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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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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유타야 왕국은 1351년에 건국되어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멸망한 태국 역사상 중요한 왕국이다. 초기에는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했으며,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고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정치적으로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계층 사회를 이루었으며, 17세기 이후 절대 군주 체제를 확립했다. 15세기부터 주변국과의 갈등과 유럽 열강과의 교류를 겪었으며, 18세기에 버마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아유타야 왕국은 태국 문화,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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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540년경 동남아시아의 아유타야 왕국
1540년경 아유타야와 동남아시아 본토; 동남아시아 국경은 근대 시기까지 상대적으로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기본 정보
정식 명칭아유타야 왕국
태국어 명칭(끄룽 시 아유타야)
일반 명칭아유타야
시대후기 고전 시대, 근대 초기
건국1351년 3월 4일
멸망1767년 4월 7일
존속 기간1351년–1767년
첫 조공 사절단 파견1292년
말레이 반도 및 수마트라 침략1290년대–1490년대
롭부리 및 수판부리 간 경쟁1370–1409년
북부 도시들과의 통합1378–1569년
따웅우 왕조의 봉신1564–68년, 1569–84년
아유타야 황금기1605–1767년
청나라의 사적 무역 금지 철회1684년
꼰바웅 왕조의 침략1759–60년, 1765–67년
이전 국가롭부리
수판부리
북부 도시
후계 국가톤부리 왕국
피마이
핏사눌록
사왕부리
나콘시탐마랏
아유타야 시대 태국 국기
1680–1767년 무역기
나라왕의 아유타야 인장
인장 (1657–1688)
수도아유타야 (1351–1463년, 1488년–1680년대 초, 1688–1767년)
핏사눌록 (주요 수도: 1463년–1488년경, 제2 수도: 1590년경까지)
롭부리 (1680년대 초–1688년)
공용어몬어 (1351–1408년, 공식)
고대 태국어 (1408년–17세기 후반, 공식)
근대 태국어 (17세기 후반, 공식)
크메르어 (초기 주요 언어, 크메르족 사용)
말레이어 (외교 언어, 특히 16세기 이전, 말레이족 사용)
페르시아어 (외교 언어, 16세기, 1660년대–1670년대)
포르투갈어 (외교 언어, 16세기 초부터 주요)
다양한 중국어 방언 (후기 아유타야 시대, 중국인 사용)
종교주요 종교: 상좌부 불교
소수 종교: 힌두교, 로마 가톨릭교, 이슬람교
통화폿두앙
정치 체제만달라 왕국
도시 국가 연합 (1351–15세기)
만달라 연합 (15세기–1600년)
상업적 절대주의 (1600–1767년)
지도자 칭호
주요 지도자우통 (1351–1369년)
보롬마뜨라이로까낫 (1448–1488년)
나레수안 (1590–1605년)
쁘라삿 통 (1629–1655년)
나라이 (1656–1688년)
펫라차 (1688–1703년)
엑카탓 (1758–1767년)
부지도자 칭호부왕
주요 부지도자라메수안 (1438–1448년)
폰피닛 (1757–1758년)
인구 (1600년경)약 2,500,000명
현재 국가태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싱가포르

2. 역사

유통 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사료가 많지 않아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거래하던 네덜란드 무역상에 의하면 중국 출신이라는 설, 역병(또는 콜레라)로 버려진 치엔세인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설과 롭부리 출신설 등이 있다. 수코타이 왕조가 북쪽에 인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유타야가 건국된 태국 중부는 수코타이 왕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아유타야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낡은 유적이 태국 중부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왕조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유타야 왕국 건국 이전의 태국 중부의 이 공백기에 롭부리나 펫차부리는 수코타이 왕국과는 달리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따라서 유통 왕의 출신도 아마 태국 중부에 있는 나라의 왕가 출신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통’이라는 말은 ‘돈의 요람’을 뜻하며, 태국 중부에서 이 이름을 가지는 왕은 많았다. 즉, 태국 중부의 작명의 관습이기도 하다.

유통 왕은 왕조 연대기에서는 라마티보디라고 하는 이름으로 기술되고 있다. 왕이 즉위할 시기에 스판나품 왕가의 협력이 절실했고, 이후에는 대수코타이 정책으로 인해 두드러지게 된다.

라마티보디 1세는 상좌부불교를 국가의 공식적인 종교로 지정하고 동시에 힌두의 법전인 다르마샤스트라나 태국에서의 관습을 바탕으로 법전(삼표법전)을 정비했다. 삼표법전은 근대적인 법전이 정비되는 19세기까지 태국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14 세기말까지 아유타야 왕국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하였지만, 동남아 지역을 완전히 압도할 만큼의 인구는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쇠퇴하고 있던 크메르 제국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대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라마티보디는 말년 1362년 크메르 제국을 공격해 아유타야의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그러나 아유타야는 앙코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수코타이 왕국과의 관계는 수코타이가 아유타야에 조공을 바치는 형태가 되었지만, 그 후 100년 후에 수코타이를 병합해 수코타이 왕국은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유타야에 새롭게 흥한 스판나품 왕가와 수코타이의 왕가와의 인척 관계를 강화하여 그 후에도 수코타이 왕가는 명맥은 겨우 유지하게 된다.

15세기에는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왕국이 아유타야의 고민거리가 된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말라카나 탄브라린가 이남의 말레이 반도 여러 도시가 15세기 초기부터 이슬람교으로 개종 하게 되어,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 남부를 잃지만, 말레이 반도 북부를 계속 장악하여 고급품을 거래해온 온 중국 상인에 의해 국내의 경제는 활기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 서쪽의 버마는 지역의 패권을 노리며, 16세기경부터 집요하게 아유타야를 침략하여 아유타야의 골칫거리가 되게 된다. 버마 따웅우 왕조의 군주 바인나웅은 1569년에 아유타야 왕 마힌트라티랏을 패망시켰으나 나레수안 대왕에 의해서 아유타야는 재건되었다. 이후 버마가 내란에 휩쓸리면서 버마의 침공은 줄어들지만, 꼰바웅 왕조가 국력을 축적하게 되면서 아유타야는 다시 버마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는다. 결국 1767년에는 신뷰신에 의해서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하게 된다. 이때 아유타야의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버마군이 퇴각한 후 새롭게 왕이 된 딱신은 아유타야 재흥을 위해 짜오프라야강이 흐르는 톤부리 방면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2. 1. 건국 이전

2천년기 전후, 차오프라야 강 하류 유역은 동쪽의 라보 왕국과 서쪽의 수판부리로 나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앙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직접적인 정치적, 군사적 영향은 받지 않았다.[30][91] 찬윗 카셋시리는 아유타야가 차오프라야 강 하류의 로프부리(라보),[31] 수판부리, 아유타야, 펫차부리 등 네 항구 도시가 합쳐진 곳이라고 주장한다. 수판부리는 1180년에 송나라에, 펫차부리는 1294년에 원나라에, 1400년에서 1500년 사이에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에 사신을 보냈다.[32][33][34]

12세기 이전에도 아유타야 섬에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1270년대 초의 도자기 파편도 발견되었다. 아유타야 동쪽 섬 밖의 일부 사원들은 1351년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최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전에 존재했던 바라이 위에 후대 건축물이 겹쳐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탐난 뮬라사사나''' 불교 연대기에는 1320년대에 두 명의 불교 승려가 경전을 찾아 아유타야를 방문했고, 이전에 한 승려가 랑카에서 돌아온 후 "아요디아 왕"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35] 13세기 후반부터는 해상 무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로 원정대를 파견했다.[36] 다른 동시대 학자들은 아유타야가 11세기부터, 또는 적어도 1351년보다 수세기 전부터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고 주장한다.[37]

중국 연대기에 기록된 아유타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282/83년에 중국 관리가 시안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시안은 1292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사절을 보냈고, 중국은 그 직후에 또 다른 사절을 요청했는데, 이는 아유타야 건국 이전부터 아유타야의 초기 중요성을 보여준다. 기존의 학자들은 민족적으로 태국인인 수코타이 또는 수판부리가 중국 자료에서 언급된 ''시안''[38][32]이라고 주장하지만, 크리스 베이커와 파숙 퐁파이칫과 같은 최근 학자들은 ''시안''이 아유타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비커리는 중국이 설립 초기부터 차오프라야 강 하류 유역을 가리키는 데 시안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33][37]

