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티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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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엔티안 왕국은 1707년 란쌍 왕국이 루앙프라방 왕국과 분열되면서 성립된 라오스의 왕국이다. 1706년 루앙프라방의 독립 선언 이후 아유타야 왕국의 지원을 받아 비엔티안 왕국이 세워졌다. 이후 시암의 속국으로 지내다 아누웡 왕의 반란 실패로 1828년 멸망했으며, 이후 프랑스 식민 통치를 거쳐 프랑스령 라오스의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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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안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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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비엔티안 왕국 |
라오어 명칭 | ອານາຈັກວຽງຈັນ (아나착 위앙짠) |
버마어 명칭 | ဗီယင်ကျန်းနိုင်ငံ (베 얀 짠 닌간) |
태국어 명칭 | อาณาจักรเวียงจันทน์ (아나짝 위앙짠) |
일반 명칭 | 비엔티안 |
존속 기간 시작 | 1707년 |
존속 기간 종료 | 1828년 |
수도 | 비엔티안 |
공용어 | 라오어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정부 형태 | 절대 군주제 |
통화 | 랏, 호이, 폿 두앙 |
오늘날 국가 | 라오스 태국 |
역사 | |
성립 계기 | 란쌍 왕국 분열 |
버마의 속국 | 1765년-1779년 |
시암의 속국 | 1779년-1828년 |
멸망 계기 | 시암에 합병 |
주요 지도자 | |
국왕 | 세타티랏 2세 (1707년–1730년) |
국왕 | 옹롱 (1730년–1767년) |
국왕 | 옹분 (1767년–1778년; 1780년–1781년) |
국왕 | 난타센 (1781년–1795년) |
국왕 | 인타봉 (1795년–1805년) |
국왕 | 아누봉 (1805년–1828년) |
총독 | 프라야 수포 (1778년–1780년) |
2. 역사
라오스에는 원래 라오 족의 통일 왕조인 란쌍 왕국이 있었으나, 1690년 술리냐웡사 왕이 사망한 후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다. 1698년 세타티랏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이 과정에서 추방된 술리냐웡사의 친족들은 훗날 란쌍 왕국이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1706년 술리냐웡사의 손자인 킨 킷사라트와 인타솜 형제가 루앙프라방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세타티랏 2세는 이들을 제압할 힘이 없어, 아유타야 왕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1707년 아유타야 군대가 비엔티안에 도착했지만, 란쌍 왕국의 약화를 노리고 움직이지 않아, 결국 란쌍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루앙프라방 분리 이후, 비엔티안 왕국의 각지에서 분열 움직임이 나타났다. 1709년 무앙 나콘 영주 프라 프롬라사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1713년 참파삭 지역이 참파삭 왕국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1730년 왕위를 계승한 옹분(푼나산) 왕은 1770년 톤부리 왕조(시암)의 딱신 왕과 동맹을 맺어 국내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동맹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773년 루앙프라방의 침공을 받았을 때, 푼나산 왕은 시암 대신 꼰바웅 왕조(버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1774년 푼나산 왕은 버마와 협력하여 시암을 공격했고, 1777년 시암은 비엔티안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비엔티안 왕국을 속령으로 삼았다.
시암은 에메랄드 불상과 귀족들을 전리품으로 1780년에 철군했지만, 푼나산 왕은 1781년 사망했다. 딱신 왕은 난타센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1782년 푸타욧파쭐라록이 라마 1세로 즉위하여 짜끄리 왕조를 세웠고, 비엔티안 왕국은 시암으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787년 비엔티안 왕국은 므앙 푸안 영토를 둘러싸고 떠이선 왕조(베트남)와 대립했다. 이 충돌은 베트남 측의 승리로 끝났고, 므앙 푸안은 비엔티안 왕국 영토이면서도 베트남 왕조의 세력 하에 놓였다.
