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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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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성왕후는 조선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이다. 1642년 김우명과 은진 송씨 사이에서 태어나 1651년 현종과 혼인하여 왕세자빈이 되었고, 현종 즉위 후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등을 두었으며, 현종 사후에는 현렬왕대비가 되어 정치에 관여했다. 특히, 남인 세력을 견제하고 서인을 지지하며, 며느리 인현왕후를 숙종의 계비로 추천했다. 1683년 숙종의 병환을 낫게 하려다 감기에 걸려 사망했으며, 능은 현종과 합장된 숭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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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배 칭호조선 왕비
휘호현렬희인정헌문덕
시호명성
존호현열왕대비
전호영모전
능묘숭릉
능묘 위치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생애
출생일1642년 6월 3일 (양력)
출생지조선 한성부 장통방 사제
사망일1684년 1월 11일 (음력)
사망지조선 창경궁 저승전
가족 관계
가문청풍 김씨
부친김우명 (청풍부원군)
모친은진 송씨 (덕은부부인)
배우자현종
자녀1남 3녀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왕비 책봉 및 추존
세자빈 책봉1651년 11월 21일 (음력)
왕비 책봉1659년 5월 9일 (음력)
왕대비 책봉1674년 8월 23일 (음력)
재위 기간
세자빈1651년 11월 21일 ~ 1659년 5월 9일 (음력)
왕비1659년 5월 9일 ~ 1674년 8월 22일 (음력)
왕대비1674년 8월 23일 ~ 1683년 12월 5일 (음력)
기타
별칭명성성모, 명성대비

2. 생애

1642년 5월 17일(다른 기록에는 6월 3일)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의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효종 대 영의정을 지낸 김육이다.

1651년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당시 왕세자였던 현종과 가례를 올렸다.[1] 1658년 첫 딸인 군주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2]

1659년 남편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숙종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으나, 첫째 딸과 명선공주, 명혜공주는 일찍 사망하였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아들 숙종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어 현렬(顯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숙종이 수렴청정을 거부하고 직접 통치하였으나, 명성왕후는 왕대비로서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하여 남인 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아들의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왕실 종친인 인평대군의 아들들(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홍수의 변과 같은 사건을 통해 제거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 개입은 남인으로부터 문정왕후에 빗댄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서인 세력과의 연계를 고려하여 송준길의 외손녀인 인현왕후 민씨를 새 왕비로 추천하여 1681년 간택되도록 하였다. 또한 숙종이 총애하던 남인 가문 출신의 궁녀 장옥정(희빈 장씨)을 그 출신과 성품을 문제 삼아 궁궐 밖으로 내쫓는 등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1683년 겨울, 숙종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아들의 쾌유를 빌기 위해 무속 신앙에 의지하여 혹한 속에서 여름 옷을 입고 물을 뿌리는 기도를 하다가 심한 감기에 걸렸다. 이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어 1684년 1월 21일(음력 1683년 12월 5일) 창덕궁 조성전에서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사후 '명성'(明聖)이라는 시호를 받아 명성왕후로 추존되었다.

2. 1. 탄생과 세자빈 시절

1642년 (인조 20년) 5월 17일,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1] 다른 기록에는 같은 해 6월 3일 장통방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아버지는 청풍 김씨 가문이며, 어머니 은진 송씨서인의 주요 인물인 송시열, 송준길과 먼 친척 관계였다. 할아버지는 효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김육이다.

1651년 (효종 2년) 11월 2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빈례(冊嬪禮)를 치르고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되었다.[1] 같은 해 12월, 당시 왕세자였던 현종과 가례(嘉禮)를 올렸다. 왕세자빈 시절에는 빈궁(嬪宮) 김씨로 불리기도 하였다.

1658년 (효종 9년), 첫 아이를 임신하여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되었고, 첫 딸인 군주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2]

2. 2. 왕비 · 왕대비 시절

1659년(현종 즉위년) 남편인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숙종과 딸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1673년(현종 14년)에는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를 같은 해에 잃는 슬픔을 겪었다.

