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페이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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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밥 페이즐리는 1919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선수와 감독으로 활동한 축구인이다. 선수 시절 리버풀 FC에서 1946-47 시즌 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은퇴 후 리버풀의 코칭 스태프를 거쳐 1974년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으로서 9년간 6번의 리그 우승, 3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포함해 총 20개의 주요 대회 우승을 달성하며 리버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3년 은퇴 후 팀 이사로 활동하다가 1996년 사망했으며,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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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이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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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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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버트 페이즐리 |
출생일 | 1919년 1월 23일 |
출생지 | Hetton-le-Hole, County Durham, 잉글랜드 |
사망일 | 1996년 2월 14일 (77세) |
사망지 | 리버풀, 잉글랜드 |
포지션 | 레프트 하프 |
선수 경력 | |
유소년 클럽 | Bishop Auckland (1937–1939) |
클럽 | 리버풀 (1939–1954) |
출장 및 득점 | 253경기 (10골) |
감독 경력 | |
어시스턴트 매니저 | 리버풀 (1959–1973) |
감독 | 리버풀 (1974–1983) |
2. 초기 생애
밥 페이즐리는 1919년 1월 23일 목요일, 선덜랜드에서 7마일 떨어진 더럼 카운티의 작은 탄광 마을인 헤튼-르-홀에서 태어났다. 페이즐리는 그곳을 "석탄이 왕이고 축구가 종교였던 긴밀한 공동체"라고 묘사했다.[11] 그의 아버지 샘은 광부였고, 어머니 에밀리는 주부였다. 그들은 윌리, 밥, 휴, 앨런의 네 아들을 두었다. 페이즐리가 태어난 날, 전국적으로 15만 명의 광부들이 더 짧은 주당 근무 시간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페이즐리는 13세까지 지역 학교에 다녔고, 그곳의 친구들처럼 부족한 식단을 보충하기 위해 국수 배급소에 의존해야 했다. 1926년, 그가 일곱 살이었을 때 총파업 기간 동안, 그는 부모가 물과 섞어 석탄 가루를 모아 조잡한 연료를 만들 수 있도록 슬래그 더미를 기어 올라가야 했다. 노동자 계급의 가족들에게 삶은 어려웠고, 페이즐리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작은 연립 주택에 살았고, 생필품이 부족한 적은 없었지만, 한 주가 끝날 때쯤이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11]
페이즐리는 엡플턴 초등학교에서 뛰어난 축구 선수였고, 4년 동안 그의 팀이 17개의 트로피를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선수 생활 내내 그는 레프트 하프였다. 14세에 학교를 졸업한 후, 페이즐리는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했으며, 아버지가 지하 사고를 당해 5년 동안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곳에 있었다. 광산은 폐쇄되었고 그는 벽돌공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11]
페이즐리는 1933년 학교를 졸업한 후 헤튼 축구 클럽에 입단했고, 주니어 팀의 일원으로서 계속 주목을 받았다. 그는 선덜랜드에서 뛰는 것을 어릴 적 꿈으로 꿨지만, 헤튼에서 추천을 받았을 때 "너무 작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2] 대신, 그는 1937–38 시즌 전에 경기당 3실링 6페니를 받고 비숍 오클랜드와 계약을 맺었다.[12]
2. 1. 어린 시절
밥 페이즐리는 1919년 1월 23일 목요일, 선덜랜드에서 7마일 떨어진 더럼 카운티의 작은 탄광 마을인 헤튼-르-홀에서 태어났다. 페이즐리는 그곳을 "석탄이 왕이고 축구가 종교였던 긴밀한 공동체"라고 묘사했다.[11] 그의 아버지 샘은 광부였고, 어머니 에밀리는 주부였다. 그들은 윌리, 밥, 휴, 앨런의 네 아들을 두었다.[11]페이즐리는 13세까지 지역 학교에 다녔고, 1926년 총파업 기간 동안에는 부모를 도와 석탄 가루를 모으기도 했다.[11] 노동자 계급의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페이즐리는 "생필품이 부족한 적은 없었지만, 한 주가 끝날 때쯤이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11]
