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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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라노 공작은 1395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보헤미아 국왕 벤체슬라우스 4세로부터 밀라노 공작 칭호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비스콘티 가문, 스포르차 가문, 발루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등 여러 가문이 밀라노를 통치했으며, 각 가문은 혈통, 정복, 결혼 등을 통해 공작위를 계승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밀라노 공국은 멸망하고, 이후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벤체슬라우스 4세로부터 '''밀라노 공작''' 칭호를 받으면서[1], 이후 밀라노의 통치자들은 공작으로 불리게 되었다.
2. 밀라노 공작 목록
이후 밀라노 공작위는 비스콘티 가문, 스포르차 가문, 발루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을 거치며 계승되었다. 각 가문별 통치 기간과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밀라노 공국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2. 1. 비스콘티 가문
1395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국왕 벤체슬라우스로부터 '''밀라노 공작''' 칭호를 받았다.[1] 그는 약 100000플로린을 지불하고 이 칭호를 샀다.[2] 그 순간부터 밀라노의 모든 통치자들은 공작으로 불리게 되었다.
2. 2.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 (1447년 - 1450년)
1447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사망하자 비스콘티 가문의 주요 계통은 단절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틈타 부유한 시민, 학자, 성직자들로 구성된 비밀 결사대가 공작령의 해체를 선언하고 과두정치적인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을 선포했다.[3]그러나 공화국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사보이 공국 등 인접 국가들은 롬바르디아에서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며, 프랑스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국가적 약점과 궐프-기벨린 간의 갈등이 재발하는 상황을 틈타, 밀라노 군 사령관이었던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1448년에 밀라노에서 베네치아로 탈주했다.[4] 2년 후, 여러 차례의 변절과 교활한 전략을 통해 스포르차는 성모 영보 대축일에 밀라노에 입성했다. 이후 그는 시의회에 의해 밀라노의 새로운 공작으로 선포되었으며, 필리포 마리아의 사생아였던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의 결혼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2. 3. 스포르차 가문 (1차)
1447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사망하면서 비스콘티 가문의 대가 끊겼다. 이로 인한 정치적 혼란기에 부유한 시민, 학자, 성직자들이 공작령을 해체하고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을 세웠다.[3]하지만 공화국은 인정받지 못했고, 베네치아 공화국, 사보이 공국, 프랑스 왕국 등이 영토 확장을 노렸다. 이러한 국가적 약점과 궐프-기벨린 간 갈등이 재발하는 가운데, 밀라노 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1448년 밀라노에서 베네치아로 탈주했다.[4] 2년 후, 그는 여러 차례의 변절과 전략 끝에 성모 영보 대축일에 밀라노에 입성, 시의회에 의해 새로운 공작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사생아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와의 결혼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2. 4. 발루아 가문 (1차)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조카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독살한 후 밀라노의 왕위를 찬탈하자,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에게 이탈리아 진군을 요청했고, 이는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이었다.[6] 1495년 루도비코가 베네치아 동맹과 동맹을 맺자, 프랑스는 포르노보 전투에서 패배했다. 샤를 8세의 사촌인 루이 12세는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잔 갈레아초의 유언에 따른 부계 혈통을 내세우며 밀라노 공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7]1499년 루이 12세는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 군대가 파비아 근처에 이르자, 루도비코와 그의 지지자들은 1499년 9월 17일 밀라노를 떠나 독일로 도망쳤다.[8] 루이 12세는 1499년 10월 6일 밀라노에 입성했다.[9]
2. 5. 스포르차 가문 (2차)
마시밀리아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들로, 1513년 1월 스위스 군대가 밀라노에 입성한 지 6개월 만에 왕위를 되찾았다.[10]
2. 6. 발루아 가문 (2차)
마리냐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위스는 밀라노에서 철수했고, 막시밀리아노는 돌아온 프랑스 군대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는 30000두카트의 금액으로 밀라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프랑스에서 계속 살았다.[11]
2. 7. 스포르차 가문 (3차)
카를 5세, 헨리 8세, 교황 레오 10세는 1521년 11월 28일에 프랑스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다.[12] 이로 인해 1521년 11월까지 프랑스의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었다. 밀라노의 프랑스 총독 오데 드 푸아는 제국군과 교황군에 맞서 싸우는 임무를 맡았지만, 프로스페로 콜론나에게 압도당했다. 결국 오데 드 푸아는 11월 말 밀라노에서 쫓겨나 아다 강 주변의 마을들로 후퇴했다.[13] 이로써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스포르차 가문이 권력을 되찾았다.
2. 8. 합스부르크 가문
1535년, 후계자가 없던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사망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프랑스나 스포르차 가문의 방계 가문에서 제기할 수 있는 다른 주장을 피하기 위해 밀라노 공국을 공석이 된 제국 영토로 합병했다.Cronologia Cronografia e Calendario Perpetuo|크로놀로지아 크로노그라피아 에 칼렌다리오 페르페투오it (밀라노, Hoepli, 1998)
2. 9. 합스부르크 스페인
Filippo Iit
- 1598년 9월 13일
Filippo IIit

- 1621년 3월 31일
Filippo IIIit

- 1665년 9월 17일
Carlo Iit

- 1700년 11월 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