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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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 명종은 1329년 카라코룸에서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했으나, 즉위 후 4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원나라 황제이다. 그는 원 무종의 아들로, 인종의 약속에 따라 황태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배제된 후 윈난으로 유배, 차가타이 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킵차크 군벌 엘 테무르의 지원을 받은 동생 투그 테무르가 즉위하자 귀국하여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엘 테무르에 의해 독살당했으며, 사후에는 익헌경효황제라는 시호와 명종이라는 묘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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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명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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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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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쿠툭투 칸() |
휘 | 코실라(}}), 화세랄() |
칸호 | 쿠툭투 카안(|Qutuγtu Qa'an}}, ) |
출생일 | 대덕(大德) 4년 11월 11일 (1300년 12월 22일) |
사망일 | 천력(天曆) 2년 8월 6일 (1329년 8월 30일) |
사망 장소 | 내몽골 옹가차투 또는 원나라 중도 |
매장 장소 | 기련곡/클레를그 산(몽골 고원) |
신분 | |
몽골 제국 | 제13대 카안 (명목상, 제국 분할로 인해) |
중국 황제 | 제9대 원 황제 |
통치 기간 | |
재위 기간 | 1329년 2월 27일 – 1329년 8월 30일 |
대관식 | 1329년 2월 27일 |
연호 | 천력(天曆), 1329년 |
묘호 | 명종(明宗) |
시호 | 익헌경효황제(翼獻景孝皇帝), 순천입도예문지무대성효황제(尊号) |
가족 관계 | |
왕조 | 보르지긴 |
아버지 | 카이샨 |
어머니 | 이키레스 씨(인헌장성황후) |
배우자 | 팔불사 황후, 정유휘성황후 |
자녀 | 토곤 테무르, 린친발 |
종교 | |
종교 | 티베트 불교, 텡그리즘, 샤머니즘 |
2. 생애
1300년 12월 22일(11월 11일) 원 무종 퀼리그 칸 카이산과 이키레스 비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윌리음역으로는 쿠살라, 키릴 문자로는 쿠슬렌, 호슬렌으로도 발음되며, 코실라 또는 쿠살라는 몽골어로 염원, 희망, 바램 등을 뜻한다. 이복 동생으로 투그 테무르가 있다.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1307년 1월 성종 테무르가 후계자 없이 죽자, 몽골 귀족들은 다르마발라의 후손 중에서 차기 칸을 선택하려 했다. 1307년 3월 3일 아유르바르와다가 대도를 장악하고 집권했으나, 5월에 형 무종 카이산에게 제위를 양보하였다. 카이산은 6월에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임명하고, 다음 황태자는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으로 정하기로 약속했다.
1311년 아버지 카이산이 갑자기 죽고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인종으로 즉위하였다. 쿠살라는 무종과 인종의 약속에 의해 인종 사후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1315년 인종은 약속을 어기고 그를 배제하였다. 쿠살라 형제는 훈기라트부 출신 황후의 왕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316년 원 인종은 형 원 무종과의 약속을 어기고 아들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려 했다. 쿠살라가 방해가 된다고 본 인종은 쿠살라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윈난성으로 추방했다.[10] 쿠살라는 윈난성으로 추방된 직후 비밀리에 도피, 몽골고원으로 갔다.
1316년 11월 토가치, 섬서행성 승상 아스칸 등은 하중부에서 쿠살라를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317년 6월 인종은 군사를 파견했고, 7월 이들은 진압당했다. 인종은 직접 정벌할 계획을 세웠고, 조모 흥성태후 다기 카툰도 쿠살라 암살을 시도했다. 자객을 따돌린 쿠살라는 알타이산맥 근처에 은신하였다.
시데발라의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쿠살라는 1316년 주(Chou) 왕으로 봉해져 윈난으로 유배되었다.[2] 산시에서 반란 실패 후, 친 카이샨 관리의 조언에 따라 에센 부카가 통치하는 차카타이 칸국으로 도망쳤다.[3] 에센 부카는 쿠살라를 환영했다. 이후 쿠살라는 차가타이 왕자들의 지원을 받았다.[3] 중앙아시아 망명 중 카를룩 출신 테무데르의 딸 마일라이티와 결혼했다.[4]
1311년 카이샨이 급사하자, 조모 다기와 중서우승상 템데르 등 다기의 친정 콘기라트 부족 파벌이 정권을 장악했고, 콘기라트 부족 여성을 어머니로 두지 않은 코실라 대신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들 시데바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주왕으로 봉해진 코실라는 윈난으로 보내졌지만, 산시에서 암살당할 뻔하여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 한국으로 도망쳤다.(토가치의 난)
1328년 예순 테무르가 사망하자 상도의 라기바흐와 대도의 투그 테무르 사이에 두 도읍의 난이 발발했다.[1] 다울라트 샤는 라기바흐를 지지했고, 킵차크 사령관 엘 테무르와 메르키트 사령관 바얀은 투그 테무르를 지지했다. 투그 테무르는 고비 사막 남쪽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승리했고, 형 쿠살라를 대도로 소환했다.
