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군트 자유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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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군트 자유백국은 현재 프랑스의 프랑슈콩테 지역에 존재했던 역사적 영토이다. 9세기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아를 왕국에 속했다가, 982년 오토-윌리엄이 부르고뉴 백국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1032년 아를 왕국 붕괴 후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가 되었으며, 12세기 부르고뉴의 르노 3세가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 백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3세기 샬롱 가문과의 권력 투쟁을 거쳐 부르고뉴 연합에 편입되었고, 1477년 샤를 용담공 사망 이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분쟁 끝에 스페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1678년 네이메헌 조약으로 프랑스에 귀속되어 현재 부르고뉴-프랑슈-콩테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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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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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존속 기간 | 982년 ~ 1678년 |
이전 | 부르군트 왕국 |
이후 | 프랑슈콩테 (프랑스) 베장송 자유 도시 |
주요 사건 | 오토 윌리엄의 부르고뉴 백작 즉위 (982년) 황제 콘라트 2세의 부르고뉴 (아를) 왕국 합병 (1033년) 필리프의 부르고뉴 공국과의 동군연합 (1384년) 생리스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양도 (1493년) 부르군트 관구 가입 (1512년) 네이메헌 조약으로 프랑스에 양도 (1678년) |
소속 | 상부르군트 아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
정치 | |
정치 체제 | 봉건 군주제 (백국) |
수도 | 돌 |
종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2. 형성 과정 (아를 왕국 내)
프랑슈콩테 지역은 원래 부르군트 왕국의 일부였으나, 534년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손 강 서쪽은 프랑스 부르고뉴 공국이 되었고, 남부 및 동부 지역은 중프랑크에 속하게 되었다.[1]
중프랑크 지역은 879년 남부 저부르군트와 888년 북부 고부르군트로 분리되었고, 프랑슈콩테는 고부르군트에 포함되었다. 933년 카롤링거 제국 붕괴 후, 저부르군트와 고부르군트는 아를 왕국으로 재통합되었다.[1]
982년, 부르고뉴 백작 오토-윌리엄은 에르망트뤼드 드 루시와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 백국을 형성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002년, 오토-윌리엄은 부르고뉴 공국 계승을 주장했으나,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와의 분쟁 끝에 실패하고, 부르고뉴 백국 통제에 집중했다.
2. 1. 안스카리드 왕조
롬바르디아의 아달베르트의 아들 오토-윌리엄은 루시의 에르망트뤼드와 결혼했다. 에르망트뤼드는 마콩 백작(부르고뉴 공국)의 과부였으며, 베상송과 돌 주변의 영지를 아내의 권리로 통치했다. 오토-윌리엄은 부르고뉴 공작 앙리 1세의 양자였으므로 앙리 1세가 사망하면 공국 전체를 상속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오토-윌리엄이 에르망트뤼드를 통해 획득한 공국 외부의 영지는 새로운 부르고뉴 백국으로 조직되었다.[2]1002년 앙리 1세가 사망하자 오토-윌리엄은 부르고뉴 공국을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는 양자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앙리 1세의 조카로서 공국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두 청구자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몇 년간의 분쟁 끝에 로베르 2세가 공국에서 승리했다. 로베르 2세는 이후 아들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에게 공국을 하사했으며, 장남 위그에게는 왕관을 유지했다. 오토-윌리엄은 마콩 백국을 계속 통제했으며, 부르고뉴 왕국의 봉토인 백국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했다.[1]

오토-윌리엄과 에르망트뤼드는 안스카리드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쥐라 산맥을 가로지르는 상업로의 발전과 소금 광산의 개발은 백국의 번영을 보장했으며, 수십 년 동안 그 도시들은 자유와 중립성을 유지했다.
3. 신성 로마 제국 시대
1032년 아를 왕국이 붕괴되면서 부르고뉴 백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가 되었다.[3] 11세기 말, 신성 로마 황제 헨리 3세는 베장송 대주교를 대재상으로 격상시키고 베장송에 자유 제국 도시 지위를 부여했다. 교황 갈리스토 2세는 르노 2세의 형제였으며, 나중에 교황이 되어 보름스 협약을 신성 로마 황제 헨리 5세와 협상했다.