난타센 사후, 인타라웡이 왕위를 계승했고, 1798년-1799년 시암의 버마 잔당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1803년 인타라웡이 사망하자, 시암은 아누웡을 세타티랏 3세로 왕위에 앉혔다. 세타티랏 3세의 치세(1804년-1829년)에 비엔티안 왕국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1807년 새로운 왕궁 건립, 1808년 탓 파놈 다리 건설, 시분판 사원(농카이 주) 건립, 1824년 세인 사원 건립 등 토목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827년, 세타티랏 3세는 시암의 혼란을 틈타 독립을 꾀하였다. 그는 비밀리에 군대를 방콕으로 파병했지만, 이 계획은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다. 1828년, 세타티랏 3세는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시암은 비엔티안을 철저히 파괴하고 비엔티안 왕국의 주권을 박탈, 영토를 시암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1828년 비엔티안 왕국은 멸망했고, 루앙프라방 왕국의 영향력이 라오스 지역에서 확대되었다.[1]
2. 1. 란쌍 왕국의 분열 (1706-1707)
1690년 술리냐웡사 왕이 사망하자, 란쌍 왕국은 왕위 계승 분쟁에 휩싸였다. 이 분쟁은 1698년 세타티랏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술리냐웡사의 친족들이 추방되었고, 이는 훗날 란쌍 왕국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1706년, 술리냐웡사의 손자인 킨 킷사라트와 인타솜 형제가 루앙프라방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세타티랏 2세는 이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기에, 독립을 승인하거나 외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결국 세타티랏 2세는 아유타야 왕국의 산펫 8세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1707년, 아유타야 군대가 비엔티안에 도착했지만, 란쌍 왕국의 약화를 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세타티랏 2세는 란쌍 왕국을 루앙프라방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으로 분열시키는 형태로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1]
2. 2. 비엔티안 왕국의 성립과 초기 발전 (1707-1770)
1698년 세타티랏 2세가 란쌍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 계승 분쟁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란쌍 왕국은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1706년, 술리냐웡사의 손자인 킨 키싸라트와 인타솜 형제가 루앙프라방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란쌍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세타티랏 2세는 아유타야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유타야 군대는 란쌍 왕국의 약화를 노리고 비엔티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이후 비엔티안 왕국의 각지에서 분리 독립 움직임이 나타났다. 1709년 무앙 나콘 영주 프라 프롬라사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1713년 참파삭 지역이 참파삭 왕국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1730년 세타티랏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옹분(푼나산) 왕은 1770년 톤부리 왕조(시암)의 딱신 왕과 동맹을 맺어 국내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동맹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773년 비엔티안 왕국은 루앙프라방의 침공을 받았을 때, 푼나산 왕은 시암 대신 꼰바웅 왕조(버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1774년 푼나산 왕은 버마와 협력하여 시암을 공격했고, 이에 1777년 시암은 비엔티안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비엔티안 왕국을 속령으로 삼았다.
2. 3. 시암의 속국 시대 (1770-1827)
1770년, 비엔티안 왕국의 옹 분(푼나산) 왕은 이웃 톤부리 왕조(시암)의 딱신 왕이 비엔티안 영토였던 우돈타니와 우본랏차타니를 노리자, 딱신 왕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 관계를 맺어 국내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양국의 서로 다른 속셈 때문에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서로의 의견 차이만 발생하였다.[1]1773년, 비엔티안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푼나산 왕은 동맹국인 시암에 원군을 요청하는 대신, 주둔지가 가깝다는 이유로 당시 시암과 전쟁 중이던 꼰바웅 왕조(버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치앙마이에서 원군 요청을 받은 버마군 지휘관 포스파라는 이 사실을 루앙프라방 측에 알려, 싸우지 않고 분쟁을 평정하고 양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1]