쿠살라는 차가타이 칸국의 엘지게데이와 두와 테무르의 지원을 받아 타르바가타이 지역(항가이 산맥)에서 몽골로 진입했다. 몽골 왕자들과 장군들의 지원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미 즉위한 투그 테무르를 압박했다. 1329년 2월 27일 쿠살라는 카라코룸 북쪽에서 스스로 대칸으로 즉위했다.[1]
1329년 4월 3일 투그 테무르는 퇴위했고, 엘 테무르는 쿠살라에게 황제의 옥새를 가져와 대도가 그를 환영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 쿠살라는 5월 15일에 투그 테무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요직에 임명했다.
1,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살라는 대도를 향해 출발했다. 8월 26일, 옹구차드(옹가차투)에서 투그 테무르를 만났는데, 그곳에서 투그 테무르는 중도라는 도시를 건설했다.[5] 그는 투그 테무르와 연회를 가진 지 4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6] 원사는 불운한 쿠살라 칸이 폭력으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 쿠살라는 차가타이 칸국과 몽골의 왕자들과 관리들에게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엘 테무르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8] 투그 테무르는 9월 8일 다시 왕위에 올랐다.
엘 테무르는 명종 쿠살라가 동생 투그 테무르를 황제로 내세운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했다. 명종이 자신의 사람을 조정에 심는 것을 엘 테무르와 투그 테무르는 불편하게 여겼다.[1]
명종은 자신이 대동하고 들어온 차가타이 한국의 군대를 고비 사막 북쪽에 체류하게 한 뒤, 동생 투그 테무르를 만나러 갔다. 음력 8월 1일 명종은 아버지 무종 카이산이 세운 중도 내 왕홀찰도(王忽察都, Онгоцот)에 체류하였다. 음력 8월 2일 쿠살라는 투그 테무르와 왕족, 장군들과 1,800명의 병력을 만나 연회를 열었으나, 4일 후 엘 테무르에 의해 독살되었다.[5][6][8] 원사에 의하면 명종은 폭사(暴死)했다고 한다.[7] 이를 천력지변(天曆之變)으로 부른다.
엘 테무르는 우루부카, 예리아, 메리크두카 등을 사주하여 명종 쿠살라를 독살했다.
2. 1. 어린 시절
1300년 12월 22일(11월 11일)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원 무종 퀼리그 칸 카이산이고, 어머니는 이키레스 비자(亦乞烈氏) 수동(壽童)이다. 어머니 이키레스 비자는 이키레스부 출신이지만, 쿠빌라이 칸의 셋째 아들 안서왕 망갈라의 딸 노울륜공주의 딸로,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증손녀가 된다. 윌리음역으로는 쿠살라로 발음한다. 이복 동생으로 투그 테무르가 있다. 키릴 문자로는 쿠슬렌, 호슬렌으로도 발음된다. 코실라 또는 쿠살라는 몽골어로 염원, 희망, 바램 등을 뜻한다.원사, 원사연의, 신원사에 의하면 코실라가 형이고, 투그 테무르가 동생이라 한다. 그런데 황금사에 의하면 투그 테무르가 코실라보다 5년 연상이라 한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1307년 1월 성종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외부 출신 인물이며 무슬림인 아난다에게 반감을 품은 몽골 귀족들은 다르마발라의 후손 중에서 차기 칸을 선택하려 했다. 1307년 3월 3일 아유르바르와다가 도성 대도를 장악하고 아난다, 불루간 대카툰, 아구타이 등을 죽이고 집권했으나, 그해 5월 아유르바르와다는 자신의 형이자 명종의 아버지 무종 카이산에게 제위를 양보하였다. 자신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리다는 점과, 즉위 직전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제위를 양보하라고 한 모후 다기 카툰과 옹기라트부의 뜻을 파악한 아버지 카이산은 그해 6월 자신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임명하고, 차기는 자신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을 차기 황태자로 임명하기로 약속했다.
