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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슈 루이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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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슈 루이스(1775-1818)는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시인으로, 고딕 호러 장르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소설 《수도사》로 명성을 얻었으며, 희곡 《성의 유령》, 시집, 번역 작품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루이스는 앤 래드클리프와 윌리엄 고드윈의 영향을 받아 공포와 초자연적인 요소를 결합한 작품을 선보였으나,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는 자메이카 농장을 상속받아 노예 제도의 현실을 마주했으며, 자메이카 방문 중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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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슈 루이스 (작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지 레스브리지 손더스가 그린 매슈 그레고리 루이스 초상화, 미상 작가 이후
조지 레스브리지 손더스가 그린 초상화 (1800년경)
본명매슈 그레고리 루이스
출생1775년 7월 9일
출생지런던, 잉글랜드
사망1818년 5월 14일/16일 (향년 42세)
사망 장소대서양 선상
직업소설가, 극작가
학력웨스트민스터 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 경력
직위하원 의원 (힌돈 대표)
임기 시작1796년
임기 종료1802년
이전 의원제임스 애덤스
다음 의원존 페들리
작품 활동
언어영어
국적영국
장르소설
대표작몽크

2. 생애

런던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웨스트민스터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받았다. 외교관을 지망하여 젊은 시절 프랑스독일 등지에서 생활하며 언어를 익혔고, 바이마르에서는 괴테 등과 교류했다.

1794년 헤이그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단기간에 집필한 고딕 소설 『수도사』 Ambrosio, or the Monkeng (1795년 출간)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선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를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렸으며, 이후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1796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문학 활동에 더 집중하여 곧 의원직을 그만두었다. 희곡 『성의 유령』 The Castle Spectreeng (1796년)의 성공에 이어 독일 문학 번역과 희곡, 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812년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과 자메이카 농장을 상속받은 후에는 문학 활동보다 농장 경영에 더 집중했다. 두 차례 서인도 제도를 방문하여 노예 처우 개선을 시도했으며, 이 경험은 사후 출간된 『서인도 제도의 농장 소유자의 일기』 Journal of a West India Proprietoreng (1833년)에 기록되었다. 1816년에는 제네바에서 바이런, 셸리, 메리 셸리 등과 교류했다.

1817년 두 번째 자메이카 방문 후 귀국길에 황열병으로 사망하여 수장되었다.[19] 미완성 소설 The Effusions of Sensibilityeng 외에 사후 『M.G. 루이스의 생애와 서간집』 The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ewiseng (1839년)이 출간되었다.

2. 1. 가족

매슈 루이스는 1775년 런던에서 매슈 루이스와 프랜시스 마리아 수웰 루이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매슈 루이스는 윌리엄 루이스와 제인 그레고리의 아들로, 1750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와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교육받았으며(1769년 학사, 1772년 석사), 육군부 수석 서기와 전쟁 차관(1775년 임명)을 역임했다. 또한 자메이카의 사바나-라-마르 근처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아들 매슈가 상속받게 된다.[3]

어머니 프랜시스 마리아 수웰은 선임 판사였던 토머스 수웰 경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가문 역시 자메이카와 연관이 있었다. 아버지 매슈는 프랜시스와 결혼하여 매슈 외에 마리아, 배링턴, 소피아 엘리자베스 세 자녀를 더 두었다.

1781년 7월 23일, 매슈가 여섯 살 때 어머니 프랜시스는 음악 교사 사무엘 해리슨을 애인으로 삼아 남편을 떠났다.[3] 별거 중 프랜시스는 남편에게 자신의 거처를 숨기기 위해 '랭글리'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남편은 그녀의 행방을 알아냈다. 루이스의 부모가 별거하는 동안 어머니는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아들 매슈와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다.[2]

1782년 7월 3일 프랜시스가 사생아를 낳자, 아버지 매슈는 이혼 소송을 준비했다. 그는 1783년 2월 27일 런던 주교의 교회 재판소를 통해 아내의 간통을 공식적으로 고발한 후, 상원에 이혼 법안 통과를 요청했다. 그러나 법안은 부결되었고,[3] 결과적으로 매슈와 프랜시스는 아버지 매슈가 1812년 사망할 때까지 법적으로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프랜시스는 사회에서 물러나 잠시 프랑스로 이주했지만, 남편과 아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그녀는 나중에 런던으로 돌아와 레더헤드에서 여생을 보냈고,[3] 다시 사교계에 복귀하여 웨일스 공주의 시녀가 되기도 했다.[4] 프랜시스는 아들 매슈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문학 활동을 돕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스스로 작가가 되기도 했으나, 아들 매슈는 이를 탐탁지 않아 했다.[5]

