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브뤼닝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인리히 브뤼닝은 1885년 뮌스터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독일노동조합연맹 서기장과 국회의원을 거쳐 1930년 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대공황에 대응하기 위한 긴축 정책과 긴급 명령 통치로 비판을 받았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힌덴부르크를 지지했지만, 결국 사임했다. 이후 중앙당 당수를 맡았으나 나치 정권의 압박으로 망명했고,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1년 독일로 돌아와 쾰른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브뤼닝은 디플레이션 정책과 외교 정책, 그리고 나치 집권에 대한 대응으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 중앙당의 의장 - 루트비히 카스
독일 중앙당의 당수였던 루트비히 카스는 가톨릭 사제이자 정치인으로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동하며 교황 비오 12세와 협력하여 라이히스 콘코르다트 체결에 관여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바티칸에서 반 나치 운동 세력과 접촉했다. - 독일 중앙당의 의장 - 빌헬름 마르크스
빌헬름 마르크스는 독일 중앙당 출신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네 차례 총리를 역임하며 경제 안정에 기여했고, 1946년 사망했다. - 바이마르 공화국 사람 - 안네 프랑크
안네 프랑크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은신 생활 중 《안네의 일기》를 쓴 독일계 유대인 소녀로, 이 일기는 홀로코스트의 참상과 소녀의 성장, 고뇌를 보여주는 역사적·문학적 증언으로 평가받으며, 그녀의 삶은 홀로코스트 기억과 인종차별 반대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 바이마르 공화국 사람 - 알프레트 되블린
알프레트 되블린은 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로 명성을 얻었으며, 몽타주와 내적 독백 기법을 통해 현대 사회와 인간 심리를 탐구하고 사회적 약자의 삶을 조명했다. - 독일의 당료 - 젬 외즈데미르
젬 외즈데미르는 독일 녹색당 소속 정치인으로, 터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녹색당 공동 대표를 역임하고 독일 연방 식량농업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독일 최초의 터키계 이민 출신 각료가 되었으며, 유럽 의회 및 독일 연방 의회 의원을 지냈고 2017년 녹색당의 총리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 독일의 당료 -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독일의 기업인이자 정치가로서, 범게르만 연맹 공동 설립자이자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를 역임하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우익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히틀러 내각에서 경제 및 농업 장관을 지냈으나 팽창주의적 야망으로 실각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하인리히 알로이시우스 마리아 엘리자베트 브뤼닝 |
출생일 | 1885년 11월 26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스트팔렌 주 뮌스터 |
사망일 | 1970년 3월 30일 |
사망지 | 미국 버몬트 주 노리치 |
안장지 | 독일 뮌스터 |
정당 | 중앙당 |
직업 | 학자 경제학자 활동가 |
충성 | 독일 제국 |
군대 | 독일 제국 육군 |
소속 부대 | 보병 연대 제30번 "그라프 베르더" |
복무 기간 | 1915년 ~ 1918년 |
계급 | 육군 소위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
훈장 |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2급 |
학력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본 대학교 |
로마자 표기 | Heinrich Aloysius Maria Elisabeth Brüning |
정치 경력 | |
수상 | 제10대 수상 (바이마르 공화국) |
임기 시작 | 1930년 3월 30일 |
임기 종료 | 1932년 6월 1일 |
대통령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부수상 | 헤르만 디트리히 |
전임 수상 | 헤르만 뮐러 |
후임 수상 | 프란츠 폰 파펜 |
외무장관 | |
외무장관 | 외무장관 |
임기 시작 | 1931년 10월 9일 |
임기 종료 | 1932년 6월 1일 |
수상 | 본인 |
전임 외무장관 | 율리우스 쿠르티우스 |
후임 외무장관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재무장관 | |
재무장관 | 재무장관 대행 |
임기 시작 | 1930년 6월 20일 |
임기 종료 | 1930년 6월 26일 |
수상 | 본인 |
전임 재무장관 | 파울 몰덴하워 |
후임 재무장관 | 헤르만 디트리히 |
중앙당 대표 | |
중앙당 대표 | 중앙당 대표 |
