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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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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동 정벌은 고려 말, 명나라의 요동 지역 진출에 대응하여 고려가 추진한 군사적 계획이다. 고려는 요동 지역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하며,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시도에 반발하여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요동 정벌 계획을 무산시켰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 왕조의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고, 결국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요동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한민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고려는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했다.[1]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에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갈등이 생겼다.[2]

고려는 1356년 (공민왕 5년)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이후 관서 지방(關西地方)과 관북 지방(關北地方)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1369년(공민왕 18년) 12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의 동녕부를 공격했고, 1370년 1월 동북면 원수 이성계압록강훈강(파저강)을 건너 이오로티무르가 지키는 우라산성을 함락시켰다. 같은 해 11월에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폈으나, 공민왕 사후 요동을 점령한 명나라가 군사력을 가진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과도한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7년(우왕 13년) 명나라는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했고, 1388년 2월 귀국한 설장수는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보고했다.[2] 같은 해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2] 고려 조정은 명나라와 외교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파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북원과 손을 잡고 요동을 공격하자는 주전파로 의견이 갈렸다.

2. 1. 요동 문제

요동은 역사적으로 여러 국가와 민족 간의 분쟁 지역이었으며, 고려명나라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다. 요동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한민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고려는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했다.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갈등이 생겼다.[2] 고려는 1356년(공민왕 5년)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이후 관서 지방(關西地方)과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1369년(공민왕 18년) 12월 고려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의 동녕부를 공격했다. 1370년 1월 동북면 원수 이성계압록강훈강(파저강, 婆猪江)을 건너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공민왕 사후 요동을 점령한 명나라가 상당한 군사력을 가진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명의 관계가 틀어졌다. 1387년(우왕 13년) 명나라는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했고, 1388년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는 '명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2] 같은 해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스스로 평안도로 행차하겠다고 나서면서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2] 고려 조정은 막강한 신흥 세력인 명나라와 외교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북원과 손을 잡고 요동을 쳐서 명나라에 본때를 보이자는 주전파(主戰派)로 의견이 갈렸다.

2. 1. 1. 고조선과 요동

고조선은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한반도 최초의 국가로, 요동은 고조선의 핵심 영역이었다. 기원전 29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서쪽 영토를 상실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1]

2. 1. 2. 고구려와 요동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다시 확보하며 성장한 국가로, 요동은 고구려의 중요한 영토였다. 313년 미천왕한사군을 몰아냈고, 402년 광개토대왕은 요동을 점령하여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다.[1] 고구려는 요양에 요동성을 쌓고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삼았다. 612년 수 양제는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1] 645년에는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격퇴되어 물러났다.[1]

2. 1. 3. 발해와 요동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요동은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98년 건국된 발해는 요동을 경략하여 200여 년간 이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1]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요동 지역을 차지하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했다. 이들은 200여 년간 요동 지역을 통치하며, 이 지역에 대한 한민족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2. 1. 4. 고려와 요동

요동은 요하(遼河) 동쪽 지방으로,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예맥족과 한족(漢族), 산융 등 북방 민족 사이의 쟁탈 지역이었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기원전 29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와의 전쟁에서 패배 후 삼국형성기 이후 요하 동쪽이 한민족의 영역이 되었다.[1]

전국시대 후반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해 이 지방을 점령했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진나라 영토가 되었다.[1] 한나라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는데, 313년 고구려 미천왕한사군을 몰아내고 402년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점령해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는 요양에 요동성을 쌓고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삼았다. 612년 수 양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645년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격퇴되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요동은 당나라 지배하에 들어갔다.

698년 건국된 발해가 요동을 경략하여 200여 년간 발해 영토였다. 926년 발해 멸망 후 요나라 영토가 되었고, 이후 금나라, 원나라가 지배하였다.

