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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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아힘 파이퍼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1933년 SS에 입대하여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을 지냈고, 동부 전선,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파이퍼 전투단을 지휘하여 벌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말메디 학살 사건 등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 종전 후, 파이퍼는 말메디 학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중, 1976년 자택에 화염병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용모와 군사적 능력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쟁 범죄 혐의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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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파이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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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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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아힘 파이퍼 |
출생일 | 1915년 1월 30일 |
사망일 | 1976년 7월 14일 |
출생지 | 빌머스도르프, 독일 제국 |
사망지 | 트라브, 오트-소느, 프랑스 |
사망 원인 | 공산주의 방화범에 의한 암살 |
안장지 | 숀도르프, 독일 |
별칭 | 요헨 |
직업 | 포르쉐 직원, 폴크스바겐 영업 트레이너 |
군사 경력 | |
소속 | 나치 독일 |
복무 기간 | 1934년 ~ 1945년 |
최종 계급 | 친위대 대령(Standartenführer) |
군번 | 해당 없음 |
병과 | 무장친위대(SS-Verfügungstruppe) |
지휘 | 해당 없음 |
부대 | 국가지도자 친위대 개인 참모부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 SS 사단 LSSAH |
주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작전 축 보베스 학살 벌지 전투 말메디 학살 |
수상 내역 | 참수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 |
정치 | |
정당 | 나치당 |
재판 | |
관련 재판 | 말메디 학살 재판 |
유죄 판결 | 사형; 종신형으로 감형; 다시 35년형으로 감형 |
유죄 인정 여부 | 해당 없음 |
죄목 | 전쟁 범죄 |
관련 사건 | |
주요 관련 사건 | 말메디 학살 보베스 학살 |
2. SS 입대 이전
요아힘 파이퍼는 독일 제국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볼데마 파이퍼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으며, 한스하소와 호르스트라는 두 명의 형이 있었다. 맏형 한스하소는 정신질환으로 1931년 자살을 시도한 후 지속적 식물 상태가 되었고, 1942년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둘째 형 호르스트는 무장친위대 대위였으나,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시달리다가 1941년에 자살했다. 훗날 파이퍼는 힘러의 부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3살 연상의 지구르트 힌릭센과 결혼해서 슬하 1남 2녀를 두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요아힘 파이퍼는 1915년 1월 30일 독일 제국 베를린 빌머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로이센 실레지아 출신의 중산층 가정의 셋째 아들이었다.[1]그의 아버지 볼데마 파이퍼는 독일 제국 육군 장교로, 1904년 독일 남서 아프리카 전투에 참전했다.[1] 이후 말라리아에 걸려 심각한 부상을 입고[2] 독일 아프리카에서 현역 복무를 중단했다. 1907년 볼데마는 프로이센군에서 현역으로 복귀했다.[3] 제1차 세계 대전에 다시 참전했고[4] 잠시 오스만 제국에 배치되어[5] 이전의 말라리아 감염으로 인해 만성적인 심장 질환을 겪었다.
전간기 동안, 볼데마는 준군사조직인 ''자유군단''에서 활동하며 제2 폴란드 공화국에 합병하려는 폴란드의 실레지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920년대 바이마르 독일에서 반유대주의 나치 이데올로기는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에 분노한 보수주의와 반동주의 정치 세력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는데, 볼데마 파이퍼도 그 중 하나였다.
볼데마의 두 아들, 호르스트와 요아힘은 같은 민족주의 이념과 군 복무의 길을 따랐다. 1926년, 11살의 요아힘은 14살인 형 호르스트 파이퍼를 따라 보이스카우트가 되었고, 장교가 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호르스트는 ''친위대''(SS)에 입대하여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SS-해골 부대''에서 복무했다. ''무장 친위대''(Waffen-SS) 병사로 현역으로 전출된 호르스트는 프랑스 공방전(1940)에서 제3 SS 기갑 사단의 일원으로 싸웠으며, 1941년 6월 폴란드에서 사망했다. 소문에 따르면 그의 동료 SS 대원들이 그의 동성애 때문에 자살하도록 몰아넣었다고 한다.
파이퍼의 맏형 한스-하소(1910년 출생)는 정신 질환을 앓았고, 자살 시도로 인해 뇌 손상을 입어 지속적 식물 상태가 되었다. 1931년 병원에 입원한 한스는 1942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2. 2. 초기 성장 과정
요아힘 파이퍼는 1915년 1월 30일 독일 제국 베를린 빌머스도르프에서 중산층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 볼데마 파이퍼는 독일 제국 육군 장교로, 1904년 독일 남서 아프리카 전투에 참전했다.[1] 말라리아와 심각한 부상으로[2] 독일 아프리카에서 현역 복무를 중단했고, 1907년 프로이센군에 복귀했다.[3]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4] 오스만 제국에 배치되었으나[5] 말라리아 감염으로 인한 만성 심장 질환과 건강 악화로 소아시아에서 현역 복무를 중단했다.