임기 시작 | 1933년 5월 6일 |
임기 종료 | 1933년 7월 5일 |
전임 대표 | 루트비히 카스 |
후임 대표 | 당 해산 |
제국의회 의원 | |
제국의회 의원 | 제국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924년 5월 27일 |
임기 종료 | 1933년 12월 12일 |
선거구 | 브레슬라우 (1924년–1932년) 전국구 (1932년–1933년) |
2. 어린 시절
1885년 11월 26일 뮌스터에서 식초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2]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브뤼닝이 한 살 때 사망하여 형인 헤르만 요제프(Hermann Joseph)가 아버지 대신 큰 영향을 주며 성장했다.[2] 김나지움 파울리눔 졸업 후, 처음에는 법조인을 꿈꿨으나,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런던 정경대, 본 대학교에서 철학, 역사학, 독일어, 정치학을 공부했다.[2] 1911년 고등교원 자격 시험에 합격했지만, 교사가 되지 않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정경대에서 경제학을 배웠다. 1913년 본으로 돌아와 1915년 영국 철도 시스템(Rail transport in Great Britain) 국유화의 재정적, 경제적, 법적 영향에 관한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는 브뤼닝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
1920년 기독교 계열의 독일노동조합연맹 서기장에 올라 1930년까지 활동했다.[42] 1924년 총선에서 독일 중앙당의 공천을 받아 국가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3] 1928년부터 2년 동안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8] 중앙당 내 우파에 속했으며 1928년 루트비히 카스가 중앙당 의장으로 취임하자 빌헬름 마르크스와 달리 이를 환영했다.[42] 1929년 12월 중앙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3]
졸업과 동시에 군에 지원하여 기관총 부대의 소위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3] 1918년 독일 혁명이 일어나 대전이 종결되었지만,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이 혁명에 반대했고, 훗날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가 된 후에도 그것을 공언했다.
3. 정계 진출
개인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지만, 전쟁 경험과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고 전직 군인들이 직업을 찾거나 교육을 받도록 돕는 것을 선호했다고 알려져 있다.[6] 그는 사회 개혁가 카를 ゾン넨샤인(Carl Sonnenschein)과 협력하여 "사회 학생 활동 사무국"에서 일했다. 6개월 후 프로이센 복지부에 들어가 장관인 아담 슈테거발트(Adam Stegerwald)의 측근이 되었다.[7] 기독교 노동조합 지도자이기도 했던 슈테거발트는 1920년 그를 노동조합의 최고 경영자로 임명했고, 브뤼닝은 1930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노동조합 신문인 ''Der Deutsche'' (''독일인'')의 편집자로서,[7] 브뤼닝은 기독교 조합주의 사상에 기반한 "사회 대중 국가"와 "기독교 민주주의"를 주장했다.[8] 1923년 브뤼닝은 "루르 싸움(Ruhrkampf)"에서 소극적 저항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9] 중앙당에 입당했고, 1924년에는 브레슬라우를 대표하는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3] 국회에서 그는 재정 전문가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근로자의 소득세 비율을 이하로 제한하는 소위 브뤼닝 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10]
1928년부터 1930년까지 브뤼닝은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8] 1929년 국회 내 중앙당 의원단 대표로 선출된 후,[3] 그의 당은 균형 재정을 보장하는 증세 보장을 조건으로 영국 계획(Young Plan)에 동의했다.[11] 이로 인해 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4. 총리 재직
독일이 대공황에 빠진 1930년 3월 헤르만 뮐러가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국방부의 추천을 받아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었다. 브뤼닝은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 독일 민주당, 독일 인민당, 독일 중산층국가당, 독일 국가인민당, 보수인민당 등의 정당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했다.[5] 헬만 뮐러 수상의 사퇴와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추천으로 총리직에 오른 브뤼닝은, 1930년 3월 28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내각 구성을 지시받고 4월 1일에 완료하였다.
