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원 성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원 성종은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의 손자이자 친킴 태자의 아들로, 1294년부터 1307년까지 원나라의 황제였다. 그는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불교 신자였으며, 젊은 시절에는 술에 탐닉하기도 했다. 황태자 시절에는 반란 진압에 참여하고, 몽골 고원의 지휘관을 역임했다. 1294년 즉위 후 공자 숭배를 강조하고, 유교 학자들을 중용하는 등 유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조절하고, 몽골 제국 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과 통풍으로 인해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원나라의 혼란을 초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65년 출생 - 단테 알리기에리
    단테 알리기에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신곡》을 저술하고 이탈리아어 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치 활동과 망명 생활을 겪고 기독교 사상과 당대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을 통해 세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265년 출생 - 후시미 천황
    후시미 천황은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제92대 일본 천황으로, 고후카쿠사 천황의 아들이자 고우다 천황의 양자였으며, 양통 립립의 관례를 확립하고 와카와 서예에 능통하여 문화 발전에 기여하며 인세이를 펼쳤다.
  • 1307년 사망 - 두아
    두아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 차가타이 칸국의 칸으로, 카이두의 지원으로 칸위에 올랐으나 카이두 사후 원나라와의 갈등 속에서 차가타이 칸국을 카이두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그의 통치는 모굴리스탄 칸국 건국에 영향을 주었다.
  • 1307년 사망 -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는 1272년부터 130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플랜태저넷 왕조의 국왕으로, 왕실 권력 회복, 웨일스 정복,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분쟁 개입, 법률 정비 및 의회 제도 발전 등 잉글랜드의 영향력 확대와 통치 체제 강화에 기여했다.
  • 테무르 - 티무르
    티무르는 14세기에 활동한 군사 지도자로서, 칭기즈 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잡고 정복 전쟁을 통해 티무르 왕조를 세웠으며, 군사적 재능과 잔혹함으로 평가받는다.
  • 테무르 - 코케 테무르
    코케 테무르는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워 하남왕에 봉해진 무장으로, 차간 테무르의 양자로서 그의 군대를 이어받아 원나라 권력 다툼에 관여했으나 명나라 군에 패하여 북원으로 후퇴 후 병사했으며,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원 성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테무르 칸의 초상화. 원본 크기는 가로 47cm, 세로 59.4cm. 비단에 그림. 현재 [[국립고궁박물원]](타이베이, 타이완)에 소장되어 있음.
테무르 칸의 초상화. 원본 크기는 가로 47cm, 세로 59.4cm. 비단에 그림. 현재 국립고궁박물원(타이베이, 타이완)에 소장되어 있음.
칭호몽골 제국 제6대 카안(명목상, 제국 분할로 인해)
이름테무르 (鐵穆耳)
칸호올제이투 칸 (Öljeyitü Qa'an, 完澤篤汗)
묘호성종 (成宗)
시호흠명광효황제 (欽明廣孝皇帝)
전체 이름테무르 (ᠲᠡᠮᠦᠷ)
통치 기간
즉위일1294년 5월 10일
퇴위일1307년 2월 10일
연호원정 (元貞) 1295–1297
대덕 (大德) 1297–1307
개인 정보
출생일1265년 10월 15일
사망일1307년 2월 10일 (41세)
사망 장소칸발리크, 원 중국
배우자콩기라트 씨족의 시린다리 황후(1285년 결혼, 1305년 사망)
바야우트 씨족의 불루간 황후(1295년 결혼)
배우자 유형황후
자녀데이슈 (1306년 사망)
아버지진킴
어머니코케진 (바이람 에그치)
종교불교
왕조
가문보르지긴
왕조원나라

2. 생애

쿠빌라이의 차남 칭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테무르는, 아버지 칭김과 형 다르마발라가 일찍 사망하면서 할아버지의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었다. 1293년 몽골 고원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황태자 인장을 받았으며, 이듬해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쿠릴타이에서 후계자로 선출되었다.[23]

테무르는 즉위 후, 카이두의 침공이 거세졌지만, 카이산 등을 파견하여 격파하고 1301년 카이두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1305년에는 두아와 차파르의 복종을 승인받아, 몽골 제국에 45년 만의 평화를 가져왔다.[23]

1299년에는 일본에 사절 일산일녕을 파견하여 조공을 촉구했으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다.[24]

테무르의 정권은 무슬림 재무 관료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쿠빌라이의 제도를 답습했다. 그러나 궁중의 낭비와 세수 감소로 인해 국가 재정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다.

