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 (1370년)
1. 개요
박은(1370년)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박상충의 아들이자 이색의 외조카이며, 13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조선 개국 후 태종을 도와 제1,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이 되었고, 금천군에 봉해졌다.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고 세종 대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사후 평도의 시호를 받았으며, 묘소는 파주시 문산읍에 위치해 있다.
| 이름 | 박은 |
|---|---|
| 원어명 | 朴訔 |
| 출생일 | 1370년 |
| 사망일 | 1422년5월9일 (53세) |
| 정당 | 무소속 |
| 별명 | 자(字)는 앙지(仰止) 호(號)는 조은(釣隱), 반계(潘溪) |
| 학력 | 1388년 고려 문과 급제 |
| 경력 | 문신 |
| 종교 | 유교(성리학) |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 본관 | 반남(潘南) |
| 배우자 | 주씨 부인 |
| 자녀 | 슬하 3남 4녀 |
| 부모 | 박상충(부), 한산 이씨 부인(모) |
| 친인척 | 박수(조부) 이색(외숙부) 주언방(장인) 이종학(외종형) |
| 직책 | 고려국 개경 소윤 |
|---|---|
| 재임 기간 | 1386년 3월 1일 ~ 1390년 3월 31일 |
| 군주 | 고려 우왕 왕우 고려 창왕 왕창 고려 공양왕 왕요 |
| 섭정 | 반복해 이성계 왕대비 죽주 안씨 이색 이성계 |
| 직책 | 조선국 지금주사 |
|---|---|
| 재임 기간 | 1392년 10월 1일 ~ 1394년 11월 30일 |
| 군주 | 조선 태조 이성계 |
| 직책 | 조선국 좌의정 |
| 재임 기간 | 1416년 11월 2일 ~ 1421년 12월 3일 |
| 군주 | 조선 태종 이방원 조선 세종대왕 이도 |
| 섭정 | 상왕 이방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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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년 사망 -
헨리 5세
헨리 5세는 1413년부터 1422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랭커스터 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왕권 강화, 프랑스와의 아쟁쿠르 전투 승리,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 확보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셰익스피어 희곡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
1422년 사망 -
윤곤
윤곤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건국 후 완산부윤, 대장군 등을 지냈고,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명나라 사신, 의정부 참찬, 이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무신, 정치인, 외교관이다. -
1370년 출생 -
레오나르도 브루니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국장으로서 시민 인본주의를 발전시키고 《피렌체 인민의 역사》를 저술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
1370년 출생 -
조말생
조말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태종과 세종 시대에 걸쳐 국방력 강화와 문물 제도 정비에 기여한 핵심 관료였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는 인물이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박수의 손자이자 박상충의 아들로,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이곡의 딸이며, 이색은 그의 외삼촌이다.
문음으로 관직에 올라 판숭복도감사를 지냈다. 1388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전교시교감, 후덕부승, 1391년(고려 공양왕 3년) 통례문부사, 1392년 개성부 소윤을 역임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지금주사, 좌보궐, 지영주사, 사헌시사, 지춘주부사, 사헌중승, 판사수감사를 지냈다. 조선 태종과는 잠저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을 도와 공을 세웠다.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3등으로 반남군에 봉해졌다.
강원도 도관찰척사, 한성부윤, 승추부제학, 계림윤,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06년(태종 6) 전라도 관찰사 재직 중 제주도의 구리 불상(동불)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잘 접대하여 칭찬받았다. 이후 좌군동지총제, 참지의정부사 겸 대사헌,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지의정부사, 병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를 거쳐 1412년 금천군으로 개봉되었다.
1409년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으로 평양성 축성을 감독했다. 판의금부사 시절 신장(訊杖)의 정수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실시케 했고, 이조판서, 판우군도총제부사를 거쳐 1416년(태종 16) 우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다. 이후 금천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판이조사를 겸했다. 세종 즉위 후 강상인의 옥사에 참여했으며, 1421년 병으로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2.1. 고려 말기
이곡의 딸인 한산 이씨와 판전교시사 박상충(朴尙衷)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색은 그의 외삼촌이 된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출사하여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를 받았다. 1388년(우왕 11)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 후덕부승(厚德府丞)을 지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년)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1392년 개성부 소윤(開城府少尹)에 임명되었다.
2.2. 조선 초기
1392년 조선 개국 후 지금주사(知錦州事)·좌보궐·지영주사(知永州事)·사헌시사·지춘주부사(知春州府事)·사헌중승·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를 지냈다. 조선 태종의 잠저(潛邸) 시절에 서로 의기가 상통하여 1398년(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제2차 왕자의 난)에 태종을 도와 공을 세웠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강원도 도관찰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士), 한성부윤(漢城府尹)·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 등을 지냈다. 이후 계림윤(鷄林尹)·전라도 관찰사로 발령받았다. 1406년(태종 6) 전라도 관찰사 재직 중, 당시 제주도의 동불(銅佛, 구리 불상)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잘 접대해 칭찬을 받았다. 이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겸 대사헌,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文察里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병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를 역임한 뒤 1412년 금천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09년에는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으로 재직하면서 평양성 축성을 감독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했을 때 신장(訊杖)의 정수(定數)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실시케 했고, 이조판서·판우군도총제부사(判友軍都摠制府事)를 거쳐 1416년(태종 16) 우의정 겸 판이조사(判吏曹事)를 지낸 뒤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이후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겸 판이조사를 겸했다. 세종 즉위 후에 강상인의 옥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직에서 물러났다.
2.3. 세종 시대
1416년(태종 16) 우의정 겸 판이조사를 지낸 뒤 금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판이조사를 겸했다. 세종 즉위 후 강상인의 옥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직에서 물러났다.
2.4. 사후
사후 바로 평도(平度)의 시호가 내려졌는데, 왕조실록의 졸기에 같이 실렸다. 포강치기왈평 심능제의왈도(布綱治紀曰平 心能制義曰度)라 하여 강기(綱紀)를 펴 다스려 나가는 것을 평(平)이라 하고, 마음이 능히 의(義)를 재량할 줄 아는 것을 도(度)라 했다 한다. 세종은 부의로 쌀과 콩 70석을 보냈으며, 바로 태종의 상중이라 그해 10월 12일 예관을 시켜 제문을 보냈다.
처음에 경기도 양주군 남중면(南中面) 양포리(良浦里) 중랑포(후일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233번지 ~ 240번지 일대)에 묻혔다가 뒤에 양주군 귀천면(龜川面) 고다기리(高多岐里,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계좌(癸坐)로 이장하였다. 뒤에 다시 이장하여 아들 박규의 묘 근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堂洞) 3리 산 57-1번지, 해좌(亥坐)로 이장하였다. 파주시 문산읍 인근 지역에는 이미 그의 아들 박규의 묘소가 있었다. 그의 가족 묘소는 파주시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었다.
3. 가족 관계
4. 묘소
처음에 경기도 양주군 남중면(南中面) 양포리(良浦里) 중랑포(후일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233번지 ~ 240번지 일대)에 묻혔다가 뒤에 양주군 귀천면(龜川面) 고다기리(高多岐里,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계좌(癸坐)로 이장하였다. 뒤에 다시 이장하여 아들 박규의 묘 근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堂洞) 3리 산 57-1번지, 해좌(亥坐)로 이장하였다. 파주시 문산읍 인근 지역에는 이미 그의 아들 박규의 묘소가 있었다. 그의 가족 묘소는 파주시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었다.
5.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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