1674년 8월, 현종이 승하하고 아들 숙종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어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로 존호를 받았다. 숙종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정사를 돌보았다. 왕대비는 이후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하여 남인 세력의 비판을 받았다. 숙종은 어머니의 간섭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뜻에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등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다. 《숙종실록》에는 왕대비가 서인 구신들이 쫓겨날 때마다 숙종에게 울며 호소했으나 숙종이 듣지 않았고, 외조부 김우명이 나서서 효도를 명분으로 왕대비의 말을 따르라고 종용했지만 숙종이 불쾌해하며 침묵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대비는 정치에 자주 개입하며 남인을 비판했고,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궁녀와 간통했다는 거짓 죄를 씌웠다. 이는 왕대비가 그들을 아들 숙종의 왕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부족했으며, 오히려 왕대비의 아버지 김우명이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왕대비는 직접 나서 처소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아들 숙종에게 세 왕자의 죄를 물을 것을 간청했다. 결국 숙종은 세 왕자를 유배 보냈고, 남인들은 왕대비의 지나친 정치 개입을 비판하며 문정왕후에 빗대어 비난했다. 이 일로 김우명은 수치심 속에 집에 칩거하다 심한 우울증으로 사망하였다.

1680년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왕대비는 송준길의 외손녀이자 서인 세력의 지지를 받던 민씨(인현왕후)를 새 왕비로 추천하여 1681년 숙종과 혼인하게 했다.

숙종과 궁녀 장옥정(희빈 장씨)의 관계를 알게 된 왕대비는 장씨를 궁궐에서 내쫓았다. 표면적으로는 장씨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남인 가문 출신인 장씨를 남인의 첩자로 의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683년 숙종이 병으로 의식을 잃자, 왕대비는 그의 회복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평소 무속 신앙을 깊이 믿었던 왕대비는 무당의 조언에 따라 한겨울임에도 여름 옷을 입고 물을 뿌리는 기도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심한 감기에 걸려 같은 해 음력 12월 5일(양력 1684년 1월 21일) 창덕궁 조성전(昭聖殿)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신하들은 무당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숙종은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사후 '명성'(明聖)이라는 시호를 받아 명성왕후로 추존되었다.

2. 3. 홍수의 변

명성왕후는 나이 어린 숙종의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삼아, 당시 왕실 내에서 영향력이 커지던 종친 세력을 경계하였다. 특히 효종과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삼복(三福)'이라 불리던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명성왕후는 자신의 아버지인 김우명과 함께 복창군과 복평군 형제가 궁궐 내에서 궁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이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은 궁녀를 뜻하는 '붉은 옷소매'라는 의미의 홍수(紅袖)를 사용하여 홍수의 변이라고 불린다.

1675년(숙종 1년), 김우명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사건이 시작되었으나,[3] 명확한 증거가 부족했고 남인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남인윤휴허목 등은 오히려 김우명을 반좌율(무고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명성왕후는 직접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며 복창군 형제의 죄를 주장했지만,[6] 숙종은 관련자들을 정배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7]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명성왕후에게 정치적 실익을 안겨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왕비의 정치 개입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남인들은 명성왕후를 중종 대의 문정왕후에 빗대며 비난하기도 했다.[8] 또한 아버지 김우명은 이 일로 정치적 타격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서인남인 간의 당파적 대립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2. 3. 1. 배경

명성왕후는 나이 어린 숙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종친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당시 삼복(三福)이라 불리며 효종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 즉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을 잠재적 위협으로 여겼다.

이에 명성왕후는 아버지 김우명과 함께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복창군과 복평군이 왕의 총애를 믿고 궁궐에 자주 드나들며 궁녀들을 희롱하였고, 심지어 인선왕후의 국상 중에 현종의 승은을 입었던 궁녀 김상업과 내수사 시녀 귀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 사건은 궁녀를 뜻하는 '붉은 옷소매'라는 의미의 홍수(紅袖)를 사용하여 홍수의 변이라고 불린다.