1774년, 푼나산 왕은 버마와 협력하여 시암에 파병했다. 이 때문에 시암의 딱신 왕은 비엔티안 왕국을 신뢰하지 않고 표면적인 외교만 유지하게 되었다. 1777년, 버마의 침공을 막아낸 시암은 그대로 비엔티안을 침공하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비엔티안 왕국을 속국으로 삼았다.[1]
시암은 에메랄드 불상과 수많은 귀족들을 전리품으로 삼아 1780년에 철군했다. 푼나산 왕은 시암 침공 때 도망친 캄크트 지역에서 1781년 사망했다. 딱신 왕은 비엔티안의 새 왕으로 차오 난타센을 옹립했다. 1782년, 푸타욧파쭐라록이 딱신 왕을 죽이고 라마 1세로 즉위하여 짜끄리 왕조를 세웠고, 비엔티안 왕국은 시암으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다.[1]

그러나 1787년부터 비엔티안 왕국은 므앙 푸안의 영토를 둘러싸고 떠이선 왕조(베트남)와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충돌은 응에안 성의 카이산에 의해 베트남 측이 승리했고, 이후 므앙 푸안은 비엔티안 왕국 영토이면서도 베트남 왕조(떠이선 왕조와 응우옌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1]
차오 난타센 사후 왕위는 동생 인타라웡이 계승했고, 1798년부터 1799년 사이 시암이 지휘한 버마 잔당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이때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차오 아누웡을 높이 평가한 시암은 1803년에 인타라웡이 사망하자 차오 아누웡을 세타티랏 3세로 왕위에 앉혔다. 세타티랏 3세의 치세(1804년-1829년)에 비엔티안 왕국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1807년 새로운 왕궁을 건립하고, 1808년 탓 파놈 다리 건설, 시분판 사원(농카이 주) 건립, 1824년 세인 사원 건립 등 각지에서 당시 토목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 사원과 시설 정비가 이루어졌다.[1]
2. 4. 아누웡 왕의 반란과 왕국의 멸망 (1827-1828)
1827년, 세타티랏 3세(아누웡)는 시암의 짜끄리 왕조가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독립을 꾀하였다. 그는 비밀리에 군대를 방콕으로 파병했지만, 이 계획은 루앙프라방 왕국과 부왕 티사 등에 의해 누설되었다. 결국 시암에 의해 이 작전은 간파되었고, 시암 군대가 왕도 비엔티안을 점령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1]반란 실패 후, 세타티랏 3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1828년 시암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시암은 비엔티안 점령 후 세타티랏 3세 파의 반란을 우려하여 왕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비엔티안 왕국의 주권을 박탈, 영토를 시암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1828년 비엔티안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고, 이후 란쌍 왕조의 계보를 잇는 루앙프라방 왕국의 영향력이 라오스 지역에서 확대되었다.[1]
3. 군주
이름 | 재위 기간 |
---|---|
세타티랏 2세 | 1706년 ~ 1730년 |
옹롱 | 1730년 ~ 1767년 |
옹분 (1차) | 1767년 ~ 1778년 |
프라야 수포 | 1778년 ~ 1780년 |
옹분 (2차) | 1780년 ~ 1781년 |
난타센 | 1781년 ~ 1795년 |
인타라웡 | 1795년 ~ 1805년 |
아누웡 (세타티랏 3세) | 1805년 ~ 1828년 |
1690년 술리냐웡사 왕이 사망하고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진 후, 1698년 세타티랏 2세가 왕위에 오르며 분쟁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1706년 킨 킷사라트와 인타솜 형제가 루앙프라방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란쌍 왕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1] 1707년 아유타야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란쌍 왕조의 약화를 노린 아유타야 군대는 비엔티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세타티랏 2세는 란쌍 왕국을 루앙프라방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으로 분리해야 했다.
1730년 왕위를 계승한 옹분(푼나산) 왕은 톤부리 왕조의 딱신 왕과 동맹을 맺었지만, 서로 다른 속내로 인해 관계는 원활하지 않았다. 1773년 루앙프라방 왕국의 침공 때 꼰바웅 왕조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시암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777년 시암은 비엔티안을 점령하고 속령으로 삼았다.
1781년 시암은 차오 난타센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1782년 짜끄리 왕조가 들어서면서 비엔티안 왕국은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787년 떠이선 왕조와의 영토 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응우옌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05년 왕위에 오른 아누웡(세타티랏 3세) 치세에 비엔티안 왕국은 황금기를 맞았다. 1807년 새 왕궁을 건립하고, 1808년 타트 파놈 다리 건설, 1824년 세인 사원 건립 등 대규모 토목 사업을 추진했다.
1827년 아누웡은 시암으로부터 독립을 꾀했지만, 1828년 시암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시암은 비엔티안 왕국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편입했다.