테무르는 음주와 방탕한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1300년경부터는 병상에 누워 정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1307년 테무르가 사망하자, 불간 황후가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으나,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가 정변을 일으켜 카이산이 즉위했다.

2. 1. 생애 초반

쿠빌라이 칸의 둘째 아들인 친킴의 셋째 아들로, 친킴이 콩기라트 씨족 출신 정실 부인 코코진과의 사이에서 낳은 3명의 적자 중 막내였다. 아버지이자 황태자였던 친킴과, 할아버지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던 둘째 형 다르마발라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만년에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었다. 카다안의 난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이때 함께 싸운 부하들 중 많은 수가 즉위 후에 측근으로 활약하게 된다[23]

1293년 7월, 테무르는 카라코룸과 주변 지역의 제후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2] 테무르가 몽골을 방어하는 동안 세 명의 차가타이 왕자들이 그에게 항복했으며, 차가타이 칸국으로 도망갔다가 테무르의 통치 기간 동안 다시 원나라로 돌아왔다.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한 후, 쿠빌라이의 옛 관료들은 상두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할 것을 조정에 촉구했다. 친킴의 둘째 아들인 다르마발라가 이미 1292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잠재적인 후계자는 친킴의 다른 아들인 가말라와 테무르 뿐이었다. 칭기즈 칸의 어록에 대한 지식을 겨루는 대회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 대회에서 테무르가 승리하여 황제로 선포되었다.[3]

2. 1. 1. 출생과 소년기

1265년 10월 15일(음력 9월 5일) 몽골 제국의 대칸 쿠빌라이 칸의 차남이자 태자인 친킴과 휘인유성황후 콩기라트씨 코코진의 셋째 아들로 대도(현, 중국 베이징시) 연왕저에서 태어났다.[23] 테무르라는 칭호는 몽골어로 철을 의미한다. 몽골식 존호인 올제이투는 몽골어로 길상, 수복함, 축복 또는 거룩함을 뜻한다. 형으로 카말라와 다르마발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쿠빌라이 카안에 의해 중국유교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 신자로 성장했다.

젊은 시절 그는 에 중독되었고, 욕심이 많아 할아버지 쿠빌라이 카안에게 책망받았다.[3] 라시드 알딘의 《집사》에 의하면 쿠빌라이 카안이 그에게 충고를 하고 야단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쿠빌라이 카안은 세 번이나 그를 막대기로 때렸고, 그에게 무사(武士) 몇 명을 붙여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술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2. 1. 2. 청년기

1286년 1월 5일 아버지 친킴이 알콜중독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둘째 형 보르지긴 다르마발라1292년 사망하면서 황태자로 지명되었다. 1287년 10월 칭기즈 칸의 동생 카치운의 4대손 카다안 투투겐이 영북행성중서성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테무르는 쿠빌라이 칸의 명으로 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1288년 3월 카다안 등을 진압하였다. 이때 함께 싸운 부하 장수들은 그의 측근이 되었다.[23]

1288년 할아버지 쿠빌라이 카안을 따라 동몽골 나얀의 반란 진압에 출정하였다. 1291년 4월 17일 테무르는 군사를 이끌고 카다안 투투겐, 주치 카사르의 아들 야고의 아들 하라하슨 등과 교전하여 물리쳤다. 1292년 카이두와 교전 중이던 장군 바얀의 사자를 만나 전황을 보고받고, 그에게 국내 정세 상황을 전달하였다.

