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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켈라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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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켈라이 전투는 기원전 101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킴브리족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게르만족의 로마 세력권 침입에 대한 일련의 전쟁 중 하나로,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테우토네스족을 격파한 직후에 벌어졌다. 전투 결과 킴브리족은 사실상 전멸했으며, 마리우스는 로마의 북부 국경에 대한 게르만족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카툴루스의 공적을 두고 의견 차이가 발생했으며, 마리우스는 이탈리아 동맹군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여 정치적 갈등을 야기했다. 이 전투는 마리우스의 권력을 강화했지만, 술라와의 경쟁을 심화시켜 로마 공화정 내전의 씨앗을 뿌리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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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켈라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베르켈라이 전투
분쟁킴브리 전쟁 및 로마-게르만 전쟁
시기기원전 101년 7월 30일
장소키살피나 갈리아 베르켈라이 (현재 북부 이탈리아)
결과로마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킴브리족
교전 2로마 공화국
지휘관 및 지도자
킴브리족 지휘관보이오릭스
루기우스
클라우디쿠스
카에소릭스
로마 공화국 지휘관가이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전력
킴브리족 전력전사 120,000–180,000명 (기병 15,000명 포함), 민간인 400,000명 포함
로마 공화국 전력군인 52,000–54,000명 (군단병 및 보조병)
피해 규모
킴브리족 피해사망 160,000명 (리비우스)
포로 60,000명
로마 공화국 피해사망 1,000명
기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베르켈라이 전투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베르켈라이 전투"

2. 배경

기원전 113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게르만족-켈트족 동맹이 로마의 세력권에 진입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들은 로마의 동맹국인 타우리시족이 거주하던 노리쿰을 침공했다. 로마 원로원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노리쿰으로 파견했지만, 노레이아 전투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에게 참패를 당했다.[5]

이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갈리아로 이동하여 로마 속주를 위협했다. 기원전 109년에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파견되었으나 아라우시오 인근에서 패배했고,[6] 기원전 107년에는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부르디갈라 전투에서 패배했다.[7] 기원전 105년에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에피오와 그나이우스 마일리우스 막시무스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로마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8]

이러한 상황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등장하여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게르만족에 맞섰다.[8] 그는 볼카이 텍토사게스족을 제압하고, 술라를 통해 게르만 마르시족을 로마 동맹으로 만드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9][10] 기원전 102년, 마리우스는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을 격파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12]

기원전 101년, 포 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던 킴브리족은 플라켄티아 근처에서 마리우스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연합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마리우스는 킴브리족과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렬되었고, 결국 베르켈라이 근처의 라우디네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로 합의했다.[13]

2. 1.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이동

기원전 113년, 게르만족켈트족의 연합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로마의 세력권에 진입했다. 이들은 노리쿰을 침공했고, 로마는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보내 대응했으나 노레이아 전투에서 대패했다.[5] 이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서쪽의 갈리아로 이동하여 로도누스 강을 따라 로마 속주인 알프스 횡단 갈리아로 이동했다. 기원전 109년,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게르만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아라우시오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6]

기원전 107년,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톨로사 외곽에서 킴브리족과 볼카이 텍토사게스족을 격파했지만, 부르디갈라 전투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패배하면서 게르만족의 위협은 계속되었다.[7] 기원전 105년,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에피오와 그나이우스 마일리우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킴브리족에게 대패를 당했다. 이 전투는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가 겪은 가장 큰 패배로 여겨졌다.[8]

2. 2.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등장

기원전 104년,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게르만족에 대응하게 했다. 마리우스는 이전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의 대패를 극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8] 그는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장군으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게르만족을 상대했다.[9]

마리우스는 볼카이 텍토사게스족을 제압하고 그들의 왕 코필루스를 사로잡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9] 기원전 103년에는 그의 부관 술라가 게르만 마르시족을 설득하여 로마의 동맹으로 만들었다.[10] 기원전 102년, 마리우스는 알프스 횡단 갈리아의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을 격파했다.[12] 한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트리덴툼 전투에서 킴브리족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며 퇴각했다.[11]

3. 전투 전개

기원전 101년, 킴브리족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가이우스 마리우스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 연합군은 포 강 근처에 방어선을 구축했다.[17] 킴브리족이 접근하지 않자 마리우스는 강을 건너 그들에게 접근했고, 킴브리족 사절들과 협상을 벌였다. 킴브리족은 정착할 땅을 요구했지만, 마리우스는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이 이미 로마에 의해 격파되었음을 알리며 거절했다. 그는 포로로 잡힌 테우토보드를 포함한 테우톤족 왕들을 보여주며 킴브리족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18][19]

