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루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스 루터(Hans Luther)는 독일의 정치인이자 경제학자로, 1879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1962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관료로 시작하여 마그데부르크 시 참사 회원, 에센 시장을 역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식량·농업부 장관과 재무 장관을 지냈으며, 초인플레이션 종식을 위해 노력했다. 1925년에는 총리로 취임하여 로카르노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나, 국기 문제로 사임했다. 이후 독일 제국 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는 미국 대사를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서독에서 활동하며 1962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의 대통령 권한대행 - 발터 지몬스
발터 지몬스는 독일의 법률가, 정치인, 외교관으로, 외무장관, 제국법원 원장, 대통령 권한 대행을 역임했으며, 국제 회의 참가 및 베르사유 조약 협상 참여 등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저서를 남기고 사망했다. - 독일의 대통령 권한대행 - 호르스트 제호퍼
호르스트 제호퍼는 독일 기독교사회연합 소속 정치인으로, 연방의원, 보건부 장관, 식량·농업·소비자 보호부 장관, 바이에른주 총리,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재정 재분배 시스템 소송 제기 및 강경한 이민 정책 추진 등 굵직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수상 - 요제프 비르트
요제프 비르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독일 정치인으로, 이행 정책과 라팔로 조약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부 불안정과 극우 세력의 반발로 사임하고, 전후에는 동독과의 협력 추구로 비판받기도 했다. -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수상 - 콘스탄틴 페렌바흐
콘스탄틴 페렌바흐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중앙당 소속으로 총리를 역임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문제로 내각이 사임한 후 반유대주의 방호 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다 1926년 사망했다.
한스 루터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한스 루터 |
출생일 | 1879년 3월 10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사망일 | 1962년 5월 11일 |
사망지 | 서독 뒤셀도르프 |
직업 | 법률가, 정치인, 외교관 |
소속 정당 | 무소속 |
정치 경력 | |
직책 | 독일 총리 (바이마르 공화국) |
임기 시작 | 1925년 1월 15일 |
임기 종료 | 1926년 5월 12일 |
이전 총리 | 빌헬름 마르크스 |
다음 총리 | 빌헬름 마르크스 |
대통령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직책 2 | 라이히스방크 총재 |
임기 시작 2 | 1930년 3월 7일 |
임기 종료 2 | 1933년 3월 17일 |
이전 총재 2 | 얄마르 샤흐트 |
다음 총재 2 | 얄마르 샤흐트 |
직책 3 | 제국 재무장관 대행 |
임기 시작 3 | 1925년 10월 26일 |
임기 종료 3 | 1926년 1월 20일 |
총리 3 | 본인 |
이전 장관 3 | 오토 폰 슐리벤 |
다음 장관 3 | 페터 라인홀트 |
임기 시작 4 | 1923년 10월 6일 |
임기 종료 4 | 1924년 12월 15일 |
총리 4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빌헬름 마르크스 |
이전 장관 4 | 루돌프 힐퍼딩 |
다음 장관 4 | 오토 폰 슐리벤 |
직책 5 | 제국 식량농업부 장관 |
임기 시작 5 | 1922년 12월 1일 |
임기 종료 5 | 1923년 10월 4일 |
총리 5 | 빌헬름 쿠노,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이전 장관 5 | 카를 뮐러 |
다음 장관 5 | 게르하르트 폰 카니츠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한스 루터는 1879년 3월 10일 베를린에서 부유한 상인 오토 루터와 빌헬미네 루터(혼전 성씨: 휘브너)의 아들로 태어나 루터교 집안에서 성장했다.[1][2]
킬 대학교, 제네바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04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관료가 되었다. 마그데부르크 시 참사 회원(1907년)과 에센 시장(1918년 - 1922년)을 역임했다.[1]
