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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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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포이 항쟁은 1857년부터 1858년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대항하여 인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지배 확대와 경제적 수탈, 세포이(인도인 용병)들의 불만, 사회·문화적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델리, 칸푸르, 럭나우 등지에서 주요 전투가 벌어졌으며, 봉건 귀족, 지주, 농민 등 다양한 세력이 항쟁에 참여했다. 항쟁은 영국군의 진압으로 종결되었으며, 무굴 제국 멸망, 영국 동인도 회사 해체, 영국의 인도 직접 통치 시작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세포이 항쟁은 인도 독립 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으며, '제1차 인도 독립 전쟁'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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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인도 대반란
다른 명칭세포이 항쟁
1857년 반란
1857년 혁명
기간1857년 5월 10일 – 1858년 11월 1일
장소인도
결과영국의 승리
영토 변화일부 번왕국이 영토를 되찾거나 할양받음
그 외의 지역은 영국 왕실에 귀속됨
영국 동인도 회사 해체
영국령 인도 제국 성립
교전 세력
반란군무굴 제국
동인도 회사의 반란 세포이
인도 민중
아와드 주민
타루크다르 (지주 계층)
가즈 (이슬람 종교 전사)
마라타 왕국의 페슈와 바지 라오 2세의 양자 나나 사히브의 군대
자한시의 라크슈미 바이 여왕의 군대
아와드의 베굼 하즈랏 마할과 그의 아들 비르지스 카드라의 지지자
비하르의 지주 쿤와르 싱의 군대
괄리오르
조드푸르
반다
기타 라자, 나와브, 자민다르, 타쿠르, 차우다리, 탈루크다르, 사르다르, 족장들
영국군 및 연합군영국 육군
동인도 회사에 충성하는 세포이
동인도 회사 소속 영국 정규군
현지 인도인 비정규군
영국 및 유럽 출신 민간인 의용군 부대
네팔 왕국
니잠
잠무 카슈미르
자이푸르
조드푸르
우다이푸르
비카네르
분디
바라트푸르
아자이가르
알와르
보팔
비자와르
카푸르탈라
파티알라
람푸르
리와
켄두자르
나바
시로히
자오라
트라방코르
라지푸타나 대리청
지휘관
반란군 지휘관바하두르 샤 2세 (포로)
나나 사히브
라크슈미 바이 (전사)
탄티아 토피 (처형)
바크트 칸 (전사)
베굼 하즈랏 마할
쿤와르 싱 (병사)
영국군 및 연합군 지휘관찰스 캐닝
조지 앤슨 (전사)
패트릭 그랜트
콜린 캠벨
휴 로즈
헨리 하블록 (전사)
제임스 아우트람
헨리 로렌스 (병사)
제임스 조지 스미스 네일 (전사)
존 니콜슨 (전사)
수렌드라 비크람 샤
디르 삼세르 라나
란디르 싱
유세프 알리 칸
병력 규모
반란군 병력225,000명의 세포이
다수의 민병대
다수의 비전투 요원
영국군 및 연합군 병력80,000명의 세포이
45,000명의 영국군 (개전 초기)
50,000명의 영국 정규군 (지원군)
25,000명의 구르카, 페르시아 및 기타 보조군
피해 규모
영국군 사망자6,000명 (민간인 포함)
인도인 사망자약 800,000명 (반란 및 기근, 전염병 포함)
기타 정보
주요 전투 지역갠지스 평원, 인도 중부
주요 원인영국 동인도 회사의 정책으로 인한 인도인 병사의 불만 및 민중의 저항
특징군사적 위협
반란을 일으킨 이들의 다양한 동기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이념 및 프로그램 부재
델리러크나우 파괴
아와드 지역의 마을 소실
반란군 및 지지자 즉결 처형
영국 민간인, 여성, 어린이 살해
남부, 벵골, 펀자브 지역은 피해를 입지 않음
영향영국령 인도 제국으로의 전환
빅토리아 여왕의 1858년 선언
인도 통치권 영국 왕실로 이양
영국과 인도 간 관계의 전환점
인도인의 종교적 자유 보장 약속
인도인과 영국인 모두에게 동등한 보호 제공 약속
인도 민족주의 씨앗 형성
관련 문서인도 독립 운동

2. 배경



영국 동인도 회사1623년 암보이나 사건 이후 인도네시아 진출을 포기하고 인도 진출을 시작했다.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를 거점으로 인도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무굴 제국을 허울뿐인 존재로 만들었다.

