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므앙푸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므앙푸안은 현재 라오스 시앙쾅도와 베트남 응에안 성에 걸쳐 있던 역사적 지역으로, 란상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4세기부터 주변 국가들과 조공 관계를 맺으며 반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고, 베트남, 샴(태국) 등의 세력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1893년 프랑스-샴 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1899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라오스의 옛 나라 - 란쌍 왕국
    란쌍 왕국은 라오스 지역에 건국된 최초의 통일 국가로서 메콩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18세기 초 분열되었고, 라오스인들의 정체성의 기둥이 되었다.
  • 라오스의 옛 나라 - 루앙프라방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은 1707년 란쌍 왕국의 분열로 시작하여 1946년 라오스 왕국에 통합될 때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 19세기 태국 - 루앙프라방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은 1707년 란쌍 왕국의 분열로 시작하여 1946년 라오스 왕국에 통합될 때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 19세기 태국 - 짜끄리 왕조
    짜끄리 왕조는 1782년 짜끄리 장군이 세운 태국의 왕조로, 방콕을 수도로 삼아 대나무 외교를 통해 독립을 유지하고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현재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 18세기 태국 - 아유타야 왕국
    아유타야 왕국은 1351년에 건국되어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며, 해상 무역과 상좌부 불교,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고 절대 군주 체제를 확립하여 태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세기 태국 - 톤부리 왕국
    톤부리 왕국은 딱신이 아유타야 왕국 멸망 후 건국하여 시암을 재통일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딱신의 통치 불안정으로 라마 1세에 의해 멸망하고 차크리 왕조가 건국되었다.
므앙푸안
개요
공식 명칭푸안 공국 (ເມືອງພວນ)
로마자 표기Mueang Phouan
위치시엥쿠앙 고원
현재 국가라오스베트남에 걸쳐 있음
수도므앙푸안
1750년경의 영토 분할을 보여주는 지도에서 청동색으로 표시된 므앙푸안
루앙프라방 북쪽과 비엔티안 남쪽 사이의 청동색으로 표시된 므앙푸안, 동쪽으로는 대월과 접경
역사
성립13세기
소멸1893년 프랑스령 라오스 보호령 편입
주요 사건13세기: 독립 공국으로 성립
14세기–1791년: 자치 공국
1802–1828년: 비엔티안 왕국의 속국
1828–1848년: 응우옌 왕조의 지방
1848–1893년: 시암의 속국
1893–1899년: 프랑스 보호령, 이후 자치권 소멸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주요 통치자캄 산 (1651–1688)
캄 응온 (1880–1899, 마지막 통치자)
칭호
언어 및 문화
공용어라오어
종교불교
경제
통화랏, 호이

2. 역사적 배경

므앙푸안은 현재 라오스 시앙쾅도와 베트남 응에안 성에 걸친 지역으로, 오랫동안 란상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787년, 베트남떠이선 왕조가 성립하면서 떠이선 왕조의 태조 응우옌반냑(阮文岳)이 라오스 방면으로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해 응우옌반냑은 당시 응에안에 있던 카이산에게 병력을 이끌고 므앙푸안에 침입하게 하여 그곳의 영주에게 응우옌 왕조에 입공을 요구했다. 이에 란쌍 왕조의 후예인 비엔티안 왕국 국왕 차오 난타센은 므앙푸안에 파병해서 카이산 군을 제압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788년에도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린 카이산이 다시 침입하여 결국 차오 난타센은 므앙푸안 영주의 응우옌 왕조의 입공을 인정했다.[1]

그리하여 므앙푸안은 비엔티안 왕국의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응우옌 왕조떠이선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인 반독립적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비엔티안 왕국이 멸망하면서 므앙푸안은 시암(짜끄리 왕조)의 영지가 되었지만, 1893년프랑스가 이전 루앙프라방 왕국의 종주권을 시암에서 획득하면서, 1899년에 시앙쿠앙은 통킹과 루앙파방으로 분할된 형태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1]

왓 피아 왓의 폐허, 쿤구


쿤구의 탑 폐허


흑기군 병사, c.1885


항아리 평원, 몽족 소녀

3. 역사



므앙푸안은 타이계 민족인 푸안족이 13세기에 현재의 라오스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푸안족은 므앙푸안을 건국한 쿤 보롬의 둘째 아들인 쳇 추엉이 이끌었다고 한다.

