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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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령은 전연의 모용수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환온 격퇴 공로로 인한 모용평의 견제를 간파하고 전진으로 망명했다. 전진에서 왕맹의 계략에 빠져 전연으로 귀순했으나, 모용위의 의심을 받아 사성으로 보내져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섭규의 배신으로 사망했으나, 후연 건국 후 헌장태자로 추봉되었고, 조카 모용성이 황위에 오르자 헌장황제로 추존되었다.
모용령은 모용수와 선단씨의 장남이다.[3] 369년, 전연의 오왕 모용수는 동진의 환온의 북벌에 항전한 공이 있었지만, 시기심이 많은 태부 모용평에게 미움을 받았다.[2] 모용수는 속으로 걱정했지만 자식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이를 눈치챈 모용령이 몰래 이를 지적했다.[2] 모용수는 모용령에게 해결책을 묻자, 모용령은 용성으로 망명하여 어린 황제 모용위가 성장하여 모용수를 맞이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2. 생애
모용수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업을 떠나 용성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동쪽에서 독립하려는 계획이 새어 나가 추격을 받았다.[3] 모용령은 모용수에게 사방에서 영웅들을 모으고 있던 전진으로 망명할 것을 권했고, 모용수는 자식들을 데리고 전진에 몸을 의탁했다.[3]
부견은 모용수를 관군장군으로 삼았고,[2] 모용령 등의 재능을 아껴 예우했다. 왕맹은 낙양을 공격할 때 모용령에게 참군으로 길 안내를 시켰으나 부견은 따르지 않았고, 왕맹은 여러 번 모용수 일가를 제거할 것을 권했다.[3] 왕맹은 사람을 시켜 모용수의 말인 것처럼 꾸며, 모용수가 동쪽으로 귀환할 것이니 모용령도 계략을 써서 귀환하라고 전하게 했다.
모용령은 그 진위를 의심하며 하루 종일 주저하다가, 결국 옛 기병을 이끌고 석문에 있던 전연의 모용장 밑으로 달아났다. 모용위는 모용령이 반역을 해놓고 귀환한 것과 아버지 모용수가 전진에서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이간질을 의심하여 용성의 동북쪽 육백 리에 있는 사성으로 옮겼다. 모용령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사성에서 거병을 꾀했다. 사성 주변의 수비병 수천 명을 모두 후하게 대접하고 아문 맹규를 죽였으며, 성 대의 섭규를 좌우에 두었다.[3]
결국 수비병들로 동쪽의 위덕성을 습격하여 성랑 모용창을 죽이고 그 성을 거점으로 삼고 관을 설치하여 사람을 보내 동서의 수비병을 불렀는데 모두 응했다. 진동장군·발해왕 모용량이 용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령이 습격하려 했지만 모용령의 동생 모용린이 밀고했기 때문에 모용량은 성문을 닫았다. 섭규가 시직하고 있을 때 모용령을 공격하자, 모용령은 단마로 도주했고 아군은 모두 궤멸되었다. 섭규는 모용령을 추격하여 설려택에서 붙잡아 죽였다. 섭규는 용성에서 모용량에게 보고했고, 모용량은 섭규를 주살하고 모용령의 시신을 장례 지냈다.[3]
후연 건국 후 모용령은 헌장태자로 추봉되었다.[4] 조카 모용성이 즉위하자 헌장황제로 추존되었고, 아내 정씨는 헌장황후로 추존되었다.[4]
2. 1. 전연 시기
모용수의 장남으로 369년 모용수가 환온의 전연 침공을 막아내며 공을 세우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때 모용수는 모용령의 조언에 따라 우선 용성(龍城)으로 피신한 뒤 향후 모용위가 실권을 장악하고 모용수를 다시 등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2][3] 이에 모용수는 모용령과 함께 업을 떠나 용성으로 향했으나 모용평에게 계획이 발각되었고,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모용령은 모용수에게 전진으로 망명할 것을 권하였다.[3]
이후 모용령은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하였고, 모용수는 부견의 환대를 받아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임명되었다.[2] 하지만 부견을 따르던 왕맹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낙양을 정벌할 당시 모용령의 참군(参軍)으로 합류한 왕맹은 모용령에게 모용수가 전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속여 모용령이 전연의 모용장에게 귀순하도록 유도하였다.[3] 모용수가 전진에서 환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모용령이 갑작스럽게 전연으로 복귀하자, 모용위는 이를 의심하여 모용령에게 사성(沙城)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용령은 사성에 도착하자 반란을 꾀하였다.[3]