라이프니츠 김나지움/베를린에서 아비투어를 취득한 후, 1897년부터 1901년까지 제네바 대학교, 킬 대학교,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오토 폰 기어케, 프란츠 폰 리스트, 하인리히 브루너, 구스타프 폰 슈몰러, 후고 프루이스 등 저명한 법학자들이 그의 스승이었다. 1904년, 루터는 ''독일 제국 내 왕위 계승 분쟁 결정에 대한 연방 의회의 권한''이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Dr.jur.)를 취득했다. 1906년에는 ''아세서'' 시험에 합격하고 프로이센 행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906/07년에는 현재 베를린의 일부인 샬로텐부르크 시의회에서 근무했다.[1]
루터는 두 번 결혼했다. 1907년부터 1924년까지 게르트루트(혼전 성씨: 슈미트, 1880–1924)와 결혼했으며, 1953년에는 게르트루트 시올리(혼전 성씨: 마우츠)와 재혼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세 딸을 얻었다.[1]
3. 정치 경력
1922년 독일 인민당(DVP)에 가까운 무소속 각료로서 빌헬름 쿠노 내각에 식량·농업부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고, 제2차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에서 재무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히알마르 샤흐트를 통화 위원으로 등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 이후 독일 통화 안정에 기여했다.[1]
1925년 1월, 중앙당, DVP, 독일 민주당(DDP) 외에 처음으로 우파 민족주의 정당인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이 참여한 연립 내각을 조직하여 수상이 되었다. 의회의 권한 제한을 꾀했으나, 1925년 10월 로카르노 조약 조인에 반대하는 DNVP가 연립에서 이탈하여 소수 여당 내각으로 전락했다. 1926년 5월 국기를 둘러싼 대립으로 연립 내각이 붕괴되어 퇴진했다.[1]
1927년 DVP에 입당했고, 1928년에는 분권을 주장하는 '국가 쇄신 동맹'을 설립했다. 1930년 3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독일 제국 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 내각의 고용 창출 정책을 지지했지만, 통화 정책을 두고 대립하다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샤흐트가 재임했다. 그 후 1937년까지 주미 독일 대사를 역임했다. 1933년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 총장의 초청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강연하여 히틀러 수상의 '평화적 의도'를 강조했다.[1] 1937년 주미 대사에서 물러난 뒤 은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에서 은행 설립과 주 구분 획정에 관한 자문위원을 역임했다.[1]
3. 1. 독일 제국 및 지방 정치
1907년 루터는 마그데부르크 시의회에 선출되어 슈레버 가든의 면적을 10배로 늘리고, 식수를 오염시킨 지역 칼륨 산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1913년 2월부터 1918년 여름까지 프로이센 도시 연맹(독일 도시 연맹의 전신)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1918년 여름, 에센의 ''Oberbürgermeister'' (시장)이 되었다. 1918년 독일 혁명 동안 그는 혁명적인 1918-1919년 독일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시 행정부와 협력하고 시장의 주도적인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에센 시장 자격으로 1920년부터 ''임시 국가 경제 위원회''의 당연직 위원이었다.
3. 2. 바이마르 공화국 및 제국 정치
1922년 빌헬름 쿠노 내각에서 국가 식량 및 농업부(Reichsministerium für Ernährung und Landwirtschaft) 장관을 맡았다. 전임 장관 카를 뮐러는 라인 분리주의자와의 연루 의혹으로 사임했다. 루터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에서도 이 직책을 유지하며 인플레이션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식량 공급을 보장하는 데 힘썼다.[1]
1923년 10월 6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 개편 때 루터는 재무부 장관이 되었고,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에서도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루터는 초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키고 렌텐마르크를 도입한 통화 개혁을 이끌었다. 1923년 10월 15일, 경제학자 카를 헬페리히와 전임 재무장관 루돌프 힐퍼딩의 아이디어를 결합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1923년 10월 13일 비상 법률(''Ermächtigungsgesetz'')을 통해 1923년 10월 15일에 시행되었다. 국가은행(Reichsbank) 총재 얄마르 샤흐트의 긴축 통화 정책과 루터의 예산 적자 감축 조치는 통화 안정에 기여했다. 루터는 세 차례 비상 증세, 세금 납부 기한 단축, 판매세 인상, 인플레이션 이익 과세 등을 통해 수입을 늘렸다. 또한, 인건비 삭감, 공무원 수 25% 감축, 승진 동결, 공무원 급여 동결 등으로 지출을 줄였다.[1]