페이즐리는 엡플턴 초등학교에서 뛰어난 축구 선수였고, 4년 동안 그의 팀이 17개의 트로피를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레프트 하프였다.[11] 14세에 학교를 졸업한 후, 페이즐리는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했으며, 이후 벽돌공 훈련을 받았다.[11]
페이즐리는 1933년 학교를 졸업한 후 헤튼 축구 클럽에 입단하여 선덜랜드 입단을 꿈꿨지만, "너무 작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2] 대신 1937–38 시즌 전에 비숍 오클랜드와 계약을 맺었다.[12]
2. 2. 비숍 오클랜드 FC 시절
1937년, 밥 페이즐리는 비숍 오클랜드 FC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2] 비숍 오클랜드는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비(非) 리그 팀 중 하나였다.[12] 페이즐리는 비숍 오클랜드에서 두 시즌 동안 활약하며 1938-39 시즌 노던 리그 챔피언십, FA 아마추어 컵 그리고 더럼 카운티 챌린지 컵에서 우승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12] FA 아마추어 컵 결승전은 더럼의 로커 파크에서 열렸으며, 비숍스는 연장전 끝에 윌링턴을 3-0으로 꺾었다.[12]3. 리버풀 FC 선수 시절
1945-46 시즌, 잉글랜드 풋볼 리그는 전쟁 직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챔피언십 프로그램을 부활시키지 않고, 지리적 기반의 노스와 사우스 디비전을 운영했다. FA컵은 8강전까지 2차전으로 진행되었다.[72]
페이즐리는 1946년 1월 5일, 체스터와의 FA컵 3라운드 1차전 원정 경기에서 리버풀 소속으로 공식 데뷔전을 치렀고, 팀은 2-0으로 승리했다. 리그 데뷔는 1946년 9월 7일 안필드에서 첼시를 상대로 이루어졌으며, 리버풀은 7-4로 승리했다. 그의 첫 골은 1948년 5월 1일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나왔으며, 페이즐리의 득점과 잭 발머의 골로 리버풀은 2-1로 승리했다.
1946-47 시즌, 페이즐리는 42경기 중 34경기에 출전하며 리버풀이 24년 만에 첫 번째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47-48 시즌과 1948-49 시즌에도 30경기 이상, 1949-50 시즌에는 28경기에 출전하며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1950년 FA컵 준결승에서는 머지사이드 라이벌 에버턴을 상대로 득점하며 결승 진출에 기여했으나, 웸블리에서 열린 아스널과의 결승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72] 그는 나중에 이 경험이 선수들에게 큰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할 때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1951년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으나,[72]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1954년에 은퇴했다.[72] 통산 277경기 12골을 기록했다.[73]
3. 1. 입단과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7년, 밥 페이즐리는 아마추어 클럽에서 축구 선수 경력을 시작하였다. 1939년 5월, 리버풀 FC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72]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리그 경기가 중단되었고, 페이즐리는 1939년 10월에 징병되어 육군에 입대, 왕립 포병대에 배치되어 포수로 복무했다.[72] 그는 제73중연대에서 복무하며 대전차포 사격 훈련을 받았고,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 등에서 복무했다.[72]군 복무 중에도 페이즐리는 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부대 대표팀 주장을 맡는 등 축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1940년 리버풀 시니어 컵 결승전에서 에버턴을 상대로 리버풀 소속으로 경기를 뛰기도 했으며, 구디슨 파크에서 에버턴을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은 그가 극동 지역으로 배치되는 것을 막아 일본군의 포로가 될 위험을 피하게 해주었다.
1941년 이집트로 파견된 페이즐리는 기수 레그 스트레튼과의 친분으로 경마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승마를 배우기도 했다. 1943년에는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이동했고, 1944년 6월에는 로마 해방에 참여하여 전차를 타고 도시로 진입했다. 이후 피렌체로 이동하여 ACF 피오렌티나의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에 주둔하며 조 루이스와 슈가 레이 로빈슨의 권투 시합을 관람하기도 했다.