전간기 동안 볼데마는 자유군단 용병 부대에 합류, 실레지아 봉기 (1919년 8월–1921년 7월) 진압에 참여했다. 1920년대 바이마르 독일에서 반유대주의 나치 이데올로기 (배후 중상설, ''시온 의정서'', ''국제 유대인'' 등)는 보수주의와 반동주의 정치 세력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고,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에 분노했다.
볼데마의 두 아들 호르스트와 요아힘은 민족주의 이념과 군 복무의 길을 따랐다. 1926년, 11살의 요아힘은 형 호르스트를 따라 보이스카우트에 참여, 장교가 되려는 관심을 가졌다.
호르스트는 친위대(SS)에 입대, 나치 강제 수용소 경비병(SS-해골 부대)으로 복무했다. 무장 친위대(Waffen-SS)로 전출된 후 프랑스 공방전(1940)에서 제3 SS 기갑 사단 소속으로 참전, 1941년 6월 폴란드에서 사망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동성애 성향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파이퍼의 맏형 한스-하소(1910년 출생)는 정신 질환으로 1931년 자살 시도 후 지속적 식물 상태가 되었고, 1942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3. SS 입대와 초기 행적
요아힘 파이퍼는 1934년 친위대 특무부대에 자원했다. 입대 후 요제프 디트리히에 의해 라이프슈탄다르테에 배속되었고, SS-융커 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SS 소위로 임관했다.[6] 1938년에는 친위대 전국지도자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을 맡았다.
파이퍼는 하인리히 힘러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영전에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파이퍼는 힘러의 개인 참모로 활동하며 그의 최측근으로 여겨졌다. 1939년까지 모든 공식 행사에서 힘러의 부관으로 항상 함께했다. 힘러는 파이퍼를 각별히 아꼈으며, 파이퍼는 SS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29세의 젊은 나이에 SS연대지도자(대령급)로 승진했고,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히틀러에게 직접 수여받았다.
3. 1. SS 입대
1933년, SS특무부대에 입대했다. 지원서를 살펴본 요제프 디트리히는 그의 라이프슈탄다르테 입대를 승인했다.[6]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으로 복무했던 초기 SS시절, 힘러는 파이퍼를 총애하여 그의 영전에 매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SS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파이퍼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SS연대지도자(대령급)로 승진했을 뿐 아니라, 당시 독일군 최고 명예훈장 중 하나인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히틀러에게 직접 수여받기도 했다.요아힘 파이퍼는 형 호르스트와 함께 히틀러 유겐트에 입단했을 때 18세였다. 1933년 10월, 파이퍼는 무장 친위대(SS)에 자원하여 SS 기병대에 입대했는데, 그의 첫 번째 상관은 구스타프 롬바르트였다. 롬바르트는 열성적인 나치이자, 점령된 소련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에 악명이 높았던 SS 기병대 여단의 연대장이었다.[6]
1934년 1월 23일, 그는 SS-''Mann'' (SS 신분증 번호 132.496)으로 진급했다. 친위대가 나치당 내 돌격대 (SA)로부터 독립하기 전, 파이퍼는 "SS 대원"이 되었다. 그해 말, 파이퍼는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SS-''Sturmmann''으로 진급했는데, 그의 명성은 제국지도자-SS 하인리히 힘러의 주목을 받았다. 힘러에게 파이퍼는 SS 장교 학교에서 가르치는 나치즘이 옹호하는 주류 개념인 아리아인을 상징했다. SS의 북유럽 출신 신병만큼 키가 크고, 금발에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파이퍼는 잘생기고 사교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SS 장교였다.
SS는 1935년 1월에 파이퍼를 정식으로 고용했고, 이후 그를 군사 지휘 과정에 보냈다. SS 지휘 학생으로서 파이퍼는 SS 강사들로부터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군 심리학자들로부터는 조건부 승인만을 받았다. 심리학자들은 파이퍼의 자기 중심성, 부정적인 태도, 그리고 제국지도자-SS 힘러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인상 지우려는 시도에 주목했다. 군 심리학자들은 파이퍼가 SS에서의 경력 과정에서 "까다로운 부하"나 "오만한 상사"가 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1935년 4월 - 1936년 3월 기간 동안, 파이퍼는 SS-융커 학교에서 군사 장교 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의 교장인 파울 하우서는 ''무장 친위대''를 위한 이념적으로 연루된 나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SS-융커 학교는 군사 훈련 외에도 반유대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나치 세계관을 가르쳤다.
나치당은 1938년 3월 1일에 파이퍼에게 NSDAP 신분증 번호 5.508.134를 발급했는데, 그는 SS 대원이 된 지 2년 후였다. 전후 시대에 파이퍼는 나치당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부인했는데, 그 사실은 그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단지 군인"이었던 평범한 사람이라는 자기 홍보 이미지와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3. 2. 초기 SS 시절
요아힘 파이퍼는 1934년 19세에 친위대 특무부대에 자원했다. 입대 후 선발되어 SS 장교 학교(SS-Junkerschulen)에 입교했고, 졸업 후 SS 소위로 임관했다.[6] 1938년에는 친위대 전국지도자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을 맡았다.1933년 SS특무부대에 입대한 파이퍼는 요제프 디트리히에 의해 라이프슈탄다르테에 배속되었다. 라이프슈탄다르테 예하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발령받기 전 초기에는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힘러는 파이퍼를 총애하여 그의 영전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SS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파이퍼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SS연대지도자(대령급)로 승진했고,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히틀러에게 직접 수여받았다.
