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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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묘청은 고려 시대의 승려이자 서경 출신으로,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인종에게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그는 개경 대신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으나,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1135년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대위'라는 국호를 사용했으나,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었고, 묘청은 처형당했다. 묘청의 난은 고려 조정 내 서경 세력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자주적인 주체성을 지향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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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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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묘청 |
한글 | 묘청 |
한자 | 妙清 |
가타카나 | 미ョチョン |
로마자 표기 | Myocheong |
일명 | 정심 |
인물 정보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고려 서경 |
사망지 | 고려 서경 |
사망일 | 1135년 |
종교 | 불교 |
정치 활동 | |
작위 | 대위국 천개 지도자 (大爲國 天開 ㅡ) |
재위 | 1135년 |
후임자 | 조광 |
섭정 | 조광 (대리청정)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없음 |
2. 생애
서경(평양) 출신인 묘청은 풍수지리에 능통했으며, 천문을 관측하여 길흉을 점치는 일자(日者) 백수한의 스승이었다. 묘청은 백수한과 함께 음양술로 인종에게 접근하여,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종은 묘청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경으로 순행하기도 했으나, 김부식 등은 묘청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다. 1135년,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칭하고 군사를 "천견충의군"이라 칭했으나, 인종은 김부식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했다.[9]
2. 1. 생애 초반
고려 인종 때의 승려 묘청은 서경(현재의 평양) 출신으로, 출생, 속성, 출가한 사찰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묘청은 불교 교리뿐만 아니라 도교의 비의에도 능통했다. 1126년(인종 4) 백수한이 검교소감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으로 삼고,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이용해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당시 고려 사회는 신라 말기부터 풍수지리설이 유행하여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다.
묘청은 유교를 믿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며,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칭제건원을 주장했다. 또한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개경은 지세가 쇠퇴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개 주변국이 복속할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2]
2. 1. 1. 초기 활동
서경(현재의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의 출생과 속성, 출가한 사찰 등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평양 출신으로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그는 불교 교리 외에도 도교의 비의에도 능통했는데, 1126년(인종 4)에 백수한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이라 하고, 두 사람은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사용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또한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2]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3]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3]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3]
묘청은 개경이 이미 업운이 쇠진하여 궁궐이 다 탄 것이라며 왕기가 서려 있는 서경으로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서경천도론이 현실화될 경우 자신들이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묘청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3]
묘청은 성인이며, 그의 제자 백수한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국가의 대소사를 소상히 자문한 후에 정사를 처리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묘청은 성인이며, 그의 제자 백수한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국가의 대소사를 소상히 자문한 후에 정사를 처리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중국어[3]
정지상,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등은 대신들에게 이 문건을 돌려 연판 서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개, 승선 이지저, 이공승 등을 제외한 중신들의 동의를 얻었다.[3] 상소문이 제출된 후 인종은 묘청을 입궐토록 했다.[3]
2. 1. 2. 서경 천도론
평양인 서경 출신인 묘청은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2]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3]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3]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3]
묘청은 개경이 이미 업운이 쇠진하여 궁궐이 다 탄 것이라며 왕기가 서려 있는 서경으로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서경천도론이 현실화될 경우 자신들이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묘청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3]
정지상,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등은 대신들에게 이 문건을 돌려 연판 서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개, 승선 이지저, 이공승 등을 제외한 중신들의 동의를 얻었다.[3] 상소문이 제출된 후 인종은 묘청을 입궐토록 했다.[3]
2. 1. 3. 금나라 정벌론
여진족은 북방에서 힘을 길러 금(1115년)을 건국하고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스스로 형이라고 칭했다.[2] 묘청은 이를 부당하다며 금나라의 국서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여진족은 원래 압록강 유역과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며 고려에 복속해왔던 민족이다. 고려 관료들은 이러한 상황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2] 묘청은 서경 천도와 함께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다. 윤언이, 정지상, 백수한 등도 묘청의 칭제건원과 북벌 주장에 동조했다.[2]
2. 2. 왕사 시절
1127년(인종 5년) 묘청은 정지상의 추천으로 궁궐에 출입하며 인종의 왕사가 되었다. 인종은 묘청의 달변에 감탄하여 그를 왕사로 임명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당시 고려 정계는 이자겸의 난 이후 진보적인 성향을 띤 국학파[4]와 보수적인 한학파[5]로 나뉘어 있었다. 묘청은 정지상과 더불어 신진 관료들이 주축이 된 서경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도참설을 근거로 서경(西京) 천도와 금국 정벌론을 펼쳤다.정지상 등의 도움으로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여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행차하였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진언으로 서경에 새 궁궐인 대화궁을 짓기 시작했다.