1293년 6월 21일 쿠빌라이로부터 황태자보를 받았다. 그해 7월 테무르는 몽골고원 주둔군 총병(總兵,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카라코룸과 인접 지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2]

2. 2. 즉위 과정

1292년 4월 14일 쿠릴타이에서 쿠빌라이 칸카말라와 테무르 중 누가 칭기즈 칸의 가르침을 암기했는지 시험했다. 칭기즈 칸의 가르침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차기 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시험의 이유였다. 카말라는 버벅댔으나 테무르는 완벽하게 암송하여 후계자로 확정되었다. 1293년 6월 21일 쿠빌라이로부터 황태자보를 받았다.[27] 그해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병력을 받고, 몽골고원카라코룸으로 파견되었다.

1293년 카이두의 침공에 대비해 몽골고원을 지키던 장군 바얀대도로 소환되면서, 그해 7월 테무르가 몽골고원 주둔군 총병(總兵, 총사령관)으로 임명, 배치되고 카라코룸과 인접 지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1294년 1월 22일, 쿠빌라이 칸이 통풍과 지병으로 사망하자, 원나라 관료들과 쿠빌라이 칸의 측근들은 쿠릴타이를 열 것을 촉구했다. 쿠릴타이가 열려 그의 손자이며 친김 태자의 아들 테무르 욀제이튀가 카안에 선출되어 성종이 되었다. 이때에도 누가 칭기즈 칸의 가르침을 더 잘 기억하는지 경쟁을 벌이는 것이 제안되었다. 테무르는 완벽하게 암송하였고 칸으로 최종 선출되었다.[27] 원나라 추밀원과 군권을 장악한 바얀 역시 테무르를 지지했다.

1294년 4월 22일 상도의 황궁 대안각에서 카안으로 즉위했다. 칸호는 완택독으로, 당대에는 울제이투우(ᠥᠯᠵᠡᠶᠢᠲᠦ ᠬᠠᠭᠠᠨ), 현대 몽골어로는 올제이투로 발음된다. 뜻은 몽고어로 길상(吉祥)함과 축복, 복수(福壽)를 의미한다. 알탄 톱치는 그가 즉위한 날이 4월 22일이 아니라 4월 10일(1294년 5월 6일)이라는 설이 있다. 원사, 원사연의, 신원사에 의하면 4월 22일 상도 황궁 대안각에서 즉위했다고 하며, 몽골 황금사(알탄 톱치)에 의하면 그는 4월 10일 시기르 호수에서 즉위했다 한다.

2. 3. 치세 기간

원 성종 테무르는 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의 정책을 계승하여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재위 기간 동안 만연했던 부패와 행정 비효율성을 개선하지는 못했다.[4]

지난 대남사는 테무르 통치 기간에 완공되었다.


이념적으로 테무르의 행정부는 유교와 유교 학자들을 존중했다. 즉위 직후 공자를 존경하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특히 유교 학자들과 가까웠던 하르가순을 비서실의 우대재상으로 임명했다.[5] 그러나 몽골 조정은 유교의 모든 원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6] 테무르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경비와 자산을 하사하고 그녀의 오르도(대궁전-천막 또는 캠프)를 롱푸궁 궁전으로 개명했는데, 이는 다음 수십 년 동안 쿵기라드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골 및 서방 정치인들은 다양한 중국 관리와 무슬림 금융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가장 저명한 무슬림 정치인은 사이이드 아잘 샴스 알-딘의 증손자인 바얀(Баян)으로, 재무부를 담당했다. 몽골 행정관 올제이와 하르가순 아래, 원나라는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했다. 재위 기간 동안 카간과 카툰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7]

행정부에 티베트인의 수가 점차 증가했다. 티베트의 콘 가문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중 한 명은 1296년에 황실 사위가 되었다. 테무르는 할아버지의 반-도교 정책을 뒤집고 도교 장리순을 학술 유현원의 공동 의장으로 임명했다. 1304년 용과 호랑이 산의 천사를 정통 통일 학교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1297년 몽골에서 알코올의 판매와 증류를 금지했고, 프랑스 역사가 르네 그루세는 그의 저서 ''The Empire of the Steppes''에서 그의 활동을 칭찬했다.

