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1세 (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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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리페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유럽 유력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하고,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분쟁에 연루되었다.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왕을 자처했지만, 후아나의 정신 질환과 장인 페르난도 2세와의 갈등으로 인해 공동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펠리페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했고, 그의 죽음은 후아나의 정신 질환을 악화시켰다. 펠리페 1세의 사후, 그의 아들 카를 5세가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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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1세 (카스티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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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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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리페 1세 / 필리프 4세 |
로마자 표기 | Pelipe 1se / Pillipeu 4se |
다른 이름 | 미남왕 |
출생일 | 1478년 7월 22일 |
출생지 |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플랑드르 백국 브뤼허 |
사망일 | 1506년 9월 25일 |
사망지 | 카스티야 왕국 부르고스 |
매장지 | 그라나다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 |
통치 정보 | |
작위 | 카스티야 국왕 부르고뉴 공작 |
재위 기간 (카스티야) | 1506년 7월 12일 - 1506년 9월 25일 |
공동 재위자 | 후아나 |
재위 기간 (부르고뉴) | 1482년 3월 27일 - 1506년 9월 25일 |
섭정 | 막시밀리안 1세 (1482년–1494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후아나 (카스티야) |
자녀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프랑스 왕비 엘레오노르 덴마크 왕비 엘리사베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 헝가리 왕비 마리어 포르투갈 왕비 카탈리나 |
아버지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
어머니 | 부귀공 마리 |
기타 정보 | |
왕가 | 합스부르크 가문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서명 | Signatur Philipp I. (Kastilien).PNG |
2. 생애
147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5]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며, 어머니 마리는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녀였다. 펠리페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5]
1477년 1월 5일, 외할아버지인 샤를 용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침공으로 부르고뉴 공국은 혼란에 빠졌다.[3] 그러나 1479년 8월 7일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기네가테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하고 혼란을 수습하였다.[7]
펠리페의 탄생은 부르고뉴 공국을 빼앗으려는 루이 11세에게 큰 타격이었다. 루이 11세는 브뤼헤에 펠리페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6] 그러자 샤를 용담공의 후처이자 마리 여공의 의붓어머니인 마거릿이 펠리페를 알몸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소문을 잠재웠다.[6]
1482년 3월, 어머니 부르고뉴의 마리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펠리페는 4세의 나이로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했다.[8]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여동생 마르가레테와 함께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인으로 지정되었고,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후견인이 되었다.[8] 그러나 프랑스의 선동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아라스 조약에 따라 여동생 마르가레테는 프랑스 왕태자 샤를과 약혼했다.[9] 펠리페는 헨트 시민들 밑에서 양육되었으며,[10] 아버지와 3년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1485년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반란을 평정하고 헨트를 함락시키면서 펠리페와 재회했다.[11] 어린 시절 이별을 겪은 탓에 펠리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고, 막시밀리안에게 안기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역시 재회의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12]
펠리페는 사냥과 마상 창시합에 능했고, 뛰어난 화술을 가진 미남으로 성장했다.
1496년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프랑스 견제의 필요성에 공감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간의 정략결혼이었다. 후아나는 남편에게 열정적으로 집착했지만, 펠리페는 여성 편력이 심해 여러 애인을 두었다.[19]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여왕 부군이었지만, 스페인을 싫어하고 플랑드르로 돌아가 아내를 홀로 남겨두는 일이 잦았다. 후아나는 남편의 애인에게 심한 질투심을 보였고, 펠리페는 후아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부부 관계는 악화되었다.[19]
1504년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자,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영토와 막대한 재산을 탐내며 여왕의 남편으로서 공동 통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카스티야의 왕을 자처했고,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후아나의 섭정이 되었다.[28]
1506년 6월 28일, 빌라파피야 조약( Treaty of Villafáfila|빌라파피야 조약영어)이 체결되어 카스티야 왕국, 그라나다 왕국, 레온 왕국이 펠리페의 통치하에 놓이는 것이 확정되었다. 펠리페는 '''"카스티야 왕 펠리페 1세"'''를 칭했지만, 코르테스 (의회)에서는 "왕의 배우자"(왕배)로만 인정받았다.[27]
그러나 귀족들은 처음에는 펠리페를 환영했지만 곧 반발했고,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배신 행위, 장인과의 대립, 현지 귀족과 부르고뉴 귀족의 대립, 스페인의 혹서 등 여러 어려움이 펠리페를 괴롭혔다.[32] 9월 초, 부르고스 체류 중 마신 찬물에 탈이 나, 9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후아나의 정신착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펠리페는 처음에 부르고스 대성당에 매장되었으나, 여성의 시신 접근을 꺼린 후아나의 뜻에 따라 그녀와 함께 스페인 각지를 떠돌았다.[33] 결국 토르데시야스 근교의 성 클라라 왕립 수도원에 매장되었고, 후아나도 아버지 페르난도 왕에 의해 수도원 인접 성관에 유폐되었다.
