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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나하추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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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의 나하추 정벌은 1380년대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던 몽골 잔존 세력인 나하추를 명나라가 정벌한 사건이다. 1386년 홍무제는 펑성 장군에게 20만 명의 군사를 주어 나하추를 공격하게 했으며, 란위와 푸유더가 펑성을 보좌했다. 명군은 요동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병참 기지를 구축하여 나하추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결국 나하추는 명나라에 항복했다. 이후 홍무제는 란위에게 몽골의 토구스 테무르를 공격하도록 명하여 부이르호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나라는 안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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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나하추 정벌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명나라의 군사적 정복의 일부
시기1387년
장소만주
결과명나라의 승리
만주의 영토명나라의 만주 정복
교전 세력
교전국 1명나라
교전국 2오리앙카이 몽골족 군대
지휘관 및 지도자
명나라펑성
푸유데
란위
주체, 연왕
오리앙카이나하추
병력 규모
명나라200,000명의 군인
오리앙카이알 수 없음
부대 규모
명나라150,000명의 야전 군인
50,000명의 요새 군인
오리앙카이알 수 없음
사상자 및 피해
명나라알 수 없음
오리앙카이알 수 없음

2. 배경

1380년대 북원의 장군 나하추는 요동 지방에서 몽골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들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명나라 북동쪽 국경에서 군사적 충돌이 잦아졌고, 대내외적 안정을 원했던 홍무제는 이들을 정벌할 필요성을 느꼈다.[1] 나하추만주의 여러 몽골 부족을 우량카이로 조직했고,[1] 이들은 명나라 동북 변경을 따라 중국과 자주 충돌했다.[1][3]

3. 과정

나하추와 휘하 부하들은 결국 명나라에 항복하였다. 항복일은 1387년 7월 14일[3]이라고도 하고, 10월[2]이라고도 한다. 다만 나하추는 항복하였으나, 몇몇 하급 부관들은 나하추의 항복이 원나라에 대한 배반이라고 보고 끊임없이 저항을 계속하였다. 나하추의 항복 이후 명나라 군대는 철군하기 시작했는데, 이 도중 몽골 잔존 군대의 공격을 받아 군대 측면에 인명 피해를 입었다.[3]

3. 1. 명군의 진격과 초기 전투

1386년 12월, 명나라 홍무제는 풍승 장군에게 20만 명의 대군을 주어 몽골의 잔존 세력을 정벌할 것을 명했다.[2] 1387년 풍승은 대장군에 봉해졌고, 푸유더 장군과 남옥 장군을 그 휘하로 삼게 하였다. 풍승은 이후 대군을 거느리고 현재의 금산(金山) 지역의 지배권을 손에 넣으러 출발하였다.[2]

명군은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 지역으로 나아갔는데, 요동에 총 4개의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모두 5만여 명의 병력을 그곳에 주둔시켰다.[3] 풍승 대장군과 푸유더 장군은 1군을 지휘하여 앞에서 나아갔고, 남옥 장군은 후발대를 이끌고 뒤에서 물자를 보충하였다.[1] 당시 황자의 신분이었던 영락제도 호위병을 거느리며 이 전쟁에 참가했는데, 큰 활동을 보이지는 않았다.[1]

1388년 1월, 풍승 대장군은 군사들을 통주로 이끌었고, 남옥 장군에게 기병을 이끌고 몽골군대를 무찌를 것을 명했다.[2] 남옥은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했고, 수많은 몽골 관리와 병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수많은 사람과 가옥들을 전리품으로 취했다.[2] 1387년 3월 20일,[3] 풍승 장군은 기세를 몰아 몽골군을 만리장성 위쪽으로 완전히 몰아냈고, 그들을 쫓아 북쪽으로 올라갔다.[3][2] 병참기지는 만리장성 주위의 4곳(다닝(大寧), 푸위(富峪), 후이저우(會州), 콴허(寛河))에 세워졌고,[3] 1387년 여름에 모두 완공되어 기능을 다하기 시작했다. 수백만 피컬의 식량이 네 개의 요새에 저장되었으며, 이는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1] 수많은 물자들이 주변 지역들에서 공출되어 이 요새들에 저장되었고, 요새들의 총책임은 홍무제의 17번째 아들인 주천이 맡았다.