루이스는 아버지의 여성 편력에 반감을 가졌으며, 가족 분쟁 시 항상 어머니의 편을 들었다. 아버지의 첩들에게 무례하게 대했기 때문에 상속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6] 그의 여동생들이 루이스의 작품 수정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7]

루이스는 잉글랜드 및 웨일스 법무 장관 피츠로이 켈리의 형제인 윌리엄 켈리와 장기간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도 있다.[8][9]

2. 2. 교육

루이스는 요크의 학장 존 폰테인 박사 밑에서 메릴본 신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작문, 산수, 그림, 춤, 펜싱 등 다양한 과목을 배웠으며, 학생들은 하루 종일 프랑스어로만 대화해야 했다. 이후 아버지처럼 8세에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입학했다. 웨스트민스터 재학 중에는 《존 왕》의 팰컨브리지 역이나 제임스 타운리의 《하이 라이프 빌로우 스테어스》에서 마이 로드 공작 역을 맡아 연기하기도 했다.

1790년 4월 27일,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했다. 그는 1794년에 학사 학위를, 1797년에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 루이스는 고전 언어 학습 의무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으며, 외교관이 되기 위해 현대 언어를 배우고자 학업 기간 중 상당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1791년에는 파리, 1792년에는 바이마르에 머물렀는데, 이때 독일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괴테빌란트와 교류하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학업 중에도 창작에 관심을 보여 습작을 지속했다.

2. 3. 작가 활동

매슈 루이스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 활동에 관심을 보였다. 1791년 희극 ''서간의 음모''를 써서 어머니에게 보냈으나, 드루리 레인 극장과 코벤트 가든에서 모두 공연을 거절당했다. 비슷한 시기에 2권짜리 소설을 완성했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후 출판된 ''M. G. 루이스의 삶과 서신''에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다. 프랑스 오페라 ''펠릭스''를 번역하고, 호러스 월폴의 ''오트란토 성''과 같은 고딕 소설을 쓰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며, 희곡 ''동인도인''을 집필했으나 실제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독일 바이마르 체류 중에는 빌란트의 서사시 ''오베론''을 번역하여 괴테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초기 문학 활동은 주로 어머니의 생계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다.

매슈 루이스, 헨리 윌리엄 피커스길 작, 1809년


1794년 헤이그 주재 영국 대사관 부관으로 근무하던 시기, 단 10주 만에 로맨스 소설 『암브로시오』 또는 『수도사』(''Ambrosio, or the Monk'')를 완성했다.[10] 이듬해 여름 익명으로 출판된 이 소설은 즉각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나, 일부 외설적인 내용으로 인해 출판 약 1년 후 판매 금지 가처분 명령을 받기도 했다. 두 번째 판에서는 작가 자신과 윌트셔주 힌돈 지역구 하원 의원임을 밝혔고 문제 소지가 있는 구절을 삭제했지만, 작품의 끔찍한 특징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바이런 경은 ''영국 시인과 스코틀랜드 평론가들''에서 "경이로운 루이스, 수도사이자 시인이여 / 파르나소스 산을 교회 묘지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 / 심지어 사탄조차 너와 함께 사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고, / 너의 두개골에서 더 깊은 지옥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비판했으며,[10] 마르키 드 사드는 그의 에세이 "소설에 대한 고찰"에서 루이스를 칭찬했다.[10]

『수도사』의 성공 이후 루이스는 사교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고, 왕실에서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의 희곡 『캐슬 스펙터』(''The Castle Spectre'', 1796년)는 큰 성공을 거두어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으며, 이를 계기로 더 많은 희곡과 시를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또한 독일 문학 번역에도 힘썼는데,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간계와 사랑』(''Kabale und Liebe'', 루이스는 ''The Minister''라는 제목으로 번역),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의 ''Rolla'' 등을 영어로 옮겼다. 1804년에는 하인리히 초케의 『대도적 아벨리노』(''Abällino, der grosse Bandit'')를 번역한 『베니스의 악한』(''The Bravo of Venice'')을 출판했는데, 이는 『수도사』 다음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 되었다.

1802년에는 고딕 단막극 『포로』(''The Captive'')가 해리엇 리치필드 주연으로 단 한 차례 공연되었다. 남편에 의해 감금된 아내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무대 연출이 매우 사실적이고 공포스러워 관객들이 충격을 받았고, 공연 중 일부 여성 관객이 실신하여 중단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희곡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11] 당시 ''모닝 크로니클''의 평론은 이러한 반응을 언급하며 루이스의 의도에 대해 논평하기도 했다.