최근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아유타야 이전 도시의 이름은 왓 카오 콥 비문[39]에 나와 있는 '''아요디아 스리람텝 나콘'''()으로, 태국 연대기인 '''프라랏차퐁사완 누아'''에 따르면 14세기~15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41] 당시 적어도 세 개의 태국어 왕실 칙령이 제정되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칙령인 '''잡법(프라 아이야칸 벳셋) 1225년'''에 아요디아를 통치한 왕의 이름은 1205년부터 53년까지 재위한 우통 왕[40]으로 나와 있다. 당시 태국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41]

'''아요디아 스리 라마 테프 나콘'''의 존재는 미얀마 연대기인 '''흐만난 야자윈'''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1056년에 귀완 전사들이 다톤 왕국으로 행군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42] '''흐만난 야자윈'''은 귀완들의 남동쪽 나라를 ''아요자''라고도 불렀다고 말한다.[43] 조르주 코데는 ''아요자'' 또는 ''아라우사''가 아유타야 = 시암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44]

877년, 방 판 출신의 왕족 프라 마하 붓다 사콘이 롭부리 강 남쪽 제방에 상카부리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974년 사콘이 사망한 후, 인타파트나콘 출신의 프라야 코돔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코돔은 도시를 동쪽으로 옮겨 파삭 강 오른쪽 제방에 새롭게 건설했다. 코돔은 30년 동안 통치했고, 그의 아들 코트라봉이 1004년 왕위를 계승했다. 1022년, 코트라봉은 크레악에게 권력을 빼앗겼고, 크레악은 신타포마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통치자로 즉위했다. 1081년 크레악이 죽은 후, 라보 왕국의 왕 차다초타의 아들 나라이가 왕위를 찬탈했다. 나라이는 도시의 이름을 아요타야로 바꾸었고, 라보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45] 이전 수도는 롭부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1147년 나라이의 통치가 끝난 후, 아요타야는 2년 동안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1157년, 왕위는 프라 차오 루앙에게 넘어갔고, 그는 도시를 남쪽으로 옮겨 차오프라야 강 동쪽 제방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 새로운 도시는 후계자 두앙크리엔 크릿나랏에 의해 세나 랏차나콘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롭부리의 왕이었던 그의 아버지 크라이쏜랏에 의해 새로운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아요타야 도시는 1211년에 버려졌다.

롭부리의 왕 크라이쏜랏이 상속인 없이 죽은 후, 우통의 할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1319년 죽은 후, 롭부리와 세나 랏차나콘 도시는 그의 딸의 왕실 상속 재산으로 여겨졌고, 딸은 나중에 그것을 아들 우통에게 물려주었다.

아유타야는 전통적으로 우통 왕이 1351년 3월 4일에 건국했다고 전해진다.[46] 그러나 이 사실은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크리스 베이커와 파숙 퐁파이칫에 따르면, 우통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전설이 적어도 일곱 가지가 있다.[47] 아유타야의 전설적인 건국자라는 사실 외에, 연대기에 기록된 우통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그의 사망 연도이다.[33]

우통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역사 자료상 명확하지 않다. 전염병으로 버려진 치엔선에서 이주해왔다는 설, 스판부리 출신설, 롭부리 출신설 등이 있다. 북쪽에 스코타이 왕조가 인접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유타야를 건국한 태국 중부는 스코타이 왕조의 영토가 아니었고, 아유타야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오래된 유적이 태국 중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왕조가 이미 존재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공백기에 롭부리와 펫차부리는 스코타이 왕조와는 별도로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따라서 우통왕의 출신도 아마 태국 중부의 어느 나라 왕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참고로, 우통은 금빛 요람을 의미하며, 전승에서 태국 중부에는 이 이름을 가진 왕이 많다.

우통왕은 왕조 연대기에서는 ラーマーティボーディー(Ramathibodi)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이 즉위하는 데 있어서 인척인 스판나품 왕가의 협력이 불가결했던 것은 후의 대스코타이 정책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우통왕가와 스판나품 왕가는 그 후 수대에 걸쳐 왕위를 다투었지만, 최종적으로 스판나품 왕가가 승리했다.

ラーマーティボーディー 1세는 국내 통일을 위해서 실론에서 불교 승려를 초청하여 상좌부 불교를 국가의 공식적인 종교로 하면서, 힌두교의 법전인 달마샤스트라와 태국 관습을 바탕으로 삼인법전을 정비했다. 삼인법전은 근대적인 법전이 정비되는 19세기까지 태국의 기본 법전으로 기능하게 된다.

14세기 말까지 아유타야 왕조는 동남아시아 최대 세력으로 여겨지게 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의 인구가 부족했다. 이 때문에 당시 쇠퇴하고 있던 크메르 왕조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베트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ラーマーティボーディー는 말년(1362년), 앙코르를 공격하여 아유타야의 영토에 편입했다.

'''아유타야 이전 통치자 연표'''
상카부리 (877–974)
아요타야 (974–1211)
세나 랏차나콘 (1157–1388)
colspan=4 style="vertical-align: top;"|
캄포치 나콘 (1347–1351)
colspan=4 style="vertical-align: top;"|
아유타야 초기 건설 (1347)
상카부리
(877–974)
아요타야
(974–1211)
세나 랏차나콘
(1157–1388)
붓다 사콘코돔코트라봉크레악나라이루앙사이 남 프엉담마카라자우통
}}
드바라바티 왕국라보 왕국
참고: 아유타야 왕국의 초대 왕이기도 함.


2. 2. 건국과 발전

우통 왕이 1351년 3월 4일에 아유타야를 건국했다고 전통적으로 전해지지만,[46] 이는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크리스 베이커와 파숙 퐁파이치트에 따르면 우통 왕의 출신에 대한 전설은 최소 일곱 가지가 존재한다.[47] 아유타야의 전설적인 건국자라는 사실 외에, 연대기에 기록된 우통 왕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그의 사망 연도이다.[33]

14세기 아유타야 왕국(빨강)과 북부 도시들(파랑)


약 1360년경 겹치는 만달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란쌍왕국, 란나, 북부 도시들, 아유타야, 앙코르 그리고 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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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대부터 1490년대까지 아유타야는 군대를 파병하여 템색(싱가푸라)(현대 싱가포르)와 수마트라에 이르기까지 말레이 여러 공국들에 조공을 요구했다.[91][13][49] 초기 아유타야는 해양 지향적인 연합체였으며, 수코타이와 북부 도시들과 같은 내륙 국가들보다는 해양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정치 체제와 더 유사했다.[91] 초기 아유타야 왕국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초기 왕조 연표는 후대 아유타야 엘리트들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91][13][49]

초기 아유타야 왕국의 여러 도시들은 만달라 시스템 하의 가족적 연관성을 통해 유지되었다.[50] 우통 왕은 그의 아들 라메수안 왕자, 그의 형제, 그의 매부를 각각 도시 통치자로 임명했다.[31][51][52] 왕은 왕자나 친척을 도시 통치자로 임명했고, 왕자가 통치하는 도시를 ''무앙 룩 루앙''(เมืองลูกหลวงth)이라고 불렀다. 각 도시 통치자는 아유타야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특정한 특권도 유지했다.

초기 아유타야의 정치는 라보(롭부리)를 중심으로 한 우통 왕조와 수판부리를 중심으로 한 수판나품 왕조 사이의 경쟁으로 특징지어진다.[33][53] 15세기 초 정화의 항해의 서기관인 마 환은 아유타야를 수상전을 하는 남성들과 일상생활을 여성들이 주관하는 소란스러운 항구 도시로 묘사했다.[33][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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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통 왕은 ラーマーティボーディー(라마티보디) 1세로 즉위했다. 그는 실론에서 불교 승려를 초청하여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하고, 힌두교 법전인 달마샤스트라와 태국 관습을 바탕으로 삼인법전을 정비했다. 삼인법전은 19세기까지 태국의 기본 법전으로 기능했다.