한편 풍승 대장군은 군사를 동쪽으로 몰았는데, 병참기지에 약 50,000여 명의 병사들을 남겨 방비를 다하게 하였다.[2] 1387년 7월에 요하를 도하하였고,[1]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지휘부가 있는 금산 지역에 당도하여 금산 서부 지역에 기지를 차렸다.[2] 풍승 대장군은 전에 사로잡혔던 나하추의 부관 나이라우에게 편지를 들려 나하추에게 돌려보냈는데, 이 편지에는 나하추가 즉시 항복할 것과 명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2] 그동안 남옥 장군은 만리장성 북부를 순회하며 몽골 유목민들을 학살하며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려 노력하였다.[1] 또한 수많은 쌀, 창, 군용 물자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요동지방으로 이동하였다.[1] 1387년 7월 7일, 전용 (陣鏞; 임강후)과 그의 부대는 주력 부대와 분리되어 매복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전용이 사망했다.[3]

3. 2. 병참 기지 구축과 나하추와의 대치

1386년 12월, 홍무제는 펑성 장군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몽골의 잔존 세력을 정벌할 것을 명했다.[2] 1387년 펑성은 대장군에 봉해졌고, 푸유더 장군과 란위 장군이 그 휘하에 배속되었다. 펑성은 대군을 이끌고 금산(金山)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러 출발하였다.[3]

명군은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 지역으로 진군하여, 요동에 4개의 병참 기지를 설치하고 5만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3] 펑성 대장군과 푸유덕 장군은 선봉군을 지휘했고, 남옥 장군은 후발대를 이끌며 물자를 보충했다. 당시 황자였던 주체도 호위병을 거느리고 참전했으나, 큰 활약은 없었다.[1]

1388년 1월, 펑성 대장군은 군사를 통주로 이끌었고, 란위 장군에게 기병을 이끌고 칭저우(慶州)의 몽골군을 공격하게 했다.[2] 란위는 작전에 성공하여 많은 몽골 관리와 병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2] 1387년 3월, 펑성은 몽골군을 만리장성 위쪽으로 몰아내고 북쪽으로 진격했다.[3][2] 만리장성 주변 4곳에 병참 기지가 세워졌고, 1387년 여름에 완공되어 기능을 시작했다. 주변 지역에서 징발된 물자들이 요새에 저장되었고, 홍무제의 17번째 아들 주권(朱權)이 총책임을 맡았다.[3]

한편 펑성 대장군은 군사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며, 병참 기지에 약 50,000여 명의 병사들을 남겨 방비를 강화했다.[2] 7월에 요하를 건너 금산 지역에 도착하여 서부에 기지를 구축했다. 펑성은 이전에 사로잡았던 나하추의 부관 나이라우에게 편지를 보내 나하추에게 항복과 명나라 지배 수용을 요구했다.[2] 그동안 란위 장군은 만리장성 북부에서 몽골 유목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쌀, 창, 군용 물자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요동 지방으로 수송되었다.[1]

나하추와 휘하 부하들은 결국 명나라에 항복했다. 항복 시기는 1387년 7월 14일[3] 또는 10월[2]로 기록이 엇갈린다. 나하추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일부 하급 부관들은 원나라에 대한 배반이라며 저항을 계속했다. 명나라 군대는 철군 중 몽골 잔존 군대의 공격을 받아 측면에 인명 피해를 입었다.[3]

3. 3. 나하추의 항복과 명군의 철수

나하추와 그의 몽골 부대는 명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다.[1][3][2] 드레이어(1982)는 항복 날짜가 1387년 7월 14일이라고 주장했고,[3] 랑글로이스(1998)는 1387년 10월이라고 주장했다.[2] 소규모 몽골 족장들은 나하추의 항복을 배신으로 여기고 계속 저항했다.[3] 명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으로 돌아가는 동안, 후위대가 매복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고, 후위대 사령관이었던 푸영(濮英)이 전사했다.[3]

4. 진압 이후

원정은 결국 나하추와 그의 휘하 장군들, 부하, 가족들을 사로잡는 것으로 끝났다.[3] 나하추와 6,500여 명에 달하는 그의 부관들과 가족들은 난징으로 보내졌고, 항복했다는 이유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2] 홍무제나하추에게 넓은 땅과 저택을 하사했으며, 나하추는 1388년 8월에 과음으로 사망하여 난징 바깥에 묻혔다.[2]

홍무제는 이 원정의 성공으로 인해 크게 고무되었고, 이후 남옥 장군에게 15만 명의 대군을 주어 몽골의 칸이었던 토구스 테무르를 칠 것을 명하였다. 이후 1388년에 부이르호 전투에 승리하며 명나라는 마침내 안정을 찾게 된다.[3]

5. 결과 및 영향

원정은 나하추와 그의 휘하 장군들, 부하, 가족들을 사로잡는 것으로 끝났다.[3] 나하추와 6,000여 명에 달하는 그의 부관들과 가족들은 난징으로 보내졌고, 항복했다는 이유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2] 그는 장시성의 국유지와 난징의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1388년 8월에 과음으로 사망하여 난징 바깥에 묻혔다.[2]

홍무제는 이 원정의 성공으로 인해 크게 고무되었고, 이후 란위 장군에게 15만 명의 대군을 주어 몽골의 칸이었던 토구스 테무르를 칠 것을 명하였다. 이후 1388년에 부이르호 전투에 승리하며 명나라는 마침내 안정을 찾게 된다.[3]

참조

[1] 서적 Perpetual Happiness: The Ming Emperor Yon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7: The Ming Dynasty, 1368–1644, Part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Early Ming China: A Political History, 1355-1435 Stan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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