펠리페의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아들의 부고를 접하고 "주여, 어째서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중얼거리며 사흘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34]
2. 1. 가문과 출생 배경
147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5]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며, 어머니 마리는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녀였다. 펠리페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5]1477년 1월 5일, 외할아버지인 샤를 용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침공으로 부르고뉴 공국은 혼란에 빠졌다.[3] 그러나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1479년 8월 7일 기네가테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하고 혼란을 수습하였다.[7]
펠리페의 탄생은 부르고뉴 공국을 빼앗으려는 루이 11세에게 큰 타격이었다. 루이 11세는 브뤼헤에 펠리페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6] 그러자 샤를 용담공의 후처이자 마리 여공의 의붓어머니인 마거릿이 펠리페를 알몸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소문을 잠재웠다.[6]
2. 2. 어린 시절
1478년 5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휴전을 깨고 에노를 침공했으나,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는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같은 해 6월 22일 펠리페가 태어났으며, 증조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를 기려 이름 지어졌다.[5]부르고뉴 공국의 브뤼헤에서는 펠리페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의붓할머니 마거릿이 펠리페를 알몸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소문을 잠재웠다.[6]
1482년 3월, 어머니 부르고뉴의 마리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펠리페는 4세의 나이로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했다.[8]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여동생 마르가레테와 함께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인으로 지정되었고,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후견인이 되었다.[8] 그러나 프랑스의 선동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아라스 조약에 따라 여동생 마르가레테는 프랑스 왕태자 샤를과 약혼했다.[9] 펠리페는 헨트 시민들 밑에서 양육되었으며,[10] 아버지와 3년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1485년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반란을 평정하고 헨트를 함락시키면서 펠리페와 재회했다.[11] 어린 시절 이별을 겪은 탓에 펠리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고, 막시밀리안에게 안기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역시 재회의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12]
펠리페는 사냥과 마상 창시합에 능했고, 뛰어난 화술을 가진 미남으로 성장했다.
2. 3. 후아나와의 결혼
1496년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프랑스 견제의 필요성에 공감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간에 맺어진 정략결혼이었다.1496년 봄, 젤란트에 도착한 후아나 일행을 펠리페는 맞이하지 않아 신부를 실망시켰다.[16] 그러나 결혼식 전날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렸고, 만남에 참석한 스페인 사제에게 명하여 정식 결혼에 앞서 그 자리에서 간소한 결혼 의식을 거행했다.[17] 펠리페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와 달리 어리석고 평범한 군주에 불과했지만, 용모가 단정했다.[18]
그럼에도 부부 사이에서는 2남 4녀가 태어났고, 모두 성인으로 성장했다.
2. 3. 1. 정략결혼의 배경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는데, 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권위에 대한 침해로 여겨졌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의 관할권은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37]또한 스페인은 방계 가문이 통치하는 나폴리를 보호해야 했다. 프랑스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낀 막시밀리안 1세와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는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제1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위해, 막시밀리안 1세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로부터 적극적인 권유를 받았다.[13] 마르가리타와 프랑스 왕의 약혼이 1493년 상리스 조약에 의해 파기된 상황도 있었고, 스페인 측에서 이중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14]