14세기 말까지 아유타야 왕조는 동남아시아 최대 세력으로 여겨지게 되었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의 인구가 부족했다. ラーマーティボーディー(라마티보디) 1세는 1362년 앙코르를 공격하여 아유타야의 영토에 편입했다.

2. 3. 15세기

15세기에 아유타야 왕국은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말라카 왕국과 탐브랄링가국(나콘시탐마라트 왕국)을 포함한 여러 도시들이 15세기 초부터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아유타야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 남부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명나라는 정화의 항해를 통해 인도양 분지에서 중국의 존재감을 확립하고 무역에 대한 황실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정화 제독이 이끄는 중국 함대는 세 차례에 걸쳐 차오프라야 강을 거슬러 아유타야를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왓 파난 초엥 사원에 있는 ''루앙 포 토'' 불상은 1407년 정화가 방문했을 때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초 중국 목판화로, 정화의 배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짐.


한편, 아유타야에는 일본 식민지가 세워져 무역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일본은 사슴가죽과 사판 나무를 수출하고, 일본 은과 수공예품(칼, 칠기 상자, 고급 종이)을 수입했다. 아유타야의 일본인 거주지는 약 1,500명에 달했으며, 이 지역 사회는 태국어로 ''반 이푼''이라고 불렸다. 안토니오 프란시스코 카르딤 신부는 1627년 아유타야에서 약 400명의 일본 기독교인에게 성례전을 집행했다고 전했다.

야마다 나가마사 초상화


이러한 대외 관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유타야는 앙코르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수코타이 왕국과의 관계는 조공 형태로 유지되었으나, 결국 아유타야 왕조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왕가 간의 인척 관계가 강화되어 수코타이 왕가는 존속했다고 여겨진다.

2. 4. 16세기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한 직후, 두아르테 페르난데스가 이끄는 외교 사절단을 아유타야의 라마티보디 2세 왕의 궁정으로 파견했다.[142] 포르투갈은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 국가였다. 1516년, 아유타야와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이 왕국에서 무역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42] 1592년의 유사한 조약은 네덜란드에 쌀 무역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포르투갈 용병들은 차이라차티랏 왕이 1539년 란나를 침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와 17세기 태국 만(灣)의 포르투갈:


16세기 중반부터 버마의 따웅우 왕조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았다. 버마-샴 전쟁 (1547년-1549년)은 아유타야 함락에 실패로 끝났다.[57] 바이난웅 왕이 이끈 두 번째 포위 공격(1563년-1564년)은 1564년 마하 짝크라팟 왕의 항복을 강요했다. 왕족은 버고(Pegu)로 끌려갔고, 왕의 둘째 아들인 마힌트라티랏이 괴뢰 왕으로 임명되었다.[57][58] 1568년, 그의 아버지가 불교 승려로 버고에서 돌아오자 마힌트라티랏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세 번째 포위 공격으로 1569년 아유타야가 함락되었고, 바이난웅은 마하 타마라차티랏(산펫 1세)을 괴뢰 왕으로 삼고 수코타이 왕조를 세웠다.[58]

1584년 5월, 바이난웅이 죽은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산펫 1세의 아들인 우파라자 나레수안(혹은 산펫 2세)은 아유타야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 선포는 버마의 아유타야 반복적인 침략을 초래했고, 샴은 결국 1593년 아유타야 네 번째 포위 공격 중에 나레수안 왕과 버마의 왕세자 밍이 스와 사이의 코끼리 결투로 끝났다. 이 결투에서 나레수안은 밍이 스와를 죽였다.[59] 오늘날 이 샴의 승리는 매년 1월 18일 태국 왕립군의 날로서 기념되고 있다.[59]

나라이(1657~1688년 재위) 왕의 궁정에서는 외국인들이 따뜻하게 환영받았다. 일본과 중요한 무역 관계가 형성되었다. 아유타야의 일본인 거주지는 약 1,500명의 일본인 주민의 거주지였다. 이 지역 사회는 태국어로 ''반 이푼''이라고 불렸으며, 태국 당국이 임명한 일본인 수장이 이끌었다.[146]

2. 5. 17세기

니콜라스 비셔 2세(1649–1702)가 출판한 동남아시아 지도. 이 지도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전체 무역 지역을 보여준다.


1600년경 전쟁이 중단되면서 에카토사로트 치세부터 시작하여 장기간의 평화와 상업 시대가 열렸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정복하면서 아유타야가 통제하는 반도 중앙의 육로를 이용하여 말라카를 우회하는 아시아 상인들이 증가했다.[33] 이 시기는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도쿠가와 쇼군 시대의 거대한 아시아 제국들의 시대였다.[33] 따라서 아유타야는 근대 초기 세계의 글로벌 제국들 사이의 무역에서 수익성 높은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33]

이 그림에는 17세기 전반 아유타야 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일본 모험가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의 용병 군대가 묘사되어 있다.


1605년, 나레수안은 샨 주(Shan) 지역에서 버마와의 분쟁 중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크게 확장된 아유타야 왕국은 그의 동생 엑카토사로트(산펫 3세)에게 상속되었다.[60] 엑카토사로트의 통치 기간은 아유타야 왕국과 그 영향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특히 네덜란드 공화국, 포르투갈 제국 및 적색 인장선(Red Seal Ships)을 통해 도쿠가와 막부 등과의 외교 관계가 증진되었다.[61] 야마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일본 상인과 용병들은 왕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61]

엑카토사로트의 시대는 1610/11년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148] 그의 장남 수탓(Suthat)의 자살로 인해, 차남 시 사오와팍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왕위에 올랐지만, 일본 상인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 잡혀 있다가 살해당했다.[60] 이후 왕국은 송탐에게 넘어갔다.

왓 프라 풋타밧], 송탐 왕이 왕실 순례지로 건설했다.


왓 차이왓타나람, 프라삿 통 왕이 평화와 상업의 시대(1600~1688)에 건설했다.


송탐은 란나, 캄보디아 및 타보이의 종주권을 상실했고,[1] 포르투갈 제국을 축출했으며,[62]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포함한 아유타야 왕국의 해외 무역 관계를 확장했다.

송탐의 생애가 저물어가자, 송탐의 형인 시신 왕자와 그의 아들인 쳇타티랏 왕자가 모두 아유타야 왕궁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지지를 얻으면서 다시 계승 문제가 갈등을 빚었다. 1628년 송탐이 죽자, 프라삿 통은 야마다 나가마사의 용병들과의 동맹을 이용하여 시신 왕자를 지지했던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고, 결국 시신 왕자를 체포하여 처형했다.[60] 곧 프라삿 통은 쳇타티랏 왕보다 아유타야 왕국에서 더욱 강력해졌고, 추가적인 음모를 통해 쳇타티랏을 폐위시키고 처형하여 그의 어린 동생 아티타야웡을 왕위에 올렸다.[60] 1629년 프라삿 통은 아동 국왕을 최종적으로 폐위하고 처형했다.[60] 프라삿 통의 많은 전 동맹자들은 그가 왕위에 오른 후 그의 대의를 버렸다.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프라삿 통은 1630년 그의 전 동맹자이자 이제 그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야마다 나가마사를 암살했고, 곧바로 남은 모든 일본인들을 아유타야 왕국에서 추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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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1=AMH-5626-NA Bird's eye view of the city of Judja.jpg

|caption1= 요하네스 빙보온스가 그린 아유타야 그림, 약 16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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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2=Gezicht op Judea, de hoofdstad van Siam Rijksmuseum SK-A-4477.jpeg

|caption2=요하네스 빙보온스가 그린 아유타야 그림, 약 1665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암스테르담 주문.}}

|thumb|left|180px|1966년에 제작된 나라이상, 롭부리 도청 근처.]]

