로들은 도망쳤지만, 무장친위대 병사들은 나머지를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일부는 땅에 쓰러져 죽은 척했다.[3] 무장친위대 병사들은 시체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부상자를 찾아 머리에 총을 쏘아 확인 사살했다.[3][7] 도망친 일부 포로들은 보그네즈 삼거리의 카페로 숨었으나, 무장친위대는 카페에 불을 지르고 탈출하는 미군들을 사살했다.[3]
말메디 학살에서 미군 포로 학살 명령을 내린 무장친위대 장교가 누구인지는 논란이 있다. 학살이 발생한 보그네즈 삼거리를 떠난 파이퍼와 제1전차대대장 베르너 포에츠케가 유력한 책임자로 거론된다. 전쟁 후, 여러 관련자와 목격자들은 포에츠케가 하급 장교들에게 미군 포로 처형 명령을 내렸다고 지목했다. 파이퍼의 직접 명령 여부와 관계없이, 그는 포로를 부담으로 여기는 부대 문화를 조성한 책임이 있다.[16]
1949년, 미 상원 조사 결과 벌지 전투(36일간)에서 파이퍼 전투단 소속 병사들이 538명에서 749명의 미군 포로를 학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12] 다른 조사에서는 무장친위대가 살해한 미군 포로 수가 더 적었으며, 미군 300~375명, 민간인 111명이 파이퍼 전투단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추산했다.[13][14]
5. 학살 발각
요아힘 파이퍼가 이끄는 무장친위대 병력이 미군 포로를 학살했다는 소식은 1944년 12월 17일 오후, 학살에서 살아남은 미군 병사들이 미군 점령 지역이었던 말메디에 도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10] 학살 생존자 43명 중 일부는 학살 발생 몇 시간 후인 12월 17일 오후 2시 30분경 제291공병전투대대 순찰대에 의해 발견되었다.[7]
미 제1군 감찰관은 학살 발생 약 4시간 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녁 무렵에는 무장친위대가 미군 포로들을 즉결 처형했다는 소문이 유럽 주둔 미군 병사들에게 퍼져 나갔다.[2] 이로 인해 SS 병사들을 포로로 잡지 말라는 비공식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2] 이후 1945년 1월 1일, 셰노뉴 학살에서 미 제11기갑사단 소속 미군 병사들이 독일 국방군 포로 80명을 보복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
6. 조사 및 유해 수습
1945년 1월 14일, 미군은 1944년 12월 17일 독일군이 84명의 미군 포로들을 집단 학살한 현장에 도착했다. 군사 수사관들은 전쟁 범죄 현장과 눈으로 덮여 얼어붙은 시신들을 부검 및 매장 전에 사진으로 기록했다.
법의학적 조사는 미군 포로들을 살해한 독일군 장교와 병사들의 전쟁 범죄 기소를 위한 총상을 기록했다.[1] 살해된 84명의 포로 시신 중 20구에는 머리에 화약 화상 흔적이 있어, 이는 자기 방어가 아닌 사살 후 머리에 총을 쏘는 ''사살(coup de grâce)''을 입증했다.[1] 또 다른 20명의 병사 시신은 화약 화상 흔적 없이 머리에 소구경 총상의 흔적을 보였다.[1] 다른 포로 시신들은 관자놀이 또는 귀 뒤쪽에 머리에 한 발의 총상을 입었다.[11] 그리고 10구의 시신은 총검으로 두개골이 골절되는 치명적인 둔기 외상 머리 부상을 보였다.[1] 이러한 머리 부상은 기관총에 의한 총상 외에 추가적인 부상이었다. 대부분의 포로 시신은 농부의 밭의 작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독일군이 미군 포로들을 모아서 총살했음을 나타낸다.[10]
이 사건에서 미군 병사 약 80명이 항복 후 살해당했지만, 소수의 생존자도 있었다. 항복 직전에 중대를 떠나 숲에 숨어 있던 자, 총격 중에 도망쳐 몸을 숨기는 데 성공한 자, 또는 시체에 섞여 죽은 척하여 독일군을 피해 지나간 자들이었다. 그들은 말메디로 가서 제291 공병대대에 사건의 경위를 보고했다.[18] 사건 소식은 생존자들로부터 주변 병사들에게 전해진 후, 『양키』, 『별과 줄무늬』, 『라이프』 등의 기사로 미국인들에게 알려졌다.[19]
미군 지휘부는 파이브 포인츠에서 학살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수사를 위해 감찰반(Inspector General team, IG) 파견을 결정했다. 미 제1군은 현지에 유골 수습 부대를 파견하고, IG는 수습 임무 전반을 지휘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보네 주변 확보가 난항을 겪어 파견 자체는 연기되었다. 이 임무에 배치된 제3060 보급 매장 확인 업무 중대 제4소대(3060th Quartermaster Graves Registration Service Company’s 4th Platoon)는 10월부터 활성화된 부대였으며, 12월 말부터 전장에서 매장 확인 임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1945년 1월 13일, 보네 주변 확보가 완료된 직후 제4소대가 현장에 투입되었다. 작업은 14일부터 15일에 걸쳐 실시되었다. 독일군은 매장하지 않고 시신을 방치했지만, 강설과 낮은 기온으로 인해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현장은 여전히 최전선이었고, 독일군의 포격으로 작업이 중단되거나 시신이 손상되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목격자 부족, 기상 조건, 또는 포격으로 인해 시신 수색은 난항을 겪었다. 이후 수습된 시신은 현장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안전한 철도 건물로 옮겨져 신원 확인 및 IG 수사를 위한 부검 등이 실시되었다.[18] 시신은 처음에 72구가 수습되었으나, 4개월 후 눈이 녹으면서 추가로 12구가 발견되었다.[20]