2. 3. 2. 경과

명성왕후는 나이 어린 숙종의 주변에 종친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당시 '삼복(三福)'이라 불리며 효종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 즉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이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과 복평군이 국왕의 총애를 힘입어 궁중에 자주 드나들며 궁녀들을 희롱하고, 심지어 인선왕후의 국상 중에 현종의 승은을 입은 궁녀 김상업 및 내수사 시녀 귀례와 간통하였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홍수의 변’이며, 홍수(紅袖)는 '붉은 옷소매'라는 뜻으로 궁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1675년(숙종 1년), 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차자를 올려, 숙종의 당숙이자 현종의 사촌 형제들인 복창군복평군 형제가 궁인과 간통하여 자식까지 낳았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의금부에서는 복창군과 복평군, 궁녀 김상업을 체포하여 신문하였고, 명성왕후는 궁녀 귀례를 따로 붙잡아 직접 장을 치며 신문하였다.[4] 그러나 명성왕후의 증언 외에는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자, 숙종은 다른 사람의 말만 믿고 종친을 의심했다며 이들을 풀어주었다.[5]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인 세력인 윤휴허목 등은 오히려 사건을 처음 고발한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반좌율(무고한 내용을 기준으로 처벌하는 것)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친정아버지 김우명이 처벌받을 위기에 놓이자, 명성왕후는 숙종이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직접 나아가 여러 대신 앞에서 통곡하며 복창군복평군이 궁녀들과 간통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현종과 대왕대비(장렬왕후)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6]

'''청풍부원군 김우명''' (1619-1675) 명성왕후의 아버지로, 홍수의 변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곧이어 병사하였다.


'''김육''' (1580-1658) 명성왕후의 할아버지이자 김우명의 아버지로, 효종대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대동법의 전국적인 확대를 건의하였다. 정조효의왕후의 6대조이다.


'''김석주''' (1634-1684)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이며, 김우명의 형인 김좌명의 아들이자 김육의 손자이다. 선조의 셋째 딸인 정숙옹주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경신환국을 기획하여 남인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 김우명(金佑明)을 패초(牌招, 승지가 왕명을 받고 신하를 부름) 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
(중략)


> 때가 이미 어두웠으므로 전상(殿上)에는 촛불이 밝게 비쳤다.

> 대신 이하가 들어가 자리에 가서 부복(俯伏)하니,

> 문짝 안에서 부인(婦人)의 울음소리가 나므로

> 비로소 자전(慈殿, '''명성왕후''')이 나와 있는 것을 알았다.

> ----

> 허적이 말하기를,

>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신(臣)들은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나는 내간(內間)의 일을 모르므로,

> 자전('''명성왕후''')께서 복평군(福平君) 형제의 일을 말하려고 여기에 나오셨다."

> 하였다.

>
(중략)


> 허적이 말하기를,

> :"자전께서 하교하시려는 일이라면 신들이 진실로 들어야 마땅하니,

> 전하께서 안에 들어가 그 울음을 그치시도록 청하셔야 하겠습니다."

>

> 자전('''명성왕후''')이 말하기를,

> :"미망인이 세상에서 살 뜻이 없어 늘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데,

> 이제 망측한 일이 있어 선조(先朝, 현종)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 선왕(현종)께서 복창군(福昌君) 형제를 두텁게 사랑한 것을 외신(外臣)들이 아는 바인데,

> 궁중에서 예모(禮貌)가 지극히 엄하여 나도 선왕의 지극하신 뜻을 몸받아

> 차이 없이 대우하였다.

>

> 이제 이들이 범한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나,

> 드러나게 되면 죽을 처지에 나아가게 될까 염려되므로,

> 내가 편의한 대로 처치하려 하였는데, 주상(主上, 숙종)은 어려서 곡절을 모르신다.

>
(중략)


> 이 목숨은 돌볼 것도 못되나,

> 선왕께서 이들을 친애하여 죄를 덮어 주려 하신 것이 도리어 무함으로 돌아가니,

> 드러내어 밝히지 않고 죽으면 지하에서 선왕을 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 우선 죽는 것을 참고 대신에게 말하려는 것이다."

>
(중략)


> 하고, 이어서 또 울면서 말하기를,

> :"모진 목숨이 이제까지 죽지 않고 이런 망극한 변을 당하였다.