묘청은 여진족의 오만함을 응징하고 금나라 정벌을 위해서는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의 개경파는 실력이 부족함을 들어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며 반대하였다. 인종은 묘청에게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태평성대를 열 방도를 물었고, 묘청은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위치를 서경 임원역의 땅으로 정해주었다.[3]
이자겸의 난을 겪은 인종은 개경의 귀족 세력이 왕권을 수호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6] 인종은 국도를 옮겨 왕실의 위상을 되찾고자 했는데, 마침 그때 개경의 지덕이 다하여 국도를 서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다.[6] 묘청의 주장은 그런 견해에 힘을 실어주었다.
묘청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인종은 서경을 방문하여 묘청과 백수한에게 임원역의 지세를 보게 하고 궁궐을 신축하기 위해 1128년 11월 김안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 개경에서도 왕궁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엄동설한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공사를 독촉하였고, 1129년 2월 서경에 대화궁이 완성되었다.[7]
2. 2. 1. 입궐과 왕사 책봉
1127년(인종 5년) 서경 출신 정지상의 추천으로 묘청은 궁궐에 출입하게 되었다. 인종은 묘청의 달변에 감탄하여 그를 왕사로 임명하고, 묘청은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 당시 고려 정계는 이자겸의 난 이후 진보적인 성향을 띤 국학파(國學派)[4]와 보수적인 한학파(漢學派)[5]로 나뉘어 있었다. 묘청은 정지상과 더불어 신진 관료들이 주축이 된 서경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도참설을 근거로 서경(西京) 천도, 금국 정벌 등의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다.[3]정지상 등의 도움으로 묘청은 인종의 총애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여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행차하였다. 1128년(인종 6)에는 묘청의 진언으로 서경에 새 궁궐인 대화궁을 짓기 시작하였다.
2. 2. 2. 칭제건원론
1129년 2월 대화궁이 완성되자,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인종에게 표문을 올려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주변국과 협공하여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7] 그러나 중신들의 반대로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묘청은 인종에게 금나라의 오만한 요구를 들어주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개경 귀족들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느냐며 비난하였다.
2. 2. 3. 서경 천도 운동과 실패
서경천도론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묘청이었다.[3] 그는 제자 백수한과 함께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들을 모았다.[3] 정지상,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동조했다.[3]묘청은 개경의 기운이 쇠하여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인종에게 묘청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다.[3] 정지상,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등은 대신들에게 상소문 서명을 받았고, 김부식, 임원개, 이지저, 이공승 등을 제외한 중신들의 동의를 얻었다.[3] 인종은 묘청을 불러들였다.[3]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형이라 자처하자,[2] 묘청은 금나라의 국서를 내칠 것을 주장했다. 묘청은 서경 천도와 함께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고, 윤언이, 정지상, 백수한 등이 이에 동조했다.[2]
1127년(인종 5년), 묘청은 정지상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인종의 왕사가 되었다. 당시 고려 정계는 이자겸의 난 이후 진보적인 국학파[4]와 보수적인 한학파[5]로 나뉘어 있었다. 묘청은 정지상과 함께 서경 세력의 일원으로, 도참설을 바탕으로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론을 주장했다.
정지상 등의 도움으로 인종의 신임을 얻은 묘청의 건의로, 1128년(인종 6) 서경에 대화궁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1129년(인종 7)에는 대화궁이 완공되었다.
묘청은 여진족의 오만함을 벌하고 금나라 정벌을 위해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부식 등의 개경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인종은 묘청에게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고 태평성대를 열 방법을 물었고, 묘청은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3]
이자겸의 난을 겪은 인종은 개경 귀족 세력이 왕권을 지킬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수도를 옮겨 왕실의 위상을 되찾고자 했다.[6] 묘청의 주장은 이러한 견해에 힘을 실어주었다.