현재 보네의 위령비에는 84명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여기에는 오류가 많아 여러 차례 논란이 되었다. 단순한 철자 오류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이름이 잘못 삭제된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상등병은 분명 1월 17일에 파이브 포인츠 부근에서 시신이 수습되었으므로 학살 희생자에 포함되었지만, 나중에 사건과는 무관한 1월 3일 파이브 포인츠 부근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오류는 나중에 친나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미군에 의한 사건 조작 또는 과장에 대한 의혹을 품게 된 원인이 되었다.[17]
7. 전후 처리
1946년 5월 16일, 요아힘 파이퍼를 비롯한 파이퍼 전투단(Kampfgruppe Peiper) 출신 대원 73명을 피고로 하여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벌지 전투 중 발생한 일련의 학살 사건에 대한 것으로, 전후 독일에서 진행된 전범 재판 중에서도 특히 주목받았다. 뉴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였다.[20]
재판 과정의 공정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여러 차례의 조사와 청문회를 거쳐 판결이 수정되었다. 1951년까지 대부분의 피고인이 석방되었고, 1956년에는 제프 디트리히와 파이퍼가 란츠베르크 전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19] 파이퍼는 석방 후 프랑스에서 가명으로 은둔 생활을 했으나, 1976년 신원이 발각되어 자택에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7. 1. 전범 재판
1946년 5월부터 7월까지 진행된 말메디 학살 재판은 현장 지휘관들이 항복한 미군 포로들을 살해한 데 대해 지휘 책임을 졌음을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Waffen-SSde의 요제프 디트리히(제6 기갑군 사령관), 베르너 포이츠케(제1 SS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사령관), 그리고 요아힘 파이퍼(캄프그루페 파이퍼de) 소속 병사들이 말메디에서 실제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16]디트리히는 자신의 장교와 병사들의 행동에 대한 지휘 책임과 관련하여, 히틀러로부터 어떤 관용도 보이지 말고, 포로를 잡지 말고, 벨기에 민간인들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말라는 상부 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15]
베어마흐트de와 바펜-SSde 병사 및 장교들의 전쟁 범죄 사건은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점령하에 있던 독일의 폐쇄된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열린 다하우 재판에서 심리되었다.[16] 다하우 재판에서는 전쟁 범죄자들을 기소하고 사형 43건(파이퍼와 디트리히 포함), 무기징역 22건, 단기 징역 8건을 선고하여 처벌했다. 그러나 사형 선고는 집행되지 않았고, 파이퍼와 디트리히는 각각 1956년과 1955년에 석방되었다.[16]

1945년 여름, 미국의 점령 당국은 라이프슈탄다르테 SS 기갑척탄병여단 출신 대원 1,000명 이상을 심문하여 75명을 말메디 학살과 관련하여 기소했다. 단, 1명은 자살했고, 1명은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밝혀져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재판은 “미합중국 대 발렌틴 베르신 외”(U.S. vs. Valentin Bersin, et al.)로 명명되었다. 베르신은 알파벳순 명부의 맨 위에 있던 피고인으로, 후에 벨기에 시민 살해와 관련하여 사형 판결을 받았다.[20]
