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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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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나 기원전 44년에 암살된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 작가이다. 그는 율리아 가문 출신으로, 로마 공화정 말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종신 독재관에 올랐지만, 공화정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그의 업적은 로마의 정치, 군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갈리아 전기'와 같은 저서를 통해 웅변가이자 작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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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자 표기Gaius Iulius Caesar
다른 이름카이사르
출생일기원전 100년 7월 12일
출생지수부라, 로마
사망일기원전 44년 3월 15일
사망지폼페이우스 극장, 로마
사망 원인암살 (자상)
직업정치인
군인
작가
별칭디부스 율리우스
출신 계급파트리키
가족카이사르 가문
씨족율리우스 씨족
종교로마 다신교
칭호영구 독재관
라틴어 이름C. Iulius C. f. C. n. Caesar
활동 시기기원전 81년–45년
경력
신관유피테르 신관? (기원전 87년-82년?)
레가투스기원전 73년-72년
신기관기원전 73년-44년
트리부누스 밀리툼기원전 71년
재무관기원전 69년
안찰관기원전 65년
최고 신기관기원전 63년-44년
법무관기원전 62년
집정관기원전 59년
아우구르기원전 47년-44년
프로콘술기원전 58-49년
독재관기원전 46년
종신 독재관기원전 45년-44년
속주 총독히스파니아 (기원전 61년)
갈리아 (기원전 58년)
최고 신관기원전 63년 ~ 기원전 44년
집정관기원전 59년
기원전 48년
기원전 46년 ~ 44년
프로콘술 (갈리아, 일리리쿰)기원전 58년~49년
독재관기원전 49년 ~ 44년
영구 독재관기원전 44년
군사 경력
소속로마군
충성로마 공화국
지휘제13군단
참전미틸레네 공방전
갈리아 전쟁
브리타니아 침공
카이사르의 내전
알렉산드리아 전쟁
개인 정보
배우자코르넬리아 (기원전 84년 결혼, 기원전 69년 사망)
폼페이아 (기원전 67년 결혼, 기원전 61년 이혼)
칼푸르니아 (기원전 59년 결혼)
파트너클레오파트라
자녀율리아
카이사리온 (사생아)
옥타비아누스 (입양)
부모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렐리아
수상시민 관
작품
주요 작품Bellum Gallicum (갈리아 전쟁)
Bellum Civile (내전)
정치 성향
정당포풀라레스
어록
주요 어록alea jacta est
veni, vidi, vici
et tu, Brute?

2. 생애

가이우스 마리우스: 카이사르의 삼촌이자 이모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함께 술라의 반대파로 활동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의 귀족 가문인 gens 율리아la에서 태어났다.[5] 그의 가문은 로마의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알바 롱가를 파괴한 후 로마로 이주해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이자 알바 롱가의 창시자인 율루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아이네이아스가 베누스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가문은 신성한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율리우스 씨족은 로물루스가 숨었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백성을 설득했다는 전설이 있으며[134], 호라티우스 삼형제의 결투에서 알바 롱가를 승리한 후, 세르빌리우스 씨족이나 퀸크티우스 씨족 등과 함께 이주해 온 귀족 가문이었다.[135]

카이사르 가문은 오래된 혈통을 가진 귀족이었지만, 두 계통으로 나뉘었고, 카이사르의 직계 조상 중 집정관 경험자는 없었다. 당시 세력을 키우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탁하여 지위 향상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이기도 했던 율리아의 추도 연설에서 "율리우스 씨족은 아에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서 유래하며, 따라서 여신 비너스의 후손이며, 또한 카이사르의 외가는 안쿠스 마르키우스(로마 왕정 제4대 왕)에 이어지는 가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136]

카이사르가 전장에서 주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데나리우스 은화. 코끼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카이사르"라는 가족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137]에 따르면, 초대 카이사르는 어머니의 자궁을 찢었기(caeso) 때문에 그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138]
  • 『로마 황제 군상』에서는 다음의 네 가지가 제시되고 있다.[139]
  • 전쟁에서 코끼리(마우레타니아인의 말, 아마 페니키아어로 caesai|카이사이ph)를 죽였다는 설
  • 어머니의 죽음 후, 절개하여 태어났다는 설(위 참조)
  • 처음으로 카이사르 성을 사용한 인물의 머리털이 무성했기 때문이라는 설(caesaries|카이사리에스la)
  • 회색 눈(oculis caesiis|오쿨리스 카이시이스la)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카이사르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스베토니우스의 『황제전』에 따른 기원전 100년[140] 설과, 카이사르가 프라이토르(법무관, 취임 자격이 만 40세 이상)에 취임한 기원전 62년으로부터 역산한 기원전 102년 설이 있다.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아버지 가이우스의 처남이었다. 아버지 가이우스는 프라이토르를 지낸 후 아시아 속주속주 총독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콧타의 딸인 아우렐리아로, 여러 명의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카이사르는 어릴 적부터 갈리아 출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구니포를 가정교사로 두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으로 처음 등장했을 무렵 "빚쟁이"나 "대머리 바람둥이"와 같은 평판을 받았다. 기원전 61년 봄, 히스파니아로 가기 전, 최대 채권자 크라수스에게 채무 보증을 받고서야 간신히 임지로 출발할 수 있었다.[184]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서 현지 부족으로부터 돈을 갈취하거나, 갈리아에서 신전이나 성역에 있던 보석류를 강탈하는 등 돈을 목적으로 도시를 파괴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로마에서도 카피톨리움 신전에 봉납되어 있던 금괴를 훔쳤다[185]거나, 내전 중에는 호민관의 제지를 무시하고 신전의 재물을 강탈했다고 전해진다.[186]