2. 2. 철령위 문제

1387년(우왕 13년), 명나라는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했다.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는 '명나라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보고했다.[2] 같은 해 음력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스스로 평안도로 행차하겠다고 나서면서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2] 고려 조정은 막강한 신흥 세력인 명나라와의 외교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북원과 손을 잡고 요동을 쳐서 명나라에 본때를 보이자는 주전파로 의견이 갈렸다.

2. 2. 1. 고려의 반원 정책과 요동 공격

공민왕 5년(1356년)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고려는 이후 관서 지방관북 지방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2]

공민왕 18년(1369년) 12월, 고려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원나라동녕부를 공격하게 했다. 이성계1370년 1월, 압록강훈강(파저강)을 건너 이오로티무르가 지키는 우라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2] 같은 해 11월,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을 공격하여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2]

이러한 고려의 군사적 행동은 외교적으로는 반원친명 정책의 일환이었으나, 공민왕 사후 요동을 점령한 명나라가 군사력을 가진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명의 관계는 악화되었다.[2]

2. 2. 2. 명나라의 압박과 고려의 대응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고려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이후 관서 지방(關西地方)과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1369년(공민왕 18년) 음력 12월 고려에서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동북면 원수 이성계1370년 음력 1월 압록강훈강(파저강, 婆猪江)을 건너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공민왕 사후 요동을 점령한 명나라가 상당한 군사력을 가진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감당키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명의 관계가 틀어졌다. 1387년(우왕 13년),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는 '명(明)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1388년(우왕 14년) 음력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스스로 평안도로 행차하겠다고 나서면서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2] 고려 조정은 막강한 신흥세력인 명나라와의 외교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북원과 손을 잡고 요동(遼東)을 쳐서 명나라에 본때를 보이는 실력행사를 하자는 주전파(主戰派)로 의견이 갈렸다.

3. 경과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에 대한 고려의 강경한 대응으로 시작된 요동 정벌은, 실제로는 고려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농사철 군사 징발과 왜구의 침탈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시중(侍中) 최영우왕과 함께 평양으로 가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는 5만여 명의 요동 정벌군을 편성했다.

우왕봉산에서 최영이성계에게 처음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음력 4월 1일),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으나 우왕은 이를 묵살했다.

우왕최영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강행, 평양에서 군사 징발을 독려하고 압록강 부교(浮橋) 설치를 지휘하는 등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 그러나 우왕은 정작 최영의 출전을 막고 자신의 곁에 남아줄 것을 청하였다.[3]

1388년 5월 22일, 압록강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회유하여 회군하였다.[4] (→위화도 회군)

당시 평안남도 성주에 있던 우왕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듣고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 군사들을 회유했다. 개경을 점령한 이성계최영고봉현으로 유배 보낸 뒤 처형하고,[5] 우왕의 급습 시도[6]를 무산시킨 뒤 1388년 6월 8일, 우왕강화로 내쫓았다.[7]

3. 1. 요동 정벌 추진과 4불가론

최영우왕의 지지를 받아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군사적 행동을 준비했다. 음력 4월,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조민수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되어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했다.[3]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 정벌에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묵살했다. 우왕은 평양에 머물며 군사 징발을 독려하고, 좌군과 우군을 정비했으며, 압록강에 부교(浮橋) 설치를 지휘했다. 최영은 총도통사, 이성계와 조민수는 각각 좌군도통사와 우군도통사로 임명되어 출정했다.[3]

4월 18일, 고려는 좌우군 3만 8,830명, 수송대 1만 1,634명, 말 2만 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은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했다. 그러나 5월 22일, 압록강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4](→위화도 회군)

3. 1. 1. 4불가론의 내용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이를 4불가론이라고 한다.

이유내용
첫째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以小逆大)
둘째(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 (夏月發兵)
셋째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는 것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3]


3. 1. 2. 이성계의 정치적 입장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 주자로, 고려 왕조 내에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며 4불가론을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

4불가론



이러한 요동 정벌 반대는 단순한 군사적 판단을 넘어, 이성계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훗날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4]

3. 2. 위화도 회군

이성계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진격, 정변을 일으켰다.(→위화도 회군) 이는 우왕최영의 요동 정벌 계획을 좌절시키고, 고려 왕조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농사철을 앞둔 군사 징발과 왜구의 침탈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시중(侍中)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음력 4월에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떠났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3만 8,830명 등 5만여 명의 병력을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

우왕봉산에서 최영이성계에게 처음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음력 4월 1일),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으나 우왕은 이를 묵살했다.