1945년 영국으로 돌아온 페이즐리는 매걸 기차역에서 미래의 아내인 제시를 만났고, 1946년 7월 17일 리버풀의 올 소울스 교회에서 결혼했다.
3. 2. 전후 활약과 리그 우승
1945-46 시즌, 잉글랜드 풋볼 리그는 전쟁 직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챔피언십 프로그램을 부활시키지 않고, 지리적 기반의 노스와 사우스 디비전을 운영했다. FA컵은 8강전까지 2차전으로 진행되었다.[72]페이즐리는 1946년 1월 5일, 체스터와의 FA컵 3라운드 1차전 원정 경기에서 리버풀 소속으로 공식 데뷔전을 치렀고, 팀은 2-0으로 승리했다. 리그 데뷔는 1946년 9월 7일 안필드에서 첼시를 상대로 이루어졌으며, 리버풀은 7-4로 승리했다. 그의 첫 골은 1948년 5월 1일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나왔으며, 페이즐리의 득점과 잭 발머의 골로 리버풀은 2-1로 승리했다.
1946-47 시즌, 페이즐리는 42경기 중 34경기에 출전하며 리버풀이 24년 만에 첫 번째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47-48 시즌과 1948-49 시즌에도 30경기 이상, 1949-50 시즌에는 28경기에 출전하며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1950년 FA컵 준결승에서는 머지사이드 라이벌 에버턴을 상대로 득점하며 결승 진출에 기여했으나, 웸블리에서 열린 아스널과의 결승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72] 그는 나중에 이 경험이 선수들에게 큰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할 때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1951년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으나,[72]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1954년에 은퇴했다.[72] 통산 277경기 12골을 기록했다.[73]
4. 코칭 경력
밥 페이즐리는 1954년 선수 은퇴 후 리버풀 FC에 물리 치료사로 합류했다.[25] 그는 독학으로 물리 치료를 공부했으며, 선수들을 보기만 해도 부상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았다.[25] 이후 리저브 팀 코치를 거쳐 1959년 8월 1군 트레이너로 승격했다.[26]
1959년 12월 빌 샹클리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클럽의 운명은 바뀌었다.[26] 샹클리는 페이즐리, 루벤 베넷, 조 페이건으로 구성된 코칭 스태프와 회의를 통해 자신의 코치를 데려오지 않고 함께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27] 샹클리는 훈련 전략을 자신이 결정하고, 모두 서로와 클럽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7] 필 테일러 감독 시절의 전통적인 육체 훈련과 도로 달리기 대신, 샹클리는 "속도와 공을 사용하는" 훈련을 도입했고, 5대5 경기를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28] 페이즐리는 공을 이용한 훈련에 열성적이었고, 페이건, 베넷과 함께 샹클리의 방식을 따랐다.[28] 페이건은 안필드의 창고를 코치들을 위한 "공동 휴게실"인 부트 룸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고, 이곳에서 샹클리는 전략, 전술, 훈련, 선수에 대해 매일 회의를 열었다.[29]
샹클리의 훈련 전략은 1960년대와 그 이후 리버풀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샹클리는 선수들이 훈련 후 목욕이나 샤워를 하기 전에 몸을 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훈련받은 물리 치료사인 페이즐리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페이즐리는 격렬한 운동 후 약 40분 동안 몸을 식혀야 땀을 흘리는 동안 모공이 열린 상태로 남아 감기나 염좌에 취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훈련 방식은 선수들의 부상 방지에 큰 효과를 보였다. 예를 들어, 리버풀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고 유럽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한 1965-66 시즌에는 전체 시즌 동안 단 14명의 선수만 기용했다.[30]