> 이제 이 일을 당하여 선왕의 누가 될까 염려되므로, 한 몸의 옳고 그름을 헤아리지 않고

> 신하들에게 한 번 드러내어 밝히고 나서 죽는 것이 쾌할 따름이다."

> 《숙종실록》 3권, 숙종 1년(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3월 14일 (임신)

명성왕후가 편전에서 숙종과 대신들에게 직접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6]

> * 효종과 인선왕후가 삼복 형제(복창군 · 복선군 · 복평군)를 아들처럼 여겨 궁중에서 양육하였는데, 복창군과 복평군이 인선왕후의 상 중에 궁녀 김상업(金常業), 귀례(貴禮)와 간통하였다.

> * 이전에도 이들 형제는 선왕(현종)의 총애를 믿고 궁궐에 자주 드나들며 궁녀들을 희롱하거나 서로 통정하기까지 하였다.

> * 궁녀 김상업은 선왕(현종)의 승은을 입은 자이다.

> * 복창군은 김상업에게, 복평군은 귀례에게 연정을 품고 궁중에서 서로 희롱하였고, 복평군과 귀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회상전의 월랑에서 밀회하였다.

> * 당시 선왕(현종)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남녀의 욕정은 남이 제지하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 복창군의 기색을 보니 큰 우환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이 사실이 알려져 대신들이 삼복 형제의 죄를 청하게 되면 이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속으로 참고 견디시다가 승하하셨다.

> * 내가 무엇 때문에 모함을 하겠는가? 이때 궁중 깊숙한 일을 나이 어린 주상(숙종)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 * 이들의 죄상이 이처럼 명백한데, 주상께서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다만 파직하여 내치게 하시고, 궁녀는 죄주어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 * 이들의 죄는 대왕대비(장렬왕후)께서도 아시는데, 주상께서 어려서 내간의 일을 모르면서 내 말은 듣지 않으셨다.

> * 이대로 두면 궁중이 어지러워질 것이므로 내가 아버지(청풍부원군 김우명)에게 말하여 '아버지가 주상께 차자를 올려 주청드리시라' 한 것이다.

> * 그런데도 주상(숙종)은 남의 말을 믿고, 내게 '사람을 망측하게 모함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일을 잘 아는 사람이 나인데도 주상이 이처럼 의심하신다. 오늘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일을 말하지 않으면 언제 말하겠는가?

> * 선왕(현종)께서 선처(善處)하지 못하시어 오늘의 일이 있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직 대신에게 어린 임금을 보도하여 나라의 일을 잘 다스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2. 3. 3. 결과

명성왕후가 직접 나서서 복창군복평군 형제의 죄를 주장하자, 대신들은 더 이상 명성왕후를 의심하거나 김우명을 공격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숙종복창군복평군, 그리고 관련 궁녀인 김상업과 귀례를 정배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7] 하지만 숙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복창군 형제를 귀양지에서 풀어주어 사실상 이들의 편을 들어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을 지켜본 남인 세력은 명성왕후의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중종의 계비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에 빗대어 "문정왕후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며, 왕비가 정치에 직접 간섭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불만을 드러냈다.[8]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해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망신을 당했으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홍수의 변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서인남인 사이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2. 4. 경신환국

1680년(숙종 6년), 숙종은 남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서인과 함께 경신환국을 일으켰다. 이는 남인 윤휴가 과거 홍수의 변 당시 명성왕후의 정치 간섭을 비판하며 숙종에게 '왕대비(慈聖)를 조관(照管)하라'고 말했던 것이 빌미가 되었다. '어머니 단속 좀 잘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발언으로 인해 윤휴는 서인의 집중 공격을 받아 결국 사사되었다.

