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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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하추는 원나라 말기 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고려를 침략하여 이성계와 교전하였으나,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파했다는 기록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이후 명나라와 대립하다가 명에 투항하여 해서후에 봉해졌으며, 윈난성 정벌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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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케 테무르는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워 하남왕에 봉해진 무장으로, 차간 테무르의 양자로서 그의 군대를 이어받아 원나라 권력 다툼에 관여했으나 명나라 군에 패하여 북원으로 후퇴 후 병사했으며,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 1388년 사망 - 완풍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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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신우는 고려 말 원나라에서 몽골식 이름 망쿠다이로 활동하며 평장정사까지 오른 관리로서, 충선왕 옹호와 고려의 국익을 위한 활동을 펼치다 원나라에서 사망 후 고려에 안장되었다. - 원나라의 관료 - 염제신
염제신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원나라 관료 생활 후 고려로 돌아와 기철 일파 숙청과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공민왕의 후궁 신비 염씨의 아버지로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나하추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나하추 |
다른 이름 | 나하추 (納哈出) 나하추 (納哈褚) 나하추 (納哈出) 나하추 (那哈出) |
민족 | 몽골족 |
생애 | |
출생 | 1320년경 |
사망 | 1388년 (68세) |
사망 장소 | 우창 |
사인 | 과음으로 인한 질병 악화 |
활동 | |
소속 | 북원 |
직위 | 승상 |
주요 활동 | 카이두의 후예로 북원에 투항 1387년 명나라에 투항 |
칭호 | |
봉작 | 해서후(海西侯) |
기타 | |
참고 사항 | 술을 매우 좋아함 |
2. 생애
이 전투 후 나하추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5]
그러나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이야기는 '사료의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 사실인지 의문이 드는 면이 있다. 이성계측의 관찬사서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 등과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의 '삼봉집'이나 고려왕조 멸망 이후 이성계에게 출사해 조선의 신료가 된 권근의 '양촌집' 등의 이성계측의 기록들에만 보일뿐, 이성계의 반대편 인물들, 예를 들어 이색, 이숭인, 정몽주, 원천석 등의 문집들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또 중국쪽 기록에서도 이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몽골측의 기록에도 역시 없는 내용이라 무조건 이성계가 납합출을 대패시켰다는 이야기에 의문점이 들 수 밖에 없다. 또 조선왕조측의 기록들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도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키고 나서 고려 조정에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하추는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활약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사료의 교차검증'이 안 되므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황산대첩도 일본 측 기록에는 없으므로 교차검증이 안 되니 없었던 일인가. 고려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된 측면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사관의 입장을 말함이다. 고려사가 방대한 역사를 다루는 만큼 실제 있었던 일이나 인물이 누락된 경우는 있어도, 아예 없던 사실 자체를 만들어서 기록할만큼 허구로 가득찬 사서가 아님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고려사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서(史書)이지 진실 여부를 가리는 책이 아니다. 즉 우왕,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가 아니라고 해도 조선 왕조 입장에서 신돈의 아들, 손자라고 했으니 고려사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지 이들이 진짜 신돈의 아들, 손자인지 아닌지 판단까지 고려사에 바랄 수는 없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후대에 논의가 되고, 다른 평가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역시 고려사의 기록이 있었기에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고려사가 후대에 편찬된 사서이다 보니 먼 고려 전기, 중기의 일은 기록의 부실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성계와 나하추의 전투는 먼 고려 전기, 중기의 일도 아니고, 당대 혹은 후대에라도 반발과 논의가 일었을 것인데, 이런 정황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지란의 신도비에서는 이지란의 활약으로 이성계가 나하추에게서 무사했고 그의 활약으로 나하추가 후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지란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 과대포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것에 대한 이론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조선왕조측의 기록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풍토여서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한다.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파했다는 것은, 물론 어쨌든 사실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더 높지만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하겠다. 세상의 모든 역사서, 특히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관찬사서들은 권력자의 지시에 의해서 쓰여지는만큼 권력자의 입장에서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한 사례가 많다. 관찬사서들이 정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쓰여지는만큼 정확성, 상세성 면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하겠으나 공정성 면에서는 개인에 의해 쓰여지는 야사보다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사를 그대로 다 믿는다면, 우, 창왕도 신돈의 아들, 손자이고, 김저의 옥사와 윤이, 이초의 옥사도 정당한 옥사이고, 조선왕조단종실록, 세조실록, 선조실록에 쓰여진 것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다면 김종서, 사육신, 김덕령도 역적,죄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양식 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중 이런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지금의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믿고 있지 않다. 