말년의 루이스 판화, 윌리엄 홀 작


작가로서 루이스는 앤 래드클리프의 『유돌포의 수수께끼』와 윌리엄 고드윈의 『캘럽 윌리엄스』 같은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3] 그러나 그는 래드클리프가 초자연적인 공포를 암시하는 '테러 고딕' 방식을 사용한 것과 달리, 끔찍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 '호러 고딕'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16]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는 찰스 매튜린, 메리 셸리와 함께 고딕 호러 장르의 대표적인 작가로 분류된다.[15]

루이스는 종종 독창성 부족과 표절 문제로 비판받았다. 특히 『수도사』와 『캐슬 스펙터』가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루이스 자신도 『수도사』 서문에서 산톤 바르시사 이야기, 독일 전설, 덴마크 발라드, 스페인 시 등 여러 출처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혔으나,[17]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같은 비평가들은 이를 표절의 증거로 삼았다. 이러한 비판은 루이스를 상당히 괴롭혔고, 그는 『수도사』 4판과 『캐슬 스펙터』 출판 시 주석을 달아 출처를 명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7] 이 전술의 성공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는 또한 토머스 홀크로프트와 같은 다른 극작가들의 연극을 위해 많은 서문과 에필로그를 썼으며, 때로는 초자연적 요소가 없는 다른 작가의 연극 에필로그 등에서 유령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이는 해당 연극에 유령이 등장하지 않는 점을 들어 불평하는 내용으로, 일종의 자기 풍자일 수 있다. 1801년에는 "마리티우스 문샤인"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반응을 풍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루이스는 자신의 작품이 선정적이라는 대중의 평가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이를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준 출처 목록을 명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181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후, 루이스는 직업적인 문필 활동에서는 점차 은퇴하고 자메이카에 소유한 농장 경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1816년 여름에는 제네바에서 퍼시 비시 셸리, 메리 셸리, 바이런, 존 폴리도리 등과 교류하며 유령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는 셸리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첫 소설로 알려진 ''감수성의 발산''(''The Effusions of Sensibility'')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사후에는 1833년 『서인도 제도의 농장 소유자의 일기』(''Journal of a West India Proprietor'')와 1839년 『M.G. 루이스의 생애와 서간집』(''The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ewis'') 2권이 출판되었다.

2. 4. 자메이카 농장 상속과 노예 제도

181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으며, 이후 문필업에서 은퇴하고 자메이카에 소유한 농장의 경영에 전념하게 되었다.[3] 루이스의 아버지는 자메이카 사바나-라-마르 근처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3] 루이스는 웨스트모어랜드의 콘월(Cornwall)과 세인트토머스의 호들리(Hordley) 두 곳에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호들리 농장은 노예 등록부에 따르면 1817년에 조지 스콧(George Scott)과 매슈 헨리 스콧(Matthew Henry Scott)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9]

1815년, 루이스는 자신의 서인도 제도 소유지를 4개월간 방문했다. 이 방문 경험은 그의 사후인 1833년에 간행된 Journal of a West India Proprietor|서인도 제도 소유주의 일기eng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노예 제도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1817년에는 다시 자메이카를 방문하여 노예들의 처우를 보다 인도적으로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자메이카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열대 기후에서의 피로 누적과 황열병 발병으로 인해 배 위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수장되었다.

2. 5. 죽음

1817년 자메이카를 방문하여 노예들의 대우를 보다 인도적인 것으로 개선했다. 그러나 열대 기후로 인한 피로로 황열병에 걸려 귀항하는 배 위에서 숨을 거두고, 수장되었다.

3. 작품 세계

(내용 없음)

3. 1. 고딕 소설의 영향



작가로서 루이스는 일반적으로 고딕 호러 장르의 작가로 분류되며, 찰스 매튜린과 메리 셸리와 함께 거론된다.[15] 그는 앤 래드클리프의 ''유돌포의 수수께끼''와 윌리엄 고드윈의 ''캘럽 윌리엄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루이스는 ''수도사''를 쓰기 시작하기 몇 달 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돌포의 수수께끼''의 악당 몬토니와 자신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

루이스는 래드클리프가 보여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탐닉과 고드윈의 서사 전개 방식, 그리고 범죄와 처벌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지만, 그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래드클리프가 '공포-고딕' 장르 안에서 상상을 통해 공포를 암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면, 루이스는 끔찍하고 충격적인 장면의 세부 사항을 직접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을 '고딕 호러'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16]