1656년 프라삿 통 왕이 사망하자 장남인 차이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거의 즉시 전 왕의 동생인 시 수탐마라차에 의해 폐위되어 처형당했다. 시 수탐마라차는 다시 자신의 조카인 나라이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패배했다.[60] 나라이는 주로 외국인 귀족 세력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했다.[60] 17세기 중반 나라이 왕 시대에 아유타야는 매우 번영했다.[63]

1662년 나라이 왕이 버마의 혼란을 이용하여 란나를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버마와 아유타야 간의 전쟁(1662-1664년 버마-시암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64] 나라이는 타보이와 마르타반을 점령했다. 궁극적으로 나라이와 시암은 보급품이 부족해져 국경 안으로 돌아왔다.[57][59]

|thumb|200px|프랑스 대사 슈발리에 드 쇼몽이 루이 14세의 편지를 나라이 왕에게 전달하는 모습. 콘스탄틴 포콘이 왼쪽 아래에서 절하고 있다.]]

|thumb|1688년 12월 23일, 기 탈샤르 신부가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를 만나는 시암 사절단.]]

나라이의 통치는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무역 회사들 사이의 3자 간의 갈등 때문이었다.[1] 나라이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1] 나라이는 방콕과 머귀 항구를 프랑스에 임대했고, 그의 군대에 많은 프랑스 장군들을 편입하여 서구 전략으로 훈련시키고 유럽식 요새 건설을 감독하게 했다.[65] 이 기간 동안 나라이는 아유타야를 버리고 롭부리에 새로운 예수회가 설계한 궁전으로 옮겼다.[60]

시암에 가톨릭의 존재감이 커지고 프랑스 요새가 세워지고 주둔하면서, 나라이 궁정의 토착 시암 신하들과, 불교 성직자들이 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가톨릭 그리스 모험가이자 프랑스 영향력의 지지자인 콘스탄틴 포콘에게 집중되었는데, 그는 나라이의 총리이자 외교 최고 고문의 지위까지 올랐다.[66]

|thumb|1688년 펫라차의 시암 혁명 세력에 의한 프랑스 방콕 요새 포위전.]]

1686년에 실패한 반란을 일으켰다.[67] 펫라차가 이끄는 불만 세력은 나라이를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오랫동안 계획해 왔다. 1688년 5월 왕이 심하게 병에 걸리자 펫라차와 그의 공범들은 그를 포콘과 많은 왕족들과 함께 체포했는데, 나라이를 제외한 모두가 처형당했다. 나라이는 그해 7월 감금 중 사망했다.[1] [69] 왕과 그의 상속자들이 제거되자 펫라차는 왕위를 찬탈하고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아유타야 왕으로 즉위했다.[1]

펫라차 왕은 거의 즉시 프랑스의 통제에서 머귀를 되찾았고, 프랑스의 시암 철수로 끝난 중대한 방콕 포위전을 시작했다. 펫라차의 많은 지방 주지사들이 그의 통치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고 나라이의 지지자들에 의한 반란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60] 펫라차 왕은 나라이의 결정을 대부분 뒤집고 네덜란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형태의 유럽과의 교류를 폐쇄했다.[60]

1592년에는 네덜란드(オランダ)가 아유타야(アユタヤ)에 사절을 보내 통상 허가를 얻었고, 국내 쌀 수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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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세력이 두드러지게 커진 것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에 걸쳐서이다.

1629년에는 프라사톤(프라사톤 왕가)이 왕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1630년에 야마다 나가마사는 무앙나콘시탐마랏으로 좌천되어 이슬람 세력인 파타니군과 교전한 후 사망했다. 1630년, 일본 세력의 확장을 우려한 프라사톤 왕에 의해 아유타야 일본인 거리가 불태워져 몰락했고, 1635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슈인센 무역이 폐지되어 쇠퇴했다.

외국과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여겨지는 나라이(1656년 - 1688년)는 17세기부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프랑스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차오프라야 코사판 등 태국의 관료들이 프랑스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또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태국에 상관을 설립할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1664년에 네덜란드 세력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통상 독점을 요구하며, 포르투갈 국기를 내건 무장 선박으로 차오프라야 강 하구를 봉쇄하고 중국 상인들을 붙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나라이의 신임을 잃고 아유타야에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나라이는 당시 외교 권위자였던 콘스탄틴 폴콘을 통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 이러한 기독교의 확장과 팔콘 등 서구 세력의 부상은 중국 상인의 지원을 받던 관리들과 불교 세력의 적개심을 샀다. 나라이 왕이 1688년에 죽자, 반대 세력인 페트라차(방플루룽 왕가)가 쿠데타(샤암 혁명)를 일으켜 나라이의 아들, 팔콘, 선교사 등을 살해하고 프랑스 세력과 친프랑스 세력을 제거하여 왕위를 찬탈했다. 이후 페트라차는 백인들을 국내에서 추방하고 아유타야를 쇄국 국가로 이끌었다.

2. 6. 멸망

1569년 아유타야 왕 마힌트라티랏이 따웅우 왕조의 군주 바인나웅에게 패배하였으나, 나레수안 대왕에 의해 아유타야는 재건되었다. 이후 버마의 내란으로 침공은 줄어들었으나, 꼰바웅 왕조가 국력을 회복하면서 아유타야는 다시 버마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1759년에서 1760년 사이의 버마-샴 전쟁에서 알라웅파야 왕이 이끄는 꼰바웅 왕조 군대가 아유타야를 공격했으나, 우기로 인해 퇴각해야 했다.[76] 알라웅파야는 퇴각 중 사망하였고, 아유타야는 일시적으로 버마의 위협에서 벗어났다.[76]

1765–1767년 버마 침략 경로


1767년 아유타야 함락의 현대적 묘사


그러나 알라웅파야의 아들 신뷰신은 아유타야 정복을 재개하였고, 1765년부터 1767년까지의 전쟁에서 버마군은 두 경로를 통해 아유타야를 침공했다.[80] 1765년 초, 버마 타보이 연대는 서부 샴을 정복했고,[80] 같은 해 중반, 네미오 티하파테는 버마-란나 연대를 이끌고 북부 샴을 공격하여 정복했다.[80] 1766년 1월, 두 버마군은 아유타야에서 합류하여 도시를 포위했다.[81]

방 라찬 진영의 자위대 집단이 방 라찬에서 5개월 동안 저항하였으나,[83] 결국 버마군은 1767년 4월 7일, 14개월간의 포위 끝에 아유타야를 함락시켰다.[83] 아유타야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버마로 끌려갔다.[88][91][89]

이후 탁신이 군대를 모아 톤부리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1767년 6월 파괴된 아유타야의 수도를 탈환하였다.[94][95]

3. 사상

아유타야 왕조 초기에는 백성과 친밀하게 지내며 보호하는 성격(포쿤)이 국왕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으나, 이후 수코타이 왕조 후기에 나타난 달마라자(불교의 수호자로서의 왕) 사상을 계승하여 불교적 가치관으로 통치하는 방식이 강조되었다.[74] 아유타야 왕조의 창시자인 라마티보디 1세는 이러한 달마라자 사상을 실천하였다.

흰 코끼리(白象)를 타고 다소 신격화되어 묘사된 왕


한편, 크메르 왕조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브라만교)적인 색채가 짙은 "왕은 신의 화신이다(데바라자)"라는 사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크메르 왕조 출신 인물을 많이 기용한 사암프라야 왕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데바라자 사상은 태국 문화를 힌두교적인 색채로 변화시켰다. 언어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차용어가 늘어났고, 문학, 연극 등에서는 힌두교적인 색채가 강한 것이 나타났다. 궁정 내의 예법이나 관습 등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국왕에 대한 존칭어인 라차삽(왕어)가 만들어졌고, '옹칸 챈남' 의식에서 볼 수 있듯이 복잡한 예법이 생겨났다. "왕은 신이다"라는 이유로 일반인과 격리되었고, 왕에게 접촉하거나 얼굴을 본 일반인을 사형에 처하는 등 법률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불교를 보호하는 왕으로서의 성격은 "왕은 전륜성왕이다"라는 형태로 계승되었다.