스티븐 F. 켈리는 페이즐리를 "완벽한 2인자: 샹클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항상 현명한 조언을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26] 페이즐리는 소탈한 성격으로 "2인자를 자처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켈리는 샹클리가 "리버풀의 위대한 동기 부여의 원동력"이었다면 페이즐리는 "전술가"였다고 평가하며 그의 영향력을 인정했다.[26]
1954년 은퇴 후, 페이즐리는 리버풀의 지원 스태프에 합류하여 독학으로 물리 치료사가 되었으며, 선수를 보기만 해도 부상을 진단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25] 그는 나중에 리저브팀 코치가 되었고, 1959년 8월 앨버트 셸리가 은퇴하면서 1군 트레이너가 되었다.[26] 1959년 12월 빌 샹클리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클럽의 운명이 바뀌었고, 페이즐리는 "그가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는 불난 집처럼 잘 지냈다"고 회상했다.[26] 샹클리는 감독으로서 첫날, 페이즐리, 루벤 베넷, 조 페이건으로 구성된 코칭 스태프와 회의를 열어 자신의 코치를 데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고, 그들의 직업을 보장했다. 샹클리는 훈련 전략은 자신이 결정할 것이며, 그들은 서로와 클럽에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27]
필 테일러 아래에서 훈련은 전통적인 육체 훈련과 도로 달리기였다. 샹클리는 "속도와 공을 사용하는" 훈련을 고집했다.[28] 5대5 경기가 전략의 핵심 부분으로 도입되었다. 페이즐리는 항상 공을 이용한 훈련에 열심이었고, 페이건과 베넷처럼 샹클리의 방식을 기꺼이 따랐다.[28] 페이건은 안필드의 창고 공간을 코치들을 위한 "공동 휴게실"로 바꾸는 데 기여했고, 이것이 전설적인 부트 룸이 되었다. 샹클리는 그곳에서 전략, 전술, 훈련 및 선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매일 회의를 갖는 리버풀의 전통을 시작했고, 이후 페이즐리와 페이건이 이를 유지했다.[29]
훈련 전략은 1960년대와 그 이후 리버풀의 성공에 핵심이었다. 단순히 공을 사용하고 5대5 경기를 하는 것 이상이었다. 페이즐리, 페이건, 베넷의 영향을 받아 샹클리는 선수들이 훈련 후 목욕이나 샤워를 하기 전에 몸을 식히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훈련받은 물리 치료사로서 페이즐리는 격렬한 운동 후 약 40분 동안 몸을 식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여전히 땀을 흘리는 동안 욕조에 들어가면 모공이 열린 상태로 남아 감기나 염좌에 더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페이건은 멜우드에 있는 클럽의 훈련 시설로 팀 버스를 타고 가기 전에 안필드에서 옷을 갈아입을 것을 옹호했다. 그들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러 돌아올 것이다. 이 일과는 몸을 식힐 필요를 충족시켰고, 두 번의 이동 중에 팀 결속을 장려하고 홈 팀으로서 그들에게 중요한 안필드에 대한 친숙성을 확보하는 부가적인 이점을 가졌다. 반대로 에버튼은 모든 것을 그들의 벨필드 훈련 시설에서 했고, 선수들은 약 2주마다 홈 경기를 위해 구디슨 파크에 갔다. 샹클리는 몸을 식히는 기간이 "여러 시즌 동안 놀라운 부상 부족"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리버풀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고 유럽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한 1965-66 시즌에는 전체 시즌 동안 단 14명의 선수만 기용했다.[30]
스티븐 F. 켈리는 페이즐리를 "완벽한 2인자: 샹클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항상 현명한 조언을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26] 페이즐리는 소탈한 인물이었고 "2인자를 자처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켈리는 그의 영향력을 인정한다. 샹클리가 "리버풀의 위대한 동기 부여의 원동력"이었지만, 페이즐리가 "전술가"였기 때문이다.[26]
샹클리가 감독으로 있는 다음 15년 동안 페이즐리가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리버풀은 1부 리그 타이틀 3회, 2부 리그 타이틀 1회, FA컵 2회, 그리고 UEFA 컵 1회를 획득했다.