그러나 루이스는 종종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이 다른 작가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데 할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특히 그의 대표 소설 ''수도사''와 희곡 ''캐슬 스펙터''에 집중되었다. 루이스는 ''수도사''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며 이러한 논란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로맨스에 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는 가디언에 실린 산톤 바르시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 피 흘리는 수녀는 여전히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며, 그녀가 출몰한다고 여겨지는 라우엔슈타인 성의 폐허는 튀링기아의 경계에서 아직 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세 번째 연에서 열두 번째 연까지의 물의 왕은 덴마크 발라드의 원본 조각입니다. – 그리고 벨레르마와 듀란다르테는 옛 스페인 시 모음집에 있는 몇 개의 연에서 번역되었으며, 여기에는 돈 키호테에 언급된 가이페로스와 멜레신드라의 인기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표절을 완전히 밝힙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표절이 더 발견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월간 평론''의 평론가처럼 일부는 이러한 기존 작품의 조합을 새로운 창조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포함한 다른 비평가들은 루이스가 영감의 출처를 밝힘으로써 스스로 저작권의 일부를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루이스는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고, ''수도사''의 네 번째 판에 주석을 추가하고 ''캐슬 스펙터'' 출판 시에도 텍스트에 주석을 달아 표절 혐의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평가가 엇갈린다.[17]

루이스의 모노드라마 ''포로''는 남편에 의해 강제로 정신 병원에 갇힌 여성이 그곳에서 겪는 끔찍한 경험을 통해 점차 광기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다. 짧은 분량의 대본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병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신체적 폭력을 느리게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연 도중 여성 관객들이 기절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중단되기도 했다. ''모닝 크로니클''은 "관객의 눈물은 일반적으로 가장 높은 찬사로 여겨져 왔지만... 히스테리 발작으로 보상받는 시인은 이상한 취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고 평했는데, 이는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 이를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루이스는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상연된 다른 공연들, 특히 토머스 홀크로프트의 작품들에 많은 에필로그와 서문을 썼다. 그는 때때로 초자연적인 요소가 없는 연극에 유령을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해당 연극에 유령이 없다는 점을 불평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홀크로프트의 ''나브인가 아닌가?''(1798) 서문에서는 "나는 전체 극 중에서 유령 하나 보지 못했고 / 비극의 시작 부분을 한 번도 찾을 수 없다"고 썼는데, 이는 의도적인 자기 풍자일 수 있다.

루이스는 1801년 "마리티우스 문샤인"이라는 가명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혐오스러운 볼거리"라고 비난하고, 가난한 국회의원인 자신을 "더 밝은 부분은 사라지고 / 국가의 복지는 고블린에 의해 훼손된다"고 묘사했다. ''알폰소, 카스티야의 왕'' 서문에서는 "이 연극이 형편없다고 말하게 하라"고 쓰기도 했다. 이처럼 루이스는 자신의 작품이 선정적이고 수준 낮다는 대중의 평가를 항상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받아들이고 크게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사소한 표절" 목록과 함께 출처 인정이 붙어 있다.

''수도사''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도 이어졌다. 바이런은 그의 풍자시 ''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1809년)에서 "수도사이자 시인 루이스의 놀라운 작품으로 인해, 파르나소스 산은 기꺼이 묘지가 되었고, 사탄조차 살기를 두려워하며, 너의 해골은 더 깊은 지옥을 알게 되리라"고 언급하며 그 충격적인 내용을 평했다. 반면, 마르키 드 사드는 에세이 ''Idée sur les romans''(1800년)에서 루이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1924년)에서 『수도사』를 "문학의 영역에서는, 단지 불가사의만이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증명"으로 언급했다.[20]

3. 2. 표절 논란

루이스는 종종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소설 수도사와 희곡 캐슬 스펙터가 주요 대상이 되었다. ''수도사''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밝히며 자신이 참고한 출처들을 명시했다.

: 이 로맨스에 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는 가디언에 실린 산톤 바르시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 피 흘리는 수녀는 여전히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며, 그녀가 출몰한다고 여겨지는 라우엔슈타인 성의 폐허는 튀링기아의 경계에서 아직 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세 번째 연에서 열두 번째 연까지의 물의 왕은 덴마크 발라드의 원본 조각입니다. – 그리고 벨레르마와 듀란다르테는 옛 스페인 시 모음집에 있는 몇 개의 연에서 번역되었으며, 여기에는 돈 키호테에 언급된 가이페로스와 멜레신드라의 인기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표절을 완전히 밝힙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표절이 더 발견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월간 평론의 평론가처럼 일부는 이러한 조합을 새로운 창작으로 평가했지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비롯한 다른 비평가들은 루이스가 영감을 얻은 출처를 밝힘으로써 저작권의 일부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7]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루이스는 ''수도사''의 네 번째 판과 ''캐슬 스펙터'' 출판 시 텍스트에 주석을 추가하여 표절 혐의에 맞섰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 방식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7]

