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사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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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사르 전투는 1764년 영국 동인도 회사와 벵골, 아와드, 무굴 제국의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벵골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미르 카심이 영국의 간섭에 반발하여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하면서 발발했다. 북사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벵골 지역에서 영국의 지배가 확립되었고, 영국은 벵골, 비하르, 오리사 지역의 조세 징수 권한을 얻어 사실상 영유권을 확보했다. 이 전투는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무굴 제국의 정치적 통제가 종식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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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일부 | 7년 전쟁 |
![]() | |
날짜 | 1764년 10월 22일 ~ 23일 |
장소 | 비하르 주, 부크사르 |
결과 | 영국 승리 |
후속 조치 | 알라하바드 조약 |
교전 세력 | |
교전 대상 1 | 대영 왕국 영국 동인도 회사 카시 왕국 [[File:Flag of the Royal House of Benares.svg|25px]] |
교전 대상 2 | 무굴 제국 [[File:Flag of the Mughal Empire.png|25px]] 벵골 [[File:Flag of the Principality of Bengal (15th-18th century).svg|25px]] 아와드 [[File:अवध ध्वज.gif|25px]]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 대상 1 지휘관 | 헥터 먼로 경 [[File:Flag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1707).svg|25px]] 발완트 싱 [[File:Flag of the Royal House of Benares.svg|25px]] |
교전 대상 2 지휘관 | 샤 알람 2세 (항복) [[File:Flag of the Mughal Empire.png|25px]] 미르자 나자프 칸 [[File:Flag of the Mughal Empire.png|25px]] 미르 카심 [[File:Flag of the Principality of Bengal (15th-18th century).svg|25px]] 슈자-우드-다울라 [[File:अवध ध्वज.gif|25px]] |
병력 규모 | |
교전 대상 1 병력 | 17,072명 |
교전 대상 2 병력 | 40,112명 |
피해 규모 | |
교전 대상 1 피해 | 사망: 289명 부상: 499명 실종: 85명 |
교전 대상 2 피해 | 사망: 2,000명 부상: 4,000명 |
2. 전투의 배경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은 벵골 지역에서 크게 강화되었다. 영국은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미르 자파르를 벵골의 나와브(태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미르 자파르는 영국의 끊임없는 요구를 감당하기 어려워했고, 점차 영국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영국은 1760년 3월, 미르 자파르를 몰아내고 그의 사위인 미르 카심을 새로운 나와브로 임명했다.[13]
1764년 10월 23일, 무굴 제국, 아와드, 벵골의 삼자 연합군과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가 비하르와 아와드의 경계 지역인 북사르 평원에서 격돌했다. 삼자 연합군은 40,000명이 넘는 병력이었으나[19], 헥터 먼로 소령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7,072명(영국인 병사 857명, 인도인 용병 세포이 6,215명)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19]
미르 카심은 이전의 미르 자파르와 달리, 영국의 지나친 간섭과 횡포에 맞서 나와브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통치를 시도하며 점차 영국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14] 특히 1763년 2월, 미르 카심이 영국 상인들에게 부여된 면세 통관 특권(다스탁)을 제한하려 하자 양측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에 영국은 같은 해 7월, 미르 카심을 나와브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미르 자파르를 복위시켰다.[15][13]
폐위된 미르 카심은 영국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내부 배신 등으로 인해 연이어 패배했다. 1763년 11월, 영국군이 당시 벵골의 주요 도시였던 파트나로 진격해오자, 미르 카심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아와드 지역으로 피신했다.[16]
아와드로 도망친 미르 카심은 그곳의 나와브인 슈자 웃 다울라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게 되었고, 슈자 웃 다울라는 미르 카심의 복위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아와드에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알람 2세 역시 머물고 있었다. 이렇게 샤 알람 2세, 슈자 웃 다울라, 그리고 미르 카심 세 사람은 영국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한 삼자 동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미르 카심이 잃어버린 벵골 지역을 되찾는 것이었다.[17][18]
3. 전투의 전개
전투는 새벽에 무굴 제국 군대의 우익을 지휘하던 미르자 나자프 칸이 영국군을 향해 진격하면서 시작되었다.[6] 그러나 영국군은 20분 만에 전열을 정비하고 무굴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삼자 연합군은 내부 문제로 인해 효과적으로 싸우기 어려웠다. 동맹 세력 간 기본적인 협조 부족도 패배의 한 원인이었으며, 제국군 내부에 영국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고, 미르 카심의 병사들은 급여 미지급 문제로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17][18] 이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는 주로 아와드 태수 슈자 웃 다울라의 군대와 영국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정오 무렵, 전투의 승패는 명확해졌다. 삼자 연합군은 큰 피해를 보고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으며,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패색이 짙어지자 슈자 웃 다울라는 북사르에 있던 3개의 대규모 화약고를 폭파시킨 후 전장에서 이탈하여 도주했다.[6] 미르 카심 역시 300만인도 루피 상당의 보석을 챙겨 도망쳤다.[6] 헥터 먼로는 즉시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도주하는 슈자 웃 다울라를 추격하도록 지시했다.[6] 한편, 미르자 나자프 칸은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 주변의 병력을 수습하여 후퇴했고, 샤 알람 2세는 승리한 영국군과 협상에 나서기로 결정했다.[6]
3. 1. 전투의 결과 (세부)
이 전투에서 영국군의 사상자는 1,847명이었던 반면, 삼자 연합군은 10,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추가로 6,000명이 포로로 잡히고 133문의 대포가 노획되었다.[19] 또한, 100만인도 루피 이상의 현금이 영국의 손에 넘어갔다.[7]