카이사르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지만, 당시 미남의 조건인 "'''날씬하고, 여자와 착각할 정도의 미남'''"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또한, 머리숱이 적다는 점을 정적에게 공격받았기 때문에, 대머리 부분을 가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내전을 종식시킨 공적을 인정받아 언제 어디서든 월계관을 쓸 수 있는 특권을 받았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카이사르가 앞머리의 숱이 적은 것을 감추기 위해 사용했던 헤어스타일은 시저컷이라고 불리며,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전형적인 남성 헤어스타일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간질 증상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187]

살루스티우스는 『카티리나의 음모』에서 카이사르와 젊은 카토를 나이, 웅변, 정신성, 영광 등이 거의 대등한 인물로 비교하고 있으며, 카이사르는 그 자비와 관대함으로 칭찬받았고, 친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며, 막대한 군공을 세울 수 있는 전쟁을 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2. 1. 유년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의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씨족에서 태어났다.[5] 율리우스 씨족은 전설적인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했으며, 베누스 여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197]

카이사르의 코그노멘(가문 이름)인 '카이사르(Caesar)'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궁에서 잘라온(ab utero caeso)'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다고 주장했다.[198] 반면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caesaries''la)이나 밝은 회색 눈(''oculis caesiis''la) 때문이라거나,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코끼리(무어말 ''caesai'')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199] 카이사르는 코끼리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는데, 이는 그가 코끼리와 관련된 어원 해석을 선호했음을 암시한다.[200]

카이사르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100년이라는 설과[140] 기원전 102년이라는 설이 있다. 카이사르의 생일은 7월 12일 또는 13일로 추정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고, 어머니는 아우렐리아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카이사르 아버지의 처남이었다. 카이사르는 어린 시절 갈리아 출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구니포를 가정교사로 두었다.

카이사르의 가문은 로마의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시대에 로마로 이주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당대에 큰 정치적 영향력은 없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기원전 88년,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일으키자, 로마에서는 술라마리우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고 원정을 떠난 사이, 킨나가 마리우스를 불러들여 로마를 장악하고 술라파를 숙청했다.[143]

기원전 84년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기원전 83년 카이사르는 플라멘 디알리스(유피테르 고위 사제)로 선출되었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여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145]

그러나 술라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82년 독재관에 취임하면서, 카이사르는 민중파로 몰려 숙청될 위기에 처했다.[147]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할 것을 강요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했다.[8] 결국 카이사르는 사제직을 사임하는 조건으로 아내와 재산은 유지하는 타협을 이끌어냈다.[9][10]

2. 1. 1. 죽은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설

대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했다.[202] 그러나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카이사르를 낳고도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 1. 2. 민중파 로마 정계 가문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197] 그의 코그노멘(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도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인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크게 4가지 설이 있다. 대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사람이 있어서 ‘자궁에서 잘라온(ab utero caeso)’이란 뜻으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했다.[198]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caesaries''la)이나 밝은 회색 눈(''oculis caesiis''la)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 ''caesai'')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199]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200]

한편 카이사르 자신이 제왕 절개 수술로 태어났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적어도 서기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01]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전에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시대에 제왕 절개 수술은 오직 죽은 여자에게만 실시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는 그를 낳고도 장수하였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귀족 가문인 gens 율리아la에서 태어났다.[5] 그의 가문은 기원전 7세기에 세 번째 로마의 왕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알바 롱가를 함락하고 파괴한 후 로마로 이주해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이자 알바 롱가의 창시자인 율루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네이아스가 비너스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가문은 신성한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율리우스 씨족은 로마 왕정 시대, 로물루스가 숨었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백성을 프로클루스 율리우스가 설득했다는 전설이 있으며[134], 호라티우스 삼형제의 결투에서 알바 롱가를 승리한 후, 세르빌리우스 씨족이나 퀸크티우스 씨족 등과 함께 이주해 온 알바의 원 지도층으로, 파트리키(귀족)에 속했다고 한다[135].