김종서,사육신,김덕령의 경우는 아예 후대의 조선왕조에서 충신으로 공식적으로 복권이 되어 이들 당시의 실록들이 조작 되었다는 것을 조선왕조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파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사실에 가깝다고 해야겠으나 앞으로 더 생각해 볼만한 여지는 있다 하겠다. 다만 황산대첩의 경우 이성계의 반대쪽 인물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이나 다른 고려측 인물의 기록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고, 또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이 전과를 바탕으로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상을 받은 기록도 분명히 존재한다. 교차검증에도 부합이 되고, 또 교차검증과는 별개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성계와의 교전 이후 1372년 나하추는 명군의 보급 기지였던 우가장을 기습해 명군 5000명을 죽이고 양곡 10만 석을 탈취했다.[6] 1386년 12월, 명 태조 주원장이 장군 풍승에게 요동 공격을 지시하자, 명군은 1387년 6월 나하추를 공격하여 금산(金山) 지역을 장악했다.[6] 기근까지 겹치자 나하추는 명에 투항하여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7] 1388년 운남 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2. 1. 고려와의 관계
이 전투 후 나하추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5]
그러나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이야기는 '사료의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 사실인지 의문이 드는 면이 있다. 이성계측의 관찬사서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 등과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의 '삼봉집'이나 고려왕조 멸망 이후 이성계에게 출사해 조선의 신료가 된 권근의 '양촌집' 등의 이성계측의 기록들에만 보일뿐, 이성계의 반대편 인물들, 예를 들어 이색, 이숭인, 정몽주, 원천석 등의 문집들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또 중국쪽 기록에서도 이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몽골측의 기록에도 역시 없는 내용이라 무조건 이성계가 납합출을 대패시켰다는 이야기에 의문점이 들 수 밖에 없다. 또 조선왕조측의 기록들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도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키고 나서 고려 조정에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하추는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활약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사료의 교차검증'이 안 되므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황산대첩도 일본 측 기록에는 없으므로 교차검증이 안 되니 없었던 일인가. 고려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된 측면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사관의 입장을 말함이다. 고려사가 방대한 역사를 다루는 만큼 실제 있었던 일이나 인물이 누락된 경우는 있어도, 아예 없던 사실 자체를 만들어서 기록할만큼 허구로 가득찬 사서가 아님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고려사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서(史書)이지 진실 여부를 가리는 책이 아니다. 즉 우왕,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가 아니라고 해도 조선 왕조 입장에서 신돈의 아들, 손자라고 했으니 고려사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지 이들이 진짜 신돈의 아들, 손자인지 아닌지 판단까지 고려사에 바랄 수는 없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후대에 논의가 되고, 다른 평가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역시 고려사의 기록이 있었기에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고려사가 후대에 편찬된 사서이다 보니 먼 고려 전기, 중기의 일은 기록의 부실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성계와 나하추의 전투는 먼 고려 전기, 중기의 일도 아니고, 당대 혹은 후대에라도 반발과 논의가 일었을 것인데, 이런 정황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지란의 신도비에서는 이지란의 활약으로 이성계가 나하추에게서 무사했고 그의 활약으로 나하추가 후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지란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 과대포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것에 대한 이론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조선왕조측의 기록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풍토여서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한다.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파했다는 것은, 물론 어쨌든 사실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더 높지만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하겠다. 세상의 모든 역사서, 특히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관찬사서들은 권력자의 지시에 의해서 쓰여지는만큼 권력자의 입장에서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한 사례가 많다. 관찬사서들이 정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쓰여지는만큼 정확성, 상세성 면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하겠으나 공정성 면에서는 개인에 의해 쓰여지는 야사보다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사를 그대로 다 믿는다면, 우, 창왕도 신돈의 아들, 손자이고, 김저의 옥사와 윤이, 이초의 옥사도 정당한 옥사이고, 조선왕조단종실록, 세조실록, 선조실록에 쓰여진 것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다면 김종서, 사육신, 김덕령도 역적,죄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양식 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중 이런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지금의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믿고 있지 않다. 김종서,사육신,김덕령의 경우는 아예 후대의 조선왕조에서 충신으로 공식적으로 복권이 되어 이들 당시의 실록들이 조작 되었다는 것을 조선왕조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파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사실에 가깝다고 해야겠으나 앞으로 더 생각해 볼만한 여지는 있다 하겠다. 다만 황산대첩의 경우 이성계의 반대쪽 인물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이나 다른 고려측 인물의 기록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고, 또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이 전과를 바탕으로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상을 받은 기록도 분명히 존재한다. 교차검증에도 부합이 되고, 또 교차검증과는 별개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다.