인종은 서경을 방문하여 묘청과 백수한에게 임원역의 지세를 보게 하고, 1128년 11월 김안에게 궁궐 신축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개경에서도 왕궁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었기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3] 1129년 2월, 대화궁이 완성되었다.[7]
묘청은 인종에게 금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청했으나, 개경 귀족들은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다. 1129년 2월, 인종은 서경에서 대화궁 낙성식을 열었다. 묘청 등 서경 세력은 칭제건원(稱帝建元,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함)과 금나라 협공을 건의했지만, 중신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대화궁 축성 후 인종은 서경에 머물렀으나, 1130년 2월 서경 중흥사 탑이 화재를 당했다. 대신들은 묘청의 말이 거짓이라 비난했지만,[7] 묘청은 대화궁 주변에 임원궁성을 건설하고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했다.[7]
1131년(인종 9), 묘청은 인종을 설득하여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짓고 8개의 상(像)을 안치했다. 1132년, 묘청은 이자겸의 난으로 불탄 개경 궁궐 수리 과정에서 서경 천도를 위해 개경 궁터가 서경보다 못하다고 주장하여 공사를 중지시켰다. 인종은 묘청의 인도로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하려 했으나, 김부식 등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132년, 인종은 개경으로 돌아갔다가 왕궁이 수축되자 다시 서경행을 결심했다. 묘청은 인종을 수행하여 서경으로 갔으나, 갑작스러운 폭우와 돌풍으로 인종 일행이 어려움을 겪었다.[7] 서경 가는 길의 사고는 개경파 귀족들의 비난을 샀다.
이 사건으로 묘청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졌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묘청 일당을 멀리할 것을 상소했지만, 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134년, 인종은 묘청에게 삼중대통지 누각원사 직책과 자색 관복을 하사했다.[7] 묘청은 다시 '칭제건원'을 상소했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 조정은 묘청의 서경 세력과 김부식의 개경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7]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 왕은 마음을 바꾸었다.[8] 묘청은 1135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칭했고, 인종은 김부식에게 토벌을 명했다.
2. 2. 4. 대위국 운동 (묘청의 난)
묘청은 서경천도론을 처음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들을 규합했다.[3]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3] 묘청은 개경이 이미 쇠퇴하여 왕기가 서린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정지상 등 서경 세력은 인종에게 묘청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다.[3] 정지상,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등은 대신들에게 이 문건을 돌려 연판 서명을 받았고, 김부식, 임원개, 이지저, 이공승 등을 제외한 중신들의 동의를 얻었다.[3] 상소가 제출된 후 인종은 묘청을 입궐시켰다.[3]
1127년(인종 5년) 묘청은 정지상의 추천으로 궁궐에 출입하여 인종의 왕사가 되었다. 묘청은 정지상과 더불어 신진 관료들이 주축이 된 서경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도참설을 근거로 서경(西京) 천도와 금국정벌론을 펼쳤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건의로 서경에 대화궁을 짓기 시작했고, 1129년(인종 7)에 완공되었다.
묘청은 여진족의 오만함을 응징하고 금나라 정벌을 위해서는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부식 등의 개경파는 실력이 부족하다며 반대했다. 인종은 묘청에게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태평성대를 열 방법을 물었고, 묘청은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3]
1128년 11월 김안이 서경에 궁궐 신축 공사를 감독했다. 1129년 2월 서경에 대화궁이 완성되었다.[7] 1131년(인종 9)에는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8개의 상(像)을 안치했다. 1132년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장했으나, 김부식 등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132년 서경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자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묘청을 멀리할 것을 상소했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 관복을 하사했다.[7] 묘청은 다시 '칭제건원'을 상소했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대화궁 건설 후 계속된 재화로 묘청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1134년 말 서경 세력은 인종에게 서경 행차를 건의했지만, 인종이 거부하자 1135년 1월 4일 군사를 일으켜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9]
묘청은 조광, 유참, 조창언 등과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자신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고 명명했다.[9] 묘청은 대화궁의 관풍전에서 전략을 짜고 개경을 공격하려 했지만, 개경에서는 서경의 반란 소식을 듣지 못했다. 백수한이 이 사실을 인종에게 보고했고, 개경파 대신들은 묘청을 역적으로 몰았다.