1933년 10월, 파이퍼는 무장 친위대(SS)에 자원하여 SS 기병대에 입대했는데, 그의 첫 상관은 구스타프 롬바르트였다. 롬바르트는 열성적인 나치이자, 점령된 소련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에 악명이 높았던 SS 기병대 여단의 연대장이었다.
1934년 1월 23일, SS-''Mann'' (SS 신분증 번호 132.496)으로 진급한 파이퍼는, 친위대가 나치당 내 돌격대 (SA)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SS 대원"이 되었다. 그해 말,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SS-''Sturmmann''으로 진급했고, 제국지도자-SS 하인리히 힘러의 주목을 받았다. 힘러에게 파이퍼는 SS 장교 학교에서 가르치는 나치즘이 옹호하는 아리아인을 상징했다. SS의 북유럽 출신 신병만큼 키가 크고 금발에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잘생기고 사교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SS 장교였다.
SS는 1935년 1월에 파이퍼를 정식으로 고용했고, 군사 지휘 과정에 보냈다. 파이퍼는 SS 강사들로부터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군 심리학자들로부터는 조건부 승인만을 받았다. 심리학자들은 파이퍼의 자기 중심성, 부정적인 태도, 그리고 힘러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인상 지우려는 시도에 주목했다. 그들은 파이퍼가 SS 경력 과정에서 "까다로운 부하"나 "오만한 상사"가 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1935년 4월 - 1936년 3월, 파이퍼는 SS-융커 학교에서 군사 장교 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의 교장인 파울 하우서는 ''무장 친위대''를 위한 이념적으로 연루된 나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SS-융커 학교는 군사 훈련 외에도 반유대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나치 세계관을 가르쳤다.
나치당은 1938년 3월 1일에 파이퍼에게 NSDAP 신분증 번호 5.508.134를 발급했는데, 그는 SS 대원이 된 지 2년 후였다. 전후 파이퍼는 나치당원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이는 그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단지 군인"이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자기 홍보 이미지와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1938년 6월, 파이퍼는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이 되었다. 힘러는 이를 승진 가능한 친위대 지도자에게 필요한 행정 훈련으로 여겼다. 당시 친위대 친위대 지도자 개인 참모에서 근무하는 장교들은 친위대 관료 카를 볼프의 지휘를 받았다. 파이퍼는 참모 장교로서 베를린의 친위대 본청 대기실에서 근무했으며 힘러가 가장 좋아하는 부관이 되었다. 파이퍼도 그만큼 존경을 표했으며, 1939년까지 모든 공식 행사에서 힘러의 부관으로 항상 함께했다.
4. 제2차 세계대전 참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이었던 파이퍼는 힘러의 개인 열차를 타고 이동하며, 아돌프 히틀러가 에르빈 롬멜과 함께 열차로 이동하거나 동부 전선 최전선에서 국방군 및 무장친위대 장군들을 만날 때 연락 장교 역할을 수행했다.[1]
1939년 9월 20일, 파이퍼는 힘러와 함께 폴란드 비드고슈치에서 나치 점령에 저항한 폴란드 지도자 20명이 공개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 처형은 루돌프 폰 알벤슬레벤이 지휘하는 민병대인 ''Volksdeutscher Selbstschutz''에 의해 자행되었다.[1] 파이퍼는 훗날 폴란드 지식인 학살을 히틀러의 상부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합리화했다.[1]
파이퍼는 독일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위한 폴란드 점령에 참여하면서, 폴란드인을 제거하기 위한 인종 청소 정책을 목격했다.[1] 1939년 12월 13일, 파이퍼는 힘러와 함께 폴란드 오빈스카에서 정신 질환 환자들을 가스 살해하는 ''T4 작전''을 참관했다. 파이퍼는 전후 심문에서 이 경험을 사실적이고 감정적으로 초연하게 설명했다.[1]
1940년 힘러와 파이퍼는 노이엔감 수용소, 작센하우젠 수용소 등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들을 시찰했다.[1] 점령된 폴란드에서 힘러는 프리드리히-빌헬름 크뤼거와 오딜로 글로보치니크를 만나 유대인 추방 문제를 논의했다.[1]
1940년 4월, 힘러와 파이퍼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와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를 방문했다. 빌헬름 레디에스와 오토 라슈는 폴란드인 학살 방법을 연구했다. 5월에 글로보치니크는 힘러와 파이퍼에게 ''T4 작전''의 효율성을 시연하고, 루블린 보호 구역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했다.[1]
파이퍼는 1938년에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 연대의 제11중대장이 되었다. 이 연대는 제2차 세계 대전에 폴란드에 참전했다. 1940년, 서부 전격전에서 1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1941년, LSSAH 연대는 여단으로 확대되었고, 1942년에는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1943년 파이퍼는 친위대 소령으로 승진하여 제2SS 기갑척탄병 연대 제3대대장에 임명되었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된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군 무장 해제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파이퍼는 한 유대인을 도왔고, 이 유대인은 전후 파이퍼의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다.