루이스는 이후 "마리티우스 문샤인"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 반응을 풍자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글을 "혐오스러운 볼거리"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비판했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사소한 표절" 목록과 함께 출처 인정을 덧붙였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이 독창성 면에서 비판받는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3. 주요 작품



작가로서 루이스는 고딕 호러 장르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며, 특히 ''수도사''로 잘 알려져 있다.[15] 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소설'''

  • ''감수성의 발현'' (The Effusions of Sensibilityeng, 미완)
  • ''수도사: 로맨스'' (The Monk: A Romanceeng, 1796년, 개정 1798년)
  • ''베니스의 브라보'' (The Bravo of Veniceeng, 1805년)
  • 《로맨틱 이야기》( Romantic Taleseng, 1808년)


'''희곡'''

  • ''마을의 덕목: 극적인 풍자'' (The Village Virtues: A Dramatic Satireeng, 1796)
  • ''성의 유령'' (The Castle Spectreeng, 1796)
  • ''장관: 5막 비극'' (The Minister: A Tragedy, in Five Actseng, 1797)
  • ''동인도인: 5막 희극'' (The East Indian: A Comedy, in Five Actseng, 1800)
  • ''아델모른, 무법자'' (Adelmorn, the Outlaweng, 1801)
  •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5막 비극'' (Alfonso, King of Castile: A Tragedy, in Five Actseng, 1801)
  • ''루간티노'' (Rugantinoeng, 1805)[18]
  • ''아델기타; 또는, 단 하나의 오류의 결과. 5막 비극'' (Adelgitha; or, The Fruits of a Single Error. A Tragedy, in Five Actseng, 1806)
  • ''한 시: 또는, 기사와 나무 악마, 그랜드 뮤지컬 로맨스'' (One O'Clock: Or, The Knight and the Wood Daemon, A Grand Musical Romanceeng, 1811)
  • ''티무르 더 타타르'' (Timour the Tartareng, 1811)
  • ''포로'' (The Captiveeng)


'''시 및 모음집'''

  • 《경이로운 이야기》( Tales of Wondereng, 1801년)
  • 《시집》( Poemseng, 1812)
  • 《악마의 섬》( The Isle of Devilseng, 1816)


'''기타'''

  • ''서인도 제도 소유주의 일지'' (Journal of a West Indian Proprietoreng, 1833년, 사후 출판)
  • ''M. G. 루이스의 생애와 서신'' (The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ewiseng, 1839년, 사후 출판)

4. 평가 및 영향



작가로서 루이스는 일반적으로 고딕 호러 장르의 작가로 분류되며, 찰스 매튜린이나 메리 셸리와 같은 작가들과 함께 언급된다.[15] 그는 앤 래드클리프의 ''유돌포의 수수께끼''와 윌리엄 고드윈의 ''캘럽 윌리엄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루이스는 ''수도사''를 집필하기 몇 달 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돌포의 수수께끼''의 악당 몬토니와 자신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

루이스는 래드클리프의 초자연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과 고드윈의 서사 방식, 범죄와 처벌에 대한 주제를 차용했지만, 문학적 접근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래드클리프가 공포-고딕 장르 내에서 상상 속의 공포를 암시하는 방식을 사용한 반면, 루이스는 끔찍한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고딕 호러 소설가로서의 특징을 드러냈다.[16]

그는 종종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작품 활동 상당 부분이 다른 작가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데 할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주로 그의 소설 ''수도사''와 희곡 ''캐슬 스펙터''에 집중되었다. 루이스는 ''수도사'' 서문에서 산톤 바르시사 이야기, 피 흘리는 수녀 전설, 덴마크 발라드, 옛 스페인 시 등 자신이 참고한 여러 출처를 밝혔는데, 이는 표절 논란을 의식한 대응으로 보인다.

이 로맨스에 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는 가디언에 실린 산톤 바르시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 피 흘리는 수녀는 여전히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며, 그녀가 출몰한다고 여겨지는 라우엔슈타인 성의 폐허는 튀링기아의 경계에서 아직 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세 번째 연에서 열두 번째 연까지의 물의 왕은 덴마크 발라드의 원본 조각입니다. – 그리고 벨레르마와 듀란다르테는 옛 스페인 시 모음집에 있는 몇 개의 연에서 번역되었으며, 여기에는 돈 키호테에 언급된 가이페로스와 멜레신드라의 인기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표절을 완전히 밝힙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표절이 더 발견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출처 공개에 대해 ''월간 평론''과 같은 일부 비평가들은 기존 작품의 조합을 새로운 창작으로 평가했지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루이스가 영감을 얻은 출처를 밝힘으로써 저작권의 일부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란은 루이스를 괴롭혔고, 그는 ''수도사''의 네 번째 판과 ''캐슬 스펙터'' 출판 시 주석을 추가하며 표절 혐의에 대응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7]