씨족은 오래된 혈통을 가진 파트리키였지만, 카이사르 가문은 두 계통으로 나뉘었고, 카이사르의 직계 조상 중 집정관 경험자는 없었다. 당시 세력을 키우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탁하여 지위 향상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이기도 했던 율리아의 추도 연설에서 "율리우스 씨족은 아에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서 유래하며, 따라서 여신 비너스의 후손이며, 또한 카이사르의 외가는 안쿠스 마르키우스(로마 왕정 제4대 왕)에 이어지는 가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136]

고대의 혈통에도 불구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당대에 특별히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지는 않았다. '카이사르'라는 코그노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람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기원전 208년의 법무관이었다. 이 가문의 첫 번째 집정관은 기원전 157년이었지만, 1세기 초에 정치적 운세가 회복되어 기원전 91년과 90년에 두 명의 집정관을 배출했다.[6]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정치적으로 중간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아우렐리 코타에 가문의 일원인 아우렐리아와 결혼하여 카이사르를 포함한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자신의 결혼과 여동생 율리아의 결혼으로 영향력 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관계를 맺었고, 기원전 103년에는 사투르니누스 토지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기원전 92년과 85년 사이에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시아의 속주 총독으로 2년(아마도 기원전 91~90년) 동안 재임했다.[7]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아버지 가이우스의 처남이었다. 아버지 가이우스는 프라이토르를 지낸 후 아시아 속주속주 총독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콧타의 딸인 아우렐리아로, 여러 명의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카이사르는 어릴 적부터 갈리아 출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구니포를 가정교사로 두었다.

2. 1. 3. 술라의 원정과 민중파 마리우스 정권

기원전 88년,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일으키자, 집정관 술라가 지휘권을 얻었다. 그러나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주는 법안이 제출되면서 폭동이 일어났고,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다.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도망쳐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다.[142] 술라가 원정을 떠나자, 킨나가 마리우스를 불러들여 로마를 장악하고 술라파를 숙청했다.[143]

기원전 86년 초, 마리우스가 사망했다. 킨나는 기원전 84년 사망할 때까지 로마를 지배했다.

기원전 84년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기원전 83년 카이사르는 유피테르 사제로 선출되었다. 파트리키와 결혼해야 했기에, 카이사르는 약혼녀와 헤어지고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145]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이혼을 강요했지만, 카이사르는 거부하고 지참금을 몰수당했다.[146]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한 술라가 로마로 진군하여 로마 시를 장악했다. 반대파를 프로스크립티오에 따라 숙청하고, 기원전 82년 독재관에 취임하였다.[147]

마리우스와 가깝고 킨나의 사위인 카이사르는 민중파로 여겨져 살해당할 뻔했다. 그러나 가이우스 등에게 간청하여 목숨을 건졌고, 술라는 "그의 안에는 많은 마리우스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원전 81년,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프라이토르 밑에 파견되어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4세와 협상했다. 무티레네 포위전에서 시민관을 수여받았다.[148]

2. 1. 4. 고위직 사제로 오름

카이사르는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되었다.[8]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지배 기간 동안 플라멘 디알리스(유피테르의 고위 사제)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가 킨나의 딸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8]

기원전 54년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주조한 동전에 묘사된 술라. 술라는 기원전 82년 로마를 점령하고 정적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술라가 내전(기원전 82년)에서 승리한 후, 킨나의 ''악타''는 무효화되었고,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사임하고 킨나의 딸과 이혼할 것을 명령했다.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하여 술라의 숙청 대상이 될 뻔했으나, 친척들과 베스타 처녀들의 도움으로 사제직을 사임하는 조건으로 아내와 재산은 유지하는 타협을 이끌어냈다.[9][10]

2. 1. 5. 사면된 마리우스의 처조카 신분

술라가 내전(기원전 82년)에서 승리한 후, 카이사르는 숙청 명단에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친척들과 베스타 처녀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9]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플라멘 디알리스(주피터의 사제) 직위에서 사임하고 코르넬리아와 이혼할 것을 명령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했다.[8] 결국 카이사르는 사제직은 사임했지만 아내와 재산은 유지하는 타협을 이끌어냈다.[10] 술라가 "카이사르에게서 많은 마리우스를 보았다"고 말했다는 주장은[11] 허구이다.[12]

2. 2. 청년 시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 출신이었다.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자 전설적인 트로이아 왕자인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197]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또는 기원전 102년에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7월 12일 또는 13일로 추정된다.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속주 총독을 지냈고, 어머니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카이사르 아버지의 처남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출신 가정교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구니포에게서 교육받았다.

기원전 78년 술라가 사망하자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왔다.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에게 봉기 참여를 요청했으나, 카이사르는 거절했다.[151] 기원전 77년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도라벨라를 고발했으나 실패했다.[152]

기원전 75년 카이사르는 수사학을 배우기 위해 로도스섬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에게해에서 킬리키아 해적에게 납치되었다. 카이사르는 해적들에게 몸값으로 50탈렌트를 요구하라고 말하며, 풀려난 후 해적들을 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다.[156]

기원전 73년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75년 집정관)의 후임 대제사장단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71년 군사 집정관에 취임하여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을 밟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제3차 노예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술라의 호민관 제한 해제와 레피두스 지지자 사면을 주장했다.[19]

기원전 69년 카이사르는 재무관이 되어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la에서 근무했다. 이모 율리아와 아내 코르넬리아의 장례식에서 추도 연설을 했고, 마리우스의 흉상을 공개했다.[158] 이후 폼페이아와 재혼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흉상을 보고 자신의 업적 없음에 낙담하여 로마로 돌아가 트란스파다나 지방을 순회했다.[159]

기원전 65년 고위 감찰관에 취임하여 공공 사업과 경기 대회를 개최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162]