이에 따라 스페인의 후안 왕자는 막시밀리안 1세의 딸 마르가레테와,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는 펠리페와 결혼하여 동맹을 공고히 하였다. 백년전쟁 종결 후 중앙집권에 성공한 프랑스는 점차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기에, 이 결혼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간의 정략결혼이었다.[38] 1496년 10월 20일, 후아나와 펠리페 1세의 결혼식이 현재 벨기에 리르에서 거행되었다.[38]
2. 3. 2. 결혼 생활과 갈등
1496년 펠리페는 스페인의 후아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정략결혼이었다.[37]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는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스페인은 나폴리를 지키고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3] 스페인의 후안 왕자와 막시밀리안 1세의 마르가레테, 후아나 공주와 펠리페 1세가 겹사돈을 맺어 동맹을 강화했다. 결혼식은 1496년 10월 20일 현재 벨기에 리르에서 열렸다.[38]후아나는 남편에게 열정적으로 집착했지만, 펠리페는 여성 편력이 심해 여러 애인을 두었다.[19]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여왕 부군이었지만, 스페인을 싫어하고 플랑드르로 돌아가 아내를 홀로 남겨두는 일이 잦았다. 후아나는 남편의 애인에게 심한 질투심을 보였고, 펠리페는 후아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부부 관계는 악화되었다.[19]
후아나의 기행으로 인해 부르고뉴 궁정에서 후아나와 스페인 사람들의 평판은 나빠졌고, 펠리페와 장인 페르난도 2세의 관계도 악화되었다.[19]
2. 4.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
1504년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자,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영토와 막대한 재산을 탐내며 여왕의 남편으로서 공동 통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카스티야의 왕을 자처했고,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후아나의 섭정이 되었다.[28]1506년 6월 28일, 빌라파피야 조약( Treaty of Villafáfila|빌라파피야 조약영어)이 체결되어 카스티야 왕국, 그라나다 왕국, 레온 왕국이 펠리페의 통치하에 놓이는 것이 확정되었다. 펠리페는 '''"카스티야 왕 펠리페 1세"'''를 칭했지만, 코르테스 (의회)에서는 "왕의 배우자"(왕배)로만 인정받았다.[27]
그러나 귀족들은 처음에는 펠리페를 환영했지만 곧 반발했고,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배신 행위, 장인과의 대립, 현지 귀족과 부르고뉴 귀족의 대립, 스페인의 혹서 등 여러 어려움이 펠리페를 괴롭혔다.[32] 9월 초, 부르고스 체류 중 마신 찬물에 탈이 나, 9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후아나의 정신착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2. 4. 1.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
가톨릭 왕의 외아들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이 1497년 10월에 병사했고, 그의 누나 이사벨이 1498년에 미겔을 출산한 후 사망하면서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은 후아나에게 넘어갔다. 1500년 7월에는 이사벨의 아들 미겔마저 요절하여 후아나의 왕위 계승은 더욱 확실해졌다. 후아나의 정신 건강은 1503년 둘째 아들 페르디난트를 출산했을 무렵부터 현저하게 악화되었다.[20]2. 4. 2. 이사벨 1세의 죽음과 페르난도 2세와의 대립
1506년 1월 7일, 후아나와 펠리페 일행은 해로로 출발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잉글랜드 도싯의 멜콤 레기스에 표류했다.[28] 같은 해 1월 31일, 펠리페 일행은 윈저 성에 도착하여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환대를 받았다.[29]펠리페와 헨리 7세는 회담을 통해 정치·군사적 협력 관계를 맺고, 펠리페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헨리 왕자(후의 헨리 8세), 펠리페와 후아나의 장남 카를 (카를로스)과 메리 공주의 약혼을 결정했다.[30]
같은 해 4월, 후아나와 펠리페 일행이 라 코루냐 항에 도착하자, 카스티야 귀족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굴복했다.[27] 페르난도는 귀족으로 변장하여 이들을 맞이했고, 도중의 교회에서 후아나의 카스티야 여왕 즉위와 펠리페의 섭정 취임을 인정했다.[31] 같은 해 6월 28일, 빌라파피야 조약이 체결되어 카스티야 왕국, 그라나다 왕국, 레온 왕국이 펠리페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면서 두 사람은 화해했다.[27] 펠리페는 아내와의 공동 통치를 주장하며 '''"카스티야 왕 펠리페 1세"'''를 칭했지만, 코르테스 (의회)에서는 "왕의 배우자"(왕배)로만 인정받았다.[27]
2. 4. 3. 카스티야 공동 통치와 급작스러운 죽음
