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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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위는 오호 십육국 시대 전연의 황제이다. 모용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357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360년 모용준이 죽자 11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모용위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 모용각이 섭정했고, 모용각 사후에는 모용평이 섭정했으나 모용평의 부패로 전연은 쇠퇴했다. 370년 전진의 침공으로 전연이 멸망하고 장안으로 끌려가 신흥후에 봉해졌으며, 385년 부견 암살 모의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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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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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모용위 |
한자 표기 | 慕容暐 |
로마자 표기 | Murong Wei (무룽 웨이) |
생년 | 350년 |
몰년 | 385년 |
사망 장소 | 장안 (전진) |
가족 | 모용씨 |
시호 | 유황제 (幽皇帝) |
재위 기간 | 360년 2월 17일 - 370년 |
연호 | 건희 (建熙) |
정치 | |
작위 | 전연 황제 |
섭정 | 모용각 (360–367), 모용평 (368–370) |
선대 황제 | 모용준 |
가계 | |
아버지 | 모용준 |
어머니 | 경소황후 가족혼씨 |
배우자 | 가독혼황후 |
2. 생애
350년 모용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모용위는 357년 형 모용엽이 죽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360년 모용준이 죽자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준의 동생 모용각이 이끌었다.[7] 모용각은 선정을 베풀어 전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8] 362년 동진의 낙양을 공격하여 365년에 함락시키고 하남 일대를 점령하였다.[8]
366년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이 국정을 맡았는데, 그는 부패하여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여 전연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369년 동진의 환온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자, 모용평은 전진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를 보내 북벌군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可足渾)씨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다.[1]
전진의 부견은 구원군 파견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하였다. 370년 왕맹이 이끄는 전진군은 업을 함락하여 전연을 멸망시켰으며, 모용위는 장안으로 끌려가 신흥후(新興侯)에 봉해졌다.[2]
383년 비수대전 당시 모용위는 모용수를 따라 운성(鄖城)에 주둔하였는데, 부견이 패배하자 장안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384년 부견 암살 모의 혐의로 살해되었고, 400년 모용덕이 시호를 올려 유제(幽帝)라 하였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350년 모용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57년 형인 모용엽이 죽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360년 모용준이 죽자 황제에 즉위하였다. 모용위가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준의 동생인 모용각이 이끌었다.[7]모용위는 350년 아버지 모용준 치세 중에 태어났으며, 모용준이 황제를 칭하기 1년 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모용준의 아내 가절혼 황후였다. 354년 중산왕에 봉해졌다.[7]
356년, 유능한 황태자로 여겨졌던 모용엽이 사망했다. 357년, 모용준은 다른 아들들이 더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곱 살 된 모용위를 가절혼 황후 소생이라는 이유로 모용엽을 대신하여 황태자로 삼았다.
광수 4년(360년) 1월, 모용준이 병으로 붕어했다. 모용위는 이때 아직 11세로 어렸기 때문에, 군신들은 모용준의 동생인 태원왕 모용각에게 뒤를 잇도록 권했지만, 모용각은 이를 굳게 사퇴했으므로, 예정대로 모용위가 계승하게 되었다.
모용준이 붕어한 지 며칠 후, 모용위는 황제에 즉위했다. 영내에 대사를 내리고 건희로 개원했다. 건희 원년(360년) 2월, 생모 가족혼씨를 황태후로 세웠다. 또한, 모용각을 태재·녹상서사로, 상용왕 모용평을 태부로, 모여근을 태사로 임명했다.
태사 모여근은 모용황 시대부터의 공신이었지만, 자신을 제쳐두고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모용각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위장군 모여간과 결탁하여 몰래 정권 장악을 꾀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모용각에게 제위 찬탈을 권하며 접근했고, 이를 모용각이 거절하자 이번에는 모용위와 가족혼씨에게 찾아가 모용각과 모용평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며 토벌 허가를 요청했다. 가족혼씨는 이를 믿고 허가하려 했지만, 모용위는 "두 공(모용각·모용평)은 국가의 친현(친족의 현신)입니다. 선제(모용준)에 의해 선택되어 고아와 과부(모용위와 가족혼씨)를 보좌해주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태사(모여근)야말로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고 반대했기에, 중지되었다. 이후 점차 모여근의 반심이 드러나자, 모용각은 마침내 주살을 결정하고, 모용평과 협력하여 모여근을 체포하여 처자 및 측근과 함께 처형했다.