백성에게 추가적인 재정적 부담을 가하는 것에 반대했다. 원나라의 일부 또는 전체에 대한 징수 및 세금 면제가 여러 번 허용되었다. 즉위 후 칸발리크(대도, 현대 베이징)와 상도를 1년 동안 세금에서 면제했다. 그는 또한 몽골 평민을 2년 동안 과세에서 면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통화 준비금의 고갈은 지폐 시스템의 신뢰성을 크게 약화시켰다. 원나라 관리들의 부패가 문제가 되었다.

말년에, 30년 이상 지속되었고 몽골 제국의 영구적인 분열을 야기한 카이두-쿠빌라이 전쟁 이후, 1304년경에 원나라와 서부 몽골 칸국(금장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다. 테무르 칸은 그들의 명목상의 종주로 인정받았다. 평화 자체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이는 서부 칸국에 대한 원나라의 명목상 우위를 확립했고, 이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테무르는 음주를 즐겼는데, 1294년 칙령을 내려 주류의 판매를 금지했지만 암암리에 술을 즐겨 마셨다. 1300년 무렵부터 알코올 중독 후유증과 심한 통풍에 시달렸다. 규칙적이지 못한 생활로 건강을 잃게 되었고, 다른 울루스의 왕공족들과 화친 조약을 체결할 무렵에는 병상에 누워 제대로 정무를 볼 수 없었다.

2. 3. 1. 즉위 초반

1294년 5월 10일 원 성종은 칙령을 발표해 공자에 제사지내고 존경할 것을 선언했다.[29] 즉위 직후 일본 원정과 안남(베트남) 원정을 잠정 중단했으며, 중국 강남 지방의 세금을 면제했다. 유학(儒學) 경전 내용으로 관료를 채용하는 것을 줄이는 한편,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황권을 제한하고 학자들에게 송나라의 율령을 참고하여 법규인 율령(律令) 편찬을 지시하였다.

곡부 안회묘에 세워진 비석, 대도 11년(1307년)에 세웠으며 한자몽골 파스파 문자로 기록


칭기즈 칸의 개국공신 키실릭(啓昔禮)의 증손이자 중국 유학자들과 친밀한 하라하슨을 재상으로 발탁했다.[29] 조정의 재정난을 극복하고자 아잘 샴스 알딘 오마르(Sayyid Ajall Shams al-Din Omar)의 증손 바얀(장군 바얀과는 동명이인)을 호부상서로 발탁하고, 무슬림 상인 출신 인사들을 등용하여 재정 관리를 맡겼다. 한족, 몽골족, 무슬림 외에도 티베트인들을 적극 등용하였으며, 1296년에는 티베트인을 원나라의 고위 장수로 임명하기도 했다.

1299년 가을, 강절행성 출신 선승 일산일녕을 사절로 일본에 파견하면서 조공을 요구했다. 1299년 10월 8일 일본에 도착한 일녕은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인 호조 사다토키에게 국서를 봉정했으나 진의를 의심했고, 가마쿠라에 체류 중이던 일녕을 간첩 혐의로 억류하고 답을 주지 않았다.

2. 3. 2. 주변국 원정 및 종주권 확립

1295년 일 칸국가잔 칸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원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자,[31] 1296년 원 성종은 장군 바이지를 보내 가잔 칸을 견제했다.[31]

1297년 11월 고려 충렬왕 왕거를 일수왕으로 임명하고, 고려 세자 왕원(충선왕)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였다.

1297년 미얀마의 왕자 티후반티야의 요청으로 원나라 군사를 파견하여 미얀마를 침공한 샨 족을 격퇴하고 주달관미얀마 주재 원나라 대사로 파견했다.[10] 1299년 티후반티야는 아팅키야에게 살해되었고, 1300년 원 성종은 아팅키야를 징벌하기 위해 버마로 원정대를 보냈다.[11] 1301년과 1302년에는 중국 남서부로 추방된 샨 족과도 교전했다.[11] 샨 족과 버마에서는 일단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11] 그러나 란나 왕국(현재 태국 북부) 원정을 위해 장정을 대량 징발하여 윈난 지역, 구이저우(貴州)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11]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하고, 1305년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 오고타이 한국의 차파르 등이 귀순하면서 몽골 제국 내 평화가 찾아왔다.[23]