4. 1. 물리 치료사와 코치
밥 페이즐리는 1954년 선수 은퇴 후 리버풀 FC에 물리 치료사로 합류했다.[25] 그는 독학으로 물리 치료를 공부했으며, 선수들을 보기만 해도 부상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았다.[25] 이후 리저브 팀 코치를 거쳐 1959년 8월 1군 트레이너로 승격했다.[26]1959년 12월 빌 샹클리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클럽의 운명은 바뀌었다.[26] 샹클리는 페이즐리, 루벤 베넷, 조 페이건으로 구성된 코칭 스태프와 회의를 통해 자신의 코치를 데려오지 않고 함께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27] 샹클리는 훈련 전략을 자신이 결정하고, 모두 서로와 클럽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7] 필 테일러 감독 시절의 전통적인 육체 훈련과 도로 달리기 대신, 샹클리는 "속도와 공을 사용하는" 훈련을 도입했고, 5대5 경기를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28] 페이즐리는 공을 이용한 훈련에 열성적이었고, 페이건, 베넷과 함께 샹클리의 방식을 따랐다.[28] 페이건은 안필드의 창고를 코치들을 위한 "공동 휴게실"인 부트 룸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고, 이곳에서 샹클리는 전략, 전술, 훈련, 선수에 대해 매일 회의를 열었다.[29]
샹클리의 훈련 전략은 1960년대와 그 이후 리버풀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샹클리는 선수들이 훈련 후 목욕이나 샤워를 하기 전에 몸을 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훈련받은 물리 치료사인 페이즐리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페이즐리는 격렬한 운동 후 약 40분 동안 몸을 식혀야 땀을 흘리는 동안 모공이 열린 상태로 남아 감기나 염좌에 취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훈련 방식은 선수들의 부상 방지에 큰 효과를 보였다. 예를 들어, 리버풀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고 유럽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한 1965-66 시즌에는 전체 시즌 동안 단 14명의 선수만 기용했다.[30]
스티븐 F. 켈리는 페이즐리를 "완벽한 2인자: 샹클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항상 현명한 조언을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26] 페이즐리는 소탈한 성격으로 "2인자를 자처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켈리는 샹클리가 "리버풀의 위대한 동기 부여의 원동력"이었다면 페이즐리는 "전술가"였다고 평가하며 그의 영향력을 인정했다.[26]
4. 2. 빌 샹클리 감독 체제
1954년 은퇴 후, 페이즐리는 리버풀의 지원 스태프에 합류하여 독학으로 물리 치료사가 되었으며, 선수를 보기만 해도 부상을 진단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25] 그는 나중에 리저브팀 코치가 되었고, 1959년 8월 앨버트 셸리가 은퇴하면서 1군 트레이너가 되었다.[26] 1959년 12월 빌 샹클리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클럽의 운명이 바뀌었고, 페이즐리는 "그가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는 불난 집처럼 잘 지냈다"고 회상했다.[26] 샹클리는 감독으로서 첫날, 페이즐리, 루벤 베넷, 조 페이건으로 구성된 코칭 스태프와 회의를 열어 자신의 코치를 데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고, 그들의 직업을 보장했다. 샹클리는 훈련 전략은 자신이 결정할 것이며, 그들은 서로와 클럽에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27]필 테일러 아래에서 훈련은 전통적인 육체 훈련과 도로 달리기였다. 샹클리는 "속도와 공을 사용하는" 훈련을 고집했다.[28] 5대5 경기가 전략의 핵심 부분으로 도입되었다. 페이즐리는 항상 공을 이용한 훈련에 열심이었고, 페이건과 베넷처럼 샹클리의 방식을 기꺼이 따랐다.[28] 페이건은 안필드의 창고 공간을 코치들을 위한 "공동 휴게실"로 바꾸는 데 기여했고, 이것이 전설적인 부트 룸이 되었다. 샹클리는 그곳에서 전략, 전술, 훈련 및 선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매일 회의를 갖는 리버풀의 전통을 시작했고, 이후 페이즐리와 페이건이 이를 유지했다.[29]