또한, 남인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과 관련된 사건도 경신환국의 배경이 되었다. 허견의 아내 홍예형은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의 첩 홍씨와 자매 관계였는데, 김우명의 첩 홍씨가 여동생의 남편인 허견과 말다툼을 하다가 허견에게 맞아 이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하였다.[11] 비록 첩이었지만 명성왕후의 서모(庶母)를 폭행한 허견에 대해 숙종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12] 당시 허견의 아버지 허적이 사실무근이라며 상소하자 숙종은 일단 사건을 무마하였으나, 내심 허적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허적 (1610-1680). 남인의 영수이자 명성왕후의 정적으로 경신환국 때 아들 허견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숙종은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이자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가 주도한 고변을 계기로 경신환국을 단행했다. 김석주는 허견인조의 손자들인 삼복 형제(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와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했고, 숙종은 이를 빌미로 삼복의 옥을 일으켜 관련자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 사건으로 명성왕후의 정적이자 홍수의 변 당시 명성왕후와 김우명을 비판했던 허적윤휴가 사사되었고, 종친인 복창군복선군 역시 처형되었다. 허목은 관직에서 쫓겨났다. 경신환국으로 남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기사환국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0년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정국은 숙종의 주도하에 서인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경신환국의 처리 과정에서 서인 내부에 갈등이 생겨 노론소론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2. 5. 경신환국 이후

1680년(숙종 6년) 10월, 며느리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성왕후는 새로운 중전을 간택할 것을 지시했다. 대신들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으나, 명성왕후는 '강한 나라가 옆에 있으니 고집할 수 없다'고 하며 다음 해인 1681년(숙종 7년) 5월, 서인의 영수 송준길의 외손녀이자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민씨를 새로운 중전으로 맞이하였다.[13] 이는 서인 세력과의 연계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후 숙종남인 출신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총애하자, 명성왕후는 이를 강하게 경계하였다. 명성왕후는 장씨가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점과 그 성품을 문제 삼아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훗날 인현왕후가 장씨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려 했을 때, 명성왕후는 강하게 반대하며 장씨가 장차 국가에 화를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년) 12월 10일 기록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인현왕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전(內殿, 인현왕후)이 그 사람(희빈 장씨)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며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총애를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이에 인현왕후는 "어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헤아려 국가의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라고 답했으나, 명성왕후는 끝내 장씨의 복귀를 허락하지 않았다.

1683년 겨울, 숙종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명성왕후는 아들의 쾌유를 빌기 위해 무속 신앙에 의지했다. 무당의 조언에 따라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여름 옷을 입고 몸에 물을 뿌리며 기도를 올렸다. 이로 인해 심한 독감에 걸려 1684년 1월 21일(음력 1683년 12월 5일) 창덕궁 조성전(昭聖殿)에서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신하들이 무당을 처형할 것을 청했으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 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사후 '명성'(明聖)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명'(明)은 사리 분별이 밝음을, '성'(聖)은 덕이 높고 성스러움을 뜻한다.

3. 최후

1675년(숙종 1년) 홍수의 변으로 아들 숙종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아버지 김우명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명성왕후는 큰 충격을 받고 식음을 전폐하며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9] 1676년(숙종 2년)에는 '''현열왕대비'''(顯烈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10]

1680년(숙종 6년), 커져가는 남인 세력을 견제하려는 숙종의 의도 아래 경신환국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남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휴는 과거 홍수의 변 당시 명성왕후의 정치 개입을 비판하며 숙종에게 '왕대비(慈聖)를 조관(照管)하라'고 했던 발언이 서인의 공격 빌미가 되어 사사되었다. 또한, 남인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이 명성왕후의 서모(庶母)를 폭행한 사건[11][12]삼복의 옥(허견과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의 역모 혐의)이 연이어 터지면서,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인 김석주 등이 주도한 서인의 공세 속에 허적 부자와 관련자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이로써 홍수의 변 당시 명성왕후와 대립했던 허적, 윤휴 등 남인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정계에서 밀려났다.

같은 해 10월, 며느리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성왕후는 서인 세력과의 연계를 고려하여 송준길의 외손녀인 인현왕후 민씨를 다음 왕비로 적극 추천하여 1681년에 간택을 성사시켰다.[13] 이후 숙종이 남인 가문 출신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총애하자, 명성왕후는 장씨가 남인의 첩자일 수 있다는 정치적 경계심과 더불어 그녀의 성품을 문제 삼아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명성왕후는 훗날 인현왕후에게 장씨가 간사하고 악독하여 총애를 받으면 국가에 큰 화를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683년(숙종 9년), 숙종이 원인 모를 병으로 위독해지자 평소 무속 신앙을 깊이 믿었던 명성왕후는 아들의 쾌유를 빌기 위해 굿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무녀의 말을 따라 혹독한 추위 속에 무리한 의식을 행하다가 독감을 얻어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그해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훙서하였다.[14]