2. 3.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기원전 71년, 카이사르는 군단장(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으로 취임하여 명예로운 관직 경로를 밟기 시작했다.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가 일으킨 Sertorian War|세르토리우스 전쟁|로마와의 전쟁la과 더불어, 기원전 73년에는 스파르타쿠스(Spartacus) 등이 주도한 제3차 노예 전쟁이 일어났는데, 폼페이우스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 전쟁에서 활약했다. 이 두 사람은 기원전 7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 시기에 카이사르는 아내의 형제인 킨나와 손을 잡고, 시민집회(콘티오)에서 연설하는 등, 술라의 숙청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의 귀환 사업을 지원했다.[157]

기원전 65년에는 고위 감찰관에 취임했다(평민 감찰관 중 한 명은 키케로였다). 동료인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공공 사업과 경기 대회 등을 개최했지만, 마치 카이사르 혼자만 부담한 것처럼 칭찬받았다고 한다.[162] 이렇게 민중의 지지를 얻은 카이사르는 호민관들을 포섭하여 플레브스 민회에서 고대 이집트를 임지로 삼도록 결의시키려 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카이사르는 반발하여 공공연히 숙부인 마리우스의 전승비 복원에 착수하고, 술라의 프로스크립티오에 근거한 몰수 재산으로 재산을 모은 자들을 고발했다.[163]

기원전 63년,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공동으로,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빌리우스를 37년 전 호민관 루키우스 아프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살해 혐의로 고발했다. 그리고 먼 친척인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고대에 존재했던 국가 반역죄 심문관에 취임했으며, 변호 측에는 키케로호르탈루스가 맡았으나, 라빌리우스를 유죄로 판결했다. 라빌리우스는 발레리우스 법 등에서 규정된 상소(프로보카티오)를 했지만, 이때 프라이토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케렐이 야니쿨룸 언덕에 게양된 전시 소집 깃발을 내리고 민회를 해산했기 때문에, 재판 자체는 무산되었다.[164][165]

3. 첫 집정관 재직과 삼두 정치

기원전 60년, 카이사르는 집정관을 목표로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동방을 평정하고 개선했지만 원로원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 비해 실적이 부족했기에, 기사 계급 출신의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균형을 맞추었다. 이로써 제1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었다. 카이사르의 민중적 지지, 폼페이우스의 군사력, 크라수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원로원에 대항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171]

3. 1. 첫 집정관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취임한 후, 원로원 의사록을 즉시 시민들에게 공개하도록 했다. 이전까지는 의원들의 발언을 통해서만 내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의원들은 경솔한 언행을 삼가게 되었다. 또한 그라쿠스 형제 이후 원로원 체제에서 금기시되던 토지법을 제정했다.

처음에는 원로원이 이 법안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카이사르는 직권으로 평민회를 소집하여 교묘하게 법안을 통과시키고, 모든 원로원 의원들에게 토지법 준수를 서약하게 했다.

4. 갈리아 정복

'''베르킨게토릭스가 카이사르의 발 앞에 무기를 던지는 모습'''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통해 갈리아 전역을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헬베티족, 벨가이족, 베네티족, 게르만족 등 다양한 부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특히, 알레시아 전투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하여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171][170]

4. 1. 갈리아 전쟁



기원전 58년, 집정관직을 마친 카이사르는 전 집정관(프로콘술) 자격으로 갈리아 키살피나갈리아 트란살피나 등의 속주 총독에 취임했다. 헬베티아이족이 로마 속주를 통과하려는 요구를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갈리아인과의 갈리아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헬베티아이족을 제압한 후, 갈리아인의 요청을 받아 게르마니아족의 아리오비스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듬해에는 갈리아 북동부에 거주하는 벨가이족 여러 부족을 제압했다.

그 사이 기원전 56년에는 룩카에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회담을 갖고, 기원전 55년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면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으로서의 임기가 5년 연장되었다. 또한, 같은 해 게르마니아에 침공하여 게르마니아족의 갈리아 진출을 막고, 라인 강 방어선의 기틀을 마련했다. 기원전 55년기원전 54년 두 차례에 걸쳐 브리타니아 원정도 실시했다.

가장 큰 전투는 기원전 52년, 아르베르니족의 족장 베르징게토릭스와의 전투였으며, 이때는 대부분의 갈리아 부족이 적대했지만,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전투에서 이들을 패배시켰다. 이러한 원정을 통해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을 로마 속주로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의 경위를 『갈리아 전기』로 저술했다.

카이사르는 이 전쟁에서 갈리아인으로부터 수많은 승리를 거두어 로마에서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는 "신병은 신병단을 구성하고, 기존 군단에는 신병을 보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채택했기 때문에 장기간 원정에 종사한 군단은 병력이 정원에 미치지 못했지만, 대신 통솔력 있는 정예 부대가 되었다. 군단병들 중에는 로마가 아닌 카이사르 개인에게 충성심을 품은 자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갈리아 정복을 통해 축적된 힘은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킬 때 후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원로원파의 카이사르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원로원파로 하여금 내란을 유발할 수도 있는 강경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5. 내전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원정 중이던 삼두정치의 일원 크라수스가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군대가 궤멸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되었다. 기원전 54년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마저 사망하면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는 삼두정치의 공동 정적이었던 카토,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에게 접근했고, 이로 인해 카이사르와의 대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갈리아 속주 총독직 해임 및 본국 소환을 명하는 『원로원 최후 결의』이 발표되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호민관이 로마에서 추방당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와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1월 10일 루비콘 강을 건널 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쳤다고 한다.[172]