루이스의 모노드라마 ''포로''는 남편에 의해 정신 병원에 강제로 갇힌 여성이 겪는 끔찍한 경험을 다루는데, 공연 중 일부 여성 관객이 기절하여 중단되기도 했다. ''모닝 크로니클''은 이를 두고 "관객의 눈물이 일반적으로 가장 높은 찬사로 여겨지지만, 히스테리 발작으로 보상받는 시인은 이상한 취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고 평하며,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루이스는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상연된 다른 공연, 대개 토머스 홀크로프트의 공연에 많은 에필로그와 서문을 제공했다. 루이스는 그렇지 않은 초자연적이지 않은 연극에 유령을 삽입하곤 했다. 이 유령들은 해당 비초자연적 연극에 유령이 부족하다며 불평하곤 했다. "나는 전체 부분에서 유령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 비극의 시작 부분을 한 번도 찾을 수 없다"(홀크로프트의 ''나브인가 아닌가?'', 1798년). 이것은 의도적인 자기 조롱을 나타낼 수 있다.

루이스는 1801년에 "마리티우스 문샤인"이라는 가명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을 풍자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글을 "혐오스러운 [sic] 볼거리"라고 비방하고, 가난한 국회의원인 자신을 "더 밝은 부분은 사라지고 / 국가의 복지는 고블린에 의해 훼손된다"라고 모욕했다. ''알폰소, 카스티야의 왕''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이 연극이 멍청하다는 것을 말하게 하라"고 썼다. 루이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의견이 형편없고 선정적이라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였으며,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사소한 표절" 목록과 함께 인정이 붙어 있다.

''수도사''에 관해서는 바이런은 그의 풍자시 ''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1809년)에서 "수도사이자 시인 루이스의 놀라운 작품으로 인해, 파르나소스 산은 기꺼이 묘지가 되었고, 사탄조차 살기를 두려워하며, 너의 해골은 더 깊은 지옥을 알게 되리라"고 썼으며, 마르키 드 사드는 에세이 ''Idée sur les romans''(1800년)에서 루이스를 칭찬했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1924년)에서는 "문학의 영역에서는, 단지 불가사의만이, ~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의 "훌륭한 증명"으로서 『수도사』를 언급하고 있다[20]

5. 작품 목록


  • ''감수성의 분출'' (미완)
  • ''몽크'' (The Monk) 1796년
  • ''캐슬 스펙터'' (The Castle Spectre) 1796년
  • ''경이로운 이야기'' (Tales of Wonder) 1801년
  • ''베니스의 브라보'' (The Bravo of Venice) 1805년
  • ''로맨틱 이야기'' (Romantic Tales) 1808년
  • ''서인도 제도 소유주의 일지'' (Journal of a West Indian Proprietor) 1833년
  • ''M. G. 루이스의 생애와 서신'' (The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ewis) 1839년

5. 1. 소설



작가로서 루이스는 일반적으로 고딕 호러 장르 작가로 분류되며, 찰스 매튜린과 메리 셸리와 함께 언급된다.[15] 그는 앤 래드클리프의 ''유돌포의 수수께끼''와 윌리엄 고드윈의 ''캘럽 윌리엄스''의 영향을 받았다. 루이스는 ''수도사''를 쓰기 전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돌포의 수수께끼''의 악당 몬토니와 자신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

루이스는 래드클리프의 초자연적 요소에 대한 접근이나 고드윈의 서사 구조, 범죄와 처벌에 대한 관심을 이어받았지만, 문학적 방식은 달랐다. 래드클리프가 공포-고딕(terror-gothic) 장르 안에서 상상을 통해 공포를 암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면, 루이스는 끔찍한 장면의 세부 묘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호러-고딕(horror-gothic) 작가로서의 특징을 보였다.[16]

루이스는 종종 독창성 부족으로 비판받았다. 그의 작업 상당 부분이 다른 텍스트 번역에 할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특히 그의 대표 소설 ''수도사''에 자주 제기되었다. 루이스는 ''수도사''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며 작품의 영감과 출처를 인정했다.