므앙푸안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으며, 이미 하위 섹션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각 시대의 주요 특징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 란쌍 왕국 시대 (14세기 중반 ~ 1707년): 란쌍 왕국의 지배를 받으며, 대월 등 주변 국가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 16세기에는 불교 미술과 건축이 번성했다.
  • 분열 시대 (1707년 ~ 1893년): 란쌍 왕국 분열 이후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 베트남 등 여러 세력의 영향을 받으며 복잡한 역사를 겪었다. 베트남의 경쟁 속에서 푸안족은 강제 이주를 당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태평천국 운동의 여파로 중국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 프랑스 식민지 시대 (1893년 ~ 1899년): 프랑스과의 조약을 통해 므앙푸안을 식민지로 편입, 1899년 므앙푸안은 자치권을 잃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1840년대부터 중국은 남부 중국의 산악 민족에 대한 군사 통제와 세금 제도를 확장하려 했다. 라오 숭족, 몽족, 메오족 등이 시엥쿠앙 성의 산악 고지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태평천국 운동 실패 후, 홍, 황, 및 줄무늬 깃발 디자인으로 식별되는 갱 조직 약탈자들과 함께 새로운 난민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은 북부 라오스와 시엥쿠앙 성 지역에서 약탈, 방화, 전쟁을 벌였다. 므앙푸안 수도는 호 또는 호 해적 전쟁 밴드에 의해 반복적으로 약탈, 파괴되었다. 은 호 전쟁으로 알려진 군사 캠페인을 수행했으나 질서 회복에 실패, 1875~1876년에 더 많은 강제 인구 이동을 시행했다. 1876년 영국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3. 1. 란쌍 왕국 시대 (14세기 중반 ~ 1707년)

므앙푸안은 현재 라오스 시앙쾅도와 베트남 응에안 성에 걸친 지역으로, 오랫동안 란쌍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1]

14세기 중반, 므앙푸안은 파 응움 왕 아래 란쌍 왕국에 통합되었다.[1] 만다라 모델에 따라, 므앙푸안은 지역 권력에 따라 이웃 국가와 조공 관계를 맺었는데, 동시에 두 개 이상의 권력에 조공을 바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1] 1434년에 므앙푸안은 대월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1] 그러나 1478년 대월이 므앙푸안을 현으로 병합하려 하자, 란쌍과 대월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1] 전쟁 후 대월 군대는 철수했고, 므앙푸안은 다시 란쌍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1] 하지만 1531년 므앙푸안은 포티사랏 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 만에 진압되었다.[1]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므앙푸안은 란쌍의 일부로 남았다.[1]

16세기에는 불교 미술과 건축이 번성했다.[1] 수도는 독특한 시엥쿠앙 양식(기초에 특징적인 '허리'가 있는 단순하고 낮은 지붕을 가진 사찰)으로 가득했다.[1] 1930년 르 불랑제는 "주변 언덕과 요새를 점령한 넓은 해자와 요새로 보호받는 크고 아름다운 도시이며, 측면에 보물이 숨겨진 62개의 파고다와 그 탑의 풍요로움은 수도에 널리 두려움을 퍼뜨리는 명성을 얻었다"라고 묘사했다.[1] 1707년 란쌍이 비엔티안 왕국루앙프라방 왕국으로 분할되면서, 므앙푸안은 루앙프라방 왕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1]

3. 2. 분열 시대 (1707년 ~ 1893년)

므앙푸안은 라오스 시앙쾅도와 베트남 응에안 성에 걸친 지역으로, 오랫동안 란상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707년 란쌍 왕국이 비엔티안 왕국루앙프라방 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므앙푸안은 루앙프라방 왕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

1720년대까지 므앙푸안은 루앙프라방 왕국을 지원하여 버마 및 샴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므앙푸안은 비엔티안 왕국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으나, 1751년에는 비엔티안 왕국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므앙푸안 내부에서는 내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1787년, 베트남떠이선 왕조가 성립되면서 떠이선 왕조의 태조 응우옌반냑(阮文岳)은 라오스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해 응우옌반냑은 카이산에게 병력을 이끌고 므앙푸안에 침입하여 그곳의 영주에게 응우옌 왕조에 조공을 요구했다. 이에 비엔티안 왕국 국왕 차오 난타센은 므앙푸안에 파병해서 카이산 군을 제압했다. 그러나 1788년 카이산이 다시 침입하여 결국 차오 난타센은 므앙푸안 영주의 응우옌 왕조에 대한 조공을 인정했다.[1]