9월에는 보베스 마을에서 매복 공격을 받은 후 마을에 포격을 가해 민간인 33명이 사망하는 사건(Boves massacre|it|Eccidio di Boves영어)이 발생했고, 이는 전후 파이퍼가 사형 선고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2월에는 SS 제1전차 연대장(독일군 최연소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44년 1월 27일, 파이퍼는 검 잎 부착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고 친위대 중령으로 진급했다.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SS 제1기갑사단 LSSAH는 캉 전선에 투입되어 영국군과 격전을 벌였다. 파이퍼는 Operation Goodwood|label=굿우드 작전영어에서 Hill 112|영어 방어전을 지휘하여 연합군을 격퇴했다. 이후 팔레즈 포위망에서 탈출하여 독일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1945년 1월 11일, 아르덴 대공세에서의 전공으로 검 잎·검 부착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나, 결국 미군에 포위되어 중장비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 작전 중 파이퍼 부대는 말메디 학살 사건을 일으켰고, 이는 전후 파이퍼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1945년, SS 제1기갑사단은 헝가리에서 소련군과 싸웠다. 파이퍼는 장크트푈텐에서 미군에 항복했다.
4. 1. 주요 전투
요아힘 파이퍼는 라이프슈탄다르테 소속으로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등 동부 전선의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라인 강의 수비 작전에서는 파이퍼 전투단을 지휘하여 미군에 맞섰다.1940년 하인리히 힘러의 스페인 방문에 동행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시타델 작전, 아치세 작전, 카시빌레 휴전, 남풍 작전, 춘계 각성 작전 등에도 참전했다.
아르덴 대공세 당시 파이퍼 전투단은 미군 포로를 학살한 말메디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4. 2. 전술 및 리더십
요아힘 파이퍼는 여러 주요 전투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유능한 전투 지휘관이었다. 그는 부하들로부터 깊은 충성심을 얻은 "카리스마적인 지휘관"으로 알려졌다.[1] 1943년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과 쿠르스크 전투 등 주목할 만한 전투에 참전했다.[1] 특히 요제프 디트리히 휘하 제6기갑군 소속 LSSAH 사단의 병력으로 편성된 파이퍼 전투단을 이끌고 라인 강의 수비 작전에 참가한 것으로 유명하다.[1] 파이퍼 전투단은 미군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연료 부족으로 벨기에 라 글레이즈에 이르러 발이 묶였다. 결국 파이퍼는 6대의 쾨니히스티거를 포함한 다수의 전차를 남겨둔 채 8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도보로 후퇴해야 했다.[1]파이퍼는 최소한의 논의로 명령을 받고 실행했으며, 부하들도 자신의 명령을 질문 없이 따르기를 기대했다.[10] 1943년 3월, 파이퍼는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나치 선전은 그를 모범적인 군사 지도자로 묘사했다.[10] 공식 SS 신문 다스 슈바르체 코르프는 하르코프에서 파이퍼의 행동이 "모든 단계에서 상황을 지배"하는 무장친위대 전차 지휘관임을 보여주며, "타고난 지도자로서, 모든 병사의 생명에 대한 최고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무 완수를 위해 필요하다면 가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도했다.[10]
1943년 7월, LSSAH 전차 사단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시타델 작전에 참여하여 붉은 군대에 맞서 싸웠다.[11] 시타델 작전 실패 후, LSSAH는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했다.[11] 1945년 초 헝가리에서 파이퍼 전투단은 남풍 작전과 춘계 각성 작전에 참전했다.[12] 이 전투에서 파이퍼는 많은 적군을 사살했지만, 공격적인 지휘 스타일로 인해 필요 이상의 많은 사상자를 냈다.[12]
5. 전쟁범죄
요아힘 파이퍼는 보베 학살과 말메디 학살 두 건의 전쟁 범죄 혐의를 받았다.
1943년 12월, 파이퍼는 러시아에서 제1 SS 기갑 연대를 지휘했으나, 과도하게 공격적인 전술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LSSAH 사단 지휘부는 파이퍼를 전투 임무에서 해임하고 사단 사령부 참모 장교로 전출시켰다. 그러나 파이퍼의 나치 선전 가치는 여전히 높았고, 1944년 1월 27일 히틀러는 그에게 참나무 잎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1944년 3월, LSSAH는 나치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재편성되었다. 새로 합류한 병사들은 대부분 나치 이념에 덜 물든 어린 소년들이었다. 파이퍼는 가혹한 훈련 중 기준 미달 병사 5명을 처형하고, 다른 병사들에게 시신을 보도록 강요했다. 1956년 독일 당국은 이 사건을 조사했으나, 파이퍼는 부인했고 증거 부족으로 종결되었다.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 (1944년 6월 6일) 이후, LSSAH는 프랑스 파 드 칼레에 배치되었으나, 연합군 공군력에 밀려 전선 이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파이퍼는 7월 18일부터 작전에 참여했지만, 지형과 무선 침묵 때문에 전선에 거의 없었다.
