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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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우영은 1928년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제9대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양손자이다. 경신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 경제부 기자로 활동했다. 1964년부터 1993년까지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며, 반공과 안보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논조를 이끌었다. 1980년 《월간조선》을 창간하고, 1990년 《스포츠조선》을 창간했으며, 1993년 조카 방상훈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회장이 되었다. 2016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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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사 - 조만식
조만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한국 전쟁 중 처형되었다. - 조선일보사 - 방일영
방일영은 평안북도 박천 출생으로 조선일보 사장 비서를 거쳐 경영권을 장악하고, 1980년대 발행 부수 1위 신문으로 성장시켰으며, 방일영장학회 등을 설립하여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했으나 권언유착 논란으로 비판받은 언론인이다. - 경성경신고등보통학교 동문 - 안창호
안창호는 평안남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로서, 서양식 교육과 기독교 입교 후 독립협회 활동, 대한국민회 설립 등 해외 독립운동, 신민회 조직, 흥사단 재건 등 국내외 민족 교육과 계몽 운동에 헌신하며 민족 개조를 주창하고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 경성경신고등보통학교 동문 - 강창성
강창성은 육군 보안사령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고 하나회 연루로 삼청교육대에 투옥되기도 했으며, 2006년 사망한 인물이다. - 정주시 출신 - 이기백
이기백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기여하고 민족사학을 개척하며 한국사 대중화에 힘쓴 역사학자이며, 주요 저서로 《한국사신론》 등이 있고,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키는 등 한국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 정주시 출신 - 문선명
문선명은 통일교를 창설하고 원리강론을 통해 사상을 체계화했으며 국제 합동 축복 결혼식을 주재했으나, 메시아 주장과 교리로 비판받았고 다양한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다.
방우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일민 방우영 |
원어명 | 逸民 方又榮 |
출생일 | 1928년 1월 22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 |
사망일 | 2016년 5월 8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 |
본관 | 온양 |
학력 |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 |
배우자 | 이선영 |
자녀 | 방성훈 방혜성 방윤미 방혜신 |
부모 | 방재윤(부) 이성춘(모) |
정당 | 무소속 |
경력 | |
경력 | 1980년 대한민국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연세대학교 이사장 조선일보 회장 민주정의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자유민주연합 전임고문 겸 당무위원 |
2. 생애
(내용 없음)
2. 1. 생애 전반
1928년 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과 어머니 이성춘(李成春)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방일영이고, 둘째 형 방필영은 2세 때 병으로 사망했다. 호는 일민(逸民)이다.그는 제9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의 양손자이다. 본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손자였으나, 아버지 방재윤이 자녀가 없던 숙부 방응모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방응모의 양손자가 되었다. 방응모는 본 부인 승계도에게서 아들 둘을 얻었지만 요절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방응모는 "일등인 형(일영)과 더불어 또 번영하라"는 뜻에서 '우영'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3] 네 살 때는 아이들과 놀다가 떨어져 다쳤는데, 이때 차를 타고 경성의전으로 가서 수술을 받고 살아났다[4]고 한다.
1940년 4월 아버지 방재윤이 정주군의 나무 심기 사업에 출장갔다가 병원에서 간호사가 잘못 놓은 주사로 인해 사망하면서 할아버지 방응모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조선일보가 폐간되었고, 방우영은 정주 조일심상 소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양할아버지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로 이주한 뒤, 서울로 유학하여 경성 경신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상과를 졸업했다.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며, 이후 형 방일영과 함께 조선일보를 재건하는 데 주력했다.
1959년 5월 15일 이선영과 결혼했다. 이선영의 어머니는 역사학자 문일평의 딸이었다. 방응모와 문일평은 가깝게 지냈으며, 문일평의 아들 중 한 명인 문동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결혼식 주례는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진오가 맡았고, 송인상 당시 재무부 장관이 축사를 했다.
2. 2. 조선일보 경영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입사하여 8년간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잠시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았다.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했으며, 1963년 발행인, 1964년 전무 대표이사를 거쳐 1970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형 방일영이 1970년까지 경영권을 행사했으나, 1970년부터 방우영이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방우영 사장은 1등 신문 조선일보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대한민국 정·관·언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쳐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5]
1970년대부터 반공과 안보제일주의를 조선일보의 주요 가치로 내세웠다. 1960∼70년대 중앙정보부 국내정보국 언론담당관으로 조선일보를 담당했던 박기식은 2001년 '민족21' 12월호에서 "현재 조선일보 논조의 근원은 바로 방우영"이라고 주장했다. 1971년 대선 전 중앙정보부 상황실에서 각 신문사 발행인들에게 북한 영상물을 보여주던 중, 김일성 주석이 간부들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오자 방우영이 김일성을 향해 삿대질하며 심한 욕설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6]
1975년에는 형 방일영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방일영장학회' 법인화에 동참했다. 형제가 보유한 지분 15%를 재단 기금으로 추가 출연하고, 기존 장학기금 15억원을 합쳐 그 해 11월 비영리 공익법인 방일영장학회(재단)를 설립했다.