영국은 인도를 자국 제품 생산을 위한 원료 공급지이자 자국 면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인도의 자원은 영국으로 흡수되었고, 산업혁명으로 생산된 다량의 양질의 면제품이 인도로 유입되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국내는 혼란에 빠졌으며 토착 면화 산업은 급격히 쇠퇴했다. 이 과정에서 권력과 재산을 잃은 과거 지배 계층부터 면화 산업 쇠퇴로 인한 실업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인도는 다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국내에 많은 불화가 있었고, 무굴 제국의 쇠퇴로 마라타 연합을 비롯한 국내 세력이 반독립 상태였기 때문에 그동안 조직적인 영국에 대한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대반란은 인도 최초의 민족 반란으로 여겨진다.

대반란 발생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지적되고 있다.


  • 영국 동인도 회사가 잠인다리 제도나 라이야트와리 제도 등 근대적인 토지 소유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발생한 농촌 변화와 기존 지주 계층의 몰락[214]이 있었다.
  • 인도 물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시파이의 봉급이 동결되고 승진이 늦어지는 등 시파이의 불만이 축적되었다.[215]
  • 시파이 측이 종교적 이유로 해외 원정을 거부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영국 동인도 회사 측과 대립이 발생했다.[216]
  • 인도 총독 달호지의 권리 상실의 원칙에 의한 봉건 영주국의 강압적인 합병이 있었다.
  • 북인도 최대 봉건 영주국인 아와드 봉건 영주국이 내정 혼란을 이유로 폐지(1856년)되었다. 아와드의 직할 통치로 지주(탈룩다르)들은 토지를 몰수당했고, 그 수는 2만 1천 명에 달했다.[219]

2. 1. 동인도 회사의 지배 확대와 경제적 수탈

영국 동인도 회사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의 샤 알람 2세에게 승리하여 벵골, 비하르, 오디샤 등에 대한 징세권을 얻게 되었다.[21] 이후 봄베이와 마드라스 기지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앙글로-마이소르 전쟁(1766~1799)과 앙글로-마라타 전쟁(1772~1818)을 통해 인도의 더 많은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22]

19세기에 들어 총독 웰즐리는 동인도 회사의 지배 지역 확장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였다.[24] 이 정책에 따라 인도 내의 제후국들과 보조 동맹을 결성하였다. 보조 동맹은 제후국이나 지역 군벌 휘하의 군사를 동인도 회사가 직접 통솔하도록 하는 것으로, 제2차 영국-시크 전쟁 이후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 카슈미르, 펀자브 지역의 제후국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 지역의 수장이었던 힌두교 마하라자이슬람교 나와브 등 제후들을 종속 동맹 안으로 편제하였다.

이러한 팽창 정책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1765년과 1805년 인도: 분홍색으로 표시된 영역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통치한 지역


1837년과 1857년 인도: 분홍색으로 표시된 영역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통치한 지역


영국은 인도를 자국 제품 생산을 위한 원료 공급지이자 자국 면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여겼다. 인도의 자원은 영국으로 흡수되었고, 산업혁명으로 생산된 다량의 양질의 면제품이 인도로 유입되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국내는 혼란에 빠졌으며 토착 면화 산업은 급격히 쇠퇴했다.

이 과정에서 권력과 재산을 잃은 과거 지배 계층부터 면화 산업 쇠퇴로 인한 실업자에 이르기까지, 시민과 농민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2. 2. 세포이의 불만 고조

1857년 5월 세포이 항쟁은 몇 가지 원인이 중첩된 결과 촉발되었다. 세포이 용병들은 힌두교이슬람교를 신봉하였는데, 이들은 항쟁 직전 20만 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영국군의 수는 약 4만 5천 명에 불과했다. 세포이 용병의 주요 주둔지는 뭄바이, 마드라스, 벵골 세 곳이었다. 벵골 군의 주요 구성원은 힌두교 카스트 가운데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라즈푸트와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만들이었고, 대부분 아와드와 비하르 출신이었다. 1855년 당시에는 이들 보다 낮은 카스트에 속한 용병은 매우 적은 수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뭄바이 군과 마드라스 군은 비교적 카스트를 따지지 않고 용병을 모집하였으며 대부분 그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244]