1944년 8월, 캉 전투에서 신경 쇠약을 겪은 파이퍼는 지휘에서 해임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10월에 복귀한 후, 파이퍼는 연합군 폭격 피해 복구 작업 중 "적에 대한 증오"를 언급하며 복수심을 드러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파이퍼는 말메디 학살 사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총살을 원했다. 많은 피고인이 감형되었지만, 파이퍼는 11년 6개월 형기를 대부분 독방에서 보낸 후 1956년 12월 31일에 가석방되었다.
5. 1. 보베 학살
1943년 9월 19일,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의 파르티잔 게릴라들은 피에몬테 북서부 보베스 인근에서 무장 친위대(Waffen-SS) 점령군과 교전하여 병사 1명을 살해하고 2명을 생포했다. 이후 파르티잔과의 교전에서 무장 친위대 보병대는 동료들을 구출하지 못했다. 요아힘 파이퍼의 ''캄프그루페 파이퍼''(Kampfgruppe Peiper, 파이퍼 전투단) 장갑 부대가 보베스 마을로 들어오고 나가는 도로와 거리를 통제했고, 파이퍼는 파르티잔이 무장 친위대 포로를 석방하지 않으면 마을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보베스 마을 파괴를 막기 위해, 보베스 코뮌의 지역 대변인인 주세페 베르나르디 신부와 사업가 알레산드로 바살로는 파르티잔이 무장 친위대 포로와 살해된 친위대 병사의 시신을 석방하도록 협상했다. 파이퍼는 시신과 포로의 석방에도 불구하고, ''캄프그루페 파이퍼'' 병사들에게 보복으로 보베스 마을 남성 24명을 즉결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집을 약탈하고 불태우면서 한 여성을 살해했다.
LSSAH(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에 보고된 사후 보고서에서 ''캄프그루페 파이퍼''는 보베스 학살을 파이퍼가 공산주의 파르티잔의 반독일 공격에 맞서 싸운 영웅적인 방어로 묘사했다. 보고서에는 "파르티잔과의 전투 중에 보베스 마을과 코스텔라르가 불탔다. 거의 모든 불타는 집에서 탄약이 폭발했다. 일부 강도들이 사살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5. 2. 말메디 학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이퍼는 아르덴 대공세에서 라 글레즈로 이동하던 중 파이퍼의 지휘하에 약 300명의 미군 포로를 총살하고, 스타벨롯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131명의 벨기에인을 살해한 혐의로 다른 무장SS 병사들과 함께 말메디 학살 재판에 기소되었다.[7]재판 중 파이퍼와 부하들은 가족을 러시아인에게 넘기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구타당하는 고문을 당했다. 이 때문에 파이퍼는 부하들을 방면한다면 모든 죄를 자백하겠다고 밝혔지만 원고 측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제30 보병사단의 119연대 소속 대대장 해롤드 D. 맥코운 소령은 재판에서 파이퍼에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재판에서 파이퍼가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적어도 두 번 내렸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다. 벨기에 민간인을 사살한 혐의에 대해서는 파이퍼는 그들이 파르티잔이었다고 답했다.[7]
파이퍼와 그의 부하들에게는 유죄가 선고되었고,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파이퍼는 직접 감독자로서 책임을 묻게 된 것이다. 후에 파이퍼는 부하들을 총살형에 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요구 또한 거절당하고 말았다. 무장친위대는 국방군과 달리 군인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다수의 자백이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협박과 피의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 등 부당한 강요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문제시되면서 말메디 학살 사건 관련 피고자 다수에게 선고된 형이 감형되었다. 대부분의 감옥 생활을 독방에서 보낸 파이퍼는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56년 12월 13일 감형으로 풀려났다.[7]
1944년 가을, 국방군은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고, 관통하고, 건너기 위한 연합군의 공격을 계속 격퇴하는 한편, 히틀러는 서부 전선에서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모색했다.[7] 그 결과는 나치 독일의 아르덴 대공세였는데, 이는 독일군이 아르덴 숲에서 미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뫼즈 강을 건너, 앤트워프 시를 점령하여 연합군 전선을 붕괴시키고 분열시키려는 절박한 전략적 도박이었다.[7]
제6 기갑군은 아헨과 슈네 에이펠 사이의 미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리에주 시 양쪽의 뫼즈 강 다리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제6 기갑군은 LSSAH를 SS-''Oberführer'' 빌헬름 모른케의 지휘 하에 기동 타격 부대로 지정했다. 제6 기갑 사단은 네 개의 합동 병과 전투단으로 구성되었다. 파이퍼는 70톤급 티거 II 전차를 장비한 제501 중전차대대를 포함한, 가장 잘 갖춰진 전투단인 ''캄프그루페 파이퍼'' (파이퍼 전투단)를 지휘했다. ''캄프그루페 파이퍼''는 리에주와 위 시 사이의 뫼즈 강 다리를 점령해야 했다. 연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령부는 파이퍼에게 미 육군 유류 저장고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제공했고, 그는 그 유류 저장고를 관리하는 소수의 미 육군 병사들로부터 연료를 탈취할 의도였다.[7]
제6 기갑군은 ''캄프그루페 파이퍼''에게 좁고 일차선 도로를 포함하는 경로를 할당하여 보병, 장갑차, 전차가 약 25km 길이의 호송대로 이동하게 했다. 파이퍼는 할당된 도로가 자전거에는 적합하지만 전차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불평했다.[7] 그러나 참모장 프리츠 크래머는 파이퍼에게 "어떻게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뫼즈 강까지 가기만 해라. 거기에 도착할 때 탱크가 한 대만 남아있더라도 말이다."라고 말했다.[7]