150년간의 번영은 아유타야 엘리트에게 상당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아유타야 엘리트는 연극적 기법을 만들어내고 정교한 축하 행사와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왕실 칭호를 받았는데, 이 모든 것은 이전에는 왕족에게만 허락되었던 특권이었다. 왕과 귀족들은 감소하는 노동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노동력 통제 개선에 관한 아유타야의 반복적인 법률은 엘리트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점점 실패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증가하는 부로 인한 혼란은 아유타야 귀족들이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천으로 불교 개혁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것은 보로막콧(재위 1733~1758) 왕의 통치를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났는데, 그는 덕 있는 경건한 보살의 모든 특징을 갖춘 경건한 왕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새로운 사찰을 건설하고 복원하여 아유타야의 스카이라인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74]

캔디의 키르티 스리 라자싱하 왕(재위 1747~1782)과 스리랑카 승려 웰리위타 스리 사라난카라 테로를 묘사한 그림


18세기 아유타야의 스카이라인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보로막콧 왕의 주요 건설 프로젝트 중 하나인 위한 프라 몽콘 보핏


1753년, 아유타야로 여행 온 스리랑카 승려들의 요청에 따라 보로막콧 왕은 두 명의 시암 승려를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 개혁을 위해 파견했다. 그러나 아유타야 귀족들(후일 랏타나코신 왕국의 라마 1세 왕이 됨)이 자신들의 모습대로 불교를 성공적으로 개혁하고 시암 왕실과 불교 사이에 거의 끊임없는 유대감을 형성하여 현대 태국까지 지속되기까지는 랏타나코신 초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74]

4. 사회

아유타야 왕조의 사회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엄격한 계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109] 기본적인 사회 단위는 확대된 가족 가구로 구성된 마을 공동체였으며, 토지 소유권은 공동체를 대표하는 촌장에게 있었다.[109] 농민들은 경작하는 한 토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109] 귀족들은 점차 신하(อำมาตย์)와 소도시의 조공 왕이 되었고, 왕은 쉬바 또는 비슈누의 지상 화신으로 여겨졌다.[109] 불교적 맥락에서 ''데바라자''(신성한 왕)는 보살(Bodhisattva)이었다.[74]

보롬마트라이로까낫 왕(재위 1448~1488)의 개혁은 아유타야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국 전역에 걸쳐 확장된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 및 정치적 계층 구조를 확립했다.[109] 짓 품미삭과 꾸크릿 프라모와 같은 태국 사회 과학자들은 아유타야의 ''색디나'' 제도를 광범위하게 평가했다. 왕은 왕관에 대한 봉사에 대한 대가로 궁중 관리, 지방 주지사, 군 사령관에게 논밭을 할당했다.[109] 각 관리의 할당량은 그가 지휘할 수 있는 일반인 또는 ''프라이''의 수에 따라 결정되었다.[109] 계층의 정점에 있는 왕은 상징적으로 왕국의 가장 큰 토지 소유주였으며, 가장 많은 수의 ''프라이 루앙'' ('왕실 종')의 봉사를 지휘했다.[109]

경작 가능한 토지가 풍부했던 아유타야 왕국은 농업 노동과 방위를 위한 충분한 인력 확보와 통제에 의존했다.[109] 라마티보디 2세 (재위 1491~1529)는 모든 자유민이 현지 영주인 ''차오 나이'' ()에게 ''프라이'' (종)로 등록되어야 하는 징용 제도를 수립했다.[109] ''프라이'' 위에는 군 복무, 공공 사업에 대한 징용 노동, 그리고 자신이 배정된 관리의 토지에 대한 책임이 있는 ''나이'' ()가 있었다.[109] ''프라이 수아이'' ()는 세금을 지불하여 노동 의무를 이행했다.[109] 19세기까지 인력 공급의 3분의 1이나 되는 부분이 ''프라이''로 구성되었다.[109]

무장 세력의 모집은 '영주'를 의미하는 ''나이'' 또는 ''문 나이'' 관리에 달려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프라이 솜'' 또는 '신하'를 지휘했다.[109] 이 관리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109]

16세기 초, 보로마트라이로까낫 왕은 계층 내 각 단계의 왕실 관리들에게 토지와 ''프라이''를 명확하게 할당하여 19세기에 정부 관리들의 봉급이 도입될 때까지 국가의 사회 구조를 결정했다.[109]

사회 계급설명
문나이수도와 행정 중심지의 면세 행정 엘리트.[110]
프라이 루앙매년 특정 기간 동안 왕관을 위해 일하는 왕실 종사자.[110] 이들은 일반적으로 징용이나 군 복무를 제외하고는 마을을 떠나는 것이 금지되었다.[110]
프라이 솜왕관에 대한 의무가 없는 일반인. 그들은 프라이 루앙보다 훨씬 많았다.[110]



이 제도 밖에는 상가 (불교 승가)와 해외 중국인이 있었다.[109] 왓은 태국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중국인들은 처음으로 태국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곧 국가 경제 생활을 장악하기 시작했다.[109] 중국인들은 징용 의무를 위해 등록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왕국을 자유롭게 이동하고 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109] 16세기까지 중국인들은 아유타야의 내부 무역을 장악했고, 민정 및 군사 서비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09]

18세기 국립고궁박물원(타이베이)에 소장된 주기적 진상 초상화(謝遂作, 청나라)에 포함된 그림 중 하나인, 시암 관리들의 초상화.


웃통은 힌두교 자료와 전통적인 태국 관습을 바탕으로 한 법전인 ''다르마샤스트라''를 편찬하는 일을 담당했다.[111] ''다르마샤스트라''는 19세기 후반까지 태국 법의 도구로 남아 있었다.[111] 계급과 칭호가 있는 관리들의 계층에 기반한 관료제가 도입되었고, 사회는 관련된 방식으로 조직되었다.[111] 그러나 카스트 제도는 채택되지 않았다.[111]

18세기에는 중국 농민 이주민들이 대거 사이암(Siam)에 유입되면서 자본주의가 도입되었다.[74] 프라이(phrai)들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농촌에서 농민이 되어 부를 축적했다.[74] 후기 아유타야(Ayutthaya) 기록에는 '부유한 농노'를 의미하는 프라이 망미(phrai mangmi)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74]

150년간의 번영은 아유타야 엘리트에게 상당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아유타야 엘리트는 연극적 기법을 만들어내고 정교한 축하 행사와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왕실 칭호를 받았다.[74] 왕과 귀족들은 감소하는 노동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74]

증가하는 부로 인한 혼란은 아유타야 귀족들이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천으로 불교 개혁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74] 보로막콧(Borommakot, 재위 1733~1758) 왕은 덕 있는 경건한 보살(Bodhisattva)의 모든 특징을 갖춘 경건한 왕으로 칭송받았다.[74] 1753년, 아유타야로 여행 온 스리랑카 승려들의 요청에 따라 보로막콧은 두 명의 시암 승려를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 개혁을 위해 파견했다.[74]

아유타야 관리 코사 판이 지위를 나타내는 롬폭과 크루이를 착용하고 있음


18세기 국립고궁박물원, 타이페이에 있는 황실 청나라의 정기 봉헌 초상화에 있는 시암 귀족들의 초상화.


1761년 베이징에 있는 시암 대표단 (暹罗国). ''万国来朝图''


번역가인 아르튀스 드 리옹 수도사와 함께한 1686년 시암 사절단. 자크 비구루 듀플레시 (–1732)가 그린 그림.


왓 프라 시 산펫(Wat Phra Si Sanphet)과 승려

5. 경제

태국인들은 풍부한 식량 공급에 부족함이 없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소비와 세금 납부를 위해 를 재배했다. 남은 것은 종교 기관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139]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태국 벼농사에는 변화가 있었다. 차오프라야 강의 충적 평야에서는 농부들이 물벼를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 벼는 저지대 논의 수위 상승 속도에 맞춰 충분히 빠르게 자랄 수 있었다.[139]

새로운 품종은 쉽고 풍부하게 자라 외국에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잉여 생산량을 만들어냈다. 왕실의 후원 아래, 강제 노역을 통해 운하가 파여 벼가 들판에서 왕의 배로 실려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차오프라야 삼각주가 개간되어 경작되었다.[139]

아유타야에 벼가 풍부했지만,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기근이 발생하면 벼 수출이 때때로 금지되었다. 벼는 일반적으로 서구인들로부터 사치품과 무기를 얻기 위한 교역 수단이었다.[139]

수상 시장, 아유타야 시대의 시장


아유타야 왕조는 공식적으로 조개껍데기, 프라깝, 포 두앙을 통화로 사용했다. 포 두앙은 13세기 초부터 쭐랄롱꼰 국왕 시대까지 표준 교환 수단이었다.