2. 2. 모용각의 섭정 (360년 ~ 367년)
360년 모용준이 죽자 황제에 즉위한 모용위는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준의 동생인 모용각이 이끌었다. 모용각은 선정을 베풀어 전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8] 362년 동진의 낙양을 공격하여 365년에 함락시키고 하남 일대를 점령하였다. 366년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이 다시 국정을 맡았다.모용각은 정치와 군사 모두에 능한 섭정이었으며, 그의 섭정 기간 동안 전연의 영토 확장은 점진적으로 계속되었다. 주로 진에게서 영토를 빼앗았다. 모용각은 모든 주요 결정을 내렸지만, 이기를 등용하려 하자 모용위는 "숙부, 당신은 모든 중요한 국사에 관여할 수 있지만, 이기는 내가 맡을 것이오."라며 거부하고, 이기를 수도에서 내보내 군태수로 만들어 유배 보냈다. 이기는 슬픔 속에 죽었다.
367년, 모용각은 병에 걸렸고, 죽음을 앞두고 모용위에게 모용수에게 중임을 맡기라고 권했다. 그러나 모용수의 재능을 질투한 모용평과 모용수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가족혼 태후는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모용평이 섭정이 되었으며, 군사적 책임의 일부는 모용위의 동생 모용충에게 넘어갔다.
과거 후조의 잔당인 장평은 병주 전역을 지배하여, 한때 전연·전진에 필적하는 제3 세력이 되었다. 모용위의 치세가 되자 장평은 전연을 침공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직후 전진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전연에 사죄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연은 구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장평은 전진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
야왕에 할거하고 있던 려호는 명목상 전연의 신하였지만, 몰래 동진에도 귀순해 있었고, 전장군·기주 자사에 임명되어 있었다. 또한, 후조의 잔당이며 형양에 할거하고 있던 고창이 같은 해에 사망하자, 려호는 그의 영하는 병민도 산하에 더하여, 그 세력을 강대화시켰다. 려호는 동진군을 불러들여 함께 전연의 수도인 업을 강습하려 획책했다. 그러나 려호의 계획이 발각되자, 모용각이 5만의 병사를 이끌고 려호 토벌에 나서, 수 개월에 걸친 포위전 끝에, 직접 전투에서 다수의 장병을 격퇴하고, 려호를 패주에 몰아넣었다. 그 후 려호가 전연에 사죄하고 다시 귀순을 청하자, 모용위는 이를 받아들여, 광주 자사[8]·녕남장군에 임명하여 이전대로 대우했다.
362년 1월, 예주 자사 손흥은 상소를 올려 "진의 장수 진우는 약병 1000여 명으로 고립된 성(낙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호소하며, 동진의 세력 하에 있던 낙양을 공격할 것을 권했다. 낙양은 동진의 대사마 환온의 북벌에 의해, 356년부터 동진의 지배권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다른 동진 영토로부터 고립된 위치에 있었다. 조정은 이 호소를 받아들여, 호군장군 부안·녕남장군 려호·태재 모용각 등을 파견하여, 낙양의 금용성(낙양성의 동북쪽에 있으며, 방위상의 거점이 되는 성)을 함락시켰다. 모용축을 가절·정로장군·낙주 자사에 임명하여 낙양의 금용성을 지키게 하고, 모용수를 도독형양낙서연예옹익량진십주제군사·정남대장군·형주목에 임명하여, 병사 1만을 주어 노양을 진수하게 했다.
363년 4월에는, 녕동장군 모용충이 형양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10월에는 진남장군 모용진이 동진의 진류군 태수 원피가 지키는 장평을 공격했지만, 동진의 여남군 태수 주빈[9]이 그 틈을 타 허창을 함락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이듬해 364년, 태부 모용평·용양장군 이홍 등이 허창·여남으로 침공하여, 동진의 여남군 태수 주빈·진군 태수 주보 등을 퇴각시키고, 이로써 허창·여남·진군을 공략했다.