그 뒤 군영에서 맹규(孟嬀)를 살해한 뒤 성주인 섭규(涉圭)를 자신의 휘하로 들였으며, 위덕성(威德城)을 공격해 모용창(慕容倉)을 죽인 뒤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용성의 모용량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린의 밀고로 인해 실패하였고, 섭규에게 배신당해 도주하다가 설려택(薛黎澤)에서 붙잡혀 살해당했다.[3]
2. 2. 전진 시기
모용수의 장남 모용령은 369년 모용수가 환온의 전연 침공을 막아낸 후 모용평의 견제를 받게 되자, 모용수에게 용성(龍城)으로 피신할 것을 조언하였다. 이후 모용수는 모용령과 함께 전진으로 망명하였고, 부견의 환대를 받았으나 왕맹의 견제를 받았다.[3]
왕맹은 모용령이 전연의 모용장(慕容臧)에게 귀순하도록 유도하였다. 모용위는 갑작스럽게 전연으로 복귀한 모용령을 의심하여 사성(沙城)으로 보냈고, 모용령은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령은 군영에서 맹규(孟嬀)를 살해하고 섭규(涉圭)를 휘하에 들였으며, 위덕성(威德城)을 공격해 모용창(慕容倉)을 죽이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용성의 모용량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린의 밀고와 섭규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하고, 도주하다가 설려택(薛黎澤)에서 붙잡혀 살해당했다.[3]
2. 3. 전연 귀환과 반란
모용수의 장남 모용령은 369년 모용수가 환온의 전연 침공을 막아내며 공을 세우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3] 모용수는 걱정했지만 자식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이를 눈치챈 모용령이 몰래 지적했다.[2] 모용령은 모용수에게 우선 용성(龍城)으로 피신한 뒤 향후 모용위가 실권을 장악하고 모용수를 다시 등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모용수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업을 떠나 용성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동쪽에서 독립하려는 계획이 새어나가 추격을 받았다.[3]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모용령은 모용수에게 전진으로 망명할 것을 권하였다. 모용수는 자식들을 데리고 전진에 몸을 의탁했다.[3]
이후 모용령은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하였고, 모용수는 부견의 환대를 받아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임명되었다.[2] 하지만 부견을 따르던 왕맹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낙양을 정벌할 당시 모용령의 참군(参軍)으로 합류한 왕맹은 모용령에게 모용수가 전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속여 모용령이 전연의 모용장에게 귀순하도록 유도하였다. 모용위는 모용령이 반역을 해놓고 귀환한 것과 아버지 모용수가 전진에서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이간질을 의심하여 용성의 동북쪽 육백 리에 있는 사성(沙城)으로 옮겼다. 모용령은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성에 도착하자 반란을 꾀하였다.
그 뒤 군영에서 맹규(孟嬀)를 살해한 뒤 성주인 섭규(涉圭)를 자신의 휘하로 들였으며, 위덕성(威德城)을 공격해 모용창(慕容倉)을 죽인 뒤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용성의 모용량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린의 밀고로 인해 실패하였고, 섭규에게 배신당해 도주하다가 설려택(薛黎澤)에서 붙잡혀 살해당했다.[3]
2. 4. 사후
모용수가 후연을 건립한 이후 헌장태자(獻莊太子)로 봉해졌으며,[4] 모용성이 제위에 오른 뒤 헌장황제(獻莊皇帝)로 추존되었고, 아내 정씨는 헌장황후(獻莊皇后)로 추존했다.[4]
참조
[1]
서적
資治通鑑考異
[2]
서적
晋書
[3]
서적
十六国春秋
[4]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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