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지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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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터 지몬스는 독일의 법률가, 정치인, 외교관으로, 1861년에 태어나 1937년에 사망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판사, 제국사법청 서기, 외무부 법무 고문을 거쳐 1920년에는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또한, 1922년에는 제국법원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 사망 후에는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기도 했다. 지몬스는 다양한 국제 회의에 독일 대표로 참석하고, 베르사유 조약 협상에 참여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나치 시대에도 루터교회 활동과 바흐 협회 회장직을 수행했으며, 저서로 《Christentum und Verbreche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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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지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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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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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61년 9월 24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엘버펠트 |
사망일 | 1937년 7월 14일 |
사망지 | 포츠담, 독일 제국 |
배우자 | 1890년 에르나 뤼레와 결혼 |
자녀 | 7명 |
친척 | 게르하르트 지몬스 (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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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외무부 장관 | 재임 기간: 1920년 6월 25일 ~ 1921년 5월 10일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총리: 콘스탄틴 페렌바흐 이전: 아돌프 쾨스터 이후: 프리드리히 로젠 |
라이히스게리히트 법원장 | 재임 기간: 1922년 10월 16일 ~ 1929년 4월 1일 이전: 이후: 에르빈 붐케 |
대통령 권한대행 | 재임 기간: 1925년 3월 12일 ~ 1925년 5월 12일 총리: 한스 루터 |
개인 정보 | |
국적 | 독일 |
직업 | 변호사 |
기타 정보 | |
정당 | 무소속 |
묘지 | 빌머스도르퍼 발트프리드호프 |
2. 초기 생애
발터 지몬스는 1861년 9월 24일 프로이센 라인 주의 엘버펠트(오늘날의 부퍼탈)에서 위그노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실크 제조업자 루드비히 지몬스(1831–1905), 어머니는 헬레네 지몬스(결혼 전 성씨 퀼만, 1842–1916)였다.[1] 증조부는 프로이센 왕국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Ludwig Simonsde이다.
1888년 프로이센 ''아세소어엑자멘''을 통과한 후 본과 졸링겐에서 보조 판사로 근무했다.[1]
2. 1. 교육
엘버펠트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879년 아비투어를 취득했다. 스트라스부르, 라이프치히, 본에서 법학, 경제학, 역사를 공부했으며, 특히 법학자 루돌프 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1] 1882년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군 복무를 했다.[1]2. 2. 결혼
1890년 졸링겐에서 에르나 륄레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3]3. 법률가 경력
1888년 본과 졸링겐에서 보조 판사로 근무했다. 1893년 벨베르트에서 판사(Amtsgerichtsrat)가 되었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마이닝겐의 지방 법원 판사(Landgerichtsrat)로 재직했다.[1]
3. 1. 제국 법무부 및 외무부 경력