366년 3월, 당시 전연 국내에서는 수해와 한발이 다발했다. 이를 받아들여, 모용각은 모용평과 함께 나아가 모용위에게 계수하고, 태재·대사마·태부·사도의 지위를 반납하고 저택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모용위는 아직 동진·전진의 위협이 남아있고, 지금은 직을 사퇴할 때가 아니라며 소를 물리쳤다. 모용각·모용평 등은 더욱 정권을 반납할 것을 청했지만, 모용위는 다시 반론했고, 마침내 2명이 제출한 사표를 찢어 버렸다. 이로 인해 모용각·모용평 등도 은퇴를 단념했다. 같은 해 5월, 모용위는 여전히 한발이 끝나지 않는 상황을 우려하여, 하서하여 가무 음악을 철폐하고, 고관에게 채식을 철저히 하고 바치는 물건의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명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비가 내려 한발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367년 4월, 모용각은 병을 앓게 되자, 모용위에게 "오왕 수(모용수)의 장상(장군과 재상)의 재능은 신에게 10배나 됩니다. 선제(모용준)께서는 어린 장자를 중시하여 신을 먼저 등용한 것일 뿐입니다. 신이 죽은 후에는, 부디 나라를 들어 오왕을 존중해 주십시오"라고 진언하고, 모용수에게 중임을 맡기도록 전했다. 5월에 모용각이 사망했지만, 이후에는 모용평과 가족혼 황태후가 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2. 3. 모용평의 섭정 (367년 ~ 370년)
366년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이 국정을 맡았다. 모용평은 부패하여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여 전연의 국력은 쇠약해졌다.[8]369년 동진의 환온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모용평은 전진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를 보내 북벌군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可足渾)씨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한편 전진의 부견은 구원군을 파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하였다.
모용평은 모용각보다 훨씬 무능하고 부패했다. 모용각이 사망하자 경쟁국 전진의 황제 부견은 전연 정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367년 겨울, 부견의 동생 조공 부상(苻雙)과 사촌들인 위공 부수(苻廋), 진공 부류(苻柳), 연왕 부무(苻武)가 반란을 일으켜 전연에 귀순을 제안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부수가 요충지인 산성(陝城, 현대 산먼샤, 허난)을 점령하여 전진의 중심부가 전연에게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모용평은 행동을 거부했고, 368년 말, 부견은 네 명의 반란 공작을 격파했다.
368년, 악완이 귀족 가문이 평민을 봉토에 집어넣는 부패 행위에 대해 우려하여 모용위에게 개혁을 청원했다. 이 관행은 평민들이 제국에 세금을 납부할 책임 없이 귀족들에게만 책임을 지게 하여 제국의 국고가 텅 비어 관료들에게 봉급을 지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용위는 개혁을 승인하고 악완에게 책임을 맡겼고, 악완은 20만 명 이상을 세금 납부 계층으로 복귀시켰다. 귀족들은 악완에게 앙심을 품었고, 368년 말 악완이 사망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악완이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믿었지만, ''진서''에는 악완이 모용평에게 암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69년, 모용위는 사촌인 가족혼익(可足渾翼)의 딸을 황후로 맞이했다.
같은 해, 동진의 장군 환온이 대규모로 전연을 공격하여 방두(枋頭, 현대 허베이, 허난)에 도달했고, 업성 인근에 이르러 전연의 모든 군대를 격파했다. 여기에는 모용위의 형인 낙안왕 모용장(慕容臧)이 이끄는 군대도 포함되었다. 모용위와 모용평은 공황 상태에 빠져 업성을 포기하고 옛 수도인 합룡(和龍, 현대 진저우, 랴오닝)으로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모용추가 자원하여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고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편, 모용위는 전진에 사자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며 지원 대가로 낙양 지역을 전진에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용추와 모용덕은 곧 환온에게 큰 패배를 안겼고, 전진군도 도착하여 환온에게 또 다른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모용평과 황태후 가족혼은 두 가지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모용추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황태후 가족혼은 그와 그의 병사들에게 보상을 거부했고, 실제로 그를 죽이려 했으며, 모용평 또한 모용추를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에 동의했다. 모용추는 전진으로 도망쳐 부견의 장군이 되었다. 그들은 또한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낙양 지역을 전진에 할양하는 것을 거부했다. 분노한 부견은 369년 말, 왕맹이 지휘하는 6만 명의 군대를 전연으로 파견했다.