브뤼닝 내각의 첫 번째 과제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악화된 재정 상황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영플랜은 독일에 배상금 지불과 통화 안정화를 동시에 요구했기 때문에, 브뤼닝은 통화 절하를 단행했다. 1930년 6월부터 재무장관 대리로서 지출 삭감안을 제출했지만, 힌덴부르크의 예상과 달리 독일 국가인민당의 지지층 이탈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브뤼닝은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근거로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공산당, 나치당이 의회 다수파를 형성하여 이 결정을 번복했다. 힌덴부르크는 의회를 해산했고, 이어진 총선에서 브뤼닝은 무당파층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결과는 나치당과 공산당의 약진이었다. 나치당이 제2당으로 부상하면서 독일의 신용등급이 폭락하고 외국 투자가 철회되어 경제 불황은 심화되었다. 힌덴부르크의 의회 해산 명령은 의회의 협조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브뤼닝은 정상적인 의회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 62개에 달하는 법안을 의회의 제약 없이 긴급 입법으로 통과시켰다. 나치당과 공산당은 매번 법안 무효화 동의안을 제출했지만, 브뤼닝은 SPD의 협력을 얻어 부결시켰다. SPD는 브뤼닝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치당과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브뤼닝 내각이 SPD와의 타협에 의존하는 상황에 불만을 가졌다.
브뤼닝은 긴축 재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독일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자 신세(新税) 도입, 국가 지출 삭감, 임금 인하를 유도했지만, 외국도 유사한 정책을 펴고 관세를 인상하여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경제 정책이 독일의 지불 능력 부족을 보여주어 연합국에 배상금 지불 중단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현재는 의문시되고 있다. 브뤼닝과 각료들은 배상금 지불만 없다면 독일 경제가 호전되어 재정 재건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브뤼닝 내각은 오랫동안 독일 외교를 담당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을 잃은 타격을 입었다.
1931년, 오스트리아와의 관세 동맹을 추진했으나, 양국의 합병을 우려한 프랑스가 반대하여 자국 은행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자금 수용을 금지, 독일 은행들은 어려움에 처했다. 같은 해 브뤼닝이 배상금 지불은 “공납”이며 독일은 더 이상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정부 성명을 발표하자 독일 경제의 신용도가 추가 하락, 외국 자본이 철수하면서 경제는 공황 직전에 이르렀다. 6월에는 상이군인과 실업자에 대한 보험을 삭감하는 긴급 법령이 발효되었고, 각 도시에서는 주로 공산당이 조직한 시위가 빈번해졌다.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에게 사표를 제출했지만, 힌덴부르크는 다시 브뤼닝에게 조각을 명령했다.제2차 브뤼닝 내각
1931년 10월 10일 - 1932년 5월 30일총리 겸 외무장관 -- 하인리히 브뤼닝 (Heinrich Brüning) style="background:#000000"| 중앙당 부총리 겸 재무장관 -- 로베르트 헤르만 디트리히 (Robert Hermann Dietrich) style="background:#FFFF00"| 독일 국가당 국방장관 겸 내무장관 직무대행 --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rowspan="2" style="background:#F0F0F0"| 무소속 경제장관 헤르만 밤볼트 (Hermann Warmbold) 무소속 -- 에른스트 트렌델렌부르크 (직무대행) bgcolor="#FFFF00" | 독일 국가당 노동장관 -- 아담 슈테거발트 (Adam Stegerwald) style="background:#000000"| 중앙당 법무장관 쿠르트 요엘 (Kurt Joel) style="background:#F0F0F0"| 무소속 우정장관 게오르크 슈체르 (Georg Schätzel) style="background:#008B45"| 바이에른 인민당 교통장관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 (Gottfried Treviranus) style="background:#191970"| 보수 인민당 농업·식량장관 마르틴 쉴레 (Martin Schiele) rowspan="2" style="background:#CCBBCC"| 기독교 국가 농민 및 농촌 주민당 무임소 장관 한스 슐랑게-셰닝겐 (Hans Schlange-Schöningen) 기독교 국가 농민 및 농촌 주민당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채권국들에 배상금 지불 유예를 제안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후버 모라토리엄). 그러나 독일로부터의 투자 철수는 멈추지 않았고, 실업자는 600만 명을 넘어섰으며, 모든 대형 은행들이 수일간 문을 닫아야 했다. 영국은 독일의 신용 붕괴를 막는다는 이유로 배상금 감액에 응하지 않았지만, 결국 1932년 로잔 회의에서 감액이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브뤼닝은 배상금 지불 의무 완화에 성공했지만, 힌덴부르크는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4월에 힌덴부르크는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지만, 경쟁자였던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에게 혐오하던 가톨릭 신자(중앙당)와 사회주의자(SPD)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승리한 것에 크게 자존심이 상해 우경화되었다. 빌헬름 그뢰너 국방장관 겸 내무장관이 돌격대 금지령을 둘러싸고 힌덴부르크와 가까운 슐라이허 차관의 저항으로 사임하자 브뤼닝 내각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회복되지 않는 경제 불황에 독일은 농업 사회가 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여론을 지배했고, 브뤼닝은 독일 동부 농지를 실업자들에게 분배하는 긴급 입법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지주들이 유지할 수 없게 된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지만, 지주 계층인 용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자신도 동부 영지 소유주였던 힌덴부르크에게 서명을 거부당했다. “골까지 100미터다”라는 자신감 넘치는 의회 연설 직후 브뤼닝은 5월 30일에 사표를 제출했다.[23] 탈진한 (그리고 중압감에서 해방된) 브뤼닝은 이례적으로 간소한 퇴임식을 거쳐 입원했다. 독신이었던 그는 총리 관저 외에는 집이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후임 내각에 외무장관으로 남아 있을 것을 요청했지만, 브뤼닝은 후임자가 누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외교 책임을 질 수 없다고 거절했다. 브뤼닝이 원했던 후임자는 카를 게르델러였지만, 힌덴부르크는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추천도 있어서 자신의 측근인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임명했다.