1304년 경, 30년 이상 지속되었고 몽골 제국의 영구적인 분열을 야기한 카이두-쿠빌라이 전쟁 이후, 원나라와 서부 몽골 칸국(금장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다. 원 성종은 그들의 명목상의 종주로 인정받았다.[4]

2. 3. 3. 아난다와의 갈등

원 성종은 1296년 장군 바이지에게 군사를 주어 일 칸국가잔 칸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1295년 일 칸국의 칸 가잔 칸은 집권 후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슬람교 포교에 힘썼다. 가잔 칸원나라 본국을 이교도라 부르며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31] 3년 후 가잔 칸은 대칸 테무르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에게 풍성한 선물을 보냈으며, 나중에 다른 몽골 칸들에게 테무르의 통치하에 단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성종 사후 일 칸국과는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

원 성종의 사촌이자 안서왕 아난다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원 성종은 이를 경계하며 그와 갈등했다. 1296년 아난다를 투옥하기도 했으나, 모후 코코진 카툰의 중재로 석방했다.

2. 3. 4. 카이두 격파, 치세 후반

1299년 원나라 군대는 알타이산맥 남쪽까지 내려가 카이두군을 격파하였다. 1300년 8월, 카이두는 카바르를 넘어 몽골고원으로 침략, 카이산의 군대를 격파했다. 1301년 카이두와 두아 칸은 카라코룸 공격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모았다.[23]

1301년 8월, 위기감을 느낀 카이두는 아리크 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 두아와 함께 최대 규모의 원정에 나섰다. 카이산의 군대가 전장에 지원되면서 전황은 급속도로 변했다.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인 두아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퇴각했고, 카이두는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24]

1301년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 메리크 테무르 등이 군사를 이끌고 카라코룸 방향으로 왔다. 테무르는 조카 회령왕 퀼리그 칸 카이산을 보내 카이두군을 상대하게 했다. 회령왕 퀼리그 칸 카이산카라코룸과 타미르에서 카이두군을 격파했고, 이때 카이두와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는 각각 중상을 입었다. 1302년 그는 정해진 세금 양을 초과하는 세금 징수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화폐 보유량과 재정이 악화되었다. 또한 원나라 관리들 사이의 부패가 문제가 되었다.[8]

1301년 혹은 1302년 카이두가 전투 중 얻은 부상으로 죽자, 1303년 두아는 카이두의 장남인 차파르를 칸위에 올렸다. 1304년 원나라와 서쪽 여러 칸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25] 1304년 일 한국의 올제이투 칸에게 원 성종은 형식적으로 책봉, 임명을 승인하고 원나라 황제의 인장을 보냈다. 올제이투 칸은 1305년 프랑스의 국왕 필립 4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인장을 사용했다.

1303년을 전후하여 곡물 운송과 관련된 중대한 부패 스캔들이 있었다. 어사대의 조사 결과 최고대신급을 포함하여 18,473명의 관리와 불교 승려도 연루되었으며 최소 45,865냥을 불법으로 빼돌린 것이 확인되었다. 성종은 이들 관원을 즉각 파면했으며, 이 중 일부는 2년 뒤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1300년 무렵부터 그는 알코올 중독 후유증과 심한 통풍에 시달렸다. 원 성종은 음주와 황음한 버릇이 있었고, 규칙적이지 못한 생활로 건강을 잃게 되었다. 다른 울루스의 왕공족들과 화친 조약을 체결할 무렵에 원 성종은 병상에 누워 제대로 정무를 볼 수 없었다.

1305년 초 성종은 갑자기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다가 낫게 되었다. 1305년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 오고타이 한국의 차파르가 입조, 충성을 맹약하였다. 그러나 1305년 두아 칸과 차파르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1306년 가을,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를 지원, 퀼리그 칸 카이산의 지휘 하에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두아는 원나라의 성종과 연합하여 오고타이 울루스를 공격, 칸인 차파르를 패배시키고 원과 함께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2. 4. 생애 후반