쿠살라의 아버지 카이산이 돌연사하고 카이산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1311년 즉위하였다. 쿠살라는 무종과 인종의 약속에 의해 인종 사후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1315년 인종은 약속을 깨고 그를 배제하였다. 쿠살라와 동생 투그테무르는 할머니인 흥성태후 다기 카톤과 테무데르를 포함한 다른 훈기라트 부족 구성원에 의해 중앙 정권으로부터 제거되었다. 쿠살라 형제는 훈기라트부 출신 황후의 왕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쿠살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신원사에 의하면 소년시절부터 영웅적 기질이 있었다 한다. 훈기라트부족은 총명한 쿠살라 보다는 성격이 유약한 시데발라를 옹립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다기 카툰과 권신 테무데르는 인종의 아들 시데발라를 태자로 밀었다. 테무데르는 쿠살라를 몰아낼 계획과 핑계까지도 미리 세워두었다. 신원사에 의하면 흥성태후와 그의 측근 시레문(失烈門)은 코살라가 자신들에게 대적할 것을 두려워하여, 테무데르 등과 함께 인종에게 고했다 한다. 일찍부터 그는 싫어하는 것이 많고, 의심 많은 성격이었다.
2. 2. 추방과 망명 생활
1316년 원 인종은 형 원 무종 퀼리크 칸 카이산과의 약속을 깨고 자신의 아들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려 했다. 쿠살라가 태자 책봉에 방해가 된다고 본 인종은 쿠살라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윈난성으로 추방했다.[10] 쿠살라는 윈난성으로 추방된 직후 비밀리에 도피, 몽골고원으로 갔다.1316년 11월 토가치, 섬서행성 승상 아스칸(阿撒罕 또는 阿思罕)과 교화(敎化) 등이 하중부(河中府)에서 쿠살라를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317년 6월 인종은 군사를 파견했고, 7월 이들은 인종이 보낸 군사에게 진압당했다. 아스칸 등은 섬서행성 평장정사 타차르에게 암살당했다. 인종은 직접 정벌할 계획을 세웠고, 조모 흥성태후 다기 카툰도 쿠살라 암살을 시도했다. 자객을 따돌린 쿠살라는 알타이산맥 근처에 은신하였다.
시데발라의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쿠살라는 1316년 주(Chou) 왕으로 봉해져 윈난으로 유배되었다.[2] 산시에서 반란 실패 후, 친 카이샨 관리의 조언에 따라 에센 부카가 통치하는 차카타이 칸국으로 도망쳤다. 차카타이 칸국의 에센 부카는 쿠살라가 자신의 영토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이했다. 이후 쿠살라는 차가타이 왕자들의 지원을 받았다.[3] 중앙아시아 망명 중 카를룩 출신 테무데르의 딸 마일라이티와 결혼했다.[4]
부친 카이샨 즉위 후 황태자로 책봉된 숙부 아유르바르와다의 다음 카안으로 정해졌으나, 지대 4년 (1311년) 카이샨이 급사했다. 이후 조모 다기와 중서우승상 템데르 등 다기의 친정 콘기라트 부족 파벌이 정권을 장악했고, 콘기라트 부족 여성을 어머니로 두지 않은 코실라 대신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들 시데바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주왕으로 봉해진 코실라는 윈난으로 보내졌지만, 산시에서 암살당할 뻔하여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 한국으로 도망쳤다. (토가치의 난)
2. 3. 몽골 귀국과 즉위
1328년 예순 테무르가 사망하자 상도를 기반으로 한 라기바흐와 대도를 기반으로 한 투그 테무르 사이에 두 도읍의 난으로 알려진 내전이 발발했다.[1] 다울라트 샤가 이끄는 예순 테무르 행정부는 예순 테무르의 아들 라기바흐를 지지했고, 킵차크 사령관 엘 테무르와 메르키트 사령관 바얀이 이끄는 카이산 파벌, 그리고 허난의 지사들은 쿠살라의 동생 투그 테무르를 지지했다. 이 내전은 투그 테무르가 고비 사막 남쪽의 대부분의 왕자, 귀족, 군벌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승리했고, 투그 테무르는 그의 형 쿠살라를 대도로 소환했다.한편, 쿠살라는 차가타이 칸국의 지도자 엘지게데이와 두와 테무르의 지원을 받아 타르바가타이 지역(항가이 산맥)에서 몽골로 진입했다. 그는 몽골의 왕자들과 장군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미 즉위한 투그 테무르를 압박했다. 1329년 2월 27일 쿠살라는 카라코룸 북쪽에서 스스로 대칸으로 즉위했다.[1]
1329년 4월 3일 투그 테무르는 퇴위했고, 한 달 후 엘 테무르는 몽골의 쿠살라에게 황제의 옥새를 가져와 대도가 그를 환영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 쿠살라는 5월 15일에 투그 테무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쿠살라는 자신의 충실한 추종자들을 비서성, 군사부, 감찰원에 요직에 임명했다.