1980년에는 《월간조선》을 창간했다. 1981년 한국언론연구원 초대 이사장과 연세대학교 동문회장을 맡았고,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으며, 프랑스 니스 시로부터 명예시민금장과 감사장을 받았다. 1987년에는 한독(韓獨)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1990년 《스포츠조선》을 창간했다. 1993년에는 형 방일영의 아들인 조카 방상훈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일보 회장이 되었다.[7]
1994년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1997년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에 각각 취임했다.
2. 3. 생애 후반
2003년 3월 26일 조선일보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조선일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일보 측은 방우영의 사임과 관련하여 "방 회장이 연세가 많이 드셔서 이전부터 75세에 물러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며 건강상의 문제나 다른 이유로 사임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2006년 9월 경기 의정부시 가능동 선산에서 가족 추모 행사를 마치고 승용차로 귀가하던 중, 신원 미상의 괴한 2명에게 벽돌로 차 유리창이 찍히는 습격을 받았다.[8] 같은 해 10월 대한민국 국정감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소속 김기춘 의원은 이 테러 사건의 배후로 북한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9]
2008년에는 55년간의 언론계 생활을 정리한 팔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밤새 전쟁을 치르듯 만든 신문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이 우리 신문에 만족할지 언제나 가슴 떨렸다”고 회고했다.[10]
2010년 조선일보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2016년 5월 8일 오전 11시 7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3. 학력
4. 경력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입사하여 8년간 사회부와 경제부 기자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잠시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기도 했다.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한 뒤, 1963년 발행인, 1964년 전무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1970년에는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형 방일영으로부터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사장으로서 조선일보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대한민국 정계, 관계, 언론계에 큰 영향력을 미쳐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5]
1970년대부터 조선일보의 주요 가치로 반공과 안보제일주의를 내세웠다. 1960~70년대 중앙정보부에서 조선일보를 담당했던 박기식은 2001년 '민족21' 12월호 인터뷰에서 "현재 조선일보 논조의 근원은 바로 방우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 전 중앙정보부 상황실에서 열린 북한 영상물 상영회 당시, 방우영이 화면 속 김일성을 향해 삿대질하며 심한 욕설을 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6]
1975년에는 형 방일영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방일영장학회' 법인 발족에 동참했다. 형제가 보유한 지분 15%를 재단 기금으로 추가 출연하고, 기존 장학기금 15억여 원을 합쳐 비영리 공익법인 방일영장학회(재단)를 설립했다.
1980년에는 《월간조선》을 창간했다. 1981년에는 한국언론연구원 초대 이사장과 연세대학교 동문회장을 맡았고,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고, 프랑스 니스 시로부터 명예시민금장과 감사장을 받았다. 1987년에는 한독(韓獨)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1990년에는 스포츠조선을 창간했다. 1993년에는 형 방일영의 아들인 조카 방상훈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일보 회장이 되었다.[7] 1994년에는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1997년에는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에 각각 취임했다. 2003년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되었고, 2004년에는 방일영문화재단 이사를 맡았다.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기간 | 직책 | 소속/기관 |
---|---|---|
1964년 ~ 1993년 | 사장 | 조선일보 |
1980년 | 창간 | 월간조선 |
1981년 ~ | 초대 이사장 | 한국언론연구원 |
1981년 ~ | 동문회장 | 연세대학교 |
1987년 ~ | 회장 | 한독협회 |
1990년 | 창간 | 스포츠조선 |
1993년 ~ 2003년 | 회장 | 조선일보 |
1994년 ~ | 제3대 이사장 |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
1997년 ~ | 이사장 | 연세대학교 재단 |
2003년 ~ | 명예회장 | 조선일보 |
2004년 ~ | 이사 | 방일영문화재단 |
(시기 미상) | 부회장 | 한국신문인협회 |
(시기 미상) | 고문 | 한국신문인협회 |
(시기 미상) | 고문 | 조선일보사 |
5. 가계
1928년 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과 어머니 이성춘(李成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방일영이고, 둘째 형 방필영은 2세 때 병으로 사망했다. 호는 일민(逸民)이다. 제9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의 양손자이다. 본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손자이다. 양할아버지이자 종조할아버지인 방응모는 본 부인 승계도에게서 아들 둘을 얻었지만 요절했다. 방일영과 방우영 형제는 방응곤의 차남인 아버지 방재윤이 숙부 방응모의 양자로 가면서 방응모의 양손자가 되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방응모는 "일등인 형(일영)과 더불어 또 번영하라는 뜻에서 우영이라고 하자"며 손수 손자의 이름을 지었다.[3] 그러나 1940년 4월 아버지 방재윤이 정주군의 나무 심기 사업에 출장갔다가 병원에 입원, 이때 간호사가 잘못 놓은 주사를 맞고 사망하여 할아버지 방응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네 살 때 아이들과 놀다가 떨어져 다쳤는데, 이때 차를 타고 경성의전으로 가서 수술을 받고 살아났다.[4]
1940년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조선일보가 폐간당한 해 정주에서 조일심상 소학교를 졸업했다. 양할아버지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 가능동)로 이주한 뒤, 서울로 유학하여 경성 경신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상과를 졸업했다. 6.25 전쟁 당시 피난갔다가 다시 서울로 귀환했다.