4. 1. 정치
1924년, 브뤼닝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어 중앙당 의원단 재정정책 대변인에 취임했다. 1925년에는 소득세를 12억 라이히스마르크로 제한하는 “브뤼닝 법”을 제출했다.[41] 그는 매우 신중하고 금욕적인 인물이었지만, 전문 지식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 결과 1929년에는 당 의원단장에 취임했다.[41] 영플랜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증세와 긴축 재정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찬성한다는 입장을 보였는데, 이러한 일관된 정책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주목을 끌었다.[41]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헬만 뮐러 수상이 사퇴하고 후임자를 찾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고문이기도 한 국방차관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추천으로 브뤼닝에게 기회가 돌아왔다.[41] SPD와의 대연정이 모색되었지만, 힌덴부르크가 SPD의 집권을 좋지 않게 생각했고, 브뤼닝이 SPD와 대립하는 독일 국민당과의 연정을 최종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SPD가 연정을 거부했다.[41] 1930년 3월 28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브뤼닝에게 공식적으로 내각 구성을 지시했고, 내각 구성 작업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어 4월 1일에 완료되었다.[41]
제1차 브뤼닝 내각 1930년 5월 1일 - 1931년 10월 9일 | ||||
---|---|---|---|---|
총리 | -- | 하인리히 브뤼닝 (Heinrich Brüning) | 중앙당 | |
부총리 | -- | 독일 국가당 | ||
외무부 장관 | -- | 독일 국민당 | ||
내무부 장관 | -- | 요제프 비르트 (Joseph Wirth) | 중앙당 | |
재무부 장관 | -- | ( - 1930년 6월 28일) | 독일 국민당 | |
-- | 독일 국가당 | |||
경제부 장관 | -- | ( - 1930년 6월 28일) | 독일 국가당 | |
-- | (직무대리) | 독일 국가당 | ||
노동부 장관 | -- | 중앙당 | ||
법무부 장관 | -- | ( - 1930년 12월 5일) | 경제당 | |
(직무대리) | 무소속 | |||
국방부 장관 | -- |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 무소속 | |
우정청 장관 | 바이에른 인민당 | |||
교통부 장관 | -- | 중앙당 | ||
농업·식량부 장관 | ![]() | (1930년 7월 22일 탈당) | 독일 국가 인민당 | |
독일 기독교 국가 농민 및 농촌 주민당 | ||||
라인란트 점령 지역 담당 장관 | ( - 1930년 9월 30일) | |||
무임소 장관 (라인란트 점령 종결에 따른) |
연정에는 중앙당 외에 독일 국가당, 독일 국민당, 경제당, 그리고 독일 국가 인민당 일부가 참여했다.[41] 44세의 나이로 취임한 총리는 독일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총리였다. 힌덴부르크는 의회에 대항하는 강력한 반독재 정권, 그리고 반마르크스주의적인 정권이 수립되기를 기대했다.[41]
총리로 취임했지만 브뤼닝 내각은 의원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30년 7월 국가의 재정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내각에서 제출한 예산안이 국가의회에서 부결됐다. 이에 브뤼닝은 바이마르 헌법 48조에 적힌 대통령 비상대권을 사용해 예산안을 통과시켰다.[41] 한편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독일 내에서 급속도로 성장했다.[41]