17세기에는 유럽과의 무역이 활발했다. 유럽 상인들은 소총과 대포와 같은 현대식 무기들을 주로 수입하여, 내륙 정글에서 나는 sappan(수교(樹膠)) 나무, 사슴가죽, 쌀과 같은 지역 제품과 교역했다. 16세기 포르투갈 탐험가 Tomé Pires는 아유타야가 "좋은 상품이 풍부한" 곳이라고 언급했다.[140]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네덜란드인들은 여전히 활동적이었다. 아유타야의 경제는 18세기에 급속도로 쇠퇴하여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아유타야의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었다.[141]

라마티보디 1세 시대부터 아유타야와 중국 상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외국인은 아유타야 시가지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중국 상인만은 예외였다. 아유타야의 주요 수출품인 쌀의 소비가 중국 남부에서 두드러지게 높았던 것도 큰 요인이다. 아유타야의 경제는 농촌 사회의 잉여 생산물인 쌀에 의존했다.

아유타야 왕조 시대에는 세금 납부와 자급자족을 위한 충분한 쌀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또한 잉여 쌀은 승려들에게 기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태국 중부 평원에서는 13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부유성 벼농사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유성 벼는 대충대충 경작해도 쉽게 생산 과잉이 발생했기 때문에, 매우 싼 가격에 정부가 매입하여 대부분 중국에 매각되었다. 그 결과 아유타야 왕조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6. 문화

150년간의 번영은 아유타야 엘리트에게 상당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이들은 이전에는 왕족에게만 허락되었던 연극적 기법을 만들고 정교한 축하 행사와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왕실 칭호를 받았다. 왕과 귀족들은 감소하는 노동력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다. 노동력 통제 개선에 관한 아유타야의 반복적인 법률은 엘리트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점점 실패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증가하는 부로 인한 혼란은 아유타야 귀족들이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천으로 불교 개혁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보로막콧(Borommakot)(재위 1733~1758) 왕은 덕 있는 경건한 보살(Bodhisattva)의 모든 특징을 갖춘 경건한 왕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새로운 사찰을 건설하고 복원하여 아유타야의 스카이라인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74] 1753년, 아유타야로 여행 온 스리랑카 승려들의 요청에 따라 보로막콧은 두 명의 시암 승려를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 개혁을 위해 파견했다. 그러나 아유타야 귀족들(후일 랏타나코신 왕국의 라마 1세(Rama I) 왕이 됨)이 자신들의 모습대로 불교를 성공적으로 개혁하고 시암 왕실과 불교 사이에 거의 끊임없는 유대감을 형성하여 현대 태국까지 지속되기까지는 랏타나코신 초기까지 기다려야 했다.[74]

시암어(태국어)는 초기에는 아유타야 엘리트 계층에서만 사용되었지만, 점차 계층을 초월하여 아유타야 후기(1688~1767)까지 왕국 전역에 널리 퍼졌다.[6] 하지만 몬어는 1515년경까지 차오프라야 삼각주의 일반 대중 사이에서 사용되었다.[117] 크메르어는 시암어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아유타야 궁정의 초기 권위 있는 언어였다.[6] 하지만 아유타야에 거주하는 크메르 공동체에서는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에서는 다양한 중국어 방언이 사용되었으며, 중국인들은 아유타야 후기에 왕국 내에서 큰 소수 민족이 되었다.[6] 아유타야 왕국에서 사용된 여러 소수 언어로는 말레이어, 페르시아어, 일본어, 참어, 네덜란드어, 포르투갈어가 있다.

19m 높이의 금박을 입힌 앉아있는 부처상이 있는 왓 프라난 청. 1324년에 건립된 이 사원은 1351년으로 알려진 아유타야 건설 시기보다 앞선다.


아유타야의 주요 종교는 상좌부 불교였다. 그러나 정치 및 사회 시스템의 많은 요소는 힌두교 경전에서 도입되었고 브라만 사제들에 의해 시행되었다.[111] 왕국 내 많은 지역에서는 대승불교, 이슬람교[118]를 믿었으며, 17세기에 중국을 통해 온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일부 지역은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119] 대승불교와 탄트라 불교의 영향 또한 상좌부 불교에 들어와 밀교 상좌부 불교라는 전통을 만들어냈다.

자연 세계에는 삿싸나 피의 일부인 많은 영들이 살고 있었다. ''피'' ()는 건물이나 영토, 자연 장소 또는 현상의 영이며, 사람들을 보호하는 조상의 영이거나 악의적인 영을 포함할 수도 있다. 장소나 마을의 수호신인 ''피''는 축제에서 공동체 모임과 음식을 바치는 의식을 통해 기념된다. 영들은 태국 민속 전반에 걸쳐 존재한다.

''피''는 인간의 질병을 포함한 자연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바치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정체성과 종교적 건강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신령의 집은 자연과 초자연적인 세계와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중요한 민속 풍습이었다. 점성술 또한 자연과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사회적 금기와 관습을 강화하는 중요한 문화적 수단이 되었다.

콘 공연, 아유타야 시대의 유명한 춤


왓 코 카우 슷타람, 펫차부리의 불교 사원 벽화, 18세기 아유타야 후기 시대에 샴(Siam)의 사원 벽화가 증가함


라마키엔의 신화와 서사시 이야기는 샴(Siam) 사람들에게 풍부한 극적 소재를 제공했다. 아유타야 왕궁은 ''콘''()과 ''락혼''()이라고 불리는 고전적인 극 형식을 발전시켰다. ''라마키엔''은 이러한 극예술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유타야 시대에 ''콘'' 또는 라마키엔의 극화된 버전은 귀족 관객만을 위한 연극 공연인 ''락혼 나이''로 분류되었다. 샴(Siam)의 연극과 고전 무용은 나중에 본토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의 고급 문화 예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120]

역사적 증거는 태국 무대극 예술이 17세기까지 이미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아유타야의 나라이 왕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1687년 프랑스는 외교관 시몽 드 라 루베르를 파견하여 샴 왕국에서 본 모든 것을 기록하게 했다. 그의 유명한 저서 ''Du Royaume de Siam''에서 라 루베르는 17세기 고전 샴(Siam) 극장을 세심하게 관찰했고, 콘 공연의 서사시적인 전투 장면을 포함하여 본 것을 자세히 기록했다.

샴(Siam) 콘 무용수들의 의상에 대해 라 루베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라밤과 콘에서 춤추는 사람들은 의식용 만다린 모자와 같은 높고 뾰족한 금박 종이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귀 아래쪽으로 옆으로 처져 있으며, 모조 보석과 금박 나무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121]

전통적인 ''몽콘''과 ''프라 지앗''을 착용한 무에타이 선수들


라 루베르는 무에타이와 라오 무에타이의 존재도 관찰했는데, 그들은 비슷하게 보였지만(즉, 주먹과 팔꿈치를 모두 사용하여 싸운다는 점) 손을 감싸는 기술은 달랐다고 지적했다.[121] 아유타야 시대의 무에타이(무에 보란으로 더 잘 알려짐)는 현대 무에타이 스포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유타야 시대에 발전한 태국 예술과 문화의 업적과 영향은 초기 랏타나코신 시대에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국 학자 제임스 로우의 관찰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샴(Siam) 사람들은 극적인 공연에서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에 도달했으며, 이러한 점에서 이웃 나라인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사람들은 샴(Siam) 배우를 구할 수 있으면 모두 부러워합니다."[120]

