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준
1. 개요
방한준은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그리고 한국 전쟁 시기를 거친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다. 선린상업학교와 일본 유학을 거쳐 1935년 《살수차》로 데뷔했다. 초기에는 사회 비판적인 영화와 문예 영화를 연출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1940년 조선영화령 공포 이후에는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영화동맹에서 활동했으며, 미군정 시기에는 공보부 영화과장으로 재직했다.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
안석주
안석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삽화가, 만화가, 영화감독, 작사가로, 미술, 영화, 문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시사만화 연재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우익 언론 활동, 〈우리의 소원〉 작사 등의 행적을 남겼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
나운규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영화감독이자 배우, 각본가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고취하며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으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중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건강 악화로 요절한 독립운동가이다. -
유효하지 않은 id가 지정된 IMDb -
호그와트 레거시
호그와트 레거시는 1890년대 호그와트를 배경으로 고대 마법을 다루는 5학년 학생이 되어 마법을 배우고 전투하며 고블린 반란 등 주요 사건을 겪는 3인칭 액션 롤플레잉 게임이다. -
유효하지 않은 id가 지정된 IMDb -
김여진
김여진은 1998년 영화 데뷔 후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고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배우이다. -
1906년 출생 -
이효상
이효상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시인, 교육자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교육계와 언론계에서 활동하다 4·19 혁명 후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3선 개헌 강행 처리와 유신 체제 지지 등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1906년 출생 -
호아킨 발라게르
호아킨 발라게르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정치인이자 작가로서, 라파엘 트루히요 정권에서 요직을 거쳐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장기간 집권하며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나 권위주의적인 통치와 인권 침해 논란에 휩싸였고,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2. 생애
방한준은 한성부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쇼치쿠키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감각이 뛰어나고 유행에 민감한 인물이었다고 하며, 백운행(白雲行) 또는 자운행(自雲行)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1935년 《살수차》로 데뷔했으나, 경성부의 암울한 현실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검열을 받았다. 이후 《성황당》(1939), 《한강》(1939) 등으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1940년 조선영화령 공포 이후 친일 성향의 영화를 제작했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승리의 뜰》(1940), 《풍년가》(1942), 《병정님》(1944), 《거경전》(1944) 등 국책 영화를 연출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영화인협회에 참가하여, 해방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영화동맹 중앙상임위원, 영화감독구락부 회원, 미군정 공보부 영화과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으며, 납북되어 자강도 만포시 수용소에서 병사했다는 증언이 있다.
2.1. 초기 활동 (1935년 ~ 1940년)
한성부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쇼치쿠키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본래 감각이 뛰어나고 유행에 민감한 인물이었다고 회고된다. 백운행(白雲行) 또는 자운행(自雲行)으로 기록된 다른 이름이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35년 《살수차》를 연출하여 데뷔했다. 시내에서 물을 뿌리는 청소 자동차를 소재로 다룬 《살수차》는 흑사병이 창궐하는 경성부 거리에 대한 암울한 현실 묘사가 사회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검열을 당했다.
이후 정비석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여 문학과 영화의 성공적인 접목을 선보였다는 평을 듣는 문예영화 《성황당》(1939)과 한강 나루터 뱃사공 부자 간의 세대 갈등을 서정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독특한 세미다큐멘터리적 수법으로 세련되게 그린 영화 《한강》(1939)으로 능력을 인정 받았다. 특히 《한강》은 1930년대 후반 한국 영화 전체의 흐름 변화를 대표할 만큼 카메라의 기교 대신 심리적인 효과에 치중하고 있는 점이 돋보이며, 일상적 삶에 대한 묘사를 통해 사회적 모순을 축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1940년 조선영화령이 공포되면서 영화에 대한 규제가 크게 강화되자, 방한준은 감각적이고 뛰어난 연출력으로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를 모으면서 주목받는 신인 감독이 되었으나 작품의 성향이 바뀌었다.
2.2. 친일 영화 제작 (1940년 ~ 1945년)
방한준은 1940년 조선영화령 공포로 영화 규제가 강화되자 작품 성향이 바뀌었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연출과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4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는 《승리의 뜰》(1940)을 시작으로 《풍년가》(1942), 《병정님》(1944), 《거경전》(1944) 등 모두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는 국책 영화였다.
조선총독부가 국책 영화 제작을 통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구성한 조선영화인협회에도 참가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3. 광복 이후 ~ 한국 전쟁 (1945년 ~ 1950년)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 중앙상임위원을 거쳐 안석주를 비롯한 우익 영화인들이 친목 모임으로 결성한 영화감독구락부에 가담했으나, 영화 연출작은 없다. 미군정 시기에 영화 부문을 관장하던 공보부 영화과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중 실종되어 종적을 알 수 없다.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쟁 중 자강도 만포시의 수용소에서 병사했다는 증언이 있다.
3. 평가
방한준은 뛰어난 감각과 유행에 민감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백운행(白雲行) 또는 자운행(自雲行)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정비석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성황당》(1939)은 문학과 영화의 성공적인 접목을 선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한강》(1939)은 한강 나루터 뱃사공 부자 간의 세대 갈등을 서정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독특한 세미다큐멘터리적 수법으로 세련되게 그려내어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한강》은 1930년대 후반 한국 영화 전체의 흐름 변화를 대표할 만큼 카메라 기교 대신 심리적인 효과에 치중하고 있으며, 일상적 삶에 대한 묘사를 통해 사회적 모순을 축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3.1. 부정적 평가
방한준은 감각적이고 뛰어난 연출력으로 주목받는 신인 감독이었으나, 1940년 조선영화령 공포 이후 작품 성향이 바뀌었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연출과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4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조선총독부의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는 《승리의 뜰》(1940), 농촌을 계몽하는 《풍년가》(1942) 등 모두 국책 영화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