이집트 정복 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친밀해져 이집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소아시아에 파견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 2세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원전 47년 6월,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떠나 도중에 폼페이우스의 세력 하에 있던 시리아와 키리키아를 제압하며 진군하여 8월 2일 젤라 전투에서 파르나케스 2세를 격파했다. 이때 로마에 있는 심복에게 보낸 승전 보고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la)"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후 로마에 단기간 체류했으며, 그때 1년간의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누미디아유바 1세와 손을 잡고 북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등 원로원파를 타프수스 전투에서 격파하고, 우티카를 공격하여 카토를 자살로 몰아넣었다(기원전 46년 4월).

기원전 46년 여름, 로마로 귀환한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개선식을 거행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로마로 초청했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여겨지는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있었다. 기원전 45년 3월, 히스파니아로 도망쳤던 라비에누스와 폼페이우스의 아들 소 폼페이우스·섹스투스 형제 등과의 문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련의 로마 내전을 종식시켰다.

5. 1. 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원정 중이던 삼두정치의 일원 크라수스가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군대가 궤멸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되었다. 기원전 54년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마저 사망하면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는 삼두정치의 공동 정적이었던 카토,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에게 접근했고, 이로 인해 카이사르와의 대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갈리아 속주 총독직 해임과 본국 소환을 명하는 『원로원 최후 결의』가 발표되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호민관이 로마에서 추방당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로써 폼페이우스 및 원로원파와의 내전이 시작되었다.[172] 1월 10일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카이사르는 "여기를 건너면 인간 세계의 멸망, 건너지 않으면 나의 멸망. 신들이 기다리는 곳, 우리를 모욕한 적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아가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172]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려 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를 포기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인 그리스에서 군사력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원로원 의원들도 폼페이우스를 따라 그리스로 피신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로마를 점령한 후, 카이사르는 일레르다 전투와 마르세이유 포위전을 통해 히스파니아와 마르세이유(현재의 마르세이유) 등지의 원로원파 세력을 제압하여 후방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서 주관한 선거를 통해 기원전 48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173] 그는 독재관직을 10일 만에 스스로 사임하고 로마를 떠나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의 보급 기지를 포위한 디라키움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기원전 48년 8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로 승리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했으나, 9월 29일 알렉산드리아 상륙 직전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근의 계략으로 살해당했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6. 내전 이후

카이사르는 내전을 종식시킨 후,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여 권력을 집중했다. 기원전 44년 1월, 카이사르를 왕(rexla)이라고 부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시민에 대한 독단적인 압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민관에 의해 저지되었다. 카이사르는 두 호민관을 파면하고 원로원에서 축출했는데, 이는 호민관을 인민 자유의 수호자로 존경하는 대중을 분노하게 했다.[89]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됨으로써, 공화정을 회복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89] 그는 루퍼칼리아 축제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건넨 왕관을 공개적으로 거부했지만, 이미 군주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왕관을 갈망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89]

카이사르 암살 계획은 기원전 45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당시 카이사르 연합이 와해되었고, 음모자 대부분은 폼페이우스파였지만, 상당수의 카이사르파도 가담했다. 음모자들은 카이사르의 임박한 파르티아 원정 출발 소식에 계획을 앞당겼다. 그들은 원로원 회의가 살해를 정치적인 것으로 꾸미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판단했다.

카이사르는 음모에 대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호원의 호위를 거부했다. 3월 15일,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동상 아래 황금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음모자들에게 단검으로 공격당했다. 그는 적어도 23차례 찔려 즉사했다.[91]

6. 1. 종신 독재관 취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독재관에 임명된 이후 네 차례나 독재관 직을 역임했다. 로마 점령 후, 그는 선거를 치르기 위해 첫 독재관 임명을 주도했고 11일 만에 사퇴했다. 이후 독재관직은 최대 1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기원전 46년 4월에는 매년 새로운 독재관직을 맡았다.[81]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검열관의 권한과 관련된 praefectus moribus|도덕 감독관la 칭호를 포함한 많은 영예를 부여했다.[83] 그는 또한 전쟁과 평화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고,[83],[84] 살아있는 로마인으로는 처음으로 그의 초상화가 로마 주화에 새겨지는 등 여러 상징적인 영예를 안았다. 그가 태어난 달인 퀸틸리스는 Juliusla(7월)로 개명되었다.

폼페이우스 사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공격을 받았으나, 나일 전투에서 승리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지원했다. 이집트 정복 후, 카이사르는 소아시아에서 파르나케스 2세젤라 전투에서 격파하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la)"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후, 그는 1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46년에는 타프수스 전투에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등 원로원파를 격파하고 우티카를 공격하여 카토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거행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리온을 로마로 초대했다. 기원전 45년 3월, 문다 전투에서 소 폼페이우스·섹스투스 형제 등을 격파하여 내전을 종식시켰다.