훈련 전략은 1960년대와 그 이후 리버풀의 성공에 핵심이었다. 단순히 공을 사용하고 5대5 경기를 하는 것 이상이었다. 페이즐리, 페이건, 베넷의 영향을 받아 샹클리는 선수들이 훈련 후 목욕이나 샤워를 하기 전에 몸을 식히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훈련받은 물리 치료사로서 페이즐리는 격렬한 운동 후 약 40분 동안 몸을 식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여전히 땀을 흘리는 동안 욕조에 들어가면 모공이 열린 상태로 남아 감기나 염좌에 더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페이건은 멜우드에 있는 클럽의 훈련 시설로 팀 버스를 타고 가기 전에 안필드에서 옷을 갈아입을 것을 옹호했다. 그들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러 돌아올 것이다. 이 일과는 몸을 식힐 필요를 충족시켰고, 두 번의 이동 중에 팀 결속을 장려하고 홈 팀으로서 그들에게 중요한 안필드에 대한 친숙성을 확보하는 부가적인 이점을 가졌다. 반대로 에버튼은 모든 것을 그들의 벨필드 훈련 시설에서 했고, 선수들은 약 2주마다 홈 경기를 위해 구디슨 파크에 갔다. 샹클리는 몸을 식히는 기간이 "여러 시즌 동안 놀라운 부상 부족"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리버풀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고 유럽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한 1965-66 시즌에는 전체 시즌 동안 단 14명의 선수만 기용했다.[30]
스티븐 F. 켈리는 페이즐리를 "완벽한 2인자: 샹클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항상 현명한 조언을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26] 페이즐리는 소탈한 인물이었고 "2인자를 자처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켈리는 그의 영향력을 인정한다. 샹클리가 "리버풀의 위대한 동기 부여의 원동력"이었지만, 페이즐리가 "전술가"였기 때문이다.[26]
샹클리가 감독으로 있는 다음 15년 동안 페이즐리가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리버풀은 1부 리그 타이틀 3회, 2부 리그 타이틀 1회, FA컵 2회, 그리고 UEFA 컵 1회를 획득했다.
5. 리버풀 FC 감독 시절
1974 FA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빌 샹클리는 예기치 않게 은퇴를 발표했고, 리버풀 이사회는 밥 페이즐리를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다.[32] 처음에는 그 역할을 맡는 것을 꺼렸지만, 페이즐리는 감독으로서 9년 동안 매년 최소 하나의 메이저 트로피를 획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단, 첫 시즌은 제외).[25]
1974-75 시즌 2위를 기록한 후, 1975-76 시즌에 풋볼 리그 우승과 UEFA컵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25] 이 시기는 리버풀이 잉글랜드와 유럽 축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였다.[25] 1976-77 시즌에는 리그 2연패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클럽 사상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컵 우승도 이루어냈다.[72] FA컵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패하며 트레블 달성에는 실패했다.[72]
1977-78 시즌,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달성했으나, 리그에서는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끄는 노팅엄 포레스트에 밀려 2위에 머물렀다.[72] 1980-81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세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다.[74]
1978년부터 1981년까지 3년 동안, 리버풀 FC의 홈 구장인 안필드에서 모든 리그 경기 및 컵 경기를 포함하여 85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이 중 63경기는 리그전이었고, 이는 당시 리그전 홈 무패 신기록이었다.
