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얀 서천 칸
1. 개요
부얀 서천 칸은 1593년부터 1603년 또는 1604년까지 북원의 칸으로 재위한 인물이다. 그는 투먼 자사그투 칸의 아들이자 링단 칸의 할아버지이며, 157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부얀 칸은 명나라를 공격하고 몽골 제국의 옥새를 사용하며 통치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재위 기간 동안 북원은 혼란에 빠져 형식적인 종주권만 유지했다.
| 칭호 | 카간 |
|---|---|
| 다른 표기 | 徹辰汗 (중국어) Цэцэн хаан (몽골어) 부얀 (개인 이름) 布延 (중국어) |
| 재위 기간 | 1592년–1604년 |
|---|---|
| 이전 통치자 | 자사그투 칸 |
| 다음 통치자 | 릭덴 칸 |
| 출생 | 1556년 |
|---|---|
| 사망 | 1604년 |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Боржигин몽골어) |
|---|---|
| 왕조 | 북원 |
| 본명 | 부얀 (Буян몽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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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자사그투 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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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하르부 -
링단 칸
링단 칸은 몽골 차하르부의 칸이자 북원의 마지막 대칸으로, 분열된 몽골 부족들을 재통일하려 했으나 강압적인 통치와 후금과의 대립 끝에 천연두로 사망하여 북원의 해체를 초래했다. -
차하르부 -
투먼 자삭투 칸
투먼 자삭투 칸은 1539년에 태어나 1558년 몽골 차하르의 칸이 되었으며, 우리양카이 등을 복속하고 불교 진흥에 힘썼으나 투메드부와의 갈등 끝에 1592년에 사망했다. -
1554년 출생 -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그레고리오 15세는 1621년부터 1623년까지 재위한 교황으로, 콘클라베 선거 방식을 개정하고 포교성성을 설치하는 등 교황청 개혁을 추진했으며, 반종교개혁을 지원하고 여러 성인을 시성했다. -
1554년 출생 -
김시민
김시민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4천 명의 군사로 2만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전투 중 사망하여 선무공신에 봉해진 조선의 무신이다. -
북원의 대칸 -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원 순제와 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은 고려 출신 어머니의 배경으로 몽골 귀족의 반대에 부딪히며 권력 투쟁을 겪었고, 명나라의 대도 함락 후 북원을 건국하여 저항했으나 실패하고 카라코룸에서 사망했다. -
북원의 대칸 -
에센 타이시
에센 타이시는 15세기 오이라트의 지도자로,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았으나 칸 즉위 후 내부 반란으로 피살되어 오이라트부 분열을 초래했다.
2. 생애
부얀 서천 칸은 1554년 혹은 1555년에 투먼 자사그투 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부얀'은 몽골어로 덕망이나 미덕을 의미한다. 1574년 타이지(태자)로 책봉되었으며, 태자 시절 여러 몽골 부족과 연합하여 명나라 변경 지역을 공격하기도 했다.
1592년 아버지 투먼 자사그투 칸이 사망하자, 이듬해인 1593년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부얀 다융 세첸 카안'이라 불렸는데, 이는 '대원(大元)의 현명한 카안 부얀'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차하르부를 중심으로 시라무룬허 유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형식적으로는 몽골 전체의 종주권을 가졌으나, 실제로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원의 분열은 심화되었고 각 부족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이 때문에 그는 차하르의 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타이송 칸 시절 잃어버렸던 원나라 황제의 옥새를 되찾았다고 전해지며, 이를 이용해 약화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시도했다.
160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망구스 태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손자인 링단 바하투르가 칸의 자리를 계승했다.
2.1. 초기 생애
1554년생 설과 1555년생 설이 있으며, 정확한 생년월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투먼 자사그투 칸이고 어머니는 킵차크 씨족 출신으로, 그는 투먼 자삭투 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부얀'은 몽골어로 덕망, 미덕을 뜻한다. '부얀 다융 세첸 카안' 또는 '다융 부얀 세첸 카안'은 대원(大元)의 현명한 카안 부얀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대원국이라는 뜻의 '다융'이 한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다언'으로 오해석되거나, 의도적으로 대원(大元)이 아닌 다른 한자로 표기되기도 했다.
1574년 타이지(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 시절 그는 차하르부의 흑석탄, 내(内) 할하부의 아바하이, 다얀 카안의 증손 초카, 올량합부의 두쿠리 등과 연합하여 명나라 변경을 공략하였고, 소진(薊鎮)과 요동(遼東) 등을 격파하였다.
2.2. 명과의 관계
1574년 타이지(태자)로 책봉된 이후, 부얀 서천 칸은 차하르부의 흑석탄, 내(内) 할하부의 아바하이, 다얀 카안의 증손 초카, 올량합부의 두쿠리 등 여러 몽골 부족과 연합하여 명나라의 변경 지역을 공략하였다. 이 연합군은 명나라의 소진(薊鎮)과 요동(遼東) 지역을 공격하여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3. 북원의 혼란과 쇠퇴
작자미상의 《대황책(大黃冊)》 121쪽에 따르면, 부얀은 30세에 카안이 되어 부얀 다융 세첸 카안이라 불렸고, 정치와 종교를 모두 평정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차하르부에 만호를 파견했으며, 시라무룬허 주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형식적인 몽골 전체의 종주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원 왕조는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 그의 치세 동안 몽골 제국은 사실상 여러 제후국으로 분할되었고, 부얀 칸은 명목상의 종주권만 유지했을 뿐 전 몽골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 때문에 그는 차하르의 칸이라고도 불렸다. 비록 대칸이 모든 몽골 부족의 지도자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이는 이름뿐인 상황이었다.
1594년에는 하르친부의 노얀 옹구타이, 망구스 등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누르하치에게 귀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북원의 통제력 약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부얀 칸은 타이송 칸 시절 잃어버렸던 원나라 황제의 옥새를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이전의 북원 카안들은 새로 만든 인장을 사용했었다. 부얀 칸은 이 옥새, 특히 칭기즈 칸의 제국 옥새라는 소문이 있던 것을 다른 몽골 씨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약화된 통치를 합법화하고 권위를 세우려 시도했다. 그는 정의와 종교에 따라 백성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1604년에 사망했다.
2.4. 옥새
부얀 칸은 타이송 칸이 잃어버렸던 원나라 황제의 인장, 즉 옥새를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에센 타이시 칸부터 투먼 자삭투 칸에 이르는 북원의 역대 카안들은 원나라의 옥새가 아닌 새로 만든 인장을 사용했다고 한다. 부얀 칸은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칭기즈 칸의 제국 옥새라는 소문이 있는 인장을 다른 몽골 씨족들에게 보여주려 시도하기도 했다.
3. 가족 관계
* 망구스 태자: 링단 칸의 아버지
* 라브카르 태자
* 모키타토 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