1946년 5월 16일, 파이퍼를 비롯한 파이퍼 전투단(Kampfgruppe Peiper) 출신 대원 73명을 피고로 하여 전투단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주변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학살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군사법정은 옛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설치되었다. 이 군사법정은 미국에서 일반적인 재판과는 매우 다른 불공정한 것이었다. 심문 전부터 유죄가 결정되어 있었고, 증명 책임은 변호 측에 있었다. 판사, 배심원, 변호인 모두 미국군 장교가 맡았다. 변호인은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했다. 전문 증거 또는 법정에 출두하지 않고 변호 측이 심문할 수 없었던 증인의 선서 진술서도 증거로 인정되었다. 다하우에서의 재판에서는 검찰 측이 증언한 증인에게 보상을 제공한 사례도 있다. 일부 피고인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 증언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538명에서 749명에 달하는 포로와 90명 이상의 벨기에 시민 살해에 대해 모든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20]
파이퍼는 사건에 대해 “꽤 오래전 일이다. 나는 진실을 모른다. 알았다 해도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내가 아는 것은 좋은 지휘관으로서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처벌받았다는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또한 부하들을 석방한다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제안했지만, 법정에서 기각되었다. 사형에 처할 때는 군인답게 총살형을 원한다고 변호인을 통해 전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0]
전후 미국에서 말메디 재판은 독일에서의 전범 재판 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것이었으며, 뉴스 영화도 제작되었다. 당시 벌지 전투는 서부 전선에서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전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전범 재판은 단순히 전쟁 범죄자를 재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미국과 점령하 독일 시민들에게 미국의 군인들이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죽었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20]
판결 후, 피고인들은 재판의 방식을 비판했다. 그들은 때때로 고문을 포함한 부적절한 수단으로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며, 재판에서 채택된 진술은 그러한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재판에서 주임 변호인을 맡았던 윌리스 에베렛(Willis Everett) 대령은 귀국하여 1947년에 예편한 후에도 피고인들의 대리인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이러한 비판이 널리 주목을 받게 되자, 미 육군 장관은 재판에 대한 조사 위원회 설치를 선언했다. 재판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독일의 예비역 군인, 독일 대중, 전범 피고인 석방을 호소했던 종교 단체 외에 미국 내에도 지지자가 있었다. 위원회 멤버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밴 로덴(Edward Van Roden) 판사도 그중 한 명으로, 그는 말메디 재판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948년 3월 20일, 위원회 조사를 거쳐 파이퍼와 다른 11명을 제외한 31명에 대해 판결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또한 1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19]
1949년에 열린 상원 청문회에서는 특별히 출석이 허용된 조지프 매카시 의원이 주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핵심은 심문관들의 행동 동기였다. 그들 중 일부는 박해를 받고 유럽을 탈출한 후 육군에 입대했던 유대계 미국인 병사였다. 또한 재판에서 변호인들은 주임 심문관 윌리엄 펄(William Perl) 중위의 행동을 특히 지적했다. 펄 중위는 프라하 출신으로, 그의 아내는 라벤스브뤽 강제수용소의 전 수용자였으며, 이 일로부터 보복 감정에 기반하여 부적절한 심문을 했다고 여겨졌다. 심문관들은 거짓말 탐지기까지 사용하여 증언했고, 위원회에서는 피고인들의 주장인 고문 등은 대부분 허위 또는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도 동시에 재판 절차에 중대한 문제가 많다는 것도 인정하여, 판결은 다시 수정되었다. 1951년까지 대부분의 피고인이 석방되었고, 남은 파이퍼 등의 판결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54년에는 추가 감형이 결정되었고, 1956년에 제프 디트리히와 파이퍼가 란츠베르크 전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19]
석방 후, 파이퍼는 가명으로 프랑스에 은둔하고 있었지만 1976년, 정체가 발각되어 자택에 화염병이 투척되어 화재로 사망했다.