1981-82 시즌과 1982-83 시즌 리그 2연패와 풋볼 리그 컵 3연패를 달성하고 1983년 은퇴했다. 그는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20개의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으며, 현재까지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이자 역대 가장 성공적인 잉글랜드 감독으로 남아 있다.[25] 그는 시즌당 2.2개의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펩 과르디올라만이 넘어선 기록이다. 카를로 안첼로티와 지네딘 지단이 각각 2014년과 2018년에 이 업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유러피언 컵을 3번 우승한 팀을 지휘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전례 없는 6번의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5. 1. 샹클리의 후계자
1974 FA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빌 샹클리는 예기치 않게 은퇴를 발표했고, 리버풀 이사회는 밥 페이즐리를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다.[32] 처음에는 그 역할을 맡는 것을 꺼렸지만, 페이즐리는 감독으로서 9년 동안 매년 최소 하나의 메이저 트로피를 획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단, 첫 시즌은 제외).[25]1974-75 시즌 2위를 기록한 후, 팀은 1976년 리그 우승과 UEFA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기는 리버풀이 잉글랜드와 유럽 축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6번의 리그 우승(두 번의 준우승 포함), 3번의 리그 컵, 1번의 UEFA 컵, 1번의 UEFA 슈퍼컵, 6번의 채리티 쉴드, 그리고 3번의 유러피언 컵을 우승했다.[25] 1981년 5위에 그친 것을 제외하고, 페이즐리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리버풀은 리그에서 2위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한 적이 없었다. 1978년과 1981년 사이에 페이즐리의 팀은 안필드에서 63번의 리그 경기를 무패로 기록했는데, 이는 2020년 11월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 팀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클럽 기록이었다.[33]
현역 은퇴 후에는 물리 치료사로서 팀에 남았고[72], 1959년에 빌 샹클리가 리버풀의 감독이 되자 샹클리의 오른팔로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다[72]。 샹클리 은퇴 후 1974년부터 감독으로 취임했다[72]。
취임 2시즌째인 1975-76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함과 동시에 UEFA컵도 우승했다. 이듬해 1976-77 시즌에는 국내 리그 2연패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클럽 사상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컵 우승도 이루어냈다. 이 시즌에는 리그 우승과 UEFA 챔피언스컵 우승을 달성했지만, FA컵은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2-1로 패해 트레블을 놓쳤다. 또한 FA컵만은, 감독으로 지휘한 9년 동안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1977-78 시즌에도 챔피언스컵을 우승하며 2연패를 달성했지만, 리그전에서는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끄는 노팅엄 포레스트에 3연패를 저지당했고, 더 나아가 다음 시즌부터 2시즌 연속으로 챔피언스컵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1980-81 시즌에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3번째 챔피언스컵 우승을 달성했다[74]。
1978년부터 1981년까지 3년 동안, 리버풀 FC의 홈 구장인 안필드에서 모든 리그 경기 및 컵 경기를 포함하여 85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85경기 중 63경기는 리그전이었고, 63경기 연속 리그전 홈 무패 기록을 수립했다(이 리그전 홈 무패 기록은 2007년에 첼시에 의해 깨졌다).
1983년, 리그 우승과 풋볼 리그 컵 3연패를 뒤로하고 9년간의 감독 생활을 마쳤다.
5. 2. 황금기를 이끌다
1974 FA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빌 샹클리가 예기치 않게 은퇴를 발표했고, 리버풀 이사회는 밥 페이즐리를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다.[32] 처음에는 그 역할을 맡는 것을 꺼렸지만, 페이즐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첫 시즌을 제외하고는, 감독으로서 9년 동안 매년 최소 하나의 메이저 트로피를 획득했다.1974-75 시즌 2위를 기록한 후, 1975-76 시즌에 풋볼 리그 우승과 UEFA컵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25] 이 시기는 리버풀이 잉글랜드와 유럽 축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였다.[25] 1976-77 시즌에는 리그 2연패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클럽 사상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컵 우승도 이루어냈다.[72] FA컵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패하며 트레블 달성에는 실패했다.[72]
1977-78 시즌,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달성했으나, 리그에서는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끄는 노팅엄 포레스트에 밀려 2위에 머물렀다.[72] 1980-81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세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다.[74]
1978년부터 1981년까지 3년 동안, 리버풀 FC의 홈 구장인 안필드에서 모든 리그 경기 및 컵 경기를 포함하여 85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이 중 63경기는 리그전이었고, 이는 당시 리그전 홈 무패 신기록이었다.