킴브리족 왕 보이오릭스는 사절들로부터 동맹군의 운명을 전해 듣고, 로마군과의 빠른 결전을 원했다.[20] 그는 마리우스를 만나 전투를 제안했고, 마리우스는 로마의 관례와 다르게 이를 수락하여 라우디아 평원(베르켈라이)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21]

전투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전투 장소를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주의 현대 베르첼리 또는 그 인근으로 추정한다.
  • 일부 역사가들은[22] "베르켈라이(vercellae)"가 고유명사가 아니며 두 강이 합류하는 어떤 채굴 지역을 지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킴브리족이 브레너 고개를 건넌 후 아디제 강을 따라갔다고 생각하여, 현대 로비고 인근, 즉 현대 폴레시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세시아 강 근처 보르고 베르첼리에서, 베르첼리에서 5km 떨어진 곳에서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쿠네오 현의 로디 촌락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23]

3. 1. 협상 결렬

기원전 101년, 킴브리족은 포 강을 따라 이동하며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협상을 시도했다.[17] 킴브리족은 정착할 땅을 요구했으나,[18] 마리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포로로 잡은 테우토네스족 왕들을 보여주며 킴브리족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19] 마리우스는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히 가질 것이오. 우리가 그들에게 준 땅이오."라고 말했다.[18]

마리우스는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을 인용하여, 킴브리족에게 "형제(테우토네스족)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시오.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준 땅에 살 것이오"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테우토네스족이 멸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킴브리족 왕 보이오릭스는 마리우스에게 결전을 제안했다.[20] 보이오릭스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마리우스의 진영을 방문하여 결투 형식의 합전을 제안했고, 로마의 관례에는 없었지만 마리우스는 이를 받아들여 베르켈라이 평원에서 3일 후에 만나자고 했다.[21]

3. 2. 전투

101년 7월 30일, 로마 군대는 라우디네 평원으로 진군했다. 마리우스는 약 52,000명의 병력을 이끌었고, 킴브리족은 120,000~180,000명으로 추정된다.[24] 마리우스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양익에 배치하고, 카툴루스의 경험이 적은 20,000~24,000명의 병력은 중앙에 배치했다.[24] 술라는 우익 기병대를 지휘했다. 로마군은 서쪽을 등지고 진을 쳐서 킴브리족이 아침 햇빛을 정면으로 받도록 했으며, 바람을 이용해 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방해했다.[25]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신들에게 마지막 제물을 바쳤다. 마리우스는 손을 씻고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승리하면 100마리의 짐승을 희생하겠다고 맹세했고, 카툴루스는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날의 전리품을 신들에게 약속했다.[26]

로마군은 먼저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아, 태양은 그들의 청동 투구에 반사되었다.[27] 킴브리족은 로마군에게 다가가느라 추가적인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27] 태양이 로마 군인들의 투구에 계속 반사되면서 킴브리족에게 하늘이 불타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불안하게 만들었고, 로마군은 이를 감지하고 공격을 시작했다.[28]

킴브리족은 카툴루스의 중앙을 향해 쐐기 형태로 돌격했고, 기병대가 선두에 섰다. 킴브리 기병대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돌아서 로마군을 대열에서 끌어내거나 측면을 공격하려 했다.[26] 일부 군단병들은 그 계략에 넘어가 킴브리 기병대를 추격했고, 그동안 킴브리족의 다른 부대가 진격하여 취약하고 무질서한 로마군을 공격했다.[26] 킴브리 기병대는 술라가 이끄는 로마 기병대에 기습당했고, 킴브리 말들은 보병대 본대로 밀려나 혼란을 야기했다. 카툴루스는 군단에 진격 명령을 내려 킴브리족의 무질서한 대열에 필룸을 던지고 백병전을 벌였다. 로마군 다른 부대들은 킴브리족의 측면으로 이동하여 포위했다.[30]

로마군은 훈련과 규율, 근접전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킴브리족을 압도했다. 여름 더위 또한 로마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전투는 킴브리족의 대패로 이어졌고, 후방의 수레가 퇴로를 막아 학살로 변했다. 보이오릭스와 귀족들은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 로마군은 완전하고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30]

콜린 매컬로는 소설 로마의 첫 번째 남자에서 이 전투를 자세히 묘사했다.