7. 암살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던 중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플루타르코스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도착했을 때,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형의 귀환을 청원했고,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며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어깨를 잡고 투니카를 잡아당기자, 카이사르는 "이건 무례한 짓이야!(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315] 이때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가 단검으로 카이사르의 목을 찔렀고, 카이사르는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316] 겁에 질린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고,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자들이 카이사르를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했으나, 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60명 이상이 암살에 가담했으며,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317] 수에토니우스는 의사의 부검 결과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가 치명상이었다고 기록했다.[318]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은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지만,[197]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라고 말했다고 전했다.[319] 플루타르코스 역시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암살자들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320]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대사는[321][322]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죽은 뒤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연설하려 했으나, 그들은 도망쳤다.[324] 브루투스와 동료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가 "로마 시민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라고 외쳤지만, 로마 시민들은 집에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867년 카이사르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제롬의 ''카이사르의 죽음''.

7. 1. 암살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형의 귀환을 청원하자, 다른 암살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며 카이사르를 둘러쌌다.[314]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자,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어깨를 잡고 투니카를 잡아당겼다고 기록했다.[315] 카이사르가 "이건 무례한 짓이야!(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치자,[315]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가 단검으로 카이사르의 목을 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카스카를 팔로 잡고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316] 겁에 질린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곧바로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암살자들이 카이사르를 공격했다.[317]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했으나, 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암살자들은 주랑 현관 아래 계단에 쓰러진 카이사르를 계속 찔렀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60명 이상이 암살에 가담했으며,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317] 수에토니우스는 의사의 부검 결과 가슴의 두 번째 상처가 치명상이었다고 기록했다.[318]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지만,[197]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라고 말했다고 전했다.[319] 플루타르코스 역시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암살자들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토가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320] 영어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는[321][322]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대사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죽은 후 브루투스가 동료 의원들에게 연설하려 했으나, 그들은 도망쳤다.[324] 브루투스와 동료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가 "로마 시민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집에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7. 2. 암살 이후

반란자들은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기쁨을 터뜨렸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325]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은 소수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유증을 통해 그에게 유산의 2/3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한 명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 않은 돈이었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 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326]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장례 연설 중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했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327]

조지 에드워드 로버트슨(George Edward Robertson)의 ''카이사르 장례식에서의 안토니우스의 연설''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328]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329]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330]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331]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332]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333]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였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334]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캅카스, 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335]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44년, 로마인들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믿었던 7일간의 혜성 폭발이 있었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혜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의 화장터 자리에는 기원전 42년 삼두정치자들에 의해 로마 포럼의 중앙 광장 동쪽에 카이사르 신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현재는 제단만 남아 있다.[93] 또한 유언장 내용이 공개적으로 읽혔다. 유언장은 일반 시민들에게 후한 기부금을 제공했고, 주요 상속인으로 카이사르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지명하고, 유언장에서 그를 양자로 삼았다.

8. 사후

카이사르의 유해는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되었으나, 세찬 비에 재가 씻겨 내려가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336]

9. 건강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뇌전증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337][95]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며, 일부 학자들은 카이사르가 저혈당증을 앓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339][340][341][99][100] 저혈당증은 뇌전증성 발작을 유발할 수 있다. 카이사르가 부분 발작 증세를 보였다는 기록은 네 가지가 있으며, 어린 시절 소발작을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발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수에토니우스가 작성했다.[339]

일부 학자들은 카이사르가 기원전 80년대 술라의 숙청 기간 동안 말라리아에 시달렸다고 생각한다.[338][96]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간질 발작이 뇌의 기생충 감염(촌충) 때문이라고 주장한다.[97][98]

프란체스코 M. 갈라시와 후탄 아슈라피안은 카이사르의 행동 증상(두통, 현기증, 낙상, 감각 결핍, 어지러움, 무감각, 실신 발작)이 간질이 아니라 뇌혈관 질환의 결과라고 제안한다. 카이사르는 심혈관 질환에 대한 유전적 소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03]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키가 크고 밝은 피부에 균형 잡힌 팔다리, 약간 통통한 얼굴, 날카로운 검은 눈을 가졌다"고 묘사하며,[104] 탈모가 심했던 카이사르가 이를 가리기 위해 가발을 썼다고 덧붙였다.[105]

키아라몬티 카이사르 흉상, 대리석으로 제작된 사후 초상, 기원전 44-30년,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 바티칸 박물관

10. 저서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342]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기에 대해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꺾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라고 평가했다.

카이사르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고모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신격화된 후 아우구스투스갈리아 전기내란기 등 몇몇 문서를 제외한 카이사르 관련 글과 연설문을 모두 회수하고 폐기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내란기가 전해진다. 갈리아 전기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한 것이고, 내란기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룬 것이다. 이 외에도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가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저자가 카이사르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저서들은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작성되어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가 분명하고 단순하며 직설적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고 교묘하게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편향되어 있다. 특히 로마,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다.