파이퍼의 차량은 자정 무렵 출발점에 도착하여 ''캄프그루페 파이퍼''의 공격을 거의 24시간이나 지연시켰다.[7] 계획은 로스하이머그라벤을 통과하는 것이었지만, ''캄프그루페 파이퍼''를 위한 경로를 열도록 배정된 두 개의 보병 사단은 전투 첫날에 이를 수행하지 못했다. 12월 17일 아침, ''캄프그루페 파이퍼''는 혼스펠트와 미 육군의 연료 저장고를 점령했다. 파이퍼는 도로가 통과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서쪽으로 계속 진격했고, 리뉴빌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의 부대는 벨기에 말메디 근처의 바우네즈 교차로로 향하도록 했다.[7]
6. 석방 후
제2차 세계 대전 후, 요아힘 파이퍼는 말메디 학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다른 무장 친위대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총살을 희망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이후 많은 피고인들이 사형에서 감형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파이퍼는 11년 6개월 형기의 대부분을 독방에서 보냈으며, 1956년 12월 31일에 가석방되었다.[9]
1948년, 군사 재판소의 재판 판결 심사관들은 말메디 학살 재판에서 일부 무장친위대 피고인들의 전쟁 범죄 사형 선고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1951년에 파이퍼의 사형 선고는 종신형으로, 1954년에는 35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1956년 12월 22일 가석방되었다.[9]
1951년, 전 육군 대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파이퍼의 정치적 복권을 위한 정치 공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토머스 T. 핸디 장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협상 중인데, [그가] 불운한 파이퍼를 매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존 J. 맥클로이는 무력한데, 말메디 학살 재판은 유럽 미군 사령부에서 처리되고 있으며, 맥클로이의 관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 이러한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SS 출신들의 인맥과 무장 친위대 전 회원 상호 지원 공동체(HIAG)의 정치적 로비는 파이퍼의 조기 석방과 취업을 주선하고 실현했다. HIAG는 파이퍼 부인을 위해 란츠베르크 감옥 근처에 일자리를 찾았다.[9]
6. 1. 은둔 생활과 최후
석방 후, 파이퍼는 HIAG의 주선으로 포르셰에 취직하여 해외 판촉 직원으로 일하려 했으나, 전범으로서 외국의 기피 인물이었기 때문에 곧 퇴직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서독에서도 과거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전범들을 기소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파이퍼는 서독에서도 살기 어려웠다. 특히 보베스 학살 사건에 대해 추적해 온 이탈리아인이 파이퍼를 고발하여 다시 심판대에 섰고, 유대인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넘겼다는 혐의도 있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전범인 베르너 베스트의 재판에 증인으로 섰으나, 기억에 없다는 증언을 반복하여 법적 처벌을 모면하였다. 이후 잡지의 자유 기고가 등을 하다가 프랑스 별장이 있는 프랑스 오트 소느 트라브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했다. 여기서 그는 라이너 부쉬만(Rainer Buschmann)이라는 가명으로 영국의 군사 서적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이곳에서 그는 프랑스 공산당 소속의 저항 운동가에게 신원이 노출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공산당에 보고되었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1976년 7월 14일 파이퍼를 죽일 거라는 문구가 파이퍼의 집 담벼락에 쓰여졌다. 암으로 투병 중인 아내를 먼저 피신시킨 파이퍼는 1976년 7월 13일 밤, 자택에 투척된 화염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는데, 부검 결과 방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다수의 공격으로 인해 신체가 크게 훼손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실행범들은 기소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저항운동가나 공산주의자들의 범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6년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트라베스에 있는 파이퍼의 집에 공격하여 불을 질렀다. 불이 꺼진 후, 소방관들은 권총과 .22구경 소총을 든 채 마치 자신을 방어하려는 듯한 남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방화 수사관들은 그 사람이 연기 흡입으로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반나치 정치 단체 '어벤져스'가 파이퍼를 살해한 방화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지만, 방화로 인한 파괴로 인해 일부 프랑스 경찰 당국은 요아힘 파이퍼가 발견된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유해는 부모, 형제, 아내 등이 묻힌 바이에른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7. SS 시기의 경력
파이퍼는 1938년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 연대 제11중대장이 되었다. 이 연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폴란드에 출전했다.[10]
1940년 서부 전격전에서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41년 LSSAH 연대는 여단으로 확대되어 발칸, 소련으로 전전했다. 1942년 LSSAH는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1943년 파이퍼는 친위대 소령으로 승진, 제2SS 기갑척탄병 연대 제3대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0]