1,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살라는 대도를 향해 출발했다. 8월 26일, 그는 옹구차드(옹가차투)에서 투그 테무르를 만났는데, 그곳에서 투그 테무르는 중도라는 도시를 건설했다.[5] 그는 투그 테무르와 함께 연회를 가진 지 4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6] 원사는 불운한 쿠살라 칸이 폭력으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 쿠살라는 쿠살라를 따르는 차가타이 칸국과 몽골의 왕자들과 관리들에게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엘 테무르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8] 투그 테무르는 9월 8일 다시 왕위에 올랐다.
2. 4. 의문의 죽음
엘 테무르는 명종 쿠살라가 자신의 동생 투그 테무르를 황제로 내세운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했다. 명종이 자신의 사람을 조정에 심는 것을 엘 테무르와 투그 테무르는 불편하게 여겼으며, 일설에는 명종이 엘 테무르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1] 황금사에 의하면 명종은 즉위 직전 1월 19일 엘 테무르를 살해하려고 사람을 보냈다고 한다. 엘 테무르가 옥새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명종은 자신이 대동하고 들어온 차가타이 한국의 군대를 고비 사막 북쪽에 체류하게 한 뒤, 직접 동생 투그 테무르를 만나러 갔다. 음력 8월 1일 명종은 아버지 무종 카이산이 세운 중도 내 왕홀찰도(王忽察都, Онгоцот)에 체류하였다. 그해 음력 8월 2일 대도로 가던 쿠살라는 투그 테무르와 왕족, 장군들과 1,800명의 병력을 만나 연회를 열었으나, 4일 후 엘 테무르에 의해 독살되었다.[5][6][8] 원사에 의하면 명종은 폭사(暴死)했다고 한다.[7] 이를 사서에서는 천력지변(天曆之變)으로 부른다.
엘 테무르는 우루부카(月魯不花), 예리아(也里阿), 메리크두카(明里董阿) 등을 사주하여 명종 쿠살라를 독살했다.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야사와 전설에 의하면 엘테무르가 명종에게 약을 먹여 독살했다 한다. 후일 혜종 토곤테무르는 문종이 자신의 아버지 명종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8월 15일 문종 투그 테무르는 다시 황제로 복위하였다.
2. 5. 사후
원 문종은 평생 자신의 형을 살해했다고 괴로워하였다. 원 문종 투그테무르는 그의 존호를 쿠투그 기궬슬렌 바즈구유렌 아찰르트 칸(Утгыг гийгүүлсэн язгуурын ачлалт хаан|계몽의 초석이 된 칸mn)으로 올렸다가, 다시 쿠툭투 칸으로 바꿨다. 1329년 11월 4일 동생 원 문종 투그테무르는 쿠살라에게 시호를 익헌경효황제(翼獻景孝皇帝)라 하고, 묘호는 명종(明宗), 몽골식 존호는 쿠툭투황제(忽都篤皇帝)로 올렸다. 몽골식 존호인 쿠툭투 카안의 쿠툭투는 중세 몽골어로 복록이 있다, 고귀하다는 뜻이다.문종 투그테무르는 자신이 형을 죽였다는 자책감을 품고 일생을 괴로워하였다. 그의 동생 투그테무르 사후 투그테무르의 유언에 의해 명종 쿠살라의 차남 영종 린친발이 6세로 즉위하였다. 권신 엘 테무르는 1332년 10월과 12월 문종의 아들 엘 테구스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으나, 부다시리 카툰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1340년 아들 혜종 토곤테무르는 문종이 자신의 아버지 명종 쿠살라를 독살했다고 선언, 그해 6월 문종의 위패를 태묘에서 출향했다. 1340년 10월 25일 아들 원 혜종 토곤테무르는 존호를 올려 순천입도예문지무대성효황제(順天立道睿文智武大聖孝皇帝)라 하였다.
3. 가족 관계
구 분 | 내용 |
---|---|
조부모 | |
부모 | |
배우자 | |
자녀 |
4. 기타
元明宗|원 명종중국어은 1329년에 연호를 천력으로 하였다.[1]
2013년부터 2014년까지 MBC에서 방영한 월화드라마 기황후에서 배우 이창환이 元明宗|원 명종중국어 역을 맡았다.[2]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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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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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 cytometry and cell sor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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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 Yuan tai huang wei chi cheng wen 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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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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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no Minso no shog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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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王偏に束
[10]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11]
서적
Flow cytometry and cell sor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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