1893년, 지몬스는 벨베르트에서 ''Amtsgerichtsrat''(판사)가 되었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는 튀링겐 마이닝겐의 ''Gemeinschaftliche Landgericht''에서 ''Landgerichtsrat''로 재직했다. 1905년 킬의 ''Oberlandesgericht''에서 일했으나, 같은 해 베를린의 ''Reichsjustizamt''(제국 법무부)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1]1907년, 지몬스는 국제법 담당 ''Geheimer Regierungsrat'' 및 ''Vortragender Rat''으로 승진했다. 여러 국제 회의에서 독일 제국을 대표했으며, 1911년 ''Auswärtige Amt''(외무부)로 옮겨 ''Geheimer Legationsrat'' 및 ''Justitiar''가 되었다. 1917년에는 ''Wirklicher Geheimer Rat''으로 승진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에 참여했다.[1] 1918년 10월 15일, 1918년 독일 혁명 직전 막스 폰 바덴 총리는 그를 국제법 문제 담당 ''Reichskanzler''(제국 재상)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는 총리와 가까웠으며, 1871년 독일 헌법 개정(10월 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국회의 지위를 강화했다. 또한 빌헬름 2세의 양위 계획을 세우고, ''Reichsamt des Innern''(내무부)에서 신헌법 관련 협상에 참여했다.[1]
1918년 11월, 지몬스는 외무부 법률 부서의 ''Ministerialdirektor''(장관)이자 수장이 되었다. 1919년, 울리히 폰 브록도르프-란차우 외무부 장관의 측근으로 베르사유에서 독일 대표단의 ''Unterstaatssekretär ''(차관) 및 ''Generalkommissar''를 맡았다.[1]
그는 조약에 대한 독일의 서명을 반대하여 직책을 사임(''einstweiliger Ruhestand'')하고, ''Reichsverband der deutschen Industrie''(산업 연합)의 전무 이사가 되었다. 1920년, 1903~1907년 집행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범게르만 동맹에서 탈퇴했다.[1]
3. 2. 독일 혁명과 베르사유 조약
1918년 10월 15일, 독일 혁명 직전 막스 폰 바덴 총리는 지몬스를 국제법 문제에 대한 제국 재상의 고문으로 임명했다.[1] 그는 총리와 가까웠고, 1871년 독일 헌법 개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10월 개혁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회의 지위를 강화했다.[1] 그는 또한 빌헬름 2세가 친척에게 양위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새로운 헌법에 관한 ''Reichsamt des Innern''(내무부)에서의 협상에 참여했다.[1]독일 혁명이 발생한 11월, 지몬스는 외무부 법률 부서의 장관(Ministerialdirektor)이 되었다.[1][3] 1919년, 외무 장관 울리히 폰 브록도르프-란차우의 측근으로, 그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대표단의 차관(Unterstaatssekretär) 및 전권대사(Generalkommissar)였다.[1][3]
그러나 지몬스는 조약 조인에 반대하여 사임했다.[4]
4. 정치 경력
지몬스는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1920년 6월부터 1921년 5월까지 페렌바흐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했다.[1] 그는 스파 회담과 Londoner Konferenz (1921)|런던 회담de에서 독일 대표로 활동했다.[1][3]
1920년대에 지몬스는 대 몰트케를 배출한 몰트케 가문의 자산 관리 단체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크라이자우 서클에 이름을 부여한 크라이자우 영지를 소유했다.[1][3]
4. 1. 독일-폴란드 협상
지몬스는 1922년 1월부터 5월까지 상부 실레지아에 관한 독일-폴란드 협상 대표였다.[1] 상실레지아 지방 주민투표에 관해 폴란드 제2공화국과 협상했다.[3]4. 2. 제지소 클럽 (SeSiSo-Kreis)
1922년 한스 폰 젝트, 빌헬름 졸프와 함께 베를린의 호텔 카이저호프에서 ''SeSiSo-Kreis''을 설립했다.[1] 이 클럽은 살롱 모임으로, 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지어졌다.[1] 제지소 클럽은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은 중산층을 위한 모임이었다.[3] 1930년대에 해산되었지만, 회원 대부분은 Solf-Kreis|졸프 서클de을 형성하여 반나치 운동에 참여했다.[5]5. 제국 법원 원장
1922년 10월 1일, 지몬스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제국법원 원장으로 임명되었다.[1]
5. 1. 대통령 권한 대행
1925년 2월 28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사망하자, 바이마르 헌법 제51조 규정에 따라 1925년 3월 12일에 지몬스는 국가 원수 대행을 맡았다.[3]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자,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후보 지명을 거부했다.[1] 2차 투표에서 당선된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5월 12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지몬스는 대통령 권한 대행 직무를 마쳤다.[3]