370년 봄, 왕맹은 먼저 낙양으로 진격하여 항복을 강요했다. 그는 그 후 호관(壺關, 현대 창즈, 산시)으로 진격하여 가는 길에 전연의 모든 저항 세력을 격파했다. 그는 그 후 진양(晉陽, 현대 타이위안, 산시)을 점령했다. 모용평은 30만 명의 병력으로 왕맹에 맞섰지만 왕맹을 두려워하여 노천(潞川, 현대 창즈)에 멈춰섰다. 왕맹은 곧 그와 대치하기 위해 도착했다. 모용위는 왕맹이 병력 수에서 밀려 패배할 것이라고 자신하며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모용평은 이때 부패의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숲과 개울에 경비병을 배치하여 평민은 물론 자신의 병사들조차 돈이나 비단을 사용료로 지불하지 않으면 땔감이나 낚시를 금지했다. 그는 곧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잃었다. 모용위는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그를 꾸짖고 재산을 병사들에게 분배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370년 겨울, 양 군대가 교전했고, 모용평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왕맹은 그를 격파했으며, 모용평은 혼자 업성으로 도망쳤다.
2. 4. 전연의 멸망 (370년)
366년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이 국정을 맡았다. 모용평은 부패하여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여 전연의 국력은 쇠약해졌다.369년 동진의 환온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모용평은 전진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를 보내 북벌군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可足渾)씨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다.[1]
한편 전진의 부견은 구원군을 파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하였다. 370년에 왕맹이 이끄는 전진군은 업을 함락하여 전연을 멸망시켰으며, 모용위는 장안으로 끌려와 신흥후(新興侯)에 봉해졌다.[2]
건희 8년(367년), 전진의 군주 부견은 모용각의 죽음을 듣고 전연을 병탄하려 은밀히 계획했다.[7] 우선 전진 산하에 있던 흉노의 좌현왕 조곡에게 조공을 명목으로 전연에 갈 것을 명하고, 전진의 서융주부 곽변을 그 수행원으로 동행시켜 곽변에게 몰래 내정을 탐색하게 했다. 곽변은 업에 도착하자, 공경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친목을 다지면서 정보 수집에 힘썼다. 이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황보진은 곽변을 자세히 조사하여 본래의 목적을 조사할 것을 상주했지만, 모용평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곽변은 무사히 전진으로 귀국하여 부견에게 수집한 정보를 전하고, 전연의 정치는 혼란스럽고 기강도 해이해졌다고 보고했다.[7]
전해부터 전진에서는 진공 부류, 조공 부쌍, 위공 부수, 연공 부무가 결탁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건희 9년(368년) 2월에 부수는 자신의 통치하는 섬성을 들어 전연에 귀순하는 대신 원군을 요청했다. 위윤·범양왕 모용덕 등은 절호의 기회라며 출정을 강력히 요청했고, 모용위는 기뻐하며 따르려 했지만, 태부 모용평은 이 출정에 맹렬히 반대하며 "전진은 혼란스럽다 해도 아직 강국이며, 반대로 전연은 대가 바뀐 직후라 국내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국경을 굳게 방어하며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라고 말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수는 전연의 중신인 모용수와 황보진에게도 편지를 보내 다시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 역시 모용평을 설득할 수 없었다. 결국, 반란은 왕맹을 비롯한 전진의 제 장수에 의해 같은 해 안에 진압되었다.[8]
2. 5. 전진에서의 삶과 최후 (370년 ~ 385년)
369년 동진의 환온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자, 모용평은 전진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를 보내 북벌군을 격퇴하였다.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可足渾)씨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다. 이를 알게 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전진의 부견은 구원군 파견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 370년 왕맹이 이끄는 전진군은 업을 함락하여 전연을 멸망시켰고, 모용위는 장안으로 끌려와 신흥후(新興侯)에 봉해졌다.383년 비수대전 당시 모용위는 모용수를 따라 운성(鄖城)에 주둔하였는데, 부견이 패배하자 장안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384년 부견 암살 모의 혐의로 살해되었고, 400년 모용덕이 시호를 올려 유제(幽帝)라 하였다.