크라비 크라봉은 아유타야에서 발전한 검술의 한 형태로, 현재 전통 태국 문화와 예술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정받고 있다.[122] 아유타야의 주요 고대 사원인 왓 풋타이사완은 크라비 크라봉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아유타야는 문학 작품이 풍부한 왕국이었다. 1767년 아유타야 함락 이후에도 태국어로 된 많은 문학 걸작들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유타야 문학(그리고 근대 이전의 태국 문학)은 운문(즉, 시)이 지배적이었고, 산문 작품은 법률 문제, 국정 기록 및 역사 편년사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태국어로 된 서사시 형태의 작품이 많다. 태국 시 전통은 원래 ''rai'' (ร่าย), ''khlong'' (โคลง), ''kap'' (กาพย์), ''klon'' (กลอน)과 같은 토착적인 시 형식을 기반으로 했다. 이러한 시 형식 중 일부, 특히 ''khlong''은 고대부터(샴의 등장 이전부터) 타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어 왔다.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다양한 산스크리트 운율 형식인 '''찬다(Chanda)'''가 실론(Ceylon)을 통해 전래되었다. 태국어는 단음절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전적인 산스크리트(Sanskrit) 운율을 짓기 위해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서 많은 차용어가 필요했다. B.J. 테르윌(B.J. Terwiel)에 따르면, 이 과정은 보롬마트라이로까낫(Borommatrailokkanat)(1448–1488) 왕 시대에 가속화되었는데, 그는

하누만이 라마의 정자를 보호하는 모습 (왓 프라깨우의 미술관 "53호실" 벽화)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는 인도화된 문화를 공유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태국 문학은 13세기 처음 등장한 이후로 인도 문화와 불교-힌두교 이념의 큰 영향을 받았다. 태국의 서사시는 붓다가 다사라타 자타카에서 서술한 라마-판디타 이야기의 한 버전으로, 라마키엔이라고 불리며,[124] 팔리어에서 번역되어 시암어 운문으로 재구성되었다. 태국에서 라마야나 서사시가 중요한 이유는 라마가 구현한 힌두교의 종교 정치적 군주 이념을 태국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시암의 수도 아유타야는 라마의 도시인 아요디아의 성스러운 도시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라마 6세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소급 적용하여 현 왕조의 태국 국왕들은 "라마"로 불립니다(서구와의 관계 때문에 왕실은 태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왕족임을 전달하기 위해 유럽식 스타일을 따라 간결한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767년 아유타야가 파괴되면서 많은 라마키엔 서사시 버전이 유실되었습니다. 현재 세 가지 버전이 존재합니다. 그중 하나는 라마 1세 국왕의 감독하에(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가 직접 작성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라마 2세는 콘 연극을 위해 일부 부분을 다시 썼습니다. 원본과의 주요 차이점은 원숭이 신 하누만의 역할이 확대되고 해피엔딩이 추가된 것입니다. 태국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많은 시들도 인도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아니룻 캄 찬으로, 고대 인도 이야기인 왕자 아니루다를 바탕으로 합니다.

태국 시의 세파 구전 공연의 현대적 모습.


아유타야 시대에는 민담도 번성했다. 가장 유명한 민담 중 하나는 “꾼 창 꾼 판”()의 이야기로, 태국에서는 간단히 "꾼 판"으로 불린다. 이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와 영웅적인 모험의 요소를 결합하여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꾼 창 꾼 판(KCKP) 서사시는 아유타야 왕을 섬긴 초인적인 마법 능력을 지닌 시암 장군 꾼 판과 그 자신, 꾼 창, 그리고 완통이라는 아름다운 시암 여인 사이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다른 구전으로 전승되는 서사시들과 마찬가지로 KCKP의 구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다. 17세기 초(약 1600년)경 태국 구전 전통 내에서 세파(sepha) 즉, 낭송으로 시작되었다. 시암의 트루바두르와 민스트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 줄거리에 더 많은 부차적인 줄거리와 장면들을 추가하여 꾸몄다.[125] 아유타야 왕국의 후기에는 약 2만 행에 달하는 긴 서사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43권의 ''삼뭇 타이'' 책에 걸쳐 있다. 오늘날 존재하는 버전은 전편에 걸쳐 클론(klon) 운율로 작곡되었으며, 태국에서는 '니탄 캄 클론'() 즉, '운문 이야기'로 불린다.

아유타야 불교 사원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스투파 형태의 솔리드 사원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ปรางค์) 형태의 사원이다. 프랑은 수코타이, 롭부리, 방콕(왓 아룬) 등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크기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프랑은 높이 15~40미터이며, 우뚝 솟은 옥수수 알갱이 모양의 구조물과 닮았다.

프랑은 본질적으로 메루산을 나타낸다. 태국에서는 부처의 유골이 종종 이러한 구조물의 석실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보여준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믿음을 반영한다.[126]

6. 1. 주요 유적

우통 왕은 1357년에 왓 야이 차이 몽콘을 건립하였다.[127] 왓 프라 시 산펫은 1351년 우통 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름사진건립 시기건립 주체비고
왓 파난 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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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년아유타야 건국 27년 전에 건립된, 여전히 사용 중인 존경받는 사원
왓 풋타이사완1351년 이전우통 왕아유타야 건국 이전에 건립됨; 태국 크라비-크라봉 검술의 발상지
왓 탐미카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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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년 이전
왓 프라 시 산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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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년우통 왕
왓 야이 차이 몽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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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7년[127]우통 왕[127]
왓 프라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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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년라마세우안 왕
왓 마하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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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보롬마라차티랏 1세 왕
왓 라차부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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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년보롬마라차티랏 2세 왕
왓 나 프라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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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130]라마티보디 2세 왕가장 잘 보존된 아유타야 사원 중 하나. 1767년 아유타야 함락에서 살아남음. 낭클라오 (재위 1824–51) 통치 기간 동안 복원됨.[130]
체디 푸카오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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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1744년 재건)[131]왕자 (후일 왕이 된) 나레수안
보롬마콧 왕[131]
1584년 아유타야의 버마 해방 이후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됨[131]
왓 프라 풋타바트, 사라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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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132]송탐 왕현재까지 태국의 순례지.
왓 차이 와탄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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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프라삿 통 왕
프라삿 나콘 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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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년[133][134]프라삿 통 왕대부분 출랄롱꼰 왕 통치 기간 동안 재건됨.
왓 쿠디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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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이전[135]왕자, 후일 왕이 된 보롬마콧[135]18세기 후기 아유타야 건축의 좋은 예. 부분적으로 복원됨.[135]
왓 코 카우 슷타람, 펫차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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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4년[136]보롬마콧 왕[136]18세기 아유타야 사원(왓) 벽화의 가장 좋은 예 중 하나
위한 프라 몽콘 보핏보롬마콧 왕 (재위 1733–1758) 통치 기간 동안 대대적으로 개조됨보롬마콧 왕1767년 버마의 약탈로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위한의 현재 모습은 주로 18세기 사원의 대대적인 개조에서 비롯됨. 20세기 중반에 대부분 재건됨.[137]


7. 정치

1600년부터 1767년까지, 단 두 번을 제외한 모든 왕위 계승은 수도에서 소규모 내전으로 이어졌다. 150년간의 번영 동안 왕좌는 매우 강력하고 수익성이 높은 부의 원천이 되었기에 많은 왕족들이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18세기 아유타야의 귀족은 지난 90년 동안 여러 차례의 왕위 계승 다툼으로 많은 수의 궁정 관리와 유능한 장군들이 사망했다고 개탄했다.[74] 마지막 국왕 엣카탓은 그의 형제 웃툼폰과 함께, 보롬마콧 왕의 아들이자 전궁의 우파라자(Uparaj)이자 지정된 후계자였던 왕자 탐마티벳을, 그의 아버지의 두 왕비와의 관계를 선동하거나 폭로함으로써 몰락시켰다. 탐마티벳 왕자는 그의 혐의대로 처형되었다.

경제적 번영으로 인해 부패가 만연했다. 지위 매수와 정치직에 대한 뇌물 수수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74]

아유타야 왕의 버마식 묘사. 우툼폰 또는 엑카탓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됨


파탄 다리에서 인타라차 왕의 두 아들이 코끼리 위에서 죽을 때까지 싸운 사건을 묘사한 그림


초기 해양 무역 시대 아유타야의 통치자들은 항구 도시의 지도자들이었다. 다른 도시들과의 관계는 동등한 자들 중 첫 번째의 지위였다. 초기 아유타야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도시의 봉신국들과의 이익을 조화시켜야 했다. 15세기와 16세기에 아유타야가 북부 도시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정부 기능을 수용함에 따라, 아유타야의 통치자들은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봉신 도시들의 희생으로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17세기 무역을 통해 부유해짐에 따라 왕들은 앙코르와 브라만 의식 및 상징을 군주에게 덧씌우는 것을 포함하여 그들의 부를 이용하여 권력을 표출했다.[91]

17세기 이후 아유타야의 왕들은 준 종교적 지위를 가진 절대 군주였다. 그들의 권위는 힌두교와 불교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리더십에서 비롯되었다. 왕은 법을 준수함으로써 온 세상이 그의 주위를 돌게 만드는 '차크라파트'(산스크리트어 ''차크라바르틴'')로 간주되었다.[100]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왕은 악마를 파괴하는 비슈누의 아바타로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태어났다. 불교에서 왕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엄격히 따르고 백성의 복지를 목표로 하는 의로운 통치자()로 여겨진다.