5. 2. 재판관 활동 및 사회민주당 비판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지몬스는 제1 민사부 원장을,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제3 형사부 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독일 제국 국가 법원 원장이기도 했다.[1]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또는 정당과 가까운 판사들의 협회인 '공화국 재판관 협회' 회원인 판사들을 비판하여 SPD의 공격을 받았다.[1]후고 진츠하이머, 로베르트 켐프너, 프리츠 바우어, 에른스트 프렌켈 등 공화국 재판관 협회에 소속된 재판관들이 사회민주당원으로서 계급 투쟁을 우선시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비판했다.[6] 지몬스의 비판에 대해, 사법 대신 구스타프 라트브루흐는 "아래로부터의 사회민주주의적 계급 투쟁보다 유해한, 위로부터의 계급 투쟁"이라고 말했다.[6]
지몬스는 별도의 행정 법원(Reichsverwaltungsgericht) 설치에 반대했고, 1923년 설립된 카르텔 법원(Kartellgericht)에 대해 부적절하게 카르텔에 적대적이라고 비판했다.[1]
5. 3. 사임
1928년 독일 국영 철도 이사 임명 문제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헤르만 뮐러 총리와 대립했다. 또한 정부의 사법 간섭에 반발하여 1929년 제국법원 원장직에서 사임했다.[1][3]6. 기타 경력
1926년부터 라이프치히 대학교 국제법 명예 교수이자 독일 국제법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20년 베를린에 독일 정치 대학(Deutsche Hochschule für Politik)을 공동 설립하고 오랫동안 이사로 재직했다. 1929/30년 베를린 상업 대학교(Handelshochschule Berlin)에서 국내 및 국제법 교수로 임명되었다.[1]
6. 1. 루터교회 활동
지몬스는 루터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신학자가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복음주의 사회 의회(1925–1936) 회장을 맡았다.[1] 1930년 이후에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 위원회 위원이었다.[1] 이처럼 루터교회에서 활동하며 루터파에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3]6. 2. 새 바흐 협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기리는 새 바흐 협회(1930년부터 회장)에서 활동했다.[1]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인 1935년 바흐 기념일 행사에서 NSDAP의 정책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3]7. 나치 시대와 죽음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지몬스는 새 바흐 협회와 루터교회 활동에 전념하며 정치에 접근했다. 1935년 바흐 탄생 250주년 기념 성명에서 나치당과 아비시니아 위기(파시스트당 및 팔랑헤당에 대한 외교 정책 지원)을 언급했다.[3]
1937년 7월 14일 포츠담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빌머스도르프 삼림 묘지(독일어: Wilmersdorfer Waldfriedhof Stahnsdorfde)에 매장되었다. 아들로는 정치학자 Hans Simonsde가 있으며, 딸 중 한 명은 나치 독일에서 헌법학 지도자가 된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와 결혼했고, 손자로는 신학자 볼프강 후버가 있다.
8. 가족 관계
아들 한스 지몬스Hans Simonsde는 정치학자였다. 사위는 나치 독일에서 헌법학 지도자가 된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이며, 손자는 신학자 볼프강 후버이다.[3]
9. 수상
1931년 독일 제국 독수리 훈장
10. 저서
- Christentum und Verbrechen|크리스텐툼 운트 페어브레헨de, 1925년
- Religion und Recht|렐리기온 운트 레히트de (웁살라 대학교 강연), 베를린-템펠호프 1936년
- Kirche und Volk|키르헤 운트 폴크de, 라이프치히 법학 연구, 제100권, 라이프치히 1937년
참조
[1]
웹사이트
Biografie Walter Simons (German)
http://www.deutsche-[...]
Bayerische Nationalbibliothek
2015-01-26
[2]
웹사이트
Biografie Walter Simons (German)
http://www.uni-leipz[...]
Universität von Leipzig
2015-01-26
[3]
웹사이트
Biografie Walter Simons (German)
http://www.deutsche-[...]
Bayerische Nationalbibliothek
2015-01-26
[4]
서적
So macht man Geschichte. Bilanz eines Lebens
List
[5]
서적
Wilhelm Solf - Botschafter zwischen den Zeiten
[6]
간행물
Die »Vertrauenskrise der Justiz« in der Weimarer Republik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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