2. 3. 진압과 최후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의 관복을 하사하였다.[7]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稱帝建元중국어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7]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 왕은 마음이 바뀌었다.[8]
대화궁 건설 후 잇따라 계속된 재화 때문에 묘청의 입지는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1134년 말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은 극약처방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정하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할 것을 건의한다.[7] 하지만 인종이 간관들의 반대에 부딪혀 서경 행차를 거부하자 1135년 1월 4일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9] 이 거병은 누가 처음 계획했는지 불확실하다.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과 병부상서 유참, 사재감소경 조창언 등과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자신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고 명명했다.[9] 하지만 묘청을 왕으로 옹립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묘청의 반란은 왕을 교체하기 위한 역모가 아니라 개경세력을 제거하고 인종으로 하여금 서경천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9]
인종은 여전히 묘청을 신임하고 있었으나, 거병을 일으켰고 결국 개경파로부터 역모로 공격당하면서 묘청의 입지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10]
묘청은 조광을 비롯한 서경의 문무대신들과 대화궁의 관풍전에서 전략을 짜고 몇 개의 조로 군사를 나누어 곧바로 개경을 공격하는 기습전을 펼치려 하였다.[9] 하지만 이때까지 개경에서는 서경의 반란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다만 서경측은 인편으로 백수한에게 묘청이 군대를 일으켰으며, 곧 개경의 역적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뿐이었다.[9] 백수한은 이 편지를 받고 그 내용을 인종에게 보고했다.[9] 개경파 대신들은 묘청을 역적으로 몰고 그가 반란의 총지휘군이라 하였다.
서경의 반란 소식이 사실임을 확인한 인종은 백관을 소집하고 회의 끝에 반란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9] 그래서 김부식을 원수로 임명하고 내시 유경심, 조진약, 황문상을 서경으로 급파하여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9] 김부식의 대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군 진영에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11] 그리고 개경군이 안북대도호부(안주)에 도착하면서 반란군 지역에 있던 많은 성들이 개경군에 호응하는 바람에 전세는 점차 대위국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김부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반란군을 이끌던 장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이때 김부식을 원수로 하는 토벌군이 쳐들어오고 조광이 그를 참수 시켰다. 대위국은 1년여를 더 버티다 고려군에게 패망하여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경성을 난입한 고려 병사에 의해 다시 부관참시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미상이었다.
3. 사후
묘청의 난이 진압되면서 고려 조정 내의 서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으며, 불교 세력도 상당히 쇠퇴하였다.[12] 반대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경 세력과 개경 문신귀족 세력의 균형이 깨어져 문신귀족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일어났다.[12]
후대에 묘청은 궁예와 함께 요사스러운 승려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비판의 소재가 되었다. 1920년대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으로 지목하면서 묘청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 평가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일천년래 대사건(一千年來大事件)'이라고 하며 크게 평가했다. 그는 묘청과 그의 운동이 사대와 주체의 기로에서 주체를 지향했다고 평가했으며, 김부식 등에 의해 대위국이 무참히 짓밟힌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낭가와 불교 세력 대 유학 세력, 독립 세력 대 사대 세력,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했다.[12] 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하면서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고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평가했다.[13]
4. 1. 신채호의 평가
신채호는 이 사건을 '일천년래 대사건(一千年來大事件)'이라 칭하며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묘청과 그의 운동이 사대주의와 주체 의식 사이에서 주체 의식을 지향했다고 평가했으며, 김부식 등에 의해 대위국이 무참히 짓밟힌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했다.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낭가와 불교 세력 대 유학 세력의 싸움, 독립 세력 대 사대 세력의 싸움, 진취적 사상 대 보수적 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했다.[12] 그는 '우리나라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고 주장하며, 이 사건을 고대부터 내려오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주사상이 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고 했다.[13] 그는 묘청을 낭가와 불교, 국풍, 독립, 진취 사상의 대표로, 김부식을 유교, 한학, 사대, 보수 사상의 대표로 보았다.[13]
신채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교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고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했다.[12]
4. 2. 묘청에 대한 비판
묘청은 간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자신의 군대조차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채 금국정벌론을 내세워 여론을 호도하고, 권력을 얻는 방식이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이 전형적인 간신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원했던 것은 단지 개경 귀족 세력이 독점한 권력을 서경 세력이 차지하는 것뿐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10]묘청과 서경 세력의 금나라 정벌론은 단순한 감상주의에 빠진 오판이거나, 서경 천도를 실현하기 위한 계책의 일환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0] 서경과 개경은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두 도시였는데, 서경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 태조가 중요하게 여긴 장소였다. 그러나 4대 광종 이후 고려 조정은 개경 귀족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이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으로 기댈 곳을 찾던 인종에게 묘청과 도참설, 그리고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권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하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묘청 일파가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중요했는데, 기득권 세력인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천도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풍수지리설과 금국 정벌이었다. 