3. 1. 사망

1683년(숙종 9년), 숙종이 원인 모를 병으로 사경을 헤매자 평소 무속 신앙을 깊이 믿었던 명성왕후는 아들의 쾌유를 빌기 위해 굿을 벌였다. 이때 무녀 막례는 왕의 병이 삼재(三災) 때문이며,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 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성왕후는 무당의 말을 그대로 믿고,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찬물로 목욕 재계하는 의식을 강행하였다. 《숙종실록》에는 임금의 병이 위독하였을 때 자성(慈聖, 명성왕후)의 근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속세의 미신을 믿고 목욕 재계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았고 날로 점차 위독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14]

결국 이 일의 후유증으로 심한 독감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었고, 같은 해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42세의 나이로 훙서하였다.[14]

명성왕후 사후, 무녀 막례가 평소 옥교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며 위세를 부리고 재물을 탐한 사실이 드러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5]숙종실록》에는 막례가 숙종이 두질(痘疾)을 앓았을 때 술법을 가지고 궁궐에 들어와 기양법을 행하였는데, 대비(명성왕후)에게 매일 차가운 샘물로 목욕할 것을 청하고 궁인들을 꾀어 재화와 진귀한 보물을 많이 취하였으며, 출입 시에는 항상 교자(轎子)를 타고 다녀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5] 신하들은 명성왕후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막례를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숙종은 평소 사리분별이 분명했던 어머니가 무녀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을 리 없다며 막례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16]

3. 2. 능묘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현종과 합장되어 있는 숭릉(崇陵)이다.

4. 가족 관계

'''왕가 (媤家)'''
관계작호이름본관생몰년비고
시아버지제17대 효종대왕
孝宗大王
이호
李淏
전주 이씨1619년 - 1659년
시어머니인선왕후
仁宣王后
장씨
張氏
덕수 장씨1619년 - 1674년
배우자제18대 현종대왕
顯宗大王
이연
李棩
전주 이씨1641년 - 1674년



'''친정 (親庭) : 청풍 김씨'''
관계작호이름본관생몰년비고
친조부문정공
文貞公
김육
金堉
청풍 김씨1580년 - 1658년영의정 역임
친조모정부인 파평 윤씨
貞夫人 坡平 尹氏
윤씨
尹氏
파평 윤씨1580년 - 1656년윤급(尹汲)의 딸[17]
외조부증 좌찬성 효정공
贈 左贊成 孝貞公
송국택
宋國澤
은진 송씨1589년 - 1638년
외조모증 정경부인 진주 강씨
贈 貞敬夫人 晋州 姜氏
강씨
姜氏
진주미상 - 1656년강흡(姜洽)의 딸[18]
아버지청풍부원군 충익공
淸風府院君 忠翼公
김우명
金佑明
청풍 김씨1619년 - 1675년
어머니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德恩府夫人 恩津 宋氏
송씨
宋氏
은진 송씨1621년 - 1660년
숙부청릉부원군 충숙공
淸陵府院君 忠肅公
김좌명
金佐明
청풍 김씨1616년 - 1671년
사촌청성부원군 문충공
淸城府院君 文忠公
김석주
金錫冑
청풍 김씨1634년 - 1684년
오빠김만주
金萬周
청풍 김씨
남동생김석익
金錫翼
청풍 김씨
남동생김석연
金錫衍
청풍 김씨1648년 - 1723년효의왕후의 고조부
남동생김석달
金錫達
청풍 김씨
이복 남동생김석천
金錫賤
청풍 김씨
이복 여동생청풍 김씨청풍 김씨
이복 남동생김석구
金錫耉
청풍 김씨
이복 남동생김석제
金錫悌
청풍 김씨
이복 여동생청풍 김씨청풍 김씨
이복 남동생김석선
金錫善
청풍 김씨
이복 남동생김석순
金錫順
청풍 김씨



