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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섭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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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섭귀는 모용목연의 뒤를 이어 선비족의 수령이 되었으며, 서진을 섬겨 선우로 임명되었다. 요동 북부로 세력을 확장하며 한족화되었고, 우문선비와 대립했다. 281년 서진을 배반하고 창려군을 침략했으나 토벌군에 패배했고, 283년 사망 후 동생 모용내에게 수령 자리를 찬탈당했다. 그는 서자 모용토욕혼에게 1700호를 나누어주었으며, 모용토욕혼은 토욕혼을, 적자 모용외는 전연의 기초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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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섭귀
모용섭귀
간칭섭귀(渉帰)
모용(慕容)
이름섭귀(渉帰)
생몰년도미상 ~ 283년
묘호시조(始祖)
시호무(武)
추존 연도386년
국적선비족
가족 관계
부친모용목연
아들모용내
모용외
관직
관직대선우(大單于)

2. 생애

모용목연의 뒤를 이어 모용선비의 수령이 된 모용섭귀는 유성에 주둔하며 서진을 섬겨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선비족의 선우로 임명되었다.[4] 그러나 우문선비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283년 모용섭귀가 사망하자, 아들인 모용토욕혼에게 지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동생인 모용내가 수령 자리를 찬탈하였다. 모용섭귀는 생전에 서자였던 모용토욕혼을 염려하여 1700호[7]를 나누어 주었다.

2. 1. 초기 활동과 서진과의 관계

모용목연의 뒤를 이어 모용선비의 수령이 되었으며, 유성(현재의 랴오닝성 차오양 시 솽타 구·룽청 구)에 주둔하며 서진을 섬겨 공을 세운 관계로 선비족선우로 임명되었다.[4] 이후 요동 북부로 근거지를 옮긴 뒤 점차 한족동화되었으며, 우문선비와는 대립했다고 한다.

281년 10월, 서진에 대한 종속을 거부하고 창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 같은 해 11월, 서진의 평주 자사 선우영이 이끄는 토벌군에 패배했다.[6] 282년 3월, 서진의 안북장군 엄순이 이끄는 토벌군에 창려에서 대패하여 1만 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2. 2. 한화(漢化) 정책과 독자 세력 구축

모용목연의 뒤를 이어 모용선비의 수령이 된 모용섭귀는 요동 북부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점차 한족동화되었다.[4] 그는 "천지(天地)의 덕을 '''모'''방하고, 해·달·별(三光)의 '''용'''(도량)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하며 '모용'이라는 성을 채택했다.[10]

281년 서진을 배반하고 창려군을 공격하는 등 자주 침공하였으나, 282년 창려에서 안북장군 엄순(嚴詢)에게 대패하였다.[5]

2. 3. 서진과의 갈등 및 최후

281년 모용섭귀는 서진을 배반하고 창려군을 공격했으며, 이후에도 자주 서진을 침공하였다.[5] 282년 창려에서 안북장군(安北將軍) 엄순(嚴詢)에게 대패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서진의 평주 자사 선우영이 이끄는 토벌군에 패배했다.[6]

태강 3년(282년) 3월, 서진의 안북장군 엄순이 이끄는 토벌군이 창려에 도착하자, 모용섭귀는 이에 패하여 1만 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283년 모용섭귀가 사망하자, 아들인 모용토욕혼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동생인 모용내수령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3. 가계

관계이름
조부막호발
모용목연


참조

[1] 서적 渉帰
[2] 서적 十六国春秋
[3] 서적 資治通鑑
[4] 서적 資治通鑑
[5] 서적 晋書
[6] 서적 晋書
[7] 서적 魏書
[8] 서적 新唐書
[9] 서적 北史
[10] 서적 十六国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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