2. 1. 1. 이성계와의 전투에 대한 논란
이 전투 후 나하추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5]
그러나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이야기는 '사료의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 사실인지 의문이 드는 면이 있다. 이성계측의 관찬사서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 등과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의 '삼봉집'이나 고려왕조 멸망 이후 이성계에게 출사해 조선의 신료가 된 권근의 '양촌집' 등의 이성계측의 기록들에만 보일뿐, 이성계의 반대편 인물들, 예를 들어 이색, 이숭인, 정몽주, 원천석 등의 문집들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또 중국쪽 기록에서도 이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몽골측의 기록에도 역시 없는 내용이라 무조건 이성계가 납합출을 대패시켰다는 이야기에 의문점이 들 수 밖에 없다. 또 조선왕조측의 기록들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도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키고 나서 고려 조정에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하추는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활약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사료의 교차검증'이 안 되므로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황산대첩도 일본 측 기록에는 없으므로 교차검증이 안 되니 없었던 일인가. 고려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된 측면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사관의 입장을 말함이다. 고려사가 방대한 역사를 다루는 만큼 실제 있었던 일이나 인물이 누락된 경우는 있어도, 아예 없던 사실 자체를 만들어서 기록할만큼 허구로 가득찬 사서가 아님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고려사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서(史書)이지 진실 여부를 가리는 책이 아니다. 즉 우왕,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가 아니라고 해도 조선 왕조 입장에서 신돈의 아들, 손자라고 했으니 고려사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지 이들이 진짜 신돈의 아들, 손자인지 아닌지 판단까지 고려사에 바랄 수는 없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후대에 논의가 되고, 다른 평가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역시 고려사의 기록이 있었기에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고려사가 후대에 편찬된 사서이다 보니 먼 고려 전기, 중기의 일은 기록의 부실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성계와 나하추의 전투는 먼 고려 전기, 중기의 일도 아니고, 당대 혹은 후대에라도 반발과 논의가 일었을 것인데, 이런 정황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지란의 신도비에서는 이지란의 활약으로 이성계가 나하추에게서 무사했고 그의 활약으로 나하추가 후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지란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 과대포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것에 대한 이론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조선왕조측의 기록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풍토여서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한다.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파했다는 것은, 물론 어쨌든 사실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더 높지만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하겠다. 세상의 모든 역사서, 특히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관찬사서들은 권력자의 지시에 의해서 쓰여지는만큼 권력자의 입장에서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한 사례가 많다. 관찬사서들이 정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쓰여지는만큼 정확성, 상세성 면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하겠으나 공정성 면에서는 개인에 의해 쓰여지는 야사보다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사를 그대로 다 믿는다면, 우, 창왕도 신돈의 아들, 손자이고, 김저의 옥사와 윤이, 이초의 옥사도 정당한 옥사이고, 조선왕조단종실록, 세조실록, 선조실록에 쓰여진 것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다면 김종서, 사육신, 김덕령도 역적,죄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양식 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중 이런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지금의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믿고 있지 않다. 김종서,사육신,김덕령의 경우는 아예 후대의 조선왕조에서 충신으로 공식적으로 복권이 되어 이들 당시의 실록들이 조작 되었다는 것을 조선왕조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파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사실에 가깝다고 해야겠으나 앞으로 더 생각해 볼만한 여지는 있다 하겠다. 다만 황산대첩의 경우 이성계의 반대쪽 인물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이나 다른 고려측 인물의 기록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고, 또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이 전과를 바탕으로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상을 받은 기록도 분명히 존재한다. 교차검증에도 부합이 되고, 또 교차검증과는 별개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다.
2. 2. 명나라와의 관계
원(元) 말기 나하추는 스스로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다. 원이 몽골 고원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북원의 대칸 아유시리다르는 명을 압박하기 위해 만주 잘라이르의 나하추와 협력하였다.[6]1362년 2월, 나하추는 고려가 수복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기 위해 쌍성총관부 잔당 조소생과 함께 고려 동북면(함경남도 홍원 지방)을 침공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막게 하였고, 함흥 평야에서 나하추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이로 인해 조소생, 탁도경 등의 쌍성총관부 잔당 세력이 완전히 몰락했다.[5] 이 전투 후 나하추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5]
그러나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기록은 이성계 측 기록에만 보이고, 중국이나 몽골 측 기록에는 없어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고려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에 실제 있었던 일이 누락될 수는 있어도, 없던 사실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성계와의 교전 이후 1372년 나하추는 명군의 보급 기지였던 우가장을 기습해 명군 5000명을 죽이고 양곡 10만 석을 탈취했다.[6] 1386년 12월, 명 태조 주원장이 장군 풍승에게 요동 공격을 지시하자, 명군은 1387년 6월 나하추를 공격하여 금산(金山) 지역을 장악했다.[6] 기근까지 겹치자 나하추는 명에 투항하여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7] 1388년 운남 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3. 대중 문화
참조
[1]
서적
《明實錄‧太祖高皇帝實錄‧卷一百九十二》
[2]
서적
Harmony and War: Confucian Culture and Chinese Power Politics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7
[4]
서적
《明實錄‧太祖高皇帝實錄‧卷一百九十二》
[5]
실록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장 B면, 【영인본】 1책 4면
http://sillok.histor[...]
[6]
웹인용
명-북원 세다툼 틈타 ‘요동정벌’ 칼 빼든 공민왕
http://www.hani.co.k[...]
한겨레
[7]
서적
명사(明史) 본기(本紀) 태조(太祖) 홍무(洪武) 20년(1387) 9월 무인(戊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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