1127년, 부르고뉴의 르노 3세는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4] 로타르 3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하고 10년간의 분쟁 끝에 승리했다. 이후 부르고뉴는 '프랑슈콩테'(자유 백국)로 불리게 되었다.[4]
3. 1. 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제국의 영향력을 다시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 1세(르노 3세의 딸이자 윌리엄 4세의 조카이자 상속녀)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백국을 장악했다.[4] 1190년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막내아들 부르고뉴의 오토 1세가 부르고뉴 백국을 물려받았고, 대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5]오토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딸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 2세와 그녀의 남편 메라니아의 오토 1세가 백국을 계승했고, 그 다음은 그들의 아들 부르고뉴의 오토 3세와 딸 부르고뉴 팔라티네 백작 부인 아델라이드가 계승했다.[5]
3. 2. 샬롱-아를레 가문과의 권력 투쟁
팔라티네 백작들은 여러 해 동안 백국의 더 큰 봉건 가문, 특히 샬롱 백국의 상속녀 가문인 샬롱 가문과 권력을 공유해야 했다.[5] 1237년, 샬롱의 존 "고령자"(John "the Old") 백작은 프랑스 왕가에 속한 자신의 영지(샬롱과 오세르 포함)를 부르고뉴 공작에게 살린-레-뱅의 소금 광산과 같은 부르고뉴 백국 내의 부유한 영지와 교환했다.[5]고령자 존의 권위는 그의 장남 샬롱의 휴와 부르고뉴의 아델라이드의 결혼(약 1239년)에 의해서만 재확립되었다. 아델라이드는 오토 3세의 누이(1248년 사망)이자 부르고뉴의 상속녀였다.[5] 그러나 이는 차남인 샬롱-아를레이의 존 1세가 봉신을 장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부르고뉴의 오토 4세는 휴와 아델라이드의 아들로, 부르고뉴의 마지막 봉건 백작이었다.
4. 부르고뉴 연합
오토 4세는 백국을 딸에게 지참금으로 양도하고 1295년에 프랑스 왕을 지참금 관리자로 지정했다. 그의 딸이자 상속녀인 잔과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는 공작령과 백국을 자신의 통치 하에 재통합했으며, 그의 손자인 필리프 1세, 부르고뉴 공작이 그 뒤를 이었다. 개인 연합은 1361년 필리프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다시 깨졌다. 부르고뉴 공작령은 프랑스 국왕 장 2세에 의해 반환된 봉토로 몰수되었고, 제국 백국은 오토 4세 백작의 손녀이자 필리프의 고모 할머니인 마르그리트 1세, 부르고뉴 여백작에게 상속되었다. 1382년, 마르그리트 1세는 자신의 영지를 아들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에게 유증했다. 용담공 필리프의 통치 기간 동안, 백국은 수도 돌을 중심으로 의회와 의회를 갖도록 조직되었다.[3]
루이 2세는 1384년 남성 상속자 없이 사망했고, 부르고뉴 백국은 그의 딸 플랑드르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의 거대한 지참금의 일부가 되었으며, 1405년 그녀의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 무서운 자 장에게 상속되었다. 백국과 공작령은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그의 후손들에 의해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이 사망할 때까지 다시 개인 연합으로 통치되었다. 그의 사촌인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즉시 백국을 점령했지만, 합스부르크의 대공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샤를의 딸 부르고뉴의 마리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이 행동에 반대했다.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백국을 유지했다.
5. 스페인 통치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에 개입하기 위해 백국에 대한 분쟁에서 벗어나고자 1493년 생리스 조약을 통해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1세에게 백국을 양도했다.[3] 이후 부르고뉴 백국은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으며,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일부로 관리되었다. 스페인 길 무역로가 이 백국을 통과하며 이 지역의 다양한 스페인 영토를 연결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3]
스페인의 통치 기간 동안 백국은 번영했고 자치권을 누렸다. 돌의 의회는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지방 귀족 중에서 총독이 선출되었다. 스페인에 대한 세금은 낮았고, 징병도 많지 않았다. 브장송 시에는 많은 박람회가 열렸고, 많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건설되었다.[3]
6. 프랑스 정복
프랑스는 1674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의 일환으로 재침공하여 거의 저항 없이 이 지역을 다시 점령했다. 1678년 네이메헌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조약에 따라 프랑슈콩테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는 대가로 프랑스에 양도되었다.[1]
프랑슈콩테는 그 이후로 계속 프랑스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현재 부르고뉴-프랑슈-콩테 행정 구역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1]
참조
[1]
서적
Du royaume franc aux origines de la France et de l'Allemagne 800-1214
Presses Universitaires du Septentrion
2014
[2]
웹사이트
La construction de la Bourgogne Robertienne (936 - 1031).
https://www.academia[...]
2021
[3]
웹사이트
Franche-Comté Region of France - History
https://www.regions-[...]
2024-02-12
[4]
웹사이트
Franche-Comte {{!}} History, Culture, Geography, & Map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2-12
[5]
간행물
Chalon
Microsoft Corporation/Het Spectrum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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