우왕최영은 반대 여론을 억누르고 출병을 강행하였고, 우왕은 평양에 머물며 군사 징발을 독려했다. 압록강에 부교(浮橋) 설치를 지휘하고 전국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편성, 최영을 총도통사, 이성계조민수를 좌우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의 출전을 막고 자신의 곁에 남아 보호해줄 것을 청하였다.[3]

고려는 음력 4월 18일, 전국에서 좌우군 3만 8,830명, 수송대 1만 1,634명, 말 2만 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은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하였다.

3. 2. 1. 위화도 회군의 배경

이성계는 요동 정벌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명나라와의 갈등 심화를 우려했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 고려 왕조 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회군을 결심했다.[3]

이성계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이유설명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以小逆大)고려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국력 차이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여름에 출병하는 것 (夏月發兵)농번기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백성들의 고통이 커지고 농사에 지장을 준다고 보았다.
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는 것 (擧國遠征, 倭乘其虛)고려군이 요동으로 가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장마철에는 활의 접착제가 녹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습한 날씨로 인해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왕최영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강행했다. 그러나 1388년 5월 22일, 압록강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4]

3. 2. 2. 위화도 회군의 전개

1388년 5월 22일, 압록강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4]

당시 성주(成州, 평안남도 성천군)에 있던 우왕은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동강을 건너 개경으로 돌아와 성난 군사들을 회유하였다.

개경을 점령한 이성계 일파는 최영의 군대를 물리치고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보낸 뒤 처형하였다.[5] 우왕은 군사들을 다독이며 이성계를 급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6]

3. 2. 3. 위화도 회군의 결과

1388년 음력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고 최영고봉현으로 유배보낸 뒤 처형하였다.[5] 이성계는 우왕을 급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6] 1388년 음력 6월 8일, 우왕은 강화로 쫓겨났다.[7] 이로써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 왕조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4. 의의

이 사건은 고려 내에서 개혁을 통해 나라를 재건하려던 최영 중심의 보수 세력(권문세족, 문벌귀족, 불교)과 이성계 중심의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신진 세력(신흥 무인, 신진사대부, 유교) 간의 충돌이 빚은 사건이었다.

4. 1. 권력 구도의 변화

위화도 회군은 고려 왕조 내 권력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최영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족 세력은 몰락하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인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를 지지하며, 새로운 왕조 건국의 주역으로 떠올랐다.[1]

4. 2. 조선 건국

이 사건은 고려 최영을 대표로 하는 보수 세력(권문세족, 문벌귀족, 불교)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신진 세력(신흥 무인, 신진사대부, 유교)의 충돌이 빚은 사건이었다.[1] 이 사건 이후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4년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1]

4. 2. 1.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의

이 사건은 고려 안에서 개혁을 통해 나라를 재건하려던 최영을 대표로 하는 보수 세력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신진 세력 간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4년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

4. 3.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역사적 의의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세력은 최영을 대표로 하는 보수 세력과의 충돌 속에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고, 이는 결국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민본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이성계의 4불가론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나라를 안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민생을 중시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정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평가한다.

참조

[1] 문서 요동반도
[2] 뉴스 명장 최영, 왜 이성계에게 당했나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11-01
[3] 서적 최영
[4] 서적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1388-05-22
[5] 서적 최영의 군사를 진압하고, 최영을 고봉현으로 귀양보내다
[6] 서적 우왕이 이성계 등을 급습하는데 실패하고 폐위당하다 1388-06-06
[7] 서적 왕이 영비와 함께 강화로 떠나다 138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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