1981-82 시즌과 1982-83 시즌 리그 2연패와 풋볼 리그 컵 3연패를 달성하고 1983년 은퇴했다. 그는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20개의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으며, 현재까지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이자 역대 가장 성공적인 잉글랜드 감독으로 남아 있다.[25] 그는 시즌당 2.2개의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펩 과르디올라만이 넘어선 기록이다. 카를로 안첼로티와 지네딘 지단이 각각 2014년과 2018년에 이 업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유러피언 컵을 3번 우승한 팀을 지휘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전례 없는 6번의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5. 3. 은퇴
밥 페이즐리는 44년간 리버풀에 몸담은 후 1982-83 시즌을 끝으로 리버풀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6번의 리그 우승, 3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 1번의 UEFA 컵 우승, 3번의 리그 컵 우승 등 총 20개의 주요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페이즐리의 후임으로는 조 페이건이 임명되어 리버풀에게 네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안겨주었다. 은퇴 이후, 페이즐리는 케니 달글리시가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된 후 2년 동안 비공식 컨설턴트 및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클럽 이사로 임명되었다. 1986년 초에는 아일랜드 축구 협회로부터 아일랜드 축구 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받았으나, 잭 찰턴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6. 감독 이후와 죽음
1983년 감독직에서 은퇴한 후 밥 페이즐리는 리버풀의 팀 디렉터로 활동했다.[72] 1986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92년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로 진단받아 은퇴할 때까지 리버풀의 이사로 활동했는데, 70대 초반에 안필드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다. 1996년 2월 14일, 머지사이드의 요양원으로 이사한 지 몇 주 후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6]
페이즐리는 울튼 리버풀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 묘지에 묻혔다.[36] 그의 고향인 헤튼레홀의 중심 공원에는 페이즐리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37] 1999년에는 리버풀 FC의 홈 구장인 안필드에 "'''페이즐리 게이트'''"라는 이름의 문이 설치되었고,[72] 1968년 경기 중에 부상당한 엠린 휴즈를 업었던 에피소드를 본뜬 동상이 세워졌다.[75]
7. 유산과 평가
밥 페이즐리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리버풀 FC의 황금기를 이끈 명장이다. 감독으로 재임한 9년 동안 3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6번의 리그 우승 등 많은 타이틀을 리버풀에 안겨주었다.[72] 감독으로서 3번 이상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한 사람은 2023년 기준으로 페이즐리, 카를로 안첼로티, 지네딘 지단, 호셉 과르디올라 4명뿐이다.[72] 잉글랜드 올해의 최우수 감독을 6번, 이달의 최우수 감독을 11번 수상했다.
8. 개인 수상 경력
밥 페이즐리는 1983년 PFA 공로상을 수상하였고, 1984년에는 FWA 공로상을 수상하였다.[76]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시즌에는 LMA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었으며, 1977-78 시즌에는 유럽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1981년에는 알프 램지 상을 수상하였다.[76] 2002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76] ESPN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4위, 월드사커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8위, 프랑스풋볼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26위에 올랐다. 1977년에는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수여받았다.[76]
9. 선수 시절 우승 경력
리버풀 FC에서 1946-47 시즌 풋볼 리그 1부 우승을 하였다.[40]
10. 감독 시절 우승 경력
밥 페이즐리는 리버풀 FC 감독으로 재임하며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풋볼 리그 1부에서 6회 (1975-76,[41] 1976-77,[42] 1978-79,[43] 1979-80,[44] 1981-82,[45] 1982-83[46]), 풋볼 리그 컵에서 3회 (1980-81,[48][49] 1981-82,[50] 1982-83[51]), FA 채리티 실드에서 6회 (1974,[54] 1976,[55] 1977,[56] 1979,[57] 1980,[58] 1982[59])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유러피언컵 3회 (1976-77,[60] 1977-78,[61] 1980-81[62]), UEFA컵 1회 (1975-76[63][64]), UEFA 슈퍼컵 1회 (1977[65][66]) 우승을 차지하며 유럽 무대에서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페이즐리는 1983년 대영 제국 훈장 (OBE)을 받았고,[10]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년에 LMA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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