통화 안정에 성공한 후, 1924년 7월과 8월 1924년 런던 회의에 독일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통상 및 금융 정책 문제를 담당했다. 1924년 8월 30일, 렌텐마르크는 Reichsmark로 대체되었다.[1]
3. 3. 총리
1924년 12월 국회 선거 이후, 막스 내각(소수 내각)을 지지하는 정당들은 연립 정부를 좌파 (SPD) 또는 우파 (DNVP)로 확대할지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1925년 1월 9일, 독립적인 루터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1월 16일, 루터는 정당 기반 정부와 전문가/기술 관료로 구성된 정부의 특징을 결합한 자신의 내각을 발표했다. 연립 정부에 참여한 각 정당 (중앙당, BVP, DVP, DNVP)은 내각에 한 명의 대표를 두었고, 나머지 자리는 해당 정당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으로 가까운 공무원들로 채워졌다. DDP는 연립 정부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루터는 오토 게슬러를 ''국방부(Reichswehrministerium)''에 유임시킬 수 있었다.[1]
에베르트가 2월 28일에 사망하자, 루터는 후임 대통령 선출 때까지 임시 국가 원수 역할을 맡았다. 그 후 대통령 선거는 내각을 지지하는 연립 정부에 약간의 긴장을 주었다. 루터는 제국법원의 발터 지몬스 원장에게 두 후보에게 투표를 포기하고 중립적인 지몬스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지몬스는 거절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당선되었다.[1]
상대적으로 짧은 재임 기간 동안, 루터와 그의 내각은 몇 가지 중요한 법률과 국제 조약의 통과를 이루었다. 대외 무역에서, 동맹국과 독일 간의 무역을 규제했던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 조항은 1925년 1월 10일에 만료되어 독일의 무역 정책에 대한 주권을 재확립했다. 관세법은 1925년 8월 12일에 발효되어 산업 및 농업에 대한 관세를 제정했는데, 이는 전쟁 전의 관세율을 기반으로 했다. 영국, 소련,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와 무역 조약을 체결했다. 국내 조세 정책에서는 소득세, 자본 및 토지 양도세, 어음 인지세 및 판매세를 모두 낮추는 조세 개혁이 이루어졌다. 외교 정책에서, 내각은 영국,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와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1925년 10월)했는데, 이는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1926년 9월)의 길을 열었다. DNVP의 장관들은 로카르노 조약에 항의하며 내각에서 사임했고, 루터는 1926년 1월에 출범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이 정부는 소련과 ''우호 및 중립 조약''을 협상했다.[1]
사회 정책에서, 루터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사회 보험에 대한 여러 개혁이 이루어졌다. 1925년 5월 노동부 장관의 법령에 따라 산업재해 보험 적용 대상이 11가지 직업병으로 확대되었고,[4] 1925년 7월의 법률에 따라 근로자 보상 보험 적용 범위가 직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로 확대되었으며, 같은 달에 직업 관리 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1925년 5월의 법령은 직업병에 대한 보상을 규정했다.[5]
루터는 1926년 5월 12일, 힌덴부르크에게 흑-적-금색의 공식 ''국기(Reichsflagge)''뿐만 아니라 흑-백-적색의 ''상업기(Handelsflagge)''도 게양하도록 명령하는 대통령령 ''플라겐-페어오드눙(Flaggen-Verordnung)'' (1926년 5월 5일)을 발령하도록 요청한 후, 국회 다수당이 그를 불신임하자 자발적으로 사임했다. 그의 후임자는 빌헬름 막스였다.[1]
3. 4. 총리 퇴임 이후
루터는 1926년 여름 국영철도 감독 이사회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말 프로이센 자유국의 대표 자리를 위해 사임했으며, 1929년 3월에는 독일 모기지 은행 연합 이사회 임원이 되었다.[1] 1927년 독일 인민당(DVP)에 입당했고, 1928년에는 분권을 주장하는 '국가 쇄신 동맹'을 설립하여 1928년 1월 창립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제국의 연방 구조 개혁, 특히 다른 주에 비해 프로이센의 지배적인 위치 문제에 대해 연구했다.[1]
1930년 3월 11일, 얄마르 샤흐트의 후임으로 Reichsbank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다른 모든 직책을 포기하고 DVP도 탈퇴했다. 루터는 하인리히 브뤼닝의 디플레이션 정책을 지지했으며, 1931년 6월/7월 독일 은행 위기 동안 외국 채권자들이 요구한 단기 대출을 은행이 상환하도록 돕기 위해 법적으로나 Reichsbank의 재정적 수단 측면에서 한계를 넘었다.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은행들의 비판은 근거가 없었으며, 주로 은행이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1] 1932년 4월 9일 저녁, 포츠담 역 플랫폼에서 총격을 받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는데, 공격자들은 루터의 통화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미리 썼다.[6]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1933년 3월 16일에 사임했다. 그러나 독일 워싱턴 대사 직을 제안받고 수락했다.[1] 1933년 컬럼비아 대학교 캠퍼스에서 강연했는데, 루터는 유럽 이웃에 대한 히틀러의 "평화적 의도"를 강조했다. 니컬러스 머레이 버틀러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은 초청 취소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비자유적"이라고 부르며 학문의 자유 필요성을 언급했다.[7]