1930년 9월 선거에서 연립 정부를 구성하던 정당들은 많은 의석을 잃었고, 반면 독일 공산당과 나치당은 큰 득표를 했다. 이로 인해 브뤼닝은 국회에서 다수파를 형성할 희망을 잃었다. 대신 그는 긴급명령을 통해 계속 통치했다. 그는 대통령과 의회의 협력에 기반한 이러한 통치 형태를 "권위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16] 브뤼닝은 민주주의에 대해 다소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취임 직후 그는 언론의 자유를 크게 제한했다. 어떤 추산에 따르면 매달 100개의 신문판이 금지되었다.[17]
브뤼닝의 가혹한 경제 정책은 사회민주당의 암묵적인 정부 지지 기반을 약화시켰고, 내각의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구성원들은 정부에 우익 세력을 참여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그의 측근과 슐라이허 육군 참모총장의 압력을 받아 이러한 조치를 옹호했으며, 특히 중앙당 출신인 비르트 장관과 장관의 해임을 포함한 내각 개편을 주장했다.[18]
대통령의 뜻은 또한 극단주의 정당들과 그들의 준군사 조직에 대항하는 정부의 결의를 방해했다. 총리와 대통령은 공산당과 나치당의 잔혹성, 불관용, 선동이 그들을 정부에 부적합하게 만든다는 데 동의했고, 브뤼닝은 나치당의 지지 없이도 정부가 위기를 극복할 만큼 강하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관용 또는 공식적인 연정에 대해 협상했지만, 나치당에 어떤 권력도 양보하거나 대통령령에 의한 완전한 지지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유보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고, 1932년 4월 거리 폭력이 최고조에 달하자 브뤼닝은 공산당의 적색전선전사동맹과 나치당의 돌격대를 금지시켰다. 우익 진영의 부정적인 반응은 힌덴부르크의 브뤼닝 지지 기반을 더욱 약화시켰다.[19][20]
4. 2. 경제 정책
하인리히 브뤼닝은 총리 취임 직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국가 재정을 건전화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줄이는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했다.[12][13] 이는 전쟁 배상금 지불을 위한 긴축 조치의 일환이기도 했다.[12][13] 브뤼닝은 독일 경제를 배상금과 외채의 부담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긴축적인 신용 정책과 임금 인상 억제를 통한 내부 평가절하를 추진했다.[12][13]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실업자 복지 축소와 실업 증가를 초래했다.[14] 브뤼닝의 조치는 국회에서 거부되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긴급 명령(Notverordnung)으로 이를 시행했다.[5][14] 이로 인해 무역 흑자가 발생했지만, 실업과 빈곤은 더욱 심화되었다.[14]
실업이 계속 증가하고 임금과 공공 부조가 감소하는 반면, 물가와 세금은 인상되어 노동자와 실업자들의 고통이 커졌다.[15] 이에 "Brüning verordnet Not!"("브뤼닝은 고난을 명령한다")라는 슬로건이 등장하기도 했다.[15]
브뤼닝은 의회 운영이 어려워지자 긴급 입법을 통해 62개에 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협력을 얻어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의 법안 무효화 시도를 저지했다. SPD는 나치당과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해 브뤼닝 내각에 협력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가졌다.