긴 싸움 끝에 보이오릭스 왕이 전사하자 킴브리 군은 붕괴되었고, 로마군의 추격으로 괴멸했다.

4. 전투의 결과

베르켈라이 전투의 승리는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마리우스가 테우토네스를 격파한 직후에 이루어져 로마의 북부 국경에 대한 게르만족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킴브리족은 사실상 전멸했고, 마리우스는 10만 명의 전사를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수의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포로들의 자녀들은 제3차 노예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 중 일부였을 수 있다.[31]

베르켈라이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소식은 마리우스의 처남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에 의해 로마로 전해졌고, 그는 이듬해에 외아들을 낳게 된다.[32]

마리우스와 카툴루스는 누가 가장 큰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 곧 의견 불일치를 보였다.[33] 마리우스는 총사령관으로서 승리에 대한 모든 공을 차지하려고 했지만, 카툴루스는 인근 파르마의 시민들을 전장으로 데려가 킴브리족의 시신들을 보여주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그들을 죽인 필룸이 시신에 박힌 채였고, 이러한 필룸(pila)의 대부분은 카툴루스의 군단의 표시를 가지고 있었다.[34]

결국 마리우스와 카툴루스는 공동 개선식을 거행했고, 마리우스는 총사령관으로서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다.[34]

4. 1. 로마의 승리와 마리우스의 영광

베르켈라이 전투의 승리는 전년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마리우스가 테우토네스를 격파한 직후에 이루어져 로마의 북부 국경에 대한 게르만족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킴브리족은 사실상 전멸했고, 마리우스는 10만 명의 전사를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수의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포로들의 자녀들은 제3차 노예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 중 일부였을 수 있다.[31]

베르켈라이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소식은 마리우스의 처남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에 의해 로마로 전해졌고, 그는 이듬해에 외아들을 낳게 된다.[32]

마리우스와 카툴루스는 누가 가장 큰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 곧 의견 불일치를 보였다.[33] 마리우스는 총사령관으로서 승리에 대한 모든 공을 차지하려고 했지만, 카툴루스는 인근 파르마의 시민들을 전장으로 데려가 킴브리족의 시신들을 보여주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그들을 죽인 필룸이 시신에 박힌 채였고, 이러한 필룸(pila)의 대부분은 카툴루스의 군단의 표시를 가지고 있었다.[34]

결국 마리우스와 카툴루스는 공동 개선식을 거행했고, 마리우스는 총사령관으로서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다.[34]

정치적으로 이 전투는 로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르만족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마리우스의 잇따른 집정관직(기원전 104년-기원전 101년)의 주요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리우스는 베르켈라이 승리 이후 인기에 힘입어 다시 집정관(기원전 100년)으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이를 이용했다. 또한 전쟁의 종식은 마리우스와 술라 사이에 점차 커지는 경쟁의 시작을 알렸고, 결국 로마의 첫 번째 내전으로 이어졌다. 베르켈라이 승리에서의 그의 역할로 인해 술라의 위신은 상당히 높아졌다. 마리우스의 경력은 절정에 달했지만, 술라의 경력은 아직 상승세였다.

전투 직후 마리우스는 원로원과 상의하거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이탈리아 동맹군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일부 원로원 의원들이 이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전투의 열기 속에서 로마인의 목소리와 동맹국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날부터 모든 이탈리아 군단은 로마 군단으로 간주되었다.[1]

마리우스의 이러한 행동은 승리한 장군이 처음으로 원로원에 공개적으로 반항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기원전 88년, 술라는 원로원과 전통 모두를 무시하고 자신의 군대를 로마 시로 이끌었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원로원으로부터 불법 행위에 대한 혐의를 받기 위해 지휘권을 내려놓고 로마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대신 기원전 49년에 자신의 군단 중 하나를 루비콘 강을 건너게 했다. 이는 그와 폼페이우스 휘하의 원로원 세력 간의 내전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로마 공화국의 종말로 이어졌다.