모용위와 일족 대부분은 전진 수도 장안으로 이주했다. 부견은 그를 신흥후로 임명하고 장군으로 삼았다. 378년, 부견의 아들 부비가 진의 주요 변경 도시 상양 포위 작전에 참여했다. 383년, 부견의 진 멸망 및 중국 통일을 위한 대규모 공격에 참여했으나, 비수 전투 패배로 부견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당시 모용수가 연 재건을 위한 봉기를 거부하자, 모용덕은 모용위에게 봉기를 설득하려 했지만, 모용위 역시 거절하고 부견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갔다.[1]
384년 봄, 모용수는 동쪽 제국(전연 영토)에서 봉기, 전 전연 귀족과 관리들이 후연 건국에 합류했다. 모용위의 형제 모용홍과 모용충도 장안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홍은 부견에게 모용위를 보내면 관중 지역을 떠나겠다고 제안했다. 부견은 분노하여 모용위를 꾸짖었고, 모용위는 계속 충실한 신하가 될 것을 간청했다. 부견은 모용위가 자리에 머물도록 허락했지만, 모용위는 부견이 모용수, 모용홍, 모용충에게 항복 명령 편지를 쓰라고 하자, 대신 몰래 모용홍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1]
: "나는 쇠창살 안의 사람이고, 죽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나는 또한 연에 죄를 지었으니, 나를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당신은 진지하게 스스로를 세우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
그러나 모용홍은 곧 암살되었고, 모용충은 서연으로 알려지게 될 선비족 반군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장안을 포위하고 부견에게 모용위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한편, 모용위와 사촌 모용숙(慕容肅)은 장안 내 선비족을 조직, 모용충에게 합류하기 위한 봉기를 준비했다. 385년 초, 모용위는 아들 결혼을 핑계로 부견을 집에 초대하여 잔치에서 암살할 준비를 했다. 부견은 참석하기로 동의했지만, 비 때문에 갈 수 없었고, 음모에 대한 소식이 새어 나갔다. 부견은 모용위와 모용숙을 궁으로 소환했다. 모용숙은 거부하고 즉시 봉기를 시작하자고 제안했으나, 모용위는 거절했고, 둘 다 궁으로 갔다. 부견은 그들의 음모에 대해 질문했고, 모용위는 여전히 부인하려 했지만, 모용숙은 당당한 어조로 인정했고, 부견은 그들과 도시의 모든 남은 선비족들을 처형했다.[1]
384년 1월, 숙부 모용수가 전진(前秦)에 반기를 들고 연왕(燕王)으로 즉위했다(모용위(慕容暐)를 배려하여 제호는 칭하지 않았다). 3월, 동생 모용홍 또한 관동에 할거하는 선비(鮮卑) 부족을 규합하여 거병했다. 모용위는 몰래 여러 아우와 종족들을 장안(長安) 밖으로 내보내 병사를 일으키게 하고, 모용홍의 움직임과 연동하려 획책했지만, 부견(苻堅)의 방비가 매우 엄중했기에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모용홍의 군세에는 동생 모용충도 가세하여, 그 세력은 1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3]
모용홍은 부견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모용위 신병 인도와 관동은 연(燕)이, 관중(關中)은 진(秦)이 영유하는 형태의 수호 조약을 제안했지만, 부견은 이에 격노하여 모용위를 소환하고, 모용 일족의 불충함을 꾸짖었다. 모용위는 피를 흘릴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잠시 후, 부견은 생각을 고쳐, 모용홍 등의 반란 책임은 모용위에게 없다고 하여, 지금까지와 같은 대우를 약속하고, 모용홍, 모용충, 모용수에게 설득하도록 모용위에게 명했다.[3]
그러나 모용위는 몰래 모용홍에게 사자를 보내 "나는 포로의 몸이라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연실(燕室)을 멸망시킨 죄인이니, 돌볼 필요가 없다. 그대는 대업을 세우는 데 힘쓰라. 오왕(모용수)을 상국으로, 중산왕(모용충)을 태재·영대사마(領大司馬)로, 그대를 대장군·영사도로 임명하고, 승제봉배(承制封拜, 황제를 대신하여 백관의 임용과 작위 수여를 하는 권한)를 위임한다. 그리고, 나의 부고를 들은 즉시, 그대가 존위(황제위)에 오르도록 하라"고 전했다. 이를 받아들여, 모용홍은 연흥(燕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정식으로 자립을 표방하며,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3]
같은 해 11월, 모용위는 모용각의 아들인 모용숙과 결탁하여 장안성 안에 있는 선비족 1천여 명을 동원, 반란을 일으키려 계획했다. 12월, 모용위는 아들 결혼을 구실로 부견을 신저택으로 초대하여 술에 취하게 한 다음 복병을 사용하여 암살하려 했다. 먼저 전연의 옛 신하인 실라등, 굴돌철후 등에게 비밀리에 계획을 알리고, 전진 조정의 출진 명령이라고 속여 장안성 안의 선비족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차남 결혼을 구실로 부견을 저택으로 초대했는데, 부견은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이날 밤 폭우로 인해 부견이 도착하기 전에 이 계획은 발각되었다. 모용숙은 계획이 누설되었음을 확신하고 즉시 성 밖으로 나가 거병할 것을 권했지만, 모용위는 따르지 않고 함께 입조했다.[4]