브뤼닝은 긴축 재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독일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 했지만, 다른 국가들도 유사한 정책을 시행하고 관세를 인상하면서 효과를 보지 못했다.[41] 일각에서는 이러한 경제 정책이 독일의 지불 능력 부족을 보여주어 연합국에 배상금 지불 중단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현재는 의문시되고 있다.[41]
4. 3. 외교 정책
브뤼닝은 경제 긴축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수주의적 우익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라이히스마리네를 위해 전함 두 척 건조를 지시하고, 헝가리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과의 2국간 무역 조약을 체결하여 중앙 및 동유럽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14] 브뤼닝은 배상금 지급 부담을 완화하고 재무장 문제에서 독일의 동등성을 달성하려고 노력했다. 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유럽 연합" 구성 제안에 대해 독일의 완전한 동등성을 요구하며, 독일 경제 악화를 돕기 위한 프랑스의 재정 지원 제안을 거절했다.[14]브뤼닝의 국수주의적 외교 정책은 독일 투자를 위축시키고 외국 차관 확보 노력을 방해했다. 1931년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간의 관세 동맹 계획은 프랑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브뤼닝은 베르사유 조약 무효화 요구와 독일 배상금에 대한 일방적 지불 유예를 발표하는 공격적인 성명을 발표하여 대응했다. 이 성명은 금융 혼란을 야기하여 라이히스방크의 준비금을 고갈시키고 다나트방크와 드레스덴 은행에서 은행 위기를 초래했다.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후버 모라토리엄을 협상하여 배상금과 연합국 간 채무 상환 연기를 통해 더 이상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는 이 모라토리엄에 반대하여 비준을 지연시켜 다나트방크 붕괴로 이어지는 은행 뱅크런을 유발했다. 라이히스방크는 금융 시스템을 폐쇄하고 라이히스마르크를 금본위제에서 철회해야 했다. 또한 수입 규제를 실시하고 외화 보유량을 국유화했다. 브뤼닝의 조치로 잉글랜드 은행이 파운드화의 금 고정을 포기하게 되어 대공황이 더욱 심각해졌다.[14] 1932년 여름 브뤼닝 사임 후, 그의 후임자들은 로잔 회의에서 배상금이 최종 30억 마르크 지불로 감소되는 그의 정책 결과를 거두었다.[22]
재무장에 대한 협상은 그의 사임 직전 1932년 제네바 회의에서 실패했지만, 12월 "5개국 협정"에서 독일의 군사적 동등성이 인정되었다.
4. 4. 1932년 대선과 실각
1932년 3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브뤼닝은 현직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재선을 위해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펼쳤다. 브뤼닝은 힌덴부르크를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자 "헌법의 수호자"라고 칭송하며, 거의 모든 독일 좌파와 중도파의 지지를 이끌어냈다.[8] 두 차례의 투표 끝에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자신이 사회민주당과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로 당선된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차악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우익으로 기울었다.
브뤼닝이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점차 잃어가던 중, 1932년 4월 빌헬름 그뢰너 국방장관이 주도한 나치 SA 준군사 조직 금지령은 힌덴부르크와 그의 측근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동시에 브뤼닝은 엘라르트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가 이끄는 프로이센 용커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용커들은 동부 지원(''Osthilfe'') 프로그램 과정에서 실업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브뤼닝의 정책에 반대하며, 힌덴부르크에게 그를 "농업 볼셰비키"라고 비난했다.[8]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용커 토지 소유주였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더 이상의 긴급 법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브뤼닝과 그의 내각은 1932년 5월 30일 "결승선 100미터 앞에서" 사임했다.[23] 브뤼닝은 의회가 아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해임된 최초의 바이마르 총리였다. 후임 총리로는 프란츠 폰 파펜이 지명되었다.
5. 퇴임 이후
브뤼닝은 총리직에서 사퇴한 후, 중앙당 당수 루트비히 카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당수직을 맡지 않고 카스에게 당수직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의 후임인 프란츠 폰 파펜에 대한 당의 반대를 지지했으며,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협상하여 국회(Reichstag)를 재건하는 것을 지지했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 브뤼닝은 1933년 3월 선거에서 새 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는 히틀러의 권한 강화 법에 대해 "의회에 요구된 가장 끔찍한 결의안"이라고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히틀러로부터 중앙당이 금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은 후 당의 규율에 따라 투표에 찬성했다. 사회민주당만이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퇴임 후 브뤼닝은 급성장한 나치당이 정권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치당과 중앙당의 연립에 반대하지 않았다. 1933년 1월,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했고, 같은 해 3월 선거에서 브뤼닝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전권위임법에 찬성했다.