4. 문화
비엔티안 왕국의 문화는 세타티랏 3세 치세에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비엔티안 왕국은 불교를 중심으로 건축, 종교,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5. 멸망 이후
1827년, 세타티랏 3세는 왕실 회의를 열어 짜끄리 왕조가 국내외 정세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꾀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타티랏 3세는 비밀리에 방콕 파병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루앙프라방 왕국과 부왕 티사 등에 의해 누설되었고, 결국 작전 도중에 시암에 간파되어 왕도 비엔티안이 점령당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1]
반란 실패 후, 세타티랏 3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1828년 시암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시암은 비엔티안 점령 후 세타티랏 3세 파의 반란을 우려하여 왕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비엔티안 왕국의 주권을 박탈하여 샴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1828년 비엔티안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고, 이후 란쌍 왕조의 계보를 잇는 루앙프라방 왕국의 영향력이 라오스 지역에서 강화되었다.[1]
5. 1. 시암과 베트남의 각축
1779년, 란쌍 왕국의 셋타티랏 2세 통치하에 키사랏은 루앙프라방의 분리를 선포하고 셋타티랏을 공격하기 위해 비엔티안으로 진군했다. 셋타티랏 2세는 아유타야에 도움을 요청했고, 시암 군대는 비엔티안 방어를 도왔지만 키사랏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키사랏은 1707년에 왕으로 즉위하여 루앙프라방 왕국을 건설하고 란쌍 왕국을 비엔티안 왕국으로 만들었다. 참파삭 왕국과 무앙푸안도 그 후 몇 년 동안 분리 독립했다.[1]1773년, 비엔티안은 루앙프라방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옹 분 왕은 도움을 얻기 위해 꼰바웅 왕조에 연락하여 비엔티안을 버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톤부리 궁정을 분노케 했다. 1775~1776년 버마-시암 전쟁 후, 탁신 왕은 프라야 차크리 장군(후일 라마 1세)을 파견하여 비엔티안을 공격했다. 1779년, 시암 군대는 비엔티안을 약탈했고, 도시는 약탈당했으며 에메랄드 불상을 포함한 여러 중요한 불상들이 톤부리로 옮겨졌다. 옹 분 왕은 시암에 복종하기로 결정했고 비엔티안은 시암의 속국이 되었다. 옹 분은 다시 시암에 반기를 들었다. 1781년, 그는 시암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
시암은 옹 분의 아들 난타센을 통치자로 임명했다. 1791년, 난타센은 라마 1세 왕에게 루앙프라방이 비밀리에 시암에 대한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루앙프라방을 공격할 허락을 받았고 1792년에 도시를 점령했다.[1]
1791년, 비엔티안은 레 왕조 충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베트남의 떠이선 왕조에 의해 침략당했고, 난타센은 시암으로 도망쳐야 했다. 마침내 그는 떠이선 왕조와 타협에 이르렀다. 1795년, 난타센은 나콘 파놈의 라오 주지사와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폐위되어 방콕으로 끌려갔다. 그의 동생 인타봉이 계승했다.[1]
인타봉은 1804년에 사망했고 그의 동생 아누봉이 비엔티안의 통치자로 그를 계승했다. 아누봉은 시암에 대한 반란을 위한 군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1826년 12월, 아누봉은 1만 명의 군대를 코랏 고원의 도시들로 보냈다. 그는 1월에 나콘랏차시마를 점령했지만 시암은 신속하게 대규모 반격을 조직했다. 1827년, 비엔티안은 시암 군대에 의해 두 번째로 파괴되었다. 도시는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거의 모든 보물이 약탈당했으며 인구는 완전히 이주당했다. 아누봉 왕은 체포되어 사망할 때까지 철창에 갇혔다.[1]
비엔티안 왕국은 멸망했다. 코랏 고원은 공식적으로 시암에 합병되었다. 시암은 라오 지역을 세 개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었다. 북쪽에는 루앙프라방의 왕과 소규모 시암 수비대가 루앙프라방, 십송반나, 십송쩌우타이를 통치했다. 중부 지역은 농카이에서 관리되었다. 남부 지역은 참파삭에서 통제되었다. 시암의 영향력을 우려한 응우옌 왕조 시대 베트남은 무앙푸안과 캄무안, 사바나켓 주를 합병했고, 그곳에서 1831년~1834년 시암-베트남 전쟁 동안 시암과 싸웠다.[1]
시암은 라오 사람들을 코랏 고원으로 강제 이주시켜 메콩 강 동쪽 기슭의 원래 인구의 5분의 1만 남게 했다. 183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이 지역은 반란, 도적, 노예 습격 및 호 전쟁으로 황폐해졌다. 권력의 공백은 이미 캄보디아와 코친차이나를 장악한 프랑스가 중국으로 가는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메콩 강으로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게 했다. 비엔티안은 결국 1893년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99년 프랑스 라오스 보호령의 수도가 되었다.[1]
5. 2. 프랑스 식민 통치
비엔티안 왕국은 1827년 시암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멸망했다. 코랏 고원은 시암에 합병되었고, 시암은 라오 지역을 세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북쪽은 루앙프라방 왕과 시암 수비대가, 중부는 농카이에서, 남부는 참파삭에서 통치했다.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시암의 영향력을 우려하여 무앙푸안과 캄무안, 사바나켓 주를 합병하고 시암과 전쟁을 벌였다.183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라오 지역은 반란과 노예 습격, 호 전쟁 등으로 황폐해졌다. 이러한 권력 공백을 틈타 프랑스는 메콩 강을 따라 북상하여 비엔티안을 점령하고, 1899년 프랑스령 라오스 보호령의 수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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