이 로맨스에 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는 가디언에 실린 산톤 바르시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 피 흘리는 수녀는 여전히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며, 그녀가 출몰한다고 여겨지는 라우엔슈타인 성의 폐허는 튀링기아의 경계에서 아직 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세 번째 연에서 열두 번째 연까지의 물의 왕은 덴마크 발라드의 원본 조각입니다. – 그리고 벨레르마와 듀란다르테는 옛 스페인 시 모음집에 있는 몇 개의 연에서 번역되었으며, 여기에는 돈 키호테에 언급된 가이페로스와 멜레신드라의 인기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표절을 완전히 밝힙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표절이 더 발견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월간 평론''의 평론가처럼 일부는 이러한 조합을 새로운 창작으로 보기도 했지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포함한 다른 비평가들은 루이스가 영감의 출처를 밝힘으로써 저작권의 일부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루이스는 ''수도사'' 4판에 주석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7]

루이스가 쓴 소설은 다음과 같다.

  • ''감수성의 발현'' (미완)
  • ''수도사: 로맨스'' (3권, 1796년, 개정 1798년)
  • ''베니스의 브라보'' (1805년)
  • ''감수성의 분출'' (미완)

5. 2. 시


  • ''경이로운 이야기'' (Tales of Wonder영어) (1801년)
  • 《시집》 (1812년)
  • 《악마의 섬》 (1816년)

5. 3. 번역


  • ''봉건 폭군; 또는, 칼스하임과 사르간의 백작들. 로맨스'' (1806)
  • * 베네딕테 노이버트의 ''엘리자베스, 토겐부르크의 상속녀, 또는 스위스 사르간의 여인들의 이야기'' (1789)를 자유롭게 번역한 작품이다.

5. 4. 단편 소설


  • 《아나콘다》 (The Anacondaeng)
  • 《한밤의 포옹》 (The Midnight Embraceeng)
  • 《미스트러스트》 (Mistrusteng)
  • 《포로》 (The Captiveeng)
  • 《삼촌의 다락방 창문》 (My Uncle’s Garret Windoweng)
  • "오베론의 부하 또는 세 자매의 전설"

5. 5. 컬렉션


  • 『몽크』 (The Monk) (1796)
  • 《캐슬 스펙터》 (The Castle Spectre) (1796)
  • 《테일즈 오브 테러》 (Tales of Terror) (1799)
  • 《경이로운 이야기》 (Tales of Wonder) (1801)
  • 《베니스의 브라보》 (The Bravo of Venice) (1805)
  • 《로맨틱 이야기》 (Romantic Tales) (1808)
  • 《서인도 제도 소유주의 일지》 (Journal of a West Indian Proprietor) (1833)
  • 《M. G. 루이스의 생애와 서신》 (The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ewis) (1839)
  • 《감수성의 분출》 (미완)

5. 6. 희곡



작가로서 루이스는 일반적으로 고딕 호러 장르의 작가로 분류되며, 찰스 매튜린과 메리 셸리와 함께 언급된다.[15] 그는 앤 래드클리프의 ''유돌포의 수수께끼''와 윌리엄 고드윈의 ''캘럽 윌리엄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적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다. 래드클리프가 공포-고딕 장르에서 상상 속의 공포를 암시하는 방식을 사용한 반면, 루이스는 끔찍한 장면의 세부 사항을 직접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딕 호러 소설가로 정의했다.[16]

루이스는 종종 독창성 부족으로 비판받았는데, 이는 그의 소설 ''수도사''와 희곡 ''캐슬 스펙터''에 특히 자주 적용되었다. 그는 ''수도사'' 서문에서 자신이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로맨스에 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는 가디언에 실린 산톤 바르시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 피 흘리는 수녀는 여전히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며, 그녀가 출몰한다고 여겨지는 라우엔슈타인 성의 폐허는 튀링기아의 경계에서 아직 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세 번째 연에서 열두 번째 연까지의 물의 왕은 덴마크 발라드의 원본 조각입니다. – 그리고 벨레르마와 듀란다르테는 옛 스페인 시 모음집에 있는 몇 개의 연에서 번역되었으며, 여기에는 돈 키호테에 언급된 가이페로스와 멜레신드라의 인기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표절을 완전히 밝힙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표절이 더 발견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이전 작품의 조합을 새로운 발명으로 보았지만,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루이스가 영감을 얻은 출처를 밝힘으로써 저작권의 일부를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루이스는 ''수도사''의 네 번째 판에 주석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캐슬 스펙터''를 출판할 때 텍스트에 주석을 달아 표절 혐의에 대응했다. 이 전략의 성공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17]

루이스의 모노드라마 ''포로''는 남편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 병원에 갇힌 여성이 그곳에서 목격하는 끔찍한 광경을 통해 점차 스스로 미쳐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몇 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대본이지만, 공연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육체적 폭력의 느린 재현으로 대부분의 시간이 채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공연은 관객 중 여성들이 기절하여 중간에 중단되기도 했다. ''모닝 크로니클''의 평론은 "관객의 눈물은 일반적으로 가장 높은 종류의 박수로 여겨져 왔다...[하지만] 히스테리 발작으로 보상을 받는 시인은 이상한 취향을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루이스 자신이 관객을 "발작" 상태로 만들고 그것으로 "보상"받는 것을 즐기는 태도를 취했음을 시사했다.