1959년에 이선영과 결혼했는데, 이선영의 친정어머니가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의 딸이었다. 방응모와 문일평은 가깝게 지냈고, 문일평의 아들 중 한 명인 문동표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해서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9년 5월 15일 이선영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때 주례는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진오가 서고 송인상 재무부장관이 축사를 하였다.
관계 | 이름 | 생몰년 및 비고 |
---|---|---|
생조부 | 방응곤(方應坤) | 방응모의 친형 |
양조부 | 방응모(方應謨) | 1883년 ~ 1950년, 제9대 조선일보 사장 |
아버지 | 방재윤(方在允) | 1902년 ~ 1940년, 방응곤의 차남, 방응모의 양자 |
어머니 | 이성춘(李成春) | |
형 | 방일영(方一榮) |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 |
형수 | 박현숙(朴賢淑) | 기독교 집사 |
조카 | 방상훈(方相勳) | 기업인 겸 언론인[11] |
조카 | 방용훈(方容勳) | 1952년 ~ 2021년 |
형 | 방필영(方必榮) | 1924년 ~ 1926년 |
누나 | 방숙영 | ? ~ 1951년 1월 |
배우자 | 이선영 | 호암 문일평의 외손녀 |
장녀 | 방혜성 | 1960년생, 태평양학원 이사[12] |
첫째 사위 | 서영배(徐榮培) | 태평양개발 회장, 서성환 태평양그룹 회장의 아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형 |
차녀 | 방윤미 | |
삼녀 | 방혜신 | |
셋째 사위 | 정연욱(鄭然旭) | 경남에너지 부회장, 정재문의 아들 |
장남 | 방성훈(方聖勳) | 1973년 4월 3일생, 스포츠조선 대표이사[13] |
며느리 | 최강민 | 최창근 고려아연 회장 딸[14] |
숙부 | 방재선(方在善) | 1944년생 |
숙부 | 방재효(方在孝) | 1946년생 |
숙부 | 방재규(方在奎) | 1948년생 |
6. 평가
조선일보를 대한민국 1등 신문으로 성장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 과정에서 정·관·언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5] 1970년대부터 반공과 안보 제일주의를 조선일보의 주요 가치로 내세웠으며, 이러한 논조의 근원이 방우영 자신이라는 평가가 있다. 전 중앙정보부 언론담당관 박기식은 2001년 '민족21' 12월호 인터뷰에서, 1971년 대통령 선거 전 중앙정보부 상황실에서 북한 영상 속 김일성 주석을 향해 방우영이 심한 욕설을 했다고 증언하며 그의 강한 반공 성향을 뒷받침했다.[6]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보여주듯, 2006년 9월에는 선산에서 귀가하던 중 신원미상의 괴한 2명에게 벽돌로 차량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8] 이 사건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 소속 김기춘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북한 배후설을 제기하기도 했다.[9]
2008년 발간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는 “밤새 전쟁을 치르듯 만든 신문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이 우리 신문에 만족할지 언제나 가슴 떨렸다”고 술회하며[10] 언론 경영에 대한 중압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참조
[1]
뉴스
전두환·김영삼·이명박... 대통령들 총출동 방우영 "권력 바람 막고, 언론자유 지켜왔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8-01-23 # 기사 수정일을 date로 사용
[2]
뉴스인용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8일 오전 별세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6-05-08
[3]
뉴스
[新 한국의 가벌] #22. 윤보선·정몽준·홍정욱 등과 혼맥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15-04-16
[4]
서적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
뉴스인용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별세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6-05-08
[6]
뉴스
'밤의 대통령'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 사임
http://pressian.com/[...]
프레시안
[7]
뉴스인용
‘사학비리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있었네’ - “보수 교단과 언론 유착”...홍성태 교수, “시민사회가 개혁 나서야”
http://www.chammalo.[...]
참말로
2007-04-06
[8]
뉴스인용
본사 방우영 명예회장 탄 차량 괴한 2명에 대낮 피습 - ‘민족의 적’ ‘謹弔’ 적힌 벽돌로 공격후 도주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6-09-29
[9]
뉴스인용
<국감현장> "방우영 회장 피습 배후는 北"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6-10-17
[10]
뉴스인용
조선일보 방우영 상임고문 별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6-05-08
[11]
일반
[12]
뉴스
(대해부)조중동 사주와 박근혜 후보도 친인척
https://news.naver.c[...]
미디어오늘
2012-12-16
[13]
일반
[14]
뉴스인용
[新 한국의 가벌] #22. 윤보선·정몽준·홍정욱 등과 혼맥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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