카이사르의 저술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전쟁 관련 저서들뿐이다. 다른 저서들의 일부 문장은 다른 저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 카이사르가 쓴 것으로 추정되나 소실된 저서로는 아버지 쪽 고모인 율리아의 장례 연설인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찬사에 대한 반박으로 카토를 공격하는 글인 "안티카토"가 있다. 고대 자료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도 언급되어 있다.[118]

카이사르는 문필가로서의 재능도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키케로와 함께 라틴 문학 산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갈리아 전기』의 장대한 문체와 간결한 문장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11. 가계

카이사르는 코르넬리아, 폼페이아,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343]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서는 딸 율리아를 얻었으며,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다.[343]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6세 카이사리온을 두었다.[343] 카이사르는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다.[343]

카이사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루키우스 카이사르
아버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어머니아우렐리아
첫 번째 아내코수티아파혼
두 번째 아내코르넬리아 킨나킨나의 딸
율리아폼페이우스의 후처
양자아우구스투스
아들프톨레마이오스 16세 카이사리온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큰누나율리아 카이사리아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결혼, 퀸투스 페디우스와 재혼
작은누나율리아 카이사리아[343]
매부아티우스
조카딸아티아
조카사위옥타비우스
조카사이필리푸스아티아의 두번째 남편
고모부가이우스 마리우스



카이사르는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그 여성들은 다음과 같다.


  • 코르넬리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첫 번째 부인
  • ** 율리아 - 장녀(적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결혼, 기원전 54년 사망
  • 폼페이아 - 두 번째 부인, 기원전 62년 이혼
  • 칼푸르니아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 마지막 부인
  • 코스티아 - 기사 계급의 딸. 약혼했으나,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파혼
  • 세르윌리아 -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우티켄시스의 누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
  • 포스투미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의 아내
  • 로리아 -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아내
  • 테르툴라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내
  • 무키아 - 폼페이우스의 아내
  • 클레오파트라 7세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파라오
  • ** 카이사리온 - 장남(기원전 47년 출생의 서자).
  • 에우노에 - 마우레타니아 왕 보그드의 아내


덴데라 신전(Dendera Temple complex)의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Caesarion)의 부조