로마군에게 멸망한 킴브리족.
프랑스 화가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드캉의 《킴브리족의 패배》(«''La défaite des Cimbres''» by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드캉)


정쟁 격화와 경제적 혼란으로 대외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로마 공화국은 일정한 안정을 얻게 되었고, 마리우스는 구국의 영웅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승리의 요인이 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동맹 시민과 로마 시민의 대우 차이를 둘러싼 정쟁에 불을 지르는 결과가 되었고, 이른바 동맹시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4. 2. 정치적 영향

베르켈라이 전투의 승리는 로마에 큰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로 게르만족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마리우스가 연속으로 집정관직을 맡을 명분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마리우스는 베르켈라이 승리 후 인기에 힘입어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은 이를 문제 삼았다.[1]

또한, 이 전투는 마리우스와 술라 사이의 경쟁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술라의 역할이 커지면서 그의 위신이 높아졌고, 이는 결국 로마의 첫 번째 내전으로 이어졌다.[1]

전투 직후,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동의 없이 이탈리아 동맹군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에 대해 일부 원로원 의원들이 항의하자, 마리우스는 전투 중에 로마인과 동맹군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승리한 장군이 원로원에 공개적으로 반항한 첫 사례였으며, 이후 술라카이사르도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된다.[1]

마리우스의 이러한 행동은 동맹시 전쟁의 계기가 되었으며, 로마 공화정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5. 전투의 의의 및 평가

베르켈라이 전투는 군사적, 역사적 측면 모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군사적으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효과와 로마 군단병의 우수성을 입증한 전투였다. 로마군의 전략과 전술은 킴브리족의 수적 우세를 무력화했다.

역사적으로 로마 공화정은 이 전투의 승리로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 승리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한 로마 시민과 동맹 시민 간의 대우 차이를 둘러싼 정쟁을 격화시켜 동맹시 전쟁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1]

5. 1. 군사적 측면

베르켈라이 전투는 로마 군단병의 우수성과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효과를 입증한 전투였다. 로마군의 전략적 배치와 전술적 운용은 킴브리족의 수적 우위를 무력화시켰다.[1]

5. 2. 역사적 측면



로마 공화국은 베르켈라이 전투의 승리로 정쟁 격화와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대외 전쟁 패배의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았다. 이 승리로 마리우스는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승리의 요인이었던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로마 시민과 동맹 시민 간의 대우 차이를 둘러싼 정쟁을 격화시켜 동맹시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1]

6. 전투지에 대한 논란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전투 장소를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주의 현대 베르첼리 또는 그 인근으로 추정한다. 일부 역사가들은[22] "베르켈라이(vercellae)"가 고유명사가 아니며 두 강이 합류하는 어떤 채굴 지역을 지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역사가들은 킴브리족이 "비합리적으로" 현대 베르첼리로 서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고 브레너 고개를 건넌 후 아디제 강을 따라갔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전투 장소는 현대 로비고 인근, 즉 현대 폴레시네가 될 수 있다. 세시아 강 근처 보르고 베르첼리에서, 베르첼리에서 5km 떨어진 곳에서, 전통을 강화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 다른 제안된 위치는 현재 쿠네오 현의 로디 촌락, 피에몬테이다.[23]

전투가 벌어진 지역에 관해서는 고고학 분야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7. 대중문화 속의 베르켈라이 전투

콜린 매컬로의 소설 《로마의 첫 번째 남자》에서 베르켈라이 전투가 상세하게 묘사되었다.[1]

참조

[1]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2] 서적 Gaius Marius
[3] 웹사이트 Catulus
[4] 웹사이트 Cimbri & Teutones http://www.historyfi[...] Kessler Associates 2016-05-18
[5]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6]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7]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8]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9]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10]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11]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12]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13]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14]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15] 서적 Sertorius and the Struggle for Spain
[16] 서적 Gaius Marius
[17] 서적 Life of Marius
[18] 문서 referring to the Ambronic and Teutonic dead he had left at Aquae Sextiae
[19] 서적 Life of Marius
[20] 서적 Life of Marius
[21] 서적 Life of Marius
[22] 서적 La battaglia dei Vercelli o dei Campi Raudii (101 a. C.) Athenaeum cremonense
[23] 문서 Descriptive material in the Ethnological Museum of the Castle of Grinzane Cavour
[24] 서적 Life of Marius
[25] 서적 Gaius Marius
[26] 서적 Life of Marius
[27] 서적 Life of Marius
[28] 서적 Epitome of Roman History
[29] 문서 This could be a fabricated tale which Sulla and/or Catulus later spread to downgrade Marius' contribution in achieving victory.
[30]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31] 서적 The Spartacus War
[32]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33] 서적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34] 서적 Cataclysm 90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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