1772년 워런 헤이스팅스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총독으로 부임하자 군사 확장에 몰두하였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이전에 있었던 플라세이 전투나 북사르 전투에 참전한 인도인들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아와드와 비하르 지역의 높은 카스트에 속하는 라즈푸트나 브라만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그 후 75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는 사회적 갈등을 방지할 목적으로 군대 내에서 그들의 종교 의식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병사들은 종교에 따라 다른 식사를 하였고, 해외 복무 시에는 요청이 없더라도 카스트가 고려되었으며, 군대 내의 힌두교 축제를 공인하였다. 상위 카스트를 존중하는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종교와 카스트에 따른 차별을 느낀 세포이들이 항쟁에 참여하는 기반이 되었다.[245]

1856년 아와드 지역이 동인도 회사에 합병되자 많은 세포이들은 그 지역에서 누렸던 자신들의 특권이 축소되고 지대 수입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였다. 아와드의 합병으로 토지세가 증가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246] 1857년 군대에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부임하자 많은 세포이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자신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다.[247] 1830년대에 이미 영국의 침례교 선교사인 윌리엄 캐리 등의 선교사가 인도에서 활동하면서 남편이 화장될 때 부인을 함께 화장하는 힌두교식 장례 풍습인 사티를 금지시키고, 과부를 재혼시키려 할 때부터 세포이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세포이들이 분노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동 환경의 변화였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병합 지역을 넓히게 되자, 세포이 용병을 인도-버마 전쟁과 같은 외국과의 전쟁까지 동원하였지만 그들에 대한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다.[248] 또한 용병의 규모가 커지자 재정 부담을 이유로 퇴직 연금 지급이 중단되었고 특히 벵골 군의 경우 퇴직금의 부담을 줄이고자 마드라스나 뭄바이의 용병보다 적은 급여를 지급하였다.[249]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 총독이었던 찰스 캐닝


세포이 항쟁이 일어난 또 다른 중요 요인은 1856년 7월 25일 발효된 〈일반 복무 규정〉때문이었다. 이는 주로 벵골 군의 불만 사항이었는데, 새 복무 규정은 이전까지는 별다른 차이를 두지 않던 해외 복무를 벵골 군에 한해 제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제임스 브라운 람세이 총독이 공포한 이 복무 규정에 따라 마드라스 군과 뭄바이 군, 그리고 벵골 군 가운데 6개의 대대는 이전과 같이 요청이 있을 경우 해외 복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의 벵골 군에 대해서는 행군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복무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해외 복무에서 제외하였다. 이 결과 중국과 버마에 파병된 세포이 가운데 벵골 군은 매우 적었다. 뒤를 이은 총독 찰스 캐닝은 새 복무 규정은 기존 병사들이 아닌 신병들에게만 해당할 뿐이라고 해석하였으나, 벵골 군 세포이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이들은 세포이를 일종의 가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도 입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250]

세포이들은 진급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는데, 유럽인과는 달리 나이가 들어 입대하는 세포이들은 근무 연수에 따라 진급하는 제도를 불공정하게 느꼈다. 유럽 출신 장교들이 계속하여 진급하는 동안[249] 세포이들은 제한 연령에 도달하여 제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상급 장교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251]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 때문에 생긴 문제가 결국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이 총은 병사들이 종이로 싼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뜯고 탄약을 총신에 재겨 넣은 뒤, 탄약이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종이와 탄환을 함께 총신에 넣고 발사하도록 고안되었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동물성 지방을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돼지의 지방을 이용한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뜯어 쓰라고 하는 것은, 돼지를 불결하게 여기던 무슬림 병사나 소를 신성하게 여기는 힌두 병사 모두에게 종교에 따른 차별로 받아들여졌다.[252] 1857년 1월 27일, 참모장 리처드 버치는 새로운 머스켓 총을 사용하면 총신에 따로 그리스를 칠하지 않아도 되니 "세포이들이 좋아할 것"이라며 모든 세포이들에게 1853년식 엔필드 머스켓을 지급하라고 지시하였다.[253] 새 탄약통이 지급되자마자 벵골에 있던 영국군의 덤덤 보급창에서 탄약통을 둘러싼 논란이 보고되었다.[254] 상위 카스트에 속한 세포이들이 자신의 카스트 지위를 잃는 것이 두려워 탄약통 수령을 거부한 것이다.[255] 물론 탄약통의 종이는 꼭 입으로 물어뜯지 않아도 손으로 뜯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 반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급된 탄약통에 대한 루머가 삽시간에 퍼져, 세포이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탄약통에 그리스를 발라 쓰는 것보다도 못한 새 탄약통은 순전히 세포이를 모욕하기 위해 지급된 것이란 말이 나돌았다.

