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당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당 전쟁은 신라가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시도를 막고 삼국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648년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로 할 것을 약속했으나, 당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는 등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맞서 싸웠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며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보했다. 전쟁 이후 당나라는 요동으로 물러났고, 신라는 대동강 이남을 영토로 하는 삼국 통일을 이루었으나, 고구려의 옛 영토는 발해가 차지하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나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명나당 전쟁
전체삼국 통일 전쟁
시기670년–676년
장소한반도 및 황해
결과신라의 승리
이유당나라한반도 전지역 편입 시도
교전 세력
교전국 1신라
교전국 1 추가 세력고구려 부흥군
백제 부흥군
보덕국
교전국 2당나라
지휘관
신라 측 지휘관문무왕
김유신
김원술
검모잠†
고연무
안승
당나라 측 지휘관당 고종
설인귀
고간
부여융
이근행
쉐 런구이
가오 칸
부여 풍
리 진싱
병력 규모
신라 측 병력20,000명 (675년)
당나라 측 병력100,000–200,000명 (675년)
영토 변화
영토 결과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되찾았고, 당은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영토를 장악함.

2. 배경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로 하기로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663년(문무왕 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신라를 자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간주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2. 1.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야욕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신라의 내부 분열을 획책하면서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전지역을 당나라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660년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는 9개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 영토로 만들려 했다. 663년(문무왕 3년) 당나라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다. 이는 당이 신라를 자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시 고구려가 건재했기 때문에 신라는 당나라와의 직접 마찰을 피하였다. 그러나,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의도를 드러내자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8]

2. 2. 신라의 저항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은 백제 유민들처럼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중국 세력과 건국 때부터 싸워온 고구려 유민들을 앞세워 당나라와 전쟁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신라는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金馬渚: 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도읍을 정해주었다. 안승을 중심으로 결집한 고구려 유민들로 편성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과 연합하여 당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통일 이후 신라의 9서당 군제에는 고구려 부흥군의 흔적이 남아 있다.

668년 고구려-당 전쟁 이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아직 신라의 통치 아래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를 격파한 신라-당 연합으로 인해 이들 두 왕국의 옛 영토는 연합군( 신라)의 점령하에 있었다. 이들 옛 왕국의 백성들은 큰 혼란을 겪었는데, 상당수가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당했다.[8]

당 황제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 평양도호부를 설치했다.[8]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 잔여 군대를 통합하여 일종의 연합군을 조직하고,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맞섰다.[5][16] 신라의 목표는 한반도에서 당군을 몰아내고(특히 옛 백제 영토 전체와 옛 고구려의 남부 지역 일부) 당의 신라 지배 시도를 막는 것이었다.[9]

3. 전쟁의 전개

669년 고구려 백성들의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난 이후,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는 수년 동안 반란이 일어났고 마지막 반란은 4년 동안 지속되었다.[10] 670년부터 673년까지 반군들은 매년 봉기를 일으켰다.

671년 신라는 백제의 옛 영토 대부분에서 당군을 몰아냈다. 고구려 유민들은 당 태종이 신라의 군사 협력에 대한 대가로 백제와 평양 남쪽 땅을 주기로 약속했으나, 당 고종이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하여 신라를 도왔다.[10][11]

674년 당 고종은 문무왕의 책봉을 취소하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문무왕675년 사죄 사절을 파견하여 이전 상태로 복귀했다.

675년 신라군은 천성에서 당의 설인귀 군대를 무찔렀다. 당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했다.[11] 676년 신라는 일련의 전투에서 대동강 남쪽의 모든 영토를 점령했다.[12]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더 방어하기 쉬운 요동으로 옮겨야 했다.[13]

3. 1. 초기 전투 (670년 ~ 673년)

670년 3월, 신라군 1만 명과 고구려 유민군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나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라군은 옛 백제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 주둔군과 웅진도독 부여융(백제의 왕족 출신)이 이끄는 백제군이 주둔하는 옛 백제 지역의 82개 성을 빼앗았으며,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회복하였다.[10]

671년, 당나라는 설인귀에게 수군을 끌고 백제로 향하게 하고, 육지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동원해 압록강으로 남침하였다. 육군은 672년 7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8월에는 한시성과 마읍성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지만, 설인귀의 수군은 신라군에 격파당하고 당으로 되돌아갔다.[10] 672년 12월 백빙산 전투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신라군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군은 당나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다.[10]

당 고종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배후에서 도와주고 백제의 옛 땅을 무력으로 강탈했다는 이유로 674년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여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는 신라에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책략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0]

3. 2. 신라의 반격과 승리 (674년 ~ 676년)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군마 30,380마리와 30,000 여명 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11]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는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후 신라군과 당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18차례에 걸쳐 벌였다.