루이스는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상연된 다른 공연, 대개 토머스 홀크로프트의 공연에 많은 에필로그와 서문을 제공했다. 그는 초자연적이지 않은 연극에 유령을 삽입하여, 그 유령이 해당 연극에 유령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대사를 넣곤 했다. 예를 들어 홀크로프트의 ''나브인가 아닌가?''(1798)에서는 "나는 전체 부분에서 유령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 비극의 시작 부분을 한 번도 찾을 수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의도적인 자기 조롱을 나타낼 수 있다.

루이스는 1801년에 "마리티우스 문샤인"이라는 가명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을 풍자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글을 "혐오스러운 [sic] 볼거리"라고 비방하고, 가난한 국회의원인 자신을 "더 밝은 부분은 사라지고 / 국가의 복지는 고블린에 의해 훼손된다"라고 모욕했다. ''알폰소, 카스티야의 왕''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이 연극이 멍청하다는 것을 말하게 하라"고 썼다. 루이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의견이 형편없고 선정적이라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평가를 받아들이고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사소한 표절" 목록과 함께 이에 대한 인정이 붙어 있다.

다음은 루이스가 쓴 희곡 작품 목록이다.

제목연도
마을의 덕목: 극적인 풍자1796
캐슬 스펙터1796
장관: 5막 비극1797
동인도인: 5막 희극1800
아델모른, 무법자1801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5막 비극1801
루간티노1805[18]
아델기타; 또는, 단 하나의 오류의 결과. 5막 비극1806
한 시: 또는, 기사와 나무 악마, 그랜드 뮤지컬 로맨스1811
티무르 더 타타르1811
포로미상
감수성의 분출미완


5. 7. 논픽션


  • ''더 많은 경이: M. G. 루이스에게 보내는 영웅적 서신 \[그의 작품에 대한 풍자] 특별 서문과 연합에 대한 송시'' (More Wonders: An Heroic Epistle to M. G. Lewis \[A satire on his writings] With a Praescript Extraordinary and An Ode on the Unioneng, 1801)
  • ''자메이카 섬 거주 기간 동안 작성된 서인도 제도 소유주의 일지'' (Journal of a West India Proprietor, kept during a residence in the Island of Jamaicaeng, 1833)
  • ''M. G. 루이스의 생애와 서신'' (The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ewiseng, 1839)
  • ''감수성의 분출'' (미완)

참조

[1] 웹사이트 Matthew Lewis http://wordsworth-ed[...] Wordsworth Editions 2017-11-14
[2] 서적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ewis, Author of "The Monk," "Castle Spectre," &c. With Many Pieces in Prose and Verse, Never Before Published Great Marlborough
[3] 논문 A Life of Matthew G. Lewis http://hdl.handle.ne[...] Harvard UP
[4] 문서 The Monk: A Romance Broadview 2004
[5] 논문 Matthew Lewis and the Gothic Horror of Obsessional Neurosis 2005
[6] 서적 'The Life and Correspondence of M. G. L. With many pieces in Prose and Verse never before published – Volume 1' Henry Colburn 1839
[7] 문서 p. 212
[8] 웹사이트 excavating-early-queer-history https://historyofpar[...]
[9] 웹사이트 https://rictornorton[...]
[10] 서적 The Monk Oxford UP 1973
[11]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London stage, 1789–1805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12] 웹사이트 Copies of Jamaican slave registers held by The National Archives are available on Ancestry http://content.ances[...] 2009-04-19
[13] 웹사이트 Matthew Gregory Lewis https://www.ucl.ac.u[...] University College, London 2015-11-12
[14] 서적 The Jamaican Stage, 1655–1900: Profile of a Colonial Theatre https://books.google[...] Univ of Massachusetts Press 1992
[15] 간행물 Gothic versus Romantic: A Revaluation of the Gothic Novel 1969
[16] 간행물 "Gothic versus Romantic": A Rejoinder 1971
[17] 간행물 The Gothic Villain and the Vilification of the Plagiarist: The Case of The Castle Spectre 2005
[18] 문서 1811 playbill in Wisbech & Fenland Museum collection.
[19] 웹사이트 Copies of the Jamaican slave registers held by The National Archives are available on Ancestry http://content.ances[...]
[20] 서적 シュルレアリスム宣言・溶ける魚 岩波文庫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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