1934년 5월, 나치의 숙청 대상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를 얻은 브뤼닝은 독일을 탈출하여 스위스와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는 긴 칼의 밤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이 살해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에서 브뤼닝은 하버드 대학교의 객원 교수가 되었고, 1939년부터 1952년까지 하버드 대학교 루시우스 리타우어(Lucius Littauer) 행정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1938년에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회원이 되었다. 그는 미국 국민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 계획과 소비에트 연방의 침략 및 확장 계획에 대해 경고했다. 1951년, 쾰른 대학교 정치학 교수직을 맡기 위해 일시 귀국했지만, 1955년 미국으로 돌아와 버몬트 주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
윈스턴 처칠과의 대담이나 회고록에서 브뤼닝은 자신이라면 냉철한 전략으로 나치의 대두를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실정 책임을 정적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5. 1. 중앙당 의장 부임과 망명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한 후, 중앙당 의장 루트비히 카스가 바티칸 공직을 맡게 되면서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브뤼닝은 1933년 5월 6일 후임 의장으로 취임했다.[2] 그러나 수권법 통과 후 나치당의 압박을 받자, 1933년 7월 5일 중앙당을 자체적으로 해산했다.[2] 1934년 긴 칼의 밤 숙청을 피해 독일을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3] 1937년부터 1951년까지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1]5. 2. 종전 후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브뤼닝은 1951년 쾰른 대학교 정치학 교수로 부임하며 서독으로 돌아왔다.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친서방 정책에 반발하여 1955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24][25]1970년 3월 30일, 브뤼닝은 미국 버몬트주 노리치에서 사망했고,[30] 그의 유해는 고향인 뮌스터에 안장되었다.
6. 역사적 평가
브뤼닝의 디플레이션 정책에 대한 대안 유무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연합국이 어떤 상황에서도 독일 마르크(Reichsmark)의 평가절하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후버 모라토리엄을 연합국이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와 독일의 배상금 지급 불능을 인정한 신호로 지적한다.[31] 브뤼닝은 디플레이션 정책이 경제 상황을 일시적으로 악화시킨 후에야 개선될 것이며, 독일 경제의 경쟁력과 신용도를 빠르게 회복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디플레이션이 경제를 돕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요 목표는 연합국에 배상금 지급 불능을 설득하여 배상금 지급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31]
당시 독일 민주당(German Democratic Party) 의장이자 브뤼닝의 비평가였던 안톤 에르켈렌츠(Anton Erkelenz)는 디플레이션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배상금 지급으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려는 정당한 시도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디플레이션 정책은 20년 동안의 배상금 지급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야기한다… 히틀러와의 싸움은 디플레이션과 생산 요소의 엄청난 파괴와의 싸움이다.[32]
1933년, 미국 경제학자 어빙 피셔(Irving Fisher)는 부채 디플레이션 이론을 개발했다. 그는 디플레이션이 이윤과 자산 가격 하락을 야기하여 기업 순자산 가치를 더욱 크게 감소시킨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건전한 기업도 과도한 부채로 파산에 직면할 수 있다.[33]
경제 성과와 민주 정부 간 정(正)의 상관관계 이론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NSDAP 지지 확산의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다.[34] 셰리 버먼(Sheri Berman)은 히틀러가 시민 단체에 침투하여 기반을 확장했으며, 시민 사회의 분열적 특성이 NSDAP 권력 장악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35] 시민 단체들은 참여자들에게 반민주적 가치를 주입했고,[36] 히틀러는 단체 내부에서 활동하며 지도자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35]
일부 단체들은 정부가 모든 반민주적 비판에 대응할 수 없었기에 포퓰리즘 세력과 연합하여 결국 나치당과 연합했다.[37] 데이비드 리프(David Rieff)는 시민 사회 통합력이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38] 히틀러는 시민 위원회 수장들을 이용하여 선거운동 없이도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계획을 진전시켰다. "독일 국가와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 부재"로 인해,[39] 시민 협회 단체들은 목자에게 이끌려갈 양떼와 같았다. 따라서 시민 사회의 모순과 모호성에 초점을 맞추면 NSDAP 부상의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40]
역사학자들은 그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방파제"였는지, "공화국의 장례식장"이었는지, 아니면 양쪽 모두였는지에 대해 논쟁하며, 브뤼닝은 여전히 독일 역사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대공황과 정치적 불안정 시대에 그에게 얼마나 행동의 여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 의견이 분분하다.[41]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수호를 목표로 했지만, 총리 재임 중 정책, 특히 긴급 권한 행사는 바이마르 공화국 공동화에 일조했다.
참조
[1]
서적
Rethinking the Weimar Republic: Authority and Authoritarianism, 1916–1936
A & C Black
[2]
서적
Heinrich Bruning and the Dissolution of the Weimar Republic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Heinrich Brüning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10-06-18
[4]
서적
Austerität. Politik der Sparsamkeit: Die kurze Geschichte eines großen Fehlers
https://books.google[...]