같은 해 7월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된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군 무장 해제 및 평정 임무를 수행했다. 이 때 파이퍼는 한 유대인을 도왔는데, 이스라엘로 도망간 그는 전후 파이퍼의 재판에서 변호했다. 9월, 파이퍼 지휘 하의 제14중대 하사관 2명이 이탈리아 병사에게 연행되자 오토 딘세 친위대 중위(SS-Obersturmführer)에게 구출 명령을 내렸지만, 보베스 마을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에 제3대대 총력으로 구출에 나섰으나 재차 매복 공격을 당하자 마을에 포격을 가해 딘세 중위와 하사관 2명을 구출했다. 이 포격으로 민간인 33명이 사망했고(보베스 학살|ko|보베스 학살it), 이는 전후 파이퍼가 사형 선고를 받는 두 번째 이유가 되었다. 12월에는 SS 제1전차 연대장(독일군 최연소 연대장)에 임명되었다.[10]
1944년 1월 27일 이탈리아에서의 전공으로 검 잎 부착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고 친위대 중령으로 승진했다.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후, SS 제1기갑사단 LSSAH는 캉 전구에 투입되어 영국군과 격전을 벌였다. 특히 연합군의 굿우드 작전|ko|굿우드 작전영어에서 112 고지|ko|112 고지영어 방어전을 지휘, 80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연합군을 패퇴시켰다. 이후 팔레즈 포위망에서 포위되었으나 탈출, 독일 본국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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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에서 선봉 부대인 파이퍼 전투단|ko|파이퍼 전투단fi(SS 제1전차 연대의 4호 전차, 5호 전차 판터 약 70대, 제501SS 중전차 대대 제1·제3중대의 6호 전차 티거 II 20대, SS 제2기갑척탄병 연대 제3대대, SS 제1기갑공병대대 제3중대, SS 제1기갑포병연대 제2대대, 공군 제84강습 대공포대대로 구성)을 지휘, 안트베르펜 공략을 목표로 했다. 1945년 1월 11일 검 잎·검 부착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나, 미군의 저항, 연료 부족, 아군과의 연계 부족으로 포위되어 중장비를 버리고 철수했다. 작전 중 파이퍼 부대가 미군 포로를 살해한 말메디 학살 사건은 전후 파이퍼가 사형 선고를 받는 첫 번째 이유가 되었다.[10]
1945년, SS 제1기갑사단은 오스트리아로 접근하는 소련군에 반격하기 위해 헝가리로 이동, 종전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소련군과 싸웠다. 종전 후 장크트푈텐에서 미군에 항복, 무장 해제되었다.[10]
7. 1. 진급 내역
날짜 | 계급 |
---|---|
1933년 10월 16일 | SS-Anwärter|SS-안베르터|SS훈련병de |
1934년 1월 23일 | SS-Mann|SS-만|SS일병de |
1934년 9월 7일 | SS-Sturmmann|SS-슈투름만|SS상병de |
1934년 10월 10일 | SS-Rottenführer|SS-로텐퓌러|SS병장de |
1935년 3월 1일 | SS-Unterscharführer|SS-운터샤르퓌러|SS하사de |
1935년 9월 11일 | SS-Scharführer|SS-샤르퓌러|SS중사de |
1936년 3월 5일 | SS-Standartenjunker|SS-슈탄다르텐융커|SS상사de |
1936년 4월 20일 | SS-Untersturmführer|SS-운터슈투름퓌러|SS소위de |
1939년 1월 30일 | SS-Obersturmführer|SS-오버슈투름퓌러|SS중위de |
1940년 6월 6일 | SS-Hauptsturmführer|SS-하웁트슈투름퓌러|SS대위de |
1943년 1월 30일 | SS-Sturmbannführer|SS-슈투름반퓌러|SS소령de |
1943년 11월 11일 | SS-Obersturmbannführer|SS-오버슈투름반퓌러|SS중령de |
1945년 4월 20일 | SS-Standartenführer|SS-슈탄다르텐퓌러|SS대령de |
7. 2. 서훈 내역
서훈 내역 |
---|
8. 전후 논란과 유산
1946년 말메디 학살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여러 차례 감형을 거쳐 1956년 12월에 가석방되었다.[9] 석방 후 포르쉐와 폭스바겐에서 근무했지만, "비나치화" 문제로 인해 단기간에 퇴직했다. 이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번역가로 생활했으나, 1976년 프랑스 공산당 활동가에게 신원이 노출되어 살해 위협을 받았다. 1976년 7월 13일 밤, 그의 집에 화염병이 투척되어 사망했다.[9] 그의 유해는 바이에른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
파이퍼는 미국에서 무장친위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일부 신나치주의자들에게 우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8]
8. 1. 정치적 복권 시도와 HIAG
1946년 말메디 학살 재판 군사 재판소는 요아힘 파이퍼에게 교수형을 선고했지만, 이후 감형 절차를 거쳐 1956년 12월 22일 가석방되었다.[9] 석방 과정에는 전직 무장친위대 회원 상호 지원 공동체(HIAG)를 비롯한 SS 출신들의 정치적 로비가 작용했으며, HIAG는 파이퍼 부인이 란츠베르크 감옥 근처에서 일자리를 찾도록 도왔다.[9] 전 지크리히트디엔스트(SD) 관리였던 알베르트 프린칭의 영향으로 파이퍼는 포르쉐 자동차 회사에 취직했다.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풀려난 파이퍼는 공개적으로는 나치 관련 활동을 자제했지만, 비밀리에 무장친위대 공동체와 관계를 유지했다. 1959년에는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수훈자 협회 전국 회의에 참석하여 제프 디트리히, 하인츠 람머딩 등 나치 전범들과 재회했다. 쿠르트 마이어, 파울 하우서 등 나치 인사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파이퍼는 HIAG와 협력하여 무장친위대의 전쟁 범죄 기록을 은폐하고, 그들을 국방군 참전 용사로 위장하여 정치적 복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친구에게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복권을 시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료는 여전히 수집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인지했다.
