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부샤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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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부샤 카툰은 원 영종 린친발의 생모이며, 원 명종의 황후이다. 내마진씨 출신으로 쿠빌라이 칸의 후손이다. 원 명종의 잠저 시절에 결혼하여 주왕비가 되었으며, 1326년에 린첸발을 낳았다. 1329년 명종이 황제가 되면서 황후가 되었으나, 명종 사후 투그테무르의 황후 부다시리에 의해 암살되었다. 혜종 즉위 후 태묘에 부묘되었으나,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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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샤 카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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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샤 카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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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칭호 | 카툰 |
배우자 | 보요카 시기 쿠투쿠 |
아버지 | 칭기즈 칸 |
형제자매 | 주치, 차카타이 칸, 오고타이 칸, 툴루이 |
2. 생애
원나라 영종 린첸발의 생모이다. 성(姓)은 내마진씨(乃馬眞氏)이며, 어머니는 원 태정제의 누이인 수녕대장공주(壽寧大長公主)이다. 출생년도와 생일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원 명종 쿠살라가 황제가 되기 전 잠저(潛邸) 시절에 결혼하여 주왕비(周王妃)가 되었고, 1326년 아들 린첸발을 낳았다. 1329년 남편 쿠살라가 문종 투그테무르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자 정궁황후(正宮皇后)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후 불교 사찰 영휘사(寧徽寺)를 건립하고 도교 사원을 세우는 등 종교 활동에 힘썼으며, 남편 원 명종 사후에는 그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1330년 원 문종의 황후인 부다시리 카툰에게 모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설에는 아들 린친발을 황제로 옹립하려다 처형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외삼촌뻘인 원 태정제 예순테무르의 부인 중 한 명인 살다바라(撒答八剌)와는 자매 관계였다. 사후 아들 린친발이 영종으로 즉위했으며, 1332년 원 혜종 때 태묘(太廟)에 부묘(祔廟)되었다.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등에는 그녀의 시호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시호 여부는 알 수 없다.
2. 1. 초기 생애와 결혼
성은 내마진씨(乃馬眞氏)이며, 어머니는 쿠빌라이 칸의 손자인 원 현종 카말라의 딸이자 원 성종의 조카딸이며, 원 태정제의 누이인 수녕대장공주(壽寧大長公主)이다. 바부샤의 출생년도와 생일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원 명종 쿠살라가 황제가 되기 전 잠저(潛邸) 시절에 결혼하였고, 남편이 주왕(周王)으로 책봉되자 주왕비가 되었다. 남편이 주왕으로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태정 3년(1326년)에 명종의 둘째 아들인 린첸발(후일의 영종)을 낳았다.
천력 2년(1329년), 남편 쿠살라가 동생 투그테무르(문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자 정궁황후로 책봉되었다.
2. 2. 황후 시절과 죽음
천력 2년(1329년), 남편 쿠살라가 동생 투그테무르의 선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자, 바부샤는 정궁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후 불교 사찰인 영휘사(寧徽寺)를 건립하고 궁중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또한 법당에 초(鈔, 지폐) 수만 정(錠)과 폐백(幣帛) 2천 필을 기부하였는데, 이는 황후궁의 비용으로 충당하였다.그러나 황후가 된 지 6개월 만인 그해 8월 30일, 남편 원 명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원 문종이 다시 황제로 복위하였다. 같은 해 11월, 바부샤는 원 문종에게 원 명종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열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에 승려들을 도성으로 초청하여 7일간 대천원연성사(大天源延聖寺)에서 불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도교의 도사들을 초빙하여 옥허(玉虛), 천보(天寶), 태을(太乙), 만수(萬壽) 등 네 개의 도교 사원을 건립하였다. 1331년에는 담당 관청에 명하여 태후궁의 비용으로 폐백 2백 필을 기탁하기도 하였다.
원 문종의 황후였던 부다시리 카툰은 원 명종의 장남 토곤테무르를 권력에서 몰아낸 뒤, 자신의 심복인 환관 바이주(拜住)를 시켜 1330년(지순 원년) 바부샤 황후를 모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원사(新元史)에 따르면, 부다시리가 내관을 시켜 바부샤를 암살하려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부샤가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부다시리가 직접 바부샤를 누중(壚中, 화로 속)으로 밀어 살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다른 기록에서는 바부샤가 자신의 아들 린친발을 황제로 옹립하려다 부다시리 카툰에게 발각되어 1330년 4월에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바부샤가 사망한 후 그녀의 아들 린친발이 원 영종으로 즉위하였다. 훗날 토곤테무르가 황제가 된 후인 1332년, 바부샤는 태묘에 부묘되었다. 원사(元史), 신원사 등 역사 기록에는 그녀의 시호가 전해지지 않아 시호 여부는 알 수 없다.
2. 3. 사후
투그테무르의 황후 卜答失里는 쿠살라의 장남 妥懽貼睦爾를 중앙 정계에서 몰아낸 후, 자신의 심복인 환관 拜住|바이주중국어를 시켜 바부샤 황후를 살해하였다(지순 원년, 1330년). 新元史|신원사중국어에 따르면, 부다시리가 내관을 시켜 바부샤 암살을 시도했고 얼마 뒤 바부샤가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부다시리가 壚中|누중중국어(화로 속)에서 바부샤를 떠밀어 죽였다는 설도 전해진다. 일설에는 바부샤가 자신의 아들 린친발을 칸으로 옹립하려다가 부다시리 카툰에게 발각되어 1330년 4월에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고도 한다.바부샤 사후, 그녀의 아들 린친발이 원 영종(元寧宗)으로 즉위하여 투그테무르의 뒤를 이었다. 혜종 토곤테무르가 즉위한 후인 1332년, 바부샤는 태묘에 부묘(祔廟)되었다. 元史|원사중국어, 新元史|신원사중국어 등 역사 기록에는 그녀의 시호가 전해지지 않아 시호 여부는 알 수 없다.
참조
[1]
서적
Marriage as Political Strategy and Cultural Expression: Mongolian Royal ...
https://books.google[...]
[2]
서적
World Food: An Encyclopedia of History, Culture and Social Influence from ...
https://books.google[...]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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