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 (고려)
1. 개요
보우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홍주 출신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수행했으며, 25세에 승과에 급제했으나 명예를 버리고 고행했다. 삼각산에 태고사를 창건하고 원나라에서 임제종 법을 받아와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공민왕의 왕사로 활동했으나 신돈의 횡포를 비판하고 법주사에 은거했으며, 신돈 사후 우왕의 국사가 되었다. 구산 선문을 통합하고 원융부를 건립하여 불교 개혁을 시도했으며, 한양 천도를 주장하기도 했다. 드라마 《개국》과 《신돈》에서 등장하며, 특히 신돈과의 갈등 관계를 중심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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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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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
우왕
우왕은 고려 제33대 국왕으로 공민왕의 아들이며, 이인임의 추대로 10세에 즉위하여 명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술과 여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왜구 침입, 명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 요동 정벌 명령, 위화도 회군 등의 사건을 겪으며 폐위되어 처형되었다. -
1301년 출생 -
예찬
원말명초의 은둔 화가이자 시인인 예찬은 부유한 지주 출신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혼란기에 유랑 생활을 하며 결벽증과 기행으로 유명하며, 독자적인 평원 산수 화풍인 "소산체"를 확립했다. -
1301년 출생 -
이븐 카티르
14세기 시리아의 샤피이 학파 법학자이자 역사가, 쿠란 주석가인 이븐 카티르는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로서 《이븐 카티르의 타프시르》로 유명하며, 다마스쿠스 대사원 교수 등을 역임했고 그의 신념은 아흘 알-하디스 및 아사리 학파 관점에서 논쟁적이다. -
1382년 사망 -
염제신
염제신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원나라 관료 생활 후 고려로 돌아와 기철 일파 숙청과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공민왕의 후궁 신비 염씨의 아버지로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
1382년 사망 -
효자고황후 (명나라)
효자고황후는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의 황후로서, 홍건적의 난에서 주원장과 혼인하여 명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며, 검소하고 현명하게 내조하며 정치에도 관여하다 1382년에 사망한 후 효자황후로 추존되었다.
2.1. 출가와 수행
13세(1313년)에 회암사에서 광지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였고, 얼마 뒤 가지산으로 가서 수행하였다.
25세(1325년, 충숙왕 12년)에 승과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감로사에서 고행하였다.
삼각산에 태고사를 지었고, 1346년(충목왕 2년) 원나라에 가서 하무산(霞霧山) 청공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2.2. 왕실과의 관계 및 불교 개혁 활동
1346년(충목왕 재위 2년) 원나라에 가서 하무산(霞霧山)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귀국 후 공민왕의 청으로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의 횡포를 비판하고 소설사(小雪師)로 돌아갔다. 신돈에게 참소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법주사(法住寺)에 은거하였다. 신돈이 죽은 후 우왕의 국사가 되었다.
3. 사상과 활동
보우는 대각국사 의천이 비판했던 구산을 통합하고, 입과 귀로만 불교를 배우는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지양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원융부(圓融府)를 건립하고 선사(禪師)의 품법으로 모든 불교를 총섭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보우는 만법귀일(萬法歸一) · 무자(無字)와 같은 화두를 참선하여 크게 깨달았으며, 충목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가 임제(臨濟)의 제17대 법손(法孫) 석옥(石屋)에게서 법을 받고 충목왕 4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절에 머물지 않고 광주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썼다. 공민왕이 보우를 불러 법을 물었을 때 보우는 왕도는 불교 신앙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고 간언했다(《고려사》권 38).
또한 선종 구산을 통합하여 임제종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3.1. 한양 천도 주장
보우는 개경은 왕기가 다했으니 복고 정치가 어려우므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다(《유창선도증국사행장》 (공민왕 5년)). 공민왕은 보우의 건의를 수용해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구산 통합에 착수하였고 한양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한양 천도는 일부 신하가 묘청의 예를 들어 반대하므로 좌절되고 이와 함께 원융부도 불과 10개월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한양 천도는 인심을 일변하게 하고 정교를 쇄신하려는 의도였고, 천도 이유로 든 풍수지리설은 당시 풍조를 현실에 맞게 이용하려 한 기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