사상자 수치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역사학자 존 윌리엄 포테스큐는 영국군 사상자를 총 847명(유럽 연대 사망 39명, 부상 64명 / 동인도 회사 세포이 병사 사망 250명, 부상 435명, 실종 85명)으로 집계했으며, 인도 동맹군은 2,000명이 사망하고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2] 다른 자료에 따르면 영국 측 사상자는 유럽인 69명, 세포이 병사 664명이며, 무굴 제국 측 사상자는 6,000명으로 추정된다.[7]
전투 패배 후 지도자들의 행보는 엇갈렸다. 아와드 나와브 슈자 웃 다울라는 강을 건너 도주한 후 자신의 배 다리를 폭파시켜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와 휘하 부대원들을 버렸다.[6] 미르 카심 역시 300만인도 루피 상당의 보석을 가지고 도주했으나, 1777년 가난 속에서 사망했다.[6] 반면, 미르자 나자프 칸은 샤 알람 2세 주변의 병력을 재편성했고, 샤 알람 2세는 후퇴한 뒤 승리한 영국군과 협상하기로 결정했다.[6]
영국군 측에서 전사한 장교는 제96 보병대의 프랜시스 스필스버리 중위와 벵골 유럽 대대의 리처드 톰슨 소위뿐이었다.[8][9]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북사르 전투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 아와드, 무굴 제국 연합군에 맞서 거둔 결정적인 승리로, 인도 아대륙의 권력 구도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6] 전투 패배 이후, 1765년 8월 16일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는 영국 동인도 회사와 알라하바드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20]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황제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벵골, 비하르, 오리사 3개 주의 디와니(Diwani, 조세 징수 및 재정 관리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21][22][20] 이는 영국이 해당 지역의 재정을 합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함께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는 발판이 되었다.[21] 비록 명목상으로는 무굴 제국의 재무 장관 지위를 유지했지만[24], 이 조약을 통해 영국은 인도의 주요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고 향후 식민 통치를 강화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북사르 전투의 승리와 디와니 획득은 영국이 마이소르 왕국, 마라타 동맹 등 다른 인도 세력과 경쟁하여 궁극적으로 인도 아대륙을 장악하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다.
4. 1. 정치적/경제적 영향
북사르 전투는 식민지 인도의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결과로 권력 구도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으며, 벵골 지역에서 영국의 지배가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벵골의 나바브, 아와드의 나바브, 그리고 무굴 제국 황제로 구성된 연합군에 대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승리는 회사를 벵골 내 최강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전투는 무굴 제국의 정치적 통제가 약화되는 시작을 알렸고, 동인도 회사는 점차 광대한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6]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비하르의 자민다르 등 다양한 세력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다.[10]패배한 주요 인물들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다. 미르 카심은 전투 후 빈곤 속에서 사라졌다. 무굴 제국 황제 샤 알람 2세는 영국에 항복했고, 아와드 나바브 수자-우드-다울라는 서쪽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영국에 항복했다.[11] 갠지스강 유역 전체가 사실상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는 인도 통치자들 사이의 내재된 약점과 분열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특히 나바브들과 무굴 황제 간의 통일성 및 협력 부족은 영국의 승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는 인도 내 정치 권력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영국이 아대륙을 지배하는 길을 열었다.


1765년 8월 16일, 북사르 전투의 결과로 영국 동인도 회사와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 사이에 알라하바드 조약이 체결되었다.[20] 이 조약을 통해 황제는 영국에게 벵골, 비하르, 오리사 3개 주의 디와니(Diwani)를 부여했다. 디와니는 해당 지역의 조세 징수 및 지출을 관장하는 권한으로, 영국이 이 3개 주의 재무 장관 지위를 획득했음을 의미했다.[21] 영국에게 디와니 획득은 가장 큰 전과였으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 대가로 영국은 황제에게 연금 260만인도 루피를 지불하기로 했고, 아와드 나바브는 전쟁 배상금으로 500만인도 루피를 영국에 지불해야 했다.[21][22][20]
조약 체결 이후에도 벵골 나바브는 명목상 존재했지만, 디와니 상실로 인해 실질적인 권한 없이 영국의 연금에 의존하는 존재로 전락했다.[23][22] 이로 인해 벵골, 비하르, 오리사 지역은 영국이 조세권을 행사하고 벵골 나바브가 명목상의 통치자로 남는 이중 통치 체제가 형성되었다.[23][22] 한편, 아와드 나바브의 보호를 벗어난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 역시 알라하바드에서 영국의 보호 아래 연금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20]
북사르 전투는 앞선 플라시 전투와 비교할 때, 영국에게 인도 내에서 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광범위한 수조권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더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3개 주의 디와니 획득은 비록 공식적인 영토 할양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해당 지역을 영국이 지배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1858년 세포이 항쟁으로 무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 3개 주의 재무 장관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며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24]
결론적으로 북사르 전투는 영국에 의한 인도의 식민지화 과정을 크게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영국은 인도의 다른 주요 세력인 마이소르 왕국 및 마라타 동맹과의 충돌로 나아가게 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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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インドの歴史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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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2―中世・近世―
[24]
서적
ケンブリッジ版世界各国史 インド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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