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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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황당은 고대 중국의 성지 신앙에서 유래하여 한국에 유입된 민간 신앙으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을 의미한다. 고려 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설치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가 주도하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중기에 사림 세력의 영향으로 관 주도의 제사가 금지되면서 민간 신앙으로 변화했다. 성황당은 돌탑, 당집, 자연석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마을의 경계나 언덕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학자들은 성황당과 서낭당을 별개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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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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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신앙 대상물, 종교 시설 |
위치 | 한국 전역 |
관련 문화 | 한국 무속 |
명칭 | |
다른 이름 | 성황당 (城隍堂) |
로마자 표기 | Seonangdang |
특징 | |
설명 |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성역 주로 돌무더기, 신목, 장승 등의 형태로 나타남 |
신앙 |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 대상으로 숭배됨 무속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음 |
역할 |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고 보호함 외부의 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짐 |
관련 문화 | |
성황제 |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 의식 |
전승 | 한국의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전승됨 |
참고 | |
관련 항목 | 당산 장승 솟대 신목 한국 무속 |
2. 역사
성황(城隍중국어) 신앙은 중국에서 유래하여 한국으로 전래되었으며, 한국의 토착 신앙과 융합하여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성황당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위상이 변화해왔다.
성황당(rr|seonangdang한국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첫 번째 이론은 성황당이 한국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성황당은 마을 간 경계 표지에서 시작되어 경계신을 모시는 곳으로 발전했으며, 원삼국 시대의 소도와 동일시된다. 다른 학자들은 성황당이 산신에게 제단을 바치는 것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이론은 성황당이 몽골 석탑인 Ovoo의 한국적 변형이라는 것이다. 몽골의 Ovoo 숭배는 돌로 만들어졌고 여행자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성황당 숭배와 매우 유사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성황당 신앙은 13세기 고려에 대한 몽골의 침략 이후에 생겨났다. 그러나 그 이전의 성황당에 대한 기록도 존재한다.[1]
성황신은 상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신이었으며, 조선 왕조 시대에도 존경받았다. 조선 정부는 성황신을 국가 수호신인 공식적인 국행 성황과 마을 수호신인 사적인 성황으로 나누었다.
조선 태조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후, 한반도 전역의 성황당에서 의례를 거행했다. 조선 태종은 백악과 송악의 성황당을 숭배했다.[2]
2. 1. 기원과 초기 형태
고대 중국에서는 성을 수호한다는 성지(城池) 신앙이 있었는데, 이것이 남북조 시대 이후 '성황'으로 변하여 일반화되었고 송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다. 한국에는 중국으로부터 성황 신앙이 유입되었는데, 이때 한국 본래의 산신 신앙이나 노신 숭배를 포함한 여러 민간 신앙을 포괄하게 되었다.[1] 문헌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사》에 고려 문종 때 선덕진에 쌓은 새 성 안에 성황사를 지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다. 고려 때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올리는 사당으로서, 고려 고종은 몽골 제국의 침공을 막은 공을 성황신에게 돌려 신호(神號)를 더하기도 하였다.성황당은 주로 국가에서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나,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호족 집안의 시조 및 그 땅에 연고가 있는 위인들이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셔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곡성성황신 신숭겸, 순천부성황신 김총(金摠), 의성부성황신 김홍술(金洪術)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유금필을 가림성황신으로 모신 사례도 있다.
조선 시대에는 산천, 성황, 풍운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던 단들을 하나의 성황당으로 통합하여 재배치하고, 군현마다 사직단과 여단(厲檀)을 일괄적으로 설치하여 봄과 가을로 국가가 주도하여 정기적으로 수령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국난이나 가뭄이 닥쳤을 때 임시로 성황제를 지내기도 했다. 국가 제도로 편입되면서 각종 제사 제단의 서열이 정해지고, 당의 규모, 제사 의식, 신위의 크기와 형태, 제복과 제기 등이 상세히 규정되었다. 지정된 성황당은 관리인이 임명되었고, 그에게는 조세와 병역을 면제하였다.
태종 13년 예조에서는 고려조의 전국 산천에 작호를 내리고 처첩, 자녀, 생질의 상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것이 번거롭다고 보고하였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며 예조에서 각 성황지신의 작호를 없애고, '무슨 고을의 성황지신'이라 부르게 하도록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그러나 해당 기관에서 고치지 않아 작호와 신주 모양이 예전 그대로인 채로 음사가 행해지니, 태조의 교지를 거듭 밝혀 '무슨 고을의 성황지신'이라 부르고 신주도 1위만 남겨 처첩 등의 신은 모두 버리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산천과 바다의 신 역시 주신 1위만 남겨두고 나무판에 '무슨 바다, 무슨 산천의 신'이라 쓰고 신상은 모두 없애 제사법을 바로잡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신라 때부터 전해온 오악의 산신을 제외한 산신에 제사 지내는 신당은 낮은 등급의 신당으로 분류되어 관리되었다. 단군과 기자의 사당도 이 규제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 왕조와 관련 있는 지역인 전주와 영흥은 국가에서 특별 대우하였다.