부견이 두 사람을 추궁하자, 모용숙은 "가문의 일은 중대한 것이오. 어찌 그 마음을 논하겠소!"라며 당당하게 반론했지만, 모용위는 꾸며낸 말로 변명할 뿐이었다. 부견은 먼저 모용숙을 살해하고, 이어서 모용위 역시 그 종족과 함께 살해했다. 향년 35세였다. 게다가 부견은 성 안에 있는 선비를 어린아이, 어른, 남녀 구분 없이 모두 죽였다. 400년, 숙부인 모용덕이 황제에 즉위하여 남연을 건국하자, 모용위는 유제(幽帝)로 추시되었다.[4]
3. 가계
- 아버지: 모용준 (경조 황제)
- 어머니: 가족혼 황후
- 아내: 가족혼 황후 (369년 책봉), 어머니의 사촌인 가족혼익(可足渾翼)의 딸
4. 모용위가 등장한 작품
5. 평가
모용위는 대부분의 치세 동안 모용각, 모용평, 황태후 가족혼씨 등에게 정사를 맡겼기 때문에, 주체적인 정치 행적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십육국춘추』는 그를 용약(庸弱), 즉 뛰어나지도 않고 어려움에 맞설 기력도 없는 인물로 평가한다.[10]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을 보여 박사 왕환[11], 조교 상봉, 비서감 두전에게서 경학을 배웠고, 측근들과 경서를 강론하며 여러 경서에 통달했고, 공자를 모시기도 했다.
모용준은 이적에게 모용위가 어리고 어리석다고 말했지만, 이적은 모용위의 천부적인 자질과 성스러운 모습, 팔덕을 칭찬하면서도 사냥과 악기를 좋아하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했다. 모용준은 이적의 말을 새겨들으라고 훈계했지만, 모용위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모용각은 모용준의 유언에 따라 이적을 상서 우복야로 임명하려 했으나, 모용위는 이적의 발언에 앙심을 품고 이를 거부하고 장무군태수로 좌천시켰다. 이적은 근심하다가 사망했다.
370년, 전진의 군세가 쳐들어오자 모용위는 이봉, 양침, 락숭에게 적의 병력과 싸울 것인지 물었다. 이봉은 낙관론을 펼쳤지만, 양침과 락숭은 계략을 사용하여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용위는 양침 등의 발언에 불만을 품었다. 측근 구순은 양침이 왕맹과 교류가 깊었다며 참소했고, 모용위는 양침을 내통자로 단정하여 투옥했다. 전연이 멸망한 후, 부견은 양침을 석방하고 주부・령기실독으로 발탁했다.
5. 1. 긍정적 평가
모용위는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항복할 때, 선조들의 무덤 앞에서 죽기를 바랐다고 말하며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부견은 이를 불쌍히 여겨 밧줄을 풀어주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는 등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모용위는 맹고와 애랑이 충의를 위해 순절했다고 부견에게 말했고, 부견은 그들을 후하게 장례하고 그들의 아들을 낭중으로 발탁하는 등 충신을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다.[1]5. 2. 부정적 평가
모용위는 대부분의 치세 동안 모용각, 모용평, 황태후 가족혼씨 등에게 정사를 맡겼기 때문에, 주체적인 정치 행적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십육국춘추』는 그를 용약(庸弱), 즉 뛰어나지도 않고 어려움에 맞설 기력도 없는 인물로 평가한다.[10]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을 보여 박사 왕환[11], 조교 상봉, 비서감 두전에게서 경학을 배웠다. 측근들과 경서를 강론하며 여러 경서에 통달했고, 공자를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모용위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사를 처리하는 편협함을 보였다. 자신을 어리석다고 평가한 이적을 좌천시키고, 전진과의 전쟁 중에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낸 양침을 투옥하는 등 독선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이는 결국 전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참조
[1]
서적
Book of Jin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기타
[4]
웹사이트
Academia Sinica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十六国春秋
[8]
기타
[9]
기타
[10]
서적
十六国春秋
[11]
서적
十六国春秋
[1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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