7. 2. 재판에 대한 비판과 판결 수정
말메디 학살 재판은 1946년 5월부터 7월까지 진행되었으며, 현장 지휘관들이 항복한 미군 포로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었다. 바펜-SSde의 요제프 디트리히(제6 기갑군 사령관), 베르너 포이츠케(제1 SS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사령관), 그리고 요아힘 파이퍼(캄프그루페 파이퍼de) 소속 병사들이 말메디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16] 디트리히는 히틀러로부터 포로를 잡지 말고 벨기에 민간인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말라는 상부 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15]
1945년 여름, 미국 점령 당국은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출신 대원 1,000명 이상을 심문하여 75명을 말메디 학살과 관련하여 기소했다. 재판은 "미합중국 대 발렌틴 베르신 외"(U.S. vs. Valentin Bersin, et al.)로 명명되었다.[20]
1946년 5월 16일, 파이퍼를 비롯한 73명이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았다. 군사법정은 옛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미국에서 일반적인 재판과는 매우 다른 불공정한 것이었다. 유죄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증명 책임은 변호 측에 있었다. 판사, 배심원, 변호인 모두 미국군 장교였으며, 변호인은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전문 증거 또는 법정에 출두하지 않은 증인의 선서 진술서도 증거로 인정되었다. 검찰 측이 증인에게 보상을 제공한 사례도 있었고, 일부 피고인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 증언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했다. 결국 모든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20]
파이퍼는 사건에 대해 "꽤 오래전 일이다. 나는 진실을 모른다."라고 진술했고, 부하들을 석방한다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제안했지만 기각되었다. 사형 선고 시 총살형을 원했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0]
판결 후, 피고인들은 재판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그들은 고문 등 부적절한 수단으로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재판에서 주임 변호인을 맡았던 윌리스 에베렛 대령은 1947년 예편 후에도 피고인들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비판에 따라 미 육군 장관은 조사 위원회를 설치했다. 에드워드 밴 로덴 판사도 위원회 멤버 중 한 명으로, 재판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948년 3월 20일, 위원회 조사를 거쳐 파이퍼와 다른 11명을 제외한 31명에 대해 판결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19]
1949년 상원 청문회에서는 조지프 매카시 의원이 주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심문관들 중 일부는 유대계 미국인 병사였고, 변호인들은 주임 심문관 윌리엄 펄 중위의 행동을 지적했다. 펄 중위는 프라하 출신으로, 그의 아내는 라벤스브뤽 강제수용소의 전 수용자였으며, 이 때문에 보복 감정에 기반하여 부적절한 심문을 했다고 여겨졌다. 위원회는 피고인들의 고문 주장은 대부분 허위 또는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재판 절차에 중대한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여 판결을 수정했다. 1951년까지 대부분의 피고인이 석방되었고, 파이퍼 등의 판결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54년 추가 감형이 결정되었고, 1956년 디트리히와 파이퍼가 란츠베르크 전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19]
8. 역사적 의의 및 영향
2차 세계 대전 중 벌지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SS의 요아힘 파이퍼 대령이 이끄는 독일군은 연합군의 항공 전력이 출격하기 전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빠르게 진격해야 했다. 전투 중 말메디 근방에서 미군 제7기갑사단 병사 12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진격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에 1944년 12월 17일 미군 84명을 사살했다.[1] 사살된 아군 포로들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이 소식은 순식간에 미군 측에 퍼졌고, 미군은 독일군에 대한 전투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되었다.[1]
이 말메디 학살로 인해 미군들이 벌지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한 독일군을 사살하는 슈노뉴 학살이 일어났다.[1]
9. 이 사건을 다룬 작품
- 영화 《아르덴느의 혹한 전투 ~서부 전선 1944~(원제: Saints and Soldiers)》에서는 도입부 장면에서 말메디 학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한 명의 미군 병사가 탈출하다가 무장친위대원에게 사살당하고, 이에 놀란 다른 미군 병사가 친위대원에게서 총을 빼앗아 사살했기 때문에 무장친위대가 미군을 사격했다는 우발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 영화 《벌지 대작전(원제: Battle of the Bulge)》에서도 말메디 학살을 묘사하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는 무장친위대에 의한 계획적인 학살이었다는 스토리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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