12. 연표


  • 기원전 100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7월 12일 로마의 서민지역인 수부라 지구에서 탄생.[197]
  • 기원전 85년 - 아버지 사망. 집정관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
  • 기원전 82년 -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피. 미누키우스 총독의 군대에 지원하여 참모가 됨.(~기원전 81년)
  • 기원전 80년 - 미누키우스의 레스보스섬 공략전에 참가.
  • 기원전 78년 - 술라 사망. 로마로 귀국.
  • 기원전 77년 - 변호사 개업을 하고 당시 권력자들을 고소하지만 실패.
  • 기원전 76년 - 고소 실패로 로도스섬으로 도피 유학을 가던 중 해적의 습격으로 포로가 되어 몸값을 주고 석방된 후 해적 소탕.
  • 기원전 73년 - 로마로 귀국해 제사장 및 대대장이 됨.
  • 기원전 70년 - 회계감사관에 취임(~기원전 69년). 먼 에스파냐에 부임. 귀국 후 원로원 의원이 되다.
  • 기원전 68년 - 고모의 장례식에서 대담한 추도연설을 행함. 아내 코르넬리아 사망.
  • 기원전 65년 - 안찰관에 취임. 자비로 아피아 가도를 보수하고 화려한 검투시합을 개최.
  • 기원전 63년 - 최고 제사장에 취임. '카틸리나 역모사건'에 대해 키케로, 소 카토와 논전.
  • 기원전 62년 - 법무관에 취임. 후처 폼페이아에 얽힌 귀족 클라우디우스의 스캔들 때문에 아내와 이혼.
  • 기원전 61년 -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현지인인 발부스를 등용. 대서양 연안을 평정.
  • 기원전 60년 - 카이사르, 귀국하여 이듬해 집정관에 출마. 폼페이우스·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정치 결성.
  • 기원전 59년 - 집정관에 취임. 농지법과 공직자에 대한 율리우스 법을 가결.
  • 기원전 58년 - 갈리아 전쟁 1년째. 카이사르, 갈리아 총독에 부임. 헬베티족아리오비스투스 격파.
  • 기원전 57년 - 갈리아 전쟁 2년째.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에 진출하여 벨가이 반란군을 격파하고 각 지방을 평정.
  • 기원전 56년 - 갈리아 전쟁 3년째. 카이사르·크라수스·폼페이우스의 루카 회담. 갈리아 각 지방을 평정.
  • 기원전 55년 - 갈리아 전쟁 4년째.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대승.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 어머니 아우렐리아 사망.
  • 기원전 54년 - 갈리아 전쟁 5년째.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암비오릭스의 반란. 카이사르, 반란군을 격파. 딸 율리아 사망.
  • 기원전 53년 - 갈리아 전쟁 6년째. 갈리아 북동부의 모든 부족을 평정.
  •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갈리아 대반란이 일어남. 카이사르, 게르고비아를 공격하러 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 '갈리아 전쟁기' 전7권 간행
  • 기원전 51년 - 알레시아 공방전의 전후 처리로 모든 부족을 복종시키고 평정, '갈리아의 로마화'에 착수.
  • 기원전 50년 - 북이탈리아 속주로 귀환.
  • 기원전 49년 - 원로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결의. 1월 12일 라벤나를 떠난 카이사르,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도하("주사위는 던져졌다!"). 내전의 시작. 일레르다 전투 승리. 이듬해인 기원전 48년도 집정관에 선출.
  • 기원전 48년 - 카이사르, 그리스에 상륙.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 카이사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이집트인들과 벌인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
  • 기원전 47년 - 『내전기』 전3권 완성. 소아시아에 상륙, 카파도키아 지방의 젤라에서 파르나케스를 격파("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기원전 46년 -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군을 대파. 로마에 귀환. 네 차례의 개선식을 거행. 내전이 사실상 종결. 각종 개혁 실시. 율리우스력(태양력) 채택. 국립 조폐소를 창설.
  • 기원전 45년 -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반카이사르파가 봉기하자 히스파니아로 떠나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
  • 기원전 44년 - 2월 원로원과 민회,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에 임명. 3월 15일 카이사르,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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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book (unspecified) (unspecified) (unspecified)
[35] book (unspecified) (unspecified) (unspecified)
[36] 논문 "[A]n alliance which in modern times has come, quite misleadingly, to be called the 'First Triumvirate'... the very phrase... invokes a misleading teleology. Furthermore, it is almost impossible to use [it] without adopting some version of the view that it was a kind of conspiracy against the republic"
[37] 학술지 What's in the Name: the so-called First Triumvirate https://journal.fi/a[...]
[38] 논문 noting that the Senate had approved distribution of lands to Pompey's veterans from the Sertorian War all the way back in 70 BC.
[39] 논문 noting that the lex Vatinia was "no means unprecedented... or even controversial".
[40] 논문 Consular provinces under the late Republic – II. Caesar's Gallic command https://www.jstor.or[...]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noting that Bibulus' voluntary seclusion "presented the image of the city dominated by one man [Caesar]... unchecked by a colleague".
[44] 논문
[45] 논문 "It should no longer be necessary to refute the older notion that Clodius acted as agent or tool of the triumvirate". Clodius was an independent agent not beholden to the triumvirs or any putative popular party. https://www.jstor.or[...]
[46] 논문 noting Caesar's opposition – in early 58 BC – to Cicero's banishment. Caesar offered Cicero a position on his staff which would have conferred immunity from prosecution but Cicero refused.
[47] 논문 citing Gelzer, "this extraordinary honour... cut the ground from under the feet of those who maintained that since 58 Caesar had held his position illegally"; Morstein-Marx also rejects the claim of senatorial duress at
[48] 논문 citing Cic. Sest., 51, "hardly anyone has lost popularity among the citizens for winning wars".
[49] 논문 citing Caes. BGall., 5.26–52.
[50] 논문 "Gruen.. and Raaflaub... have effectively disposed of the old idea, too heavily influenced by [Plutarch]", citing Plut. Caes., 28.1 and Plut. Pomp., 53.6–54.2, "that Pompey had now turned against Caesar... since Julia's death in 54".
[51] 논문 "Despite the fact that Pompey declined Caesar's later offer to form another marriage connection, their political alliance showed no signs of strain for the next several years".
[52] 논문 "Julia's death came in the late summer of 54[;] if it opened a breach between Pompey and Caesar, there is no sign of it in subsequent months... The evidence indicates no change in the relationship during 53"; "Julia's death provoked no change in the contract[;] Caesar did not cut Pompey out of his will until the outbreak of civil war".
[53] 학술지 How and why was Pompey made sole consul in 52 BC? https://www.jstor.or[...]
[54] 논문 citing Caes. BGall., 8.2–16.
[55] 논문 citing App. BCiv., 2.30–31 and Dio, 40.64.1–66.5.
[56] 학술지 Caesar's alleged fear of prosecution and his "ratio absentis" in the approach to the civil war
[57] 논문 Januar 49 v. Chr.: Vorgeschichte, Rechtslage, politische Aspekte https://publikatione[...] Dr. Rudolf Habelt GmbH
[58] 논문 citing Suet. Iul., 26.1; Plut. Pomp., 56.1–3.
[59] 논문 "Caesar feared that the only guarantee of his rights... to stand for election in absentia under the protection of the Law of the Ten Tribunes and to receive a triumph... was his army".
[60] 서적 SPQR: a history of ancient Rome W W Norton
[61] 논문
[62] 논문 "[Abandoning Italy] was probably justified from a military point of view ... but Cicero was doubtless right in seeing it as politically and psychologically very damaging to abandon the capital and indeed all Italy, intending to starve and then invade it".
[63] 논문 citing: Cic. Att., 10.4.8; Dio, 41.15–16; App. BCiv., 2.41.
[64] 논문 citing Caes. BCiv., 2.17–20.
[65] 논문 He also passed laws removing civil disabilities from the descendants of those proscribed by Sulla and recalling all exiles on specious claims of unfair trials.
[66] 논문 citing, among others, Caes. BCiv., 3.1.1; Plut. Caes., 37.1–2; App. BCiv., 2.48; Dio, 41.36.1–4. He had no magister equitum.
[67] 서적 Cleopatra: a biograph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68] 학술지 Cleopatra in Pompeii?
[69] 논문 noting that both children were left under Roman protection under their father's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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