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문인)
1. 개요
부산은 명나라 멸망 이후 도사의 모습으로 의술을 행하며 생계를 유지한 문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비상한 재능을 보였고, 경서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명경에 급제했다. 화가로서는 산수와 묵죽에, 서예가로서는 예서와 금석 전각에 능했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상홍감집』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70세에 박학홍유과에 추천되어 북경으로 소환되었으나 시험을 거부하고 중서사인 임명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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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장가 -
당송팔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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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장가 -
가의 (전한)
가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학가로, 문제의 중용을 받았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좌천되었으며, 유가 사상을 바탕으로 내외 정책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펼친 인물이다. -
1684년 사망 -
김석주
김석주는 조선 중기의 서인 정치가로, 명성왕후의 친척이자 뛰어난 능력으로 요직을 역임하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지만, 예송 논쟁과 남인 숙청에 관여하며 정치적 부침을 겪었고 서인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 인물이다. -
1684년 사망 -
명성왕후
명성왕후는 조선 현종의 계비이자 숙종의 생모로, 왕대비로서 조정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남인 세력을 견제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무속 신앙에 심취하다 사망하여 그녀의 행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
청나라의 서예가 -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군사 전략가, 공산주의 이론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아버지로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을 통치했고, 마오쩌둥 사상의 창시자로서 그의 정책과 통치는 중국 사회, 경제, 문화, 외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청나라의 서예가 -
정샤오쉬
정샤오쉬는 청나라 말기 외교관, 만주국 초대 국무원 총리, 서예가로 활동했으며,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았으나 뛰어난 서예 작품을 남겼다.
2. 생애
부산은 어린 시절부터 재능이 뛰어나 경서와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명경에 급제했다. 명나라 멸망 후에는 도사로 활동하며 의술로 생계를 유지했다. 청나라 강희 연간(1679년)에 박학홍유과에 추천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산수와 묵죽을 잘 그렸고, 서예에서는 예서와 전각에 능통하여 조집신으로부터 당대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문집으로 『상홍감집(霜紅龕集)』이 있다.
2.1. 어린 시절과 명경 급제
어린 시절부터 비상한 재능을 보여, 한 번 눈에 들어온 글자는 반드시 암송했다고 한다. 널리 경서(經史),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설에 통달하여 태원(太原)에서 명경(明經)에 급제했다.
2.2. 명나라 멸망 이후의 삶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부산은 도사의 모습으로 의술을 행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679년(강희 18년)에는 70여 세의 나이로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에 추천되어 북경으로 소환되었지만, 중병을 핑계로 성 서쪽의 오래된 절에 머물며 시험을 거부했다. 이후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었으나, 이 역시 노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화가로서는 산수와 묵죽을 잘 그렸고, 서예가로서는 예서와 금석의 전각에 능통하여 조집신으로부터 당대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산은 스스로를 높이 여겨 함부로 붓을 들지 않았기에, 그의 글씨는 일자천금(一字千金)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시문에도 뛰어나 『상홍감집(霜紅龕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2.3. 박학홍유과 추천과 사임
강희( 康熙중국어 (간체) ) 18년(1679년), 70여 세의 나이로 박학홍유과( 博學鴻儒科중국어 (간체) )에 추천되어 북경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핑계로 성 서쪽의 고찰( 古刹중국어 (간체) )에 머물며 시험 응시를 거부했다. 이후 중서사인( 中書舍人중국어 (간체) )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이 역시 노병( 老病중국어 (간체) )을 이유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3.1. 회화
화가로서 산수화와 묵죽을 잘 그렸다. 스스로를 존중하여 함부로 붓을 잡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2. 서예
서예가로서는 예서와 금석의 전각에 능통하여 조집신에 의해 본조 제일로 칭송받았다. 전산은 스스로를 존중하여 함부로 붓을 잡지 않았고, 그의 글씨는 일자천금(一字千金)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3.3. 시문
시문에도 능하여 『상홍감집(霜紅龕集)』이라는 시집이 있다.
4. 평가 및 영향
부산의 학문과 예술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평가받았다. 그의 독창적인 서예와 회화 양식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동아시아 서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그의 예술적 성취와 사상은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4.1. 당대의 평가
부산은 학문과 예술 여러 방면에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설에 널리 통달하여 학문적 깊이를 인정받았으며, 강희(康熙) 18년(1679년)에는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에 추천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예술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림에서는 산수화와 묵죽화를 잘 그렸고, 서예에서는 예서와 금석(金石)의 전각(篆刻)에 능통하여 조집신으로부터 '본조(本朝) 제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부산은 스스로의 작품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붓을 들지 않았으며, 그의 글씨는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 불릴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다. 또한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상홍감집(霜紅龕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