왕들의 공식 이름은 힌두교와 불교를 반영했다. 그들은 다양한 힌두 신들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인드라, 시바 또는 비슈누(라마). 즉위식은 브라만들이 주관했는데, 힌두 신 시바는 "우주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전에 따르면, 왕은 백성을 보호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최고의 의무를 지녔다.

불교에 따르면, 왕은 보살로 여겨지기도 했다. 왕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번영과 평화의 상징으로 사원이나 붓다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100]

지역 주민들에게 왕권의 또 다른 측면은 "땅의 주인" 또는 "땅을 다스리는 자"(''Phra Chao Phaendin'')의 비유였다. 궁중 예절에 따르면, 왕족과 또는 왕족에 대해 소통하기 위해 특별한 언어인 ''라차삽''(, '왕실 언어')가 사용되었다.[101] 아유타야에서 왕은 귀족부터 평민까지 신하들에게 토지를 통제할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보롬마트라이로카낫(1448-1488) 왕이 제정한 ''삭나'' 또는 ''삭디나'' 시스템에 따른 것이었다.[102] ''삭디나'' 시스템은 봉건제와 유사했지만 동일하지는 않았는데, 봉건제에서는 군주가 토지를 소유하지 않는다.[103] 1685년 아유타야에 온 프랑스인 프랑수아-티몰레옹 드 쇼지는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진정한 시암인들의 신이며, 아무도 그의 이름을 감히 입에 담지 못한다"고 썼다. 또 다른 17세기 작가인 네덜란드인 얀 반 플리에트는 시암 왕이 "신 다음으로 그의 신하들에게 존경받고 숭배받았다"고 언급했다. 법률과 명령은 왕에 의해 발표되었다. 때때로 왕 자신이 반역자나 반란자와 같은 중요한 범죄자를 심판하고 처벌하는 최고 재판관이기도 했다.[104]

''삭디나'' 시스템 외에도 보롬마트라이로카낫의 수많은 제도적 혁신 중 하나는 '총독' 또는 '왕자'로 번역되는 ''우파라자''의 직책을 채택한 것이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왕의 장남이나 친형제가 맡았으며, 왕위 계승을 정규화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일부다처제 왕조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왕과 ''우파라자'' 사이에는 내재적인 갈등이 있었고, 자주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105] 그러나 아유타야 왕위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유타야 왕의 패권은 항상 그의 나이와 지지자들을 바탕으로 한 카리스마에 기반을 두었다. 지지자 없이는 유혈 쿠데타가 때때로 발생했다. 수도의 가장 강력한 인물은 항상 장군이거나 군부 장관인 ''칼라홈''이었다. 아유타야의 마지막 세기 동안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과 장군들 사이의 유혈 사투가 궁정을 괴롭혔다.

나레수안이 1605년 에카토사롯에게 왕위를 계승한 것을 제외하고, "17세기 내내 아유타야의 왕위 계승 방법은 전투였다." [106] 당시 태국을 방문한 유럽 방문객들은 시암의 왕위 계승 순서에 어떤 규칙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고, 실제로는 죽은 왕의 동생이 그를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했지만, 이 관습은 어디에도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06] 통치하는 왕은 종종 자신의 선호하는 계승자에게 ''우파라자'' 칭호를 수여했지만, 실제로는 '제거 과정'이었다. 왕족 남성 구성원(일반적으로 고인이 된 왕의 형제와 아들)은 스스로 아유타야의 왕위를 주장하고 모든 라이벌을 물리쳐 승리할 수 있었다.[106] 또한 귀족, 외국 상인 및 외국 용병 그룹은 각 전쟁의 결과로부터 이익을 얻기를 바라며 자신의 선호하는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106]

아유타야는 19세기 이전 동남아시아 여러 왕국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만달라 시스템을 따랐다. 17세기 아유타야 국왕들은 귀족들의 경쟁을 막기 위해 아유타야가 지배하는 도시들의 총독으로 비(非)토착민들을 자주 임명할 수 있었다. 아유타야 시대 말기에 시암 수도는 차오프라야 강 하류 지역의 정치 세력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아유타야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통제력은 점차 느슨해졌다.[74] 태국 역사가 수나잇 추인타라논드(Sunait Chutintaranond)는 "아유타야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는 견해"는 옳지 않으며 "아유타야에서는 지방 총독들의 패권이 결코 성공적으로 제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107][108]

프랑스 자료에 따르면, 18세기 아유타야 왕국의 주요 도시는 마르타반, 리골(Ligor) 또는 나콘시탐마랏(Nakhon Sri Thammarat), 테나세림(Tenasserim), junk Ceylon(Junk Ceylon) 또는 푸껫 섬(Phuket Island), 싱고라(Singora) 또는 송클라(Songkhla)였다.[115]

특히 남쪽에서는 아유타야 왕국의 영유권 주장이 말레이 술탄국들에 의해 종종 부정되거나 축소되었고, 그 결과 17세기와 18세기부터 반항적인 술탄국들을 정복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군사 원정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악명 높은 것은 1680년 나라이(Narai) 왕의 싱고라 술탄국(Sultanate of Singora) 원정이었다.

7. 1. 군사

아유타야의 군대는 태국 육군의 기원이 되었다.[91] 군대는 수천 명의 소규모 상비군으로 조직되어 수도와 왕궁을 방어했으며, 훨씬 더 큰 징집 기반의 전시 군대를 보유했다. 징집은 ''프라이'' 시스템(프라이 루앙과 프라이 솜 포함)을 기반으로 했는데, 이 시스템은 전시에 지역 지도자들이 인구를 기준으로 관할 구역에서 미리 정해진 수의 병력을 공급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군사 조직 시스템은 초기 라타나코신 시대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91]

보병의 주요 무기는 주로 검, 창, 활과 화살이었다. 보병 부대는 기병코끼리 부대에 의해 지원되었다.[91]

1600년부터 1759년까지의 기간 동안 전쟁 규모는 그 이전 시대에 비해 감소했다. 나라이 왕은 1650년대와 1660년대에 치앙마이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아유타야는 1715년경부터 응우옌 왕조(베트남 남부의 통치자)와 캄보디아의 지배권을 두고 싸웠다. 반면 아유타야 왕국과 복고 타웅구 왕조 버마는 17세기에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서로 사절을 교환했다.[91]

아유타야는 용병에 크게 의존했다. 일본의 사무라이시크 라즈푸트족처럼 엘리트 군사 계급을 만들지 못했는데, 아마도 아유타야 왕들이 왕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거나 도전할 수 있는 그러한 엘리트 전사 집단의 창설을 의도적으로 저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유타야 시는 우기 몬순에 의존하여 1년 중 6개월 동안 포위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아유타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청난 양의 대포와 무기를 축적했다.[91]



1600년 버마의 바고를 점령한 나레수안 국왕, 프라야 아누삿치트라콘의 벽화, 왓 수완다라람, 아유타야 유적 공원.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Ayutthaya: Siam in the Early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A History of Ayutthaya: Siam in the Early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A History of Ayutthaya: Siam in the Early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A History of Ayutthaya: Siam in the Early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The Siam Society Lecture: A History of Ayutthaya (28 June 2017) https://www.youtube.[...] 2020-05-21
[6] 서적 Strange Parallels: Volume 1, Integration on the Mainland: Southeast Asia in Global Context, c. 800–1830 (Studies in Comparative World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7] 서적 A History of Ayutthaya: Siam in the Early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The Siam Society Lecture: Uma Amizade Duradoura (31 May 2018) https://www.youtube.[...]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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