Karl Blessing Verlag
[5]
웹사이트
Heinrich Brüning
https://www.kas.de/d[...]
1885-11-25
[6]
서적
Vor dem Abgrund 1930–1933. Reichsbankpräsident in Krisenzeiten
Propyläen Verlag
[7]
학술지
Chancellor Bruening of Germany
https://www.jstor.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31-10
[8]
웹사이트
Heinrich Brüning
https://www.lwl.org/[...]
2004-03-09
[9]
서적
Germany and the Americas: Culture, Politics, and History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10]
서적
Report of the Agent General for Reparation Payments. May 30, 1925-[May 21, 1930]
[11]
서적
Heinrich Bruning and the Dissolution of the Weimar Republic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
학술지
The Borchardt hypothesis: A cliometric reassessment of Germany’s debt and crisis during 1930–1932
[13]
서적
Finance and financiers in European history 1880-196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The Wages of Destruction: The Making &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Penguin
[15]
서적
Skizzen aus dem Leben der Weimarer Republik. Berliner Erinnerungen
https://books.google[...]
Duncker & Humblot
[16]
서적
Son of Oldenburg. The Life and World War Ii Diary of Gerold Meyer
https://books.google[...]
Xlibris US
[17]
서적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Penguin Press
2003
[18]
서적
Heinrich Bruning and the Dissolution of the Weimar Republic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
서적
Der Lange Weg nach Westen. Deutsche Geschichte I
C.H. Beck
[20]
서적
The Third Reich Sourcebook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1]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Fawcett Crest
[22]
웹사이트
Lausanne Conference
https://www.u-s-hist[...]
2023-11-02
[23]
서적
Die Erinnerungen
[24]
서적
Inside Europe
https://archive.org/[...]
Harper & Brothers
[25]
서적
A Dictionary of Political Biography
https://books.google[...]
OUP Oxford
[26]
서적
Staatsbankrott. Die Geschichte der Finanzpolitik des Deutschen Reiches von 1920 bis 1945, geschrieben vom letzten Reichsfinanzminister; Das Ende der Reparationen. Deutschland, Frankreich und der Youngplan
Musterschmidt, Schöningh
[27]
서적
Weimar 1918–1933. Die Geschichte der ersten deutschen Demokratie; Von Brüning zu Hitler. Der Wandel des politischen Systems in Deutschland 1930–1933; Das Ende der Reparationen. Deutschland, Frankreich und der Youngplan
Beck, Walter de Gruyter, Schöningh
[28]
서적
Tagebücher 1918–1937
[29]
서적
The Wooden Titan. Hindenburg in Twenty Years of German History
[30]
웹사이트
Heinrich Brüning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14-07-03
[31]
서적
Deutsche Gesellschaftsgeschichte, Band 4; Deutsche Wirtschaftsgeschichte
C.H. Beck
[32]
서적
The Beginnings of Scholarly Economic Journalism
Springer
[33]
서적
Weimar: die überforderte Republik
Klett-Cotta
[34]
서적
Making Democracy Work
http://dx.doi.org/10[...]
1994-12-31
[35]
학술지
Civil Society and the Collapse of the Weimar Republic
http://dx.doi.org/10[...]
1997-04
[36]
논문
Civil Society and Democracy: Weimar Reconsidered
https://doi.org/10.1[...]
2009-06-01
[37]
논문
Think Again: Democracy
http://dx.doi.org/10[...]
1997
[38]
논문
'Global Civil Society': A Sceptical View
http://dx.doi.org/10[...]
SAGE Publications Ltd
2023-03-03
[39]
논문
The Paradoxical Modernity of Civil Society: The Weimar Republic, Democracy, and Social Homogeneity
https://doi.org/10.1[...]
2015-04-01
[40]
논문
Jews and the Ambivalences of Civil Society in Germany, 1800–1933: Assessment and Reassessment
https://www.journals[...]
2005-12
[41]
서적
Rethinking the Weimar Republic: Authority and Authoritarianism, 1916–1936
A & C Black
2013
[42]
서적
독일 현대사: 1871년 독일제국 수립부터 현재까지
미지북스
20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