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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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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원술은 김유신의 차남으로, 신라 진골 출신이며 고구려 멸망 무렵 하급 장군이었다. 672년 당나라와 말갈족의 공격에서 패배한 후, 아버지 김유신이 처벌을 요청했으나 문무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원술은 부끄러움을 느껴 은둔했고,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어머니가 만나주지 않자 세상을 비관하며 숨어 살았다. 김원술의 이야기는 설화로 전해지며, 드라마 《대왕의 꿈》 등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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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술
인물 정보
김원술의 초상
김원술의 초상
본관김해 김씨
작위벽해군(碧海君)
주요 경력당나라 계필하력 부장, 신라 대아찬
시대남북국시대
가족 관계
아버지김유신
어머니영모부인
형제김삼광, 김원정, 김장이, 김윤중, 김윤문, 김수승
부인미상
자녀슬하 1남 (김의관)
생애
생몰년미상
활동 시기7세기
주요 활동나당 전쟁 참전
초기 생애김유신의 아들로 출생
계필하력 휘하당나라 장군 계필하력의 부장으로 나당 전쟁에 참전
귀국과 갈등문무왕에게 귀국 후 아버지 김유신의 공을 믿고 자만하다가 문무왕의 노여움을 사 변방 지역으로 쫓겨남
복수 시도자신을 모함한 김인문의 아들 김장청을 죽이려다 실패
처형 위기김문량에 의해 반역죄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김유신의 옛 공을 생각한 문무왕에 의해 용서받음
이후대아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은거
기타
특징아버지 김유신의 후광을 업고 방탕한 생활을 함
평가자만심과 오만함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음

2. 가계 및 배경

김원술은 김유신 장군의 차남이자, 금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직계 후손이었다. 김원술은 신라의 진골 출신이었으며, 고구려가 나당 연합에 의해 멸망할 즈음에는 하급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3. 생애

672년 이 말갈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자 김원술은 비장으로 출전하였으나, 고간이 이끄는 당나라 군의 공격으로 효천, 의문 등이 전사하고 신라군은 패퇴하였다.[1] 김원술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돌진하려 했으나, 좌관 담릉 등이 적극적으로 만류하여 후퇴하였다.

문무왕김유신의 공을 고려하여 김원술을 처벌하지 않았다.[1] 이에 김유신은 김원술을 처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1] 김원술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673년 7월 아버지 김유신이 사망하자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1]

김원술은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675년 당나라 군이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김원술은 과거의 치욕을 씻기 위해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1] 그러나 어머니가 여전히 만나주지 않자, 세상을 비관하며 평생 은둔 생활을 하였다.[1]

3. 1. 초기 생애

김원술은 김유신 장군의 차남이자, 금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직계 후손이었다. 김원술은 신라의 진골 출신이었으며, 고구려가 나당 연합에 의해 멸망할 즈음에는 하급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3. 2. 삼국통일 전쟁 참전

김유신의 둘째 아들로 672년 이 말갈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자 비장으로 출전하였으나, 당나라 장수 고간의 공격으로 효천, 의문 등이 전사하고 신라군은 패퇴하였다.[1]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들려고 하였으나, 좌관 담릉 등이 한사코 말려서 후퇴하였다.[1]

문무왕김유신의 전공을 생각하여 김원술을 처벌하지 않았다.[1] 이에 김유신은 김원술을 처형시킬 것을 왕에게 주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지 않았다.[1] 김원술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시골에 숨어 살다가 673년 7월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어머니도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들여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1]

그는 그 길로 태백산에 들어갔는데, 675년 당나라의 군사가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 공을 세웠다.[1]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가 만나주지 않자 세상을 비관하며 일생을 숨어 살았다.[1]

672년 8월 백수성 근처에서 벌어진 당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신라군은 초반에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퇴각하는 당나라 군대를 추격하다가 함정에 빠져 일곱 명의 장군과 수많은 병사들을 잃었다. 원술은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는 그를 막아서며 "용감한 자가 죽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 어려운 것은 죽을 때를 선택하는 것이다. 가치 없이 죽는 것은 나중에 복수하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말했다. 원술은 "사나이는 치욕스러운 삶을 살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후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는 말 고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원술은 결국 전투에서 죽지 못하고 경주로 돌아왔다.

3. 3. 백수성 전투 패배와 은둔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은 672년 이 말갈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할 때 비장으로 참전했으나, 고간이 이끄는 당나라 군의 공격으로 효천, 의문 등이 전사하고 신라군은 패퇴하였다. 김원술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돌진하려 했으나, 좌관 담릉 등이 적극적으로 만류하여 후퇴하였다.[1]

문무왕김유신의 공을 고려하여 김원술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유신은 김원술을 처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김원술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673년 7월 아버지 김유신이 사망하자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김원술은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675년 당나라 군이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김원술은 과거의 치욕을 씻기 위해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어머니가 여전히 만나주지 않자, 세상을 비관하며 평생 은둔 생활을 하였다.

3. 4. 매소성 전투 참전과 최후

672년 이 말갈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할 때,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은 비장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고간의 공격으로 효천, 의문 등이 전사하고 신라군은 패퇴하였다. 김원술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돌진하려 했으나, 좌관 담릉 등이 적극적으로 만류하여 후퇴하였다.[1]

문무왕김유신의 전공을 고려하여 김원술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에 김유신은 김원술을 처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김원술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시골에 은둔하였다. 673년 7월 아버지 김유신이 사망하자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유언을 이유로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1]

이후 김원술은 태백산에 들어갔다. 675년 당나라 군대가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가 만나주지 않자, 세상을 비관하며 평생을 숨어 살았다.[1] 김원술은 전장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며, 그 결과 신라군은 당나라 군대에 크게 승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김춘추는 김원술에게 경주에서 큰 상을 내리려 기다렸지만, 김원술은 부모에게 불효한 것을 후회하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김원술은 산에서 굶주리며 여생을 보냈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사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4. 사후

김원술이 패주하여 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져 원술 설화, 원술랑 설화 등으로 전해졌고 희곡으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5. 김원술이 등장하는 작품

5. 1. TV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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