1305년 6월 27일(음력 6월 5일) 아들 테이슈를 황태자로 임명했으나, 1306년 1월 3일 테이슈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29] 원 성종은 후계자를 정하지 않아, 그의 사후 혼란이 발생했다. 치세 후반 운남 성과 귀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만년에 원 성종은 잦은 음주와 병으로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불루간 카툰색목인 출신 관리들이 권력을 행사했다. 혼란을 틈타 저장 성 닝보에는 왜구들이 출몰하였다.[34] 1306년 12월 19일 성종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12월 27일 경주(瓊州)의 동만(洞蠻)과 왕문하(王文何)가 반란을 일으켜 진압하고 복주하였다. 윈난 성과 구이저우 등에서도 소요사태가 벌어졌으나 곧 진압되었다. 1307년 성종은 카라코룸에 이동식 정부를 조직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1307년 1월 초 성종의 병세는 심해졌고, 불루간 대카툰은 안서왕 아난다를 대도로 소환했다. 안서왕 아난다는 메리크 테무르와 1월 6일 대도에 도착했다. 1307년 2월 10일 대도 황궁 옥덕전(玉德殿)에서 사망했으며, 이맹(李孟), 우승상 하라하슨(哈喇哈孫), 좌승상 아구타이 등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3. 사후

1307년 10월 7일 원 무종 카이산은 테무르에게 흠명광효황제(欽明廣孝皇帝)라는 시호와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몽골어로는 완택독황제(完澤篤皇帝)라 하였다. 올제이투는 중세 몽골어로 길상(吉祥), 복수(福壽)라는 뜻이다.[12]

테무르는 아들 테이슈 태자가 1306년 사망하여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칸위를 놓고 조정에 혼란이 발생했다. 불루간 카툰은 어아난다를 섭정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다른 신하들은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퀼리그 칸 카이산은 대도 주변에서 정세를 관망하며,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벌어졌다.

칭기즈 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 카안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 카안의 어머니 코코진 등의 출신 부족인 곤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 궁정 귀족들이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되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 출신이 아니었기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고자 안서왕 아난다를 카안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방계 즉위에 위협을 느낀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유르바르와다 군대를 맞이하여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카안으로 추대했다. 다기 카툰의 설득에도 카이산은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아유르바르와다가 형에게 양보하여 카이산이 카안이 되었다.

카이산은 즉위 전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삼고, 그 후손들이 번갈아 통치하도록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아유르바르와다가 원 인종으로 즉위한 후, 그의 어머니에 의해 카이산의 후손들이 박해받으면서 깨졌다. 이후 칸의 칭호는 테무르와 다르마발라의 후손에게서 그들의 형 가마알라의 후손에게로 넘어갔다.[13][14]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세조대원의 제5대 카안
조모소예순성황후콩기라트씨
아버지유종추존황제
어머니휘인유성황후콩키라트씨, 추존황후
장형카마라
차형다르마발라
황후시린달리홍길랄씨(弘吉剌氏) 출신, 옹기라트의 올로친 퀴레겐의 딸
황태자데쇼(德寿)1306년 1월 3일 사망, 이슬람 자료에는 티시 타이스(Tiši Tāyšī)[15] 또는 Ṭayšū[16]
황후불루간바야트씨(巴牙惕氏) 출신
황후후테니후테니씨(乞里吉忽帖尼) 출신
황후다기 카툰테무르의 형제 다르마발라(Darmabala)의 미망인[17]
미상의 배우자와의 자녀구유그 왕자(Qūyik Tāyšī)[18]
옹 테무르 왕자(ʿŪng Tīmūr)[19]
마카발린 왕자(Muqābīlān)[20][21]
창국공주(昌国公主) 이리해아(益里海雅)첫째 딸
조국공주(赵国公主) 아이야실리(爱牙失里)둘째 딸
노국공주(鲁国公主普纳) 푸나셋째 딸


5. 평가

성종은 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의 정책을 계승하여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을 확보하고 제국의 안정을 유지했다.[4] 유교를 존중하고 유교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즉위 직후 공자를 존경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유교 학자 하르가순을 중서성의 우대재상으로 임명하기도 했다.[5]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쳐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 티베트인을 행정부에 등용하고, 도교 장리순을 학술 유현원의 공동 의장으로 임명하는 등 종교적 화합을 추구했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여러 차례 세금을 감면해주고, 정해진 세금 할당량을 초과하는 징수를 금지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다.[8]