1937년 현직에서 은퇴했고(''임시 휴식 상태'') 1942년에 완전히 은퇴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49년에 뮌헨에 있는 개인 은행인 메르크 핑크 & Co.의 이사였으며, ''Bayerischen Hypotheken und Wechselbank''의 감독 이사회 멤버로도 활동했다. 1952년 뮌헨 ''정치과학대학''(Hochschule für politische Wissenschaften)에서 명예교수 직함을 수여했고, 1952–1955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영토 구조 조정을 위한 전문가 위원회(''Sachverständigen-Ausschuß für die Neugliederung des Bundesgebiets'') 의장을 맡았다. 1958년에는 재설립된 ''Verein für das Deutschtum im Ausland'' 회장이 되었다.[1][3]
1962년 5월 11일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1]
4. 나치 시대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루터는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같은 해 3월 16일에 Reichsbank 총재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주미 독일 대사 직을 제안받았고 이를 수락했다.[1]
1933년, 루터는 컬럼비아 대학교 캠퍼스에서 강연했다. 루터의 연설은 유럽 이웃에 대한 히틀러의 "평화적 의도"를 강조했다. 니컬러스 머레이 버틀러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은 초청을 취소하라는 학생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그 요청을 "비자유적"이라고 부르며 학문의 자유의 필요성을 언급했다.[7]
1937년, 루터는 주미 독일 대사직에서 은퇴했고(''임시 휴식 상태'') 1942년에 완전히 은퇴했다.[1][3]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서독에서 은행 설립과 주 구분 획정에 관한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6. 사망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에서 은행 설립과 주 구분 획정에 관한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7.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
1924 | 확고한 마르크 - 견실한 경제 |
1928 | 독일 자신의 힘으로 |
1928 | 독일 통화의 안정화 |
1959 | 단지 겉으로만 자신의 일인 듯[1] |
1959 | 유권자에게 투표권[2] |
1959 | 도시 연합의 봉사[3] |
1960 | 정당 없는 정치인[4] |
1964 | 1930-1933년, 벼랑 앞에서[5] |
참조
[1]
웹사이트
Biografie Hans Luther (German)
http://www.deutsche-[...]
Bayerische Nationalbibliothek
2015-01-19
[2]
웹사이트
Biografie Hans Luther (German)
https://www.dhm.de/l[...]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2015-01-19
[3]
웹사이트
Biografie Hans Luther (German)
https://www.bundesar[...]
Bundesarchiv
2015-01-19
[4]
서적
Greater Than the Parts: Holism in Biomedicine, 1920-1950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Farm labor in Germany, 1810–1945; its historical development within the framework of agricultural and social policy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Das Attentat auf Luther 1932
Duncker & Humblot
[7]
뉴스
DR. BUTLER REFUSES TO BAR NAZI ENVOY; Columbia Head Rejects Plea by Students to Cancel Dr. Luther's Address. CALLS REQUEST ILLIBERAL Stresses Need for Academic Freedom – Club Is Reported Planning Demonstratio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33-11-2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