그리하여 므앙푸안은 비엔티안 왕국의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응우옌 왕조떠이선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인 반독립적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1779년 비엔티안 왕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므앙푸안은 의 봉신국이 되면서도 대월과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은 므앙푸안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푸안족 인구를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1793년 차오 솜푸는 비엔티안에 투옥되었으나, 므앙푸안이 비엔티안 왕국대월에 동등한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803년 차오 솜푸의 조카 차오 노이가 므앙푸안을 장악했다. 그는 권위적인 통치를 펼쳤으며, 1826~1828년 라오스 반란에서 아누봉을 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1831년 대월은 차오 노이를 처형하고 므앙푸안을 병합하여 '쩐닌'으로 명명했다.

대월은 므앙푸안에 베트남 세금, 문화 및 의복을 강요했다. 푸안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가 침략하여 베트남 관리들을 살해했고, 이후 푸안족 인구를 의 확고한 통제하에 있는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1831년 말, 베트남캄보디아를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시엥쿠앙 성 지역은 베트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1850년대에 베트남에 대한 반란을 부추겼고, 므앙푸안은 의 종주권 아래에 놓였다. 1860년대 태평천국 운동의 여파로 중국의 난민들이 므앙푸안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므앙푸안의 수도는 반복적으로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은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875~1876년에 더 많은 강제 인구 이동을 시행했다.[1]

흑기군에 의해 발생한 불안정은 1880년대에 프랑스에 의해 점령된 통킹과 안남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식민 제국은 의 영토 통제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893년 프랑스-샴 조약에 따라 므앙푸안은 프랑스 식민 제국의 식민 보호를 받게 되었다. 1899년, 푸안 지역은 자치권을 잃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프랑스령 라오스 보호령의 일부가 되었다.

3. 3. 프랑스 식민지 시대 (1893년 ~ 1899년)

1787년, 베트남떠이선 왕조가 성립되자, 떠이선 왕조의 태조 응우옌 후에는 라오스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같은 해 응우옌 후에는 당시 응에안에 있던 카이선에게 병력을 이끌고 므앙푸안에 침입하여, 그곳의 영주에게 응우옌 왕조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란쌍 왕조의 후예인 비엔티안 왕국 국왕 난타선 퐁마라오는 므앙푸안에 파병해서 카이산 군을 제압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788년에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린 카이선이 다시 침입하여 결국 난타선 퐁마라오는 므앙푸안 영주의 응우옌 왕조 조공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므앙푸안은 비엔티안 왕국의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응우옌 왕조떠이선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인 반독립적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비엔티안 왕국이 멸망하면서 므앙푸안은 시암(짜끄리 왕조)의 영지가 되었지만, 1893년프랑스가 이전 루앙프라방 왕국의 종주권을 시암에서 획득하면서, 1899년시앙쿠앙통킹루앙프라방으로 분할된 형태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1]

4. 므앙푸안의 통치자

이름재위 기간비고
캄 산1651년–1688년시앙쿠앙 주지사, 란쌍 왕국[1]
캄 란1688년–1700년캄 산의 아들[1]
캄 삿타1723년–1751년캄 란의 손자, 베트남,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에 조공[1]
옹 로1751년–1779년[1]
솜푸1779년–1803년[1]
노이 (Southaka Souvanna Koumar)1803년–1831년솜푸의 조카, 베트남 황제 민망에 의해 처형됨[1]
시앙쿠앙은 베트남에 의해 쩐닌성으로 병합됨 (1832년)[1]
1848년–1865년노이의 아들, 시암과 베트남의 속국[1]
1866년–1876년노이의 아들, 호 해적이 1874년에 시앙쿠앙을 침략[1]
칸티1876년–1880년웅의 아들, 시암의 속국[1]
캄 응온1880년–1899년라오스 프랑스 보호령 자치 종료[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