1504년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자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영토와 막대한 재산을 탐내며 공동 통치 권리를 주장했고 카스티야의 왕을 자처했다. 결국 펠리페는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후아나의 섭정이 되었다.[28]1506년 1월 7일, 후아나와 펠리페 일행은 해로로 출발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잉글랜드 도싯의 Melcombe Regis|멜콤 레기스영어에 표류했다.[28] 1월 31일, 펠리페 일행은 윈저 성에 도착하여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환대를 받았다.[29] 펠리페와 헨리 7세는 회담을 통해 정치·군사적 협력 관계를 맺었고, 펠리페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헨리 왕자(후의 헨리 8세), 펠리페와 후아나의 장남 카를 (카를로스)과 메리 공주의 약혼이 결정되었다.[30]
4월, 후아나와 펠리페 일행이 라 코루냐 항에 도착하자, 카스티야 귀족들은 페르난도 5세의 재혼에 대한 불만으로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27] 페르난도는 귀족들의 반발이 아라곤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하여, 귀족으로 변장하여 이들을 맞이하고, 도중에 있는 교회에서 후아나의 카스티야 여왕 즉위와 펠리페의 섭정 취임을 인정했다.[31] 6월 28일, Treaty of Villafáfila|빌라파피야 조약영어이 체결되어 카스티야 왕국, 그라나다 왕국, 레온 왕국이 펠리페의 통치 하에 놓이는 것이 확정되었다.[27] 펠리페는 '''"카스티야 왕 펠리페 1세"'''를 칭했지만, 코르테스 (의회)에서는 "왕의 배우자"(왕배)로만 인정받았다.[27]
귀족들은 처음에는 펠리페를 환영했지만 곧 반발했고,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배신 행위, 장인과의 대립, 현지 귀족과 부르고뉴 귀족의 대립, 스페인의 혹서 등 여러 어려움이 펠리페를 괴롭혔다.[32] 9월 초, 부르고스 체류 중 마신 찬물에 탈이 나, 9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후아나의 정신착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2. 5. 펠리페 1세 사후
1504년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자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왕을 자처하며 공동 통치권을 주장했고,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후아나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2년 뒤 부르고스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후아나의 정신착란은 더욱 심해졌다.[33]펠리페는 처음에 부르고스 대성당에 매장되었으나, 여성의 시신 접근을 꺼린 후아나의 뜻에 따라 그녀와 함께 스페인 각지를 떠돌았다.[33] 결국 토르데시야스 근교의 성 클라라 왕립 수도원에 매장되었고, 후아나도 아버지 페르난도 왕에 의해 수도원 인접 성관에 유폐되었다.
펠리페의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아들의 부고를 접하고 "주여, 어째서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중얼거리며 사흘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34] 막시밀리안은 네덜란드 통치를 과부가 된 딸 마르그리트에게 맡겼다. 마르그리트는 메헬렌을 거점으로 삼아 통치와 조카들의 양육에 힘썼고, 명군으로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다.[35]
장인 페르난도는 제노바 체류 중에 부고를 접하고 나폴리로 가려 했으나,[36] 막시밀리안이 파견한 사절은 페르난도에게 로마 왕과 아라곤 왕의 '공통된 손자' 카를로스(훗날 카를 5세)에 의한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설득했다.[36] 이로써 카스티야 왕위는 카를로스에게 계승(명목상 어머니 후아나와의 공동 통치)되었고, 가까운 미래의 스페인 통합이 확실해졌다. 펠리페는 생전에 왕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성립되자,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펠리페라고 명명된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은 조부를 1세로 하여 펠리페 2세라고 칭했다.
3. 자녀
이름 | 배우자 | 출생-사망 |
---|---|---|
레오노르 | 마누엘 1세, 프랑수아 1세 | 1498년 - 1558년 |
카를 5세 | 1500년 - 1558년 | |
이사벨 | 크리스티안 2세 | 1501년 - 1526년 |
페르디난트 1세 | 1503년 - 1564년 | |
마리아 | 러요시 2세 | 1505년 - 1558년 |
카탈리나 | 주앙 3세 | 1507년 - 1578년 |
4. 가계도
펠리페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와 부르고뉴 공국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펠리페 1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펠리페 1세 |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 증조 할아버지: 에른스트 |
증조 할머니: 침발카 마조비에츠카 | |||
할머니: 엘레오노르 | 증조 할아버지: 두아르트 1세 (포르투갈 왕)[1] | ||
증조 할머니: 레오노르[2] | |||
어머니: 마리 | 할아버지: 샤를 | 증조 할아버지: 필리프[3] | |
증조 할머니: 이사벨[1] | |||
할머니: 이사벨 | 증조 할아버지: 샤를 1세 | ||
증조 할머니: 아녜스[3] |
- 주앙 1세의 자녀인 두아르트 1세와 이사벨은 형제자매이며, 항해왕자 엔히크, 성왕자 페르난두도 형제자매이다. 따라서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는 증조할아버지인 주앙 1세를 공유하는 고종사촌 관계이다.
- 레오노르는 아라곤 왕국 페르난도 1세의 공주이다. 따라서 펠리페 1세에게는 고조부, 후아나에게는 증조부를 공유하는 먼 친척 관계이다.
- 필리프와 아녜스는 장 1세의 자녀로 형제자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