'''자녀'''
구분작호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장녀공주[2][19]1658년 - 1658년요절
차녀명선공주
明善公主
1659년 - 1673년맹만택(孟萬澤)혼인 전에 요절[20]
장남제19대 숙종대왕
肅宗大王

1661년 - 1720년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삼녀명혜공주
明惠公主
1663년 - 1673년신요경(申堯卿)혼인 전에 요절[21]
사녀명안공주
明安公主
온희
溫姬[22]
1665년 - 1687년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



'''손자녀'''
부모작호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숙종대왕제20대 경종대왕
景宗大王

1688년 - 1724년단의왕후 심씨
선의왕후 어씨
희빈 장씨 소생
제21대 영조대왕
英祖大王

1694년 - 1776년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숙빈 최씨 소생
연령군
延齡君

1699년 - 1719년상산군부인 김씨명빈 박씨 소생
명안공주오원
吳瑗

1700년 - 1740년양자
오진주(吳晋周)의 아들


5. 평가

청풍 김씨 가문 출신인 명성왕후는 지능이 비상하고 총명하다는 평가와 함께, 성격이 매우 강하고 거칠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11] 일설에는 그녀의 강한 성정 때문에 현종이 후궁을 두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1]

왕비가 된 이후, 서인 세력의 중심 인물로서 남인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였다.[11][12] 아들인 숙종 즉위 후에는 왕대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현종의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위협으로 간주하여 제거하려 시도하거나[11][12] 숙종이 총애하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남인과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내쫓는 등[11][12] 과감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정치 개입과 단호한 성격은 서인 세력에게는 힘이 되었을 수 있으나, 반대파인 남인 세력과 유림 사회로부터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11][12] 명성왕후의 노골적인 언사와 감정 표현, 정치 관여는 종종 문정왕후에 비견되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2] 또한, 숙종의 병환 치유를 위해 무속 신앙에 의지하여 한겨울에 물을 맞으며 기도를 드리다 병을 얻어 사망한 일화는[12] 그녀의 성격과 신념을 보여주는 동시에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후 '명성'(明聖)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명'(明)은 신중함을, '성'(聖)은 덕과 검소함을 의미한다.[12] 그러나 그녀의 실제 정치적 행보와 강한 성격에 대한 평가는 시호의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조선 왕비 중 정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5. 1. 부정적 평가

청풍(淸風) 김씨 가문 출신인 명성왕후는 지능이 비상하고 총명하였으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현종이 후궁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1]

서인 세력의 일원으로서 남인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며, 특히 현종의 사촌형제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하 삼복 형제)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아버지 김우명과 함께 홍수의 변을 일으켜 이들 삼복 형제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11][12] 또한 명성왕후는 자주 정치에 개입하여 남인을 비판했으며, 삼복 형제가 궁녀와 간통했다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는데, 이는 그들이 아들 숙종의 왕위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해석된다.[1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부족했으며, 오히려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이러한 중상모략을 주도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명성왕후는 직접 나서서 처소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아들 숙종에게 삼복 형제의 죄를 입증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결국 숙종은 세 왕자를 유배 보냈고, 남인들은 명성왕후의 정치 개입을 강하게 비난하며 그녀를 문정왕후의 환생이라고 조롱했다.[12] 아버지 김우명은 이 일로 인한 수치심과 심적 고통 속에 칩거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숙종이 총애하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궁궐에서 내쫓기도 했는데, 이는 장씨의 가문이 남인이었기에 남인의 첩자로 의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과 함께, 그녀의 낮은 신분 때문에 무지하고 사악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11][12]