인종 역시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 귀족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기득권 세력이 포진한 개경을 벗어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일어난 것이 서경 천도 운동이었고, 이를 간파한 개경 귀족 세력은 당연히 천도 운동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대규모 공사와 전쟁에 희생된 것은 백성들이었다. 《고려사》에는 묘청이 엄동설한에 공사 독촉을 심하게 해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당시의 신궁 공사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농업이 생산의 근간이었던 당시 공역 동원은 농번기가 아니라 농한기, 곧 겨울에 하는 것이 상례였다. 다만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책이므로, 묘청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묘청이 서경천도론을 내세우며 풍수지리설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고 그 밖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천도와 같은 국가적 대업을 단순히 풍수설에만 의존했다는 것도 문제였다.[10]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논리를 곁들여 개경 세력의 입지를 약화시켰다면 서경 천도론을 공론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0] 게다가 자신들의 입김이 약해지고 있다고 해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개경 세력의 입지만 강화시키는 결과만 낳았다.[10] 묘청이 이를 주도했거나 묵인했거나 서경 세력의 약화를 불러왔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당시 인종은 여전히 묘청을 신임하고 있었고, 그 덕택에 서경 세력의 입지는 이자겸의 난 이전보다는 훨씬 강화된 상태였다.[10] 그런데 군사를 일으키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여 스스로 몰락의 길을 택했다는 것은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의 정치력이 형편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10]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있었다.[12] 대금 정벌론을 내세워 잃어버렸던 민족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높게 평가될 수 있으나, 당시 국제 정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지나치게 풍수 사상에만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12]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남하하여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낸 상태였다. 말하자면 금나라는 중국 대륙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막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나 금나라는 잘 훈련된 기마병을 주력 부대로 영토 확장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고려군은 기마 전술에 약했기 때문에 보병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었다.[12] 그런데 금나라를 침입하면 반드시 평원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는데 보병 중심의 고려군에겐 불리하였다.[12]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기마병 중심의 금군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4. 3. 기타
여진족이 세운 금(1115년)이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스스로 형이라고 칭하자, 묘청은 이에 반대하며 금나라의 국서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묘청은 서경 천도와 함께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으며, 윤언이, 정지상, 백수한 등도 이에 동조했다.[2]묘청은 간신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자신의 군대조차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채 금국 정벌론을 내세워 여론을 호도하고, 권력을 얻는 방식이 전형적인 간신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원했던 것은 개경 귀족 세력이 독점한 권력을 서경 세력이 차지하는 것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10]
묘청과 서경 세력의 금나라 정벌론은 단순한 감상주의에 빠진 오판이거나, 서경 천도를 실현하기 위한 계책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서경과 개경은 고려의 중요한 도시였는데, 광종 이후 개경 귀족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이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종에게 접근하여 묘청과 도참설,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권력을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묘청 일파는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 기득권 세력인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고, 풍수지리설과 금국 정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인종 역시 문벌 귀족에 대한 거부감으로 개경을 벗어나고 싶어 했기에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개경 귀족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과 목숨이 위험해질 것을 우려하여 천도 운동을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대규모 공사와 전쟁으로 희생되었다. 《고려사》에는 묘청이 겨울철에 공사를 독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농업이 중요했던 당시에는 농한기인 겨울에 공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묘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고 다른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천도와 같은 국가적 대업을 풍수설에만 의존한 것은 문제였으며,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논리로 개경 세력의 입지를 약화시켰어야 했다는 것이다.[10] 또한 군사를 일으킨 것은 개경 세력의 입지만 강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고, 묘청이 이를 주도했거나 묵인했거나 서경 세력의 약화를 불러왔다는 점도 비판받는다.[10]
당시 인종은 여전히 묘청을 신임했고 서경 세력의 입지는 강화된 상태였지만, 군사를 일으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몰락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의 정치력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다.[10]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의 주장은 당시 국제 정세와 맞지 않았고,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풍수사상에만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12]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낼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특히 잘 훈련된 기마병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반면 고려군은 기마 전술에 약한 보병 중심이었기 때문에 금나라와의 평원 전투에서 불리했다.[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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