676년 11월,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 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과 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10] 이 전투에서도 신라군이 승리하여, 당나라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의지를 상실했다.

675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여 경기 지역에서 신라군을 패배시켰다. 이에 신문왕은 사과와 함께 조공 사절단을 당나라에 파견했다. 당 고종은 신문왕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서쪽의 티베트의 위협을 처리하기 위해 당나라 군대를 철수시켰다. 당나라의 전략적 약점을 본 신라는 당나라 영토에 대한 진격을 재개했다.[11] 676년 신라는 일련의 전투에서 대동강 남쪽의 모든 영토를 점령했다.[12]

4. 전쟁의 결과

676년 당나라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기고, 웅진도독부는 건안성(개평)으로 옮기면서 대동강 북쪽으로 완전히 철수하였다. 나당전쟁의 승리로 신라는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지역을 영토로 확정하였다.[14][13]

당나라가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요동으로 옮긴 것은 사실상 당나라가 신라 영토에 대한 야심을 포기했음을 의미했다.[14][13] 당나라 군대가 대동강 이남의 영토에서 쫓겨났지만, 신라는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지 못했고, 그곳은 당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15] 당나라는 요동반도를 장악했고, 신라는 한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16]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는 8세기 초까지 단절되었고,[16][17] 신라 성덕왕(702~737)과 당나라 현종(712~755)이 외교 관계를 재개하고 두 국가 간의 화해를 시작했다.[17] 736년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한반도에 대한 신라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5. 의의 및 평가

외세를 개입시켜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신라는 '''나당 전쟁'''을 통해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비로소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발해(698년 ~ 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신라의 삼국통일고구려의 영토를 상당부분 상실했다는 점에서 영토적인 면에서 분명 한계가 있었으나, 한반도 내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단일국가 수립의 기반이 되어 한국사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6. 전쟁 후 양국 관계

발해가 강성해지자 신라와 당의 관계는 전쟁 후 50여 년간 소원했던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가까워져 무역 및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732년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를 돕기 위해 발해의 남쪽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폭설 등 험한 날씨로 인해 중도 철수하였다.[21]

당나라 정부가 안동도호부의 소재지를 요동으로 옮긴 것은 사실상 당나라의 신라 영토에 대한 야심이 종말을 의미했다.[14][13] 당나라 군대가 대동강 이남의 영토에서 쫓겨났지만, 신라는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지 못했고, 그곳은 당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15] 당나라는 요동반도를 장악했고, 신라는 한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16]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는 8세기 초까지 단절되었고,[16][17] 신라 성덕왕(702~737)과 당 현종(712~755)이 외교 관계를 재개하고 두 국가 간의 화해를 시작했다.[17]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한반도에 대한 신라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736년이었다.

참조

[1]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Routledge 2002
[2]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3]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4]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Facts On File
[5] 서적 Tang China in Multi-Polar Asia: A History of Diplomacy and War
[6] 서적 Tang China in Multi-Polar Asia: A History of Diplomacy and War
[7]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舊唐書 http://ctext.org/wik[...] 2017-08-03
[9] 서적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10] 서적 Korea in the middle: Korean studies and area studies : essays in honour of Boudewijn Walraven https://books.google[...] CNWS Publications 2012-03-10
[11] 웹사이트 매소성(買肖城) https://www.kci.go.k[...] 2023-09-14
[1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Rowman & Littlefield
[13] 웹사이트 舊唐書 http://ctext.org/wik[...] 2017-08-03
[14]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archive.org/[...] Greenwood Press
[15] 서적 Nuclear endgame: The need for engagement with North Korea Praeger Security International
[16] 서적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17]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18] 뉴스 나당전쟁 羅唐戰爭 http://100.nate.com/[...] 브리타니카 백과사전(한국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19] 뉴스 나당전쟁 羅唐戰爭 http://100.nate.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뉴스 나당전쟁 羅唐戰爭 https://www.doopedia[...] 두산 세계 대백과사전 2022-05-21
[21] 뉴스 발해-신라, 대결·갈등…초기엔 39개 역참 갖춘 발해의 '신라길' 통해 서로 교류 https://news.v.daum.[...] 한겨레 2010-03-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