명성왕후는 정사에 직접 관여하며 노골적인 언사와 감정 표현을 드러내 사대부와 유림(儒林)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1] 남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휴홍수의 변 당시 명성왕후의 정치 간섭을 비판하며 숙종에게 '왕대비(慈聖)를 조관(照管)하라'고 직언했는데, 이는 '어머니 단속 좀 잘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 발언은 훗날 서인의 공격 빌미가 되어 윤휴가 사사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의 서자 허견 또한 명성왕후와 악연이 있었다. 허견의 아내 홍예형은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의 첩 홍씨와 자매 관계였는데, 김우명의 첩 홍씨가 여동생의 남편인 허견과 말다툼을 하다가 허견에게 맞아 이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11] 비록 첩이었지만 자신의 서모(庶母)를 폭행한 허견에 대해 명성왕후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고, 이는 숙종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2] 당시 허견의 아버지 허적이 사실무근이라며 상소하자 숙종은 일단 사건을 무마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12]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숙종은 커져가는 남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경신환국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이자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가 주도하여 허견이 삼복 형제와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제기되었고, 이를 빌미로 삼복의 옥이 일어나 관련자들이 대거 처형되었다.[11][12] 이 사건으로 명성왕후의 정적이자 홍수의 변 당시 명성왕후와 김우명을 비판했던 허적윤휴가 사사되었고, 종친인 복창군복선군 역시 처형되었으며, 허목은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로 인해 남인 세력은 기사환국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0년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11]

또한 명성왕후는 무속 신앙을 깊이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이 병으로 의식을 잃자 그의 회복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무당의 조언에 따라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여름 옷을 입고 몸에 물을 뿌리며 기도를 올렸다. 이로 인해 심한 감기에 걸려 1684년 1월 (음력 1683년 12월) 창덕궁 조성전(昭聖殿)에서 사망하였다.[12] 사후 신하들이 무당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숙종은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12]

6. 기타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어머니 은진 송씨는 덕은부부인(德恩府夫人)에 봉해졌다. 또한 명성왕후의 여동생 김석연(金錫衍)을 통해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는 명성왕후의 증손녀가 된다.

1680년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성왕후는 송준길의 외손녀이자 자신과 먼 친척 관계였던 민씨(훗날의 인현왕후)를 숙종의 새로운 왕비로 추천하였다. 이는 민씨 가문이 서인의 주요 지지 세력이었던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왕후는 종종 정치에 개입하여 남인 세력을 비판하였으며,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궁녀와 간통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그들이 아들 숙종의 왕위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명성왕후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처소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아들 숙종에게 간청하기도 했으며, 결국 숙종은 세 왕자를 유배 보냈다. 이러한 정치 개입으로 인해 남인들은 명성왕후를 문정왕후에 빗대어 비판하기도 했다.

숙종이 병으로 위중해지자, 평소 무속 신앙을 믿었던 명성왕후는 무당의 조언에 따라 쾌유를 비는 의식을 거행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여름 옷을 입고 몸에 물을 뿌리며 기도를 올렸으나, 이로 인해 심한 감기에 걸려 1684년 1월(음력 1683년 12월) 창덕궁 조성전(昭聖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신하들은 무당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숙종은 무당을 유배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시호인 '명성'(明聖)에서 '명'(明)은 신중함을, '성'(聖)은 덕과 검소함을 뜻한다.

7. 명성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연도방송사/제작사작품명배우
1988년MBC조선왕조 오백년 - 인현왕후김해숙
1995년SBS장희빈견미리
2002년 ~ 2003년KBS2장희빈김영애
2007년영화사 아침궁녀예수정
2010년MBC동이박정수
2012년 ~ 2013년MBC마의이가현
2013년SBS장옥정, 사랑에 살다김선경


참조

[1] 서적 효종실록 1651-11-21
[2] 서적 승정원일기 1658-06-03
[3] 서적 숙종실록 1675-03-12
[4] 서적 숙종실록 1675-03-12
[5] 서적 숙종실록 1675-03-13
[6] 서적 숙종실록 1675-03-14
[7] 서적 숙종실록 1675-03-15
[8] 서적 여인열전 김영사
[9] 서적 숙종실록 1675-06-21
[10] 서적 숙종실록 1676-10-20
[11] 서적 숙종실록 1679-02-10
[12] 서적 숙종실록 1679-02-10
[13] 서적 명성왕후 지문
[14] 서적 숙종실록 1683-12-05
[15] 문서
[16] 서적 숙종실록 1683-12-15
[17] 문서
[18] 서적 숙종실록 1683-02-11
[19] 서적 승정원일기 1658-04-28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명안공주 작명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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