정종 이후 각 군현의 성황당은 관아에 소속된 제사 시설로 자리 잡았으며, 지방관들은 부임한 뒤 성황사에 빠짐없이 들러 예를 올려야 했다. 새로 부임한 관리들은 이런 제사를 주관하면서 지역민의 정신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성황당의 성격은 크게 변화하였는데, 이는 지방 유력자들, 특히 성리학만을 정도로 받들며 그 외의 가르침을 사도(邪道)로 몰았던 사림 세력이 장악하게 되면서 성황당에 대해서도 음사(淫祀)로 보았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성황당에서의 관 차원에서의 제사를 금지하게 되면서 성황제의 성격도 관헌적인 것에서 민간적인 것으로 바뀌었음을 《영가지》나 《임영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2.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는 국가에서 공적으로 성황당에 제사를 올렸다.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에 나타난다. 문종 때 선덕진에 쌓은 새로운 성 안에 성황사를 지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1] 고종은 몽골의 침공을 막은 공을 성황신에게 돌려, 성황신에게 신호(神號)를 더하기도 하였다.성황당은 주로 국가에서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나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호족 집안의 시조 및 그 땅에 연고가 있는 위인들이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셔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곡성성황신 신숭겸, 순천부성황신 김총(金摠), 의성부성황신 김홍술(金洪術) 등이 그 예이다. 유금필을 가림성황신으로 모신 사례도 있다.
고려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성황당은 전주에 있었다.[1] 고려 고종은 몽골 제국이 고려에 대한 몽골의 침략에서 여러 차례 패배한 것은 성황신이 한국인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2. 3.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산천, 성황, 풍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단을 하나로 합쳐 성황당으로 재배치하였다. 군현마다 사직단과 여단(厲檀)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국가 주도로 수령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고,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는 임시로 성황제를 지내기도 했다.[1] 국가 제도로 편입되면서 제사 의식, 신위, 제복, 제기 등이 자세히 규정되었고, 지정된 성황당에는 관리인을 임명하여 조세와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태종 13년, 예조에서는 고려 시대의 번거로운 제사 방식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각 산천에 작호를 내리고 처첩, 자녀, 생질의 상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것을 없애고, '무슨 고을의 성황지신'이라 부르며 신주도 하나만 남기도록 하였다. 산천과 바다의 신 역시 주신 하나만 남기고 신상은 모두 없애 제사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2] 신라 때부터 내려온 오악의 산신을 제외한 산신 제사 신당은 낮은 등급으로 관리되었고, 단군과 기자의 사당도 이러한 규제를 받았다. 그러나 전주와 영흥은 조선 왕조와 관련이 있어 국가에서 특별히 대우하였다.
정종 이후 성황당은 관아 소속 제사 시설로 자리 잡았고, 지방관들은 부임한 뒤 성황사에 예를 올려야 했다. 이를 통해 지역민의 정신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조선 중기에는 지방 유력자, 특히 사림 세력이 성황당을 음사(淫祀)로 보면서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조정에서 관 차원의 제사를 금지하면서 성황제는 민간적인 것으로 바뀌었다.[1]
3. 형태
성황당은 마을 근처의 언덕이나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1.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큰 나무(신목(神木)) 옆이나 주변에 돌탑이 있는 형태이다. 이곳에서 굿(무속 의례)이 거행되기도 했다.[2]
2. 나무 없이 돌탑만 있는 형태도 있다. 이는 신목이 있는 성황당의 변형된 형태로, 돌탑이 나무보다 먼저 발달한 것으로 여겨진다.
3. 돌탑 없이 성황신의 집 역할을 하는 성황나무만 있는 형태도 있다. 이 나무는 흰색 또는 오방색(빨강, 노랑, 흰색, 파랑, 녹색) 비단 조각으로 장식되었으며, 각 조각은 사방을 나타낸다. 성황나무는 신목과 동일하게 간주된다.
4. 강원도에서 널리 퍼져 있던 형태로, 돌탑 없이 실제 집(당집)이 성황신의 거처로 여겨졌다. 당집은 전통적으로 기와지붕을 얹은 나무로 지어졌으며,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 여기에 성황신이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1]
5. 남쪽 지역의 형태는 수직으로 세워진 자연석으로, 높이 2m, 너비 120cm에 달했다.[2]
일부 학자에 의하면 성황당과 서낭당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시는 돌무더기인 서낭당은 마을 입구나 고갯길, 동네 어귀, 길섶이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거나 노거수 옆에 있으며, 돌무더기에는 금줄이나 종이띠가 둘러쳐져 있고 더러 솟대나 간짓대가 꽂혀 있다. 이는 행인들의 여행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노신 신앙과 관련되어 보인다.[5] 성황은 마을 전체가 치성을 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곳임에 비해, 서낭은 행인의 안전 통행을 기원하는 대상이라는 점도 다르다.
4. 서낭당과의 관계
일부 학자에 의하면 성황당과 서낭당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시는 돌무더기인 서낭당은 마을 입구나 고갯길, 동네 어귀, 길섶이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거나 노거수 옆에 있고, 돌무더기에는 금줄이나 종이띠가 둘러쳐져 있으며 더러 솟대나 간짓대가 꽂혀 있는데, 행인들의 여행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노신 신앙과 관련되어 보인다.[5] 또한 성황은 마을 전체가 치성을 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곳임에 비해, 서낭은 행인의 안전 통행을 기원하는 대상이 된다.
참조
[1]
웹사이트
서낭당
http://terms.naver.c[...]
[2]
웹사이트
서낭당
http://terms.naver.c[...]
[3]
웹사이트
서낭당 - 한국민속신앙사전
https://folkency.nfm[...]
[4]
웹사이트
제112호 다시보는 우리문화 : 서낭당
http://webzine.daeso[...]
[5]
서적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
사계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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