1304년경에는 30년 이상 지속된 카이두-쿠빌라이 전쟁을 끝내고 서부 몽골 칸국(금장 칸국, 차카타이 칸국, 일 칸국)과의 평화를 이끌어냈다. 비록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서부 칸국에 대한 원나라의 명목상 우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4]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다. 통화 준비금이 고갈되면서 지폐 시스템의 신뢰성이 크게 약화되었고, 관리들의 부패 문제도 심각했다.[8] 알코올 중독과 건강 문제로 인해 통치 후반기에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5. 1. 긍정적 평가

성종은 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의 정책을 계승하여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을 확보하고 제국의 안정을 유지했다.[4] 그는 유교를 존중하고 유교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즉위 직후 공자를 존경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유교 학자 하르가순을 중서성의 우대재상으로 임명하기도 했다.[5]

성종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쳐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 티베트인을 행정부에 등용하고, 도교 장리순을 학술 유현원의 공동 의장으로 임명하는 등 종교적 화합을 추구했다. 또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여러 차례 세금을 감면해주고, 정해진 세금 할당량을 초과하는 징수를 금지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다.[8]

1304년경에는 30년 이상 지속된 카이두-쿠빌라이 전쟁을 끝내고 서부 몽골 칸국(금장 칸국, 차카타이 칸국, 일 칸국)과의 평화를 이끌어냈다. 비록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서부 칸국에 대한 원나라의 명목상 우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4]

5. 2. 부정적 평가

성종(成宗, 1265년 ~ 1307년)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정책을 펼쳤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는 백성들에게 추가적인 재정 부담을 주는 것을 반대하며 세금 감면 정책을 여러 차례 시행했다.[8] 즉위 직후 칸발리크(대도, 현재의 베이징)와 상도의 세금을 1년간 면제하고, 몽골 평민들에게는 2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었다.[8] 1302년에는 정해진 세금 할당량을 초과하는 징수를 금지하기도 했다.[8]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다. 통화 준비금이 고갈되면서 지폐 시스템의 신뢰성이 크게 약화되었고, 관리들의 부패 문제도 심각했다.[8]

또한 성종은 알코올 중독과 건강 문제로 인해 통치 후반기에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297년에는 몽골에서 알코올 판매와 증류를 금지하기도 했지만,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더욱 심각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국민의힘 및 보수 진영에서는 성종의 통치가 방만한 재정과 부패 심화로 이어져 원나라 쇠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6. 기타

1299년 가을, 원 성종은 강절행성 출신 선승 일산일녕을 사절로 일본에 파견하면서 조공을 요구했다.[31] 1299년 10월 8일 일본에 도착한 일녕은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인 호조 사다토키에게 국서를 전달했으나, 진의를 의심받아 가마쿠라에 억류되었고 답을 받지 못했다.[9]

1296년 주달관캄보디아에 사절로 보내 현지 사정을 보고받았다.[31]

참조

[1]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2] 문서 Yuan shi
[3] 서적 Kublai Khan
[4] 서적 A History of China http://archive.org/d[...] St. Martin's Press
[5]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6] 서적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7] 서적 Worshiping the ancestors
[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9] 서적 Imperial Chinese Military History
[10]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11] 서적 From the Yellow River to the Chao Phraya River
[1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1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14] 웹사이트 Writing Empire: Culture, Politics, and the Representation of Cultural Others in the Mongol- Yuan Dynasty https://dash.harvard[...] Harvard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Arts & Sciences 2022-11-15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元史
[25] 문서 鎌倉年代記
[26] 문서 元史, 集史
[27] 서적 Kublai Khan: From Xanadu to Superpower Bantam Books
[28] 웹인용 Jean de Montecorvino http://www.wikitau.o[...] 2021-06-19
[29]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 서적 Worshiping the ancestors
[31] 서적 Mémoires sur les coutumes du Cambodge de Tcheou Ta-Kouan
[32] 문서 The successors of Genghis Khan
[33] 문서 The successors of Genghis Khan
[34] 서적 Imperial Chinese Military Histor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