8. 2. 신나치주의자들의 우상화
요아힘 파이퍼는 미국에서 독일 전쟁 영웅으로 무장친위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신나치주의자들에게 우상으로 여겨지며, 나치 전범으로 보지 않는다.[8]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 외국인 혐오적인 러시아-미국 냉전과 반동적인 매카시즘이라는 전후 시대의 문화적 배경은 파이퍼에 대한 역사적, 사실적, 개인적 오해를 HIAG(구 무장친위대 회원 상호 원조 협회)와 같은 특정 우익 단체들이 실천하는 인격 숭배로 융합되게 했다.[9] 이 단체들은 서독에서 파이퍼를 전범 수감에서 조기 석방시키려 했다. 미국 대중 문화에서 파이퍼 중령의 군인으로서의 태도, 잘생긴 외모, 지휘력 있는 모습, 나치 훈장들은 민간 사회와 군대 사회에서 많은 우익 지지자들을 얻게 했다.미국 군대에서 파이퍼에 대한 우상 숭배는 미국 국방부(DoD)의 공식 간행물에도 나타났다. 2019년, 국방부 페이스북 계정은 벌지 전투 (말메디 학살 (1944)을 포함)에서 미 육군이 ''Wehrmacht''(국방군)과 ''Waffen-SS''(무장친위대) 군인들과 싸운 75주년을 기념하는 시청각 자료에 무장친위대 군복을 입은 파이퍼의 컬러 사진을 포함했다. 파이퍼의 ''Waffen-SS'' 사진은 국방부 간행물이 나치 전범을 독일 전쟁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처럼 보여 "소셜 미디어에서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방부는 사과하고 해당 사진을 삭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타곤은 파이퍼의 ''Waffen-SS'' 사진을 사용하여 벌지 전투에서 미 육군 공수 부대와 싸우는 독일군을 대표했다. 게다가, 육군의 제10 산악 사단의 페이스북 페이지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그들이 싸운 독일군을 대표하기 위해 파이퍼의 컬러 ''Waffen-SS'' 군사 사진을 사용했다.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 신문은 국방부의 전범 요아힘 파이퍼에 대한 긍정적인 군사적 평전이 "역겹고 소름끼치는" 역사 수정주의의 행위이며 우익 선전의 "마치 '팬보이 스타일' 기사"와 같은 어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페이스북 논평가들을 인용했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의 연구원들은 파이퍼의 컬러 사진의 출처를 나치를 지지하고 히틀러를 옹호하는 설명을 곁들여 나치 사진을 게시하는 친나치 예술가의 트위터 계정으로 추적했으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75년 전에 파시스트 정권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다 죽은 미국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글과 함께 온라인에서 나치 선전을 찬양하는 예술가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펜타곤과 육군 관계자들이 어떻게 승인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 실수는 최근 백인 우월주의자 활동에 대한 여러 비난으로 최근 비판을 받아온 미국 육군에게는 당혹스러운 일련의 사건 중 가장 최근의 사건일 뿐이다.
9. 평가
파이퍼는 금발에 푸른 눈, 장신의 체구를 가진 뛰어난 용모로 이상적인 북방 게르만인 친위대 대원의 이미지로 여겨졌으며, 피규어로 재현되어 제품화되기도 했다.[12]
참조
[1]
서적
Himmlers Krieger: Joachim Peiper und die Waffen-SS in Krieg und Nachkriegszeit
https://books.google[...]
Verlag Ferdinand Schoeningh GmbH & Co KG
2023-07-06
[2]
서적
Himmlers Krieger: Joachim Peiper und die Waffen-SS in Krieg und Nachkriegszeit
https://books.google[...]
Verlag Ferdinand Schoeningh GmbH & Co KG
2023-07-06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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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Himmlers Krieger: Joachim Peiper und die Waffen-SS in Krieg und Nachkriegszeit
https://books.google[...]
Verlag Ferdinand Schoeningh GmbH & Co 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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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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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ag Ferdinand Schoeningh GmbH & Co 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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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The Origins of the Final Solution
Arrow Books
[7]
서적
Massacre at Malmedy
Pen & Sword Military
[8]
간행물
Malmedy Massacre Investigation: Report of the Subcommittee of the Committee on Armed Services
1949-10-13
[9]
서적
The Malmedy Massacre: The War Crimes Trial Controversy
https://www.jstor.or[...]
Harvard University Press
2022-08-15
[10]
서적
SS戦車隊・上
大日本絵画
[11]
서적
図解ドイツ装甲師団
並木書房
[12]
서적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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