2. 3. 사회, 문화적 반감

영국의 공리주의기독교 전도를 앞세운 사회개혁 시도는 인도인들의 반감을 샀다.[261] 영국인들은 인도의 장례 풍습인 사티를 금지하고,[262][263] 과부의 재혼을 합법화하였다.[264] 많은 인도인들은 이러한 영국의 사회개혁을 기독교 전파를 위한 것으로 여겼다.[265]

1831년 제임스 에트킨슨이 그린 사티 장면. 미망인이 원할 경우 남편과 함께 화장하던 인도의 장례풍습은 영국인이 보기에 야만적인 것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크리스토퍼 엘런 베일리는 당시 인도가 서양 의학의 도입, 영국 관할지 내 하위 카스트 계층 보호, 여성 재혼 허용 등으로 인해 전통적 지식체계가 붕괴되는 상황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유럽인 설립 학교들은 "수학을 이유로 종교적 관습을 배척하고 여자 아이들에게 도덕적으로 위험한 사상을 주입한다"는 이유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266]

인도인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법 체계 역시 반감의 대상이었다. 영국 하원에서 발간한 공식 청서인 《1855년-1857년 동인도의 고문 현황》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사관들이 인도인의 범죄에 대해 잔혹하게 대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267]

2. 4. 항쟁 참여 세력

세포이 항쟁에는 세포이뿐만 아니라 봉건 귀족, 탈루크달이라 불리던 지주 계급, 농민 등 다양한 민간인들이 참여하였다.

락슈미 바이는 대영국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인도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되찾고자 하였다.


봉건 귀족들은 영국의 합병 정책으로 잃었던 지위를 되찾고자 항쟁에 참여했다. 라프스 선언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합병 정책으로 많은 봉건 귀족들은 지위를 잃고 굴욕감과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락슈미 바이나 나나 사히브가 대표적인 예이다. 무굴 제국 귀족들 역시 바하두르 샤 2세 계승 문제와 관련, 동인도 회사 조치에 분노했다.

그러나 모든 봉건 귀족이 항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영국 동인도 회사 지배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인도르나 사우가르 지역 귀족들은 항쟁 이후에도 동인도 회사에 충성했다.[257]

탈루크달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토지 개혁 조치로 수입이 감소하면서 항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세포이나 귀족들과 혈연관계로 얽힌 경우가 많았고, 항쟁을 통해 잃었던 땅을 빠르게 되찾았다.

농민 계급은 가장 많이 항쟁에 참여했고 희생도 컸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착취하는 지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맞았다.[258] 동인도 회사가 부과한 과중한 토지세는 토지 소유자들을 빚더미로 몰아 항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59]

민간인의 항쟁 참여는 지역마다 큰 편차를 보였다. 중부 인도 북부 지역은 항쟁 기간 동안 영국의 지배력이 거의 상실되었지만, 미루트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무자파르나가르에서는 별다른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260]

3. 항쟁의 전개

1857년 5월 10일, 인도 북부 도시 메라트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인 용병인 시파이(세포이)가 봉기하면서 세포이 항쟁이 시작되었다.[220] 이들은 상층 카스트에 속하는 힌두교도와 상류층 무슬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에서 새로 도입된 엔필드 라이플의 종이약통에 힌두교도가 신성시하는 기름과 무슬림이 불결하게 여기는 돼지라드가 사용되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221][222] 엔필드 라이플의 종이 약통에는 방습유로 기름이 발라져 있었고, 장전할 때는 먼저 입으로 약통의 끝을 깨물어 화약을 총구로 흘려보내고, 탄환과 탄압을 밀어 넣어야 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시파이들은 전투 중에 종교적 금기를 어기게 되는 것이었다.[220]

동인도 회사는 소와 돼지 기름 사용설을 부정했지만, 시파이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힌두교도에게는 신성한 소가 도살된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무슬림에게는 돼지 기름을 손으로 만지는 것조차 불결한 행위였다.[220]

세포이 항쟁


메라트의 반란군은 다음날인 5월 11일 델리에 도착하여, 델리 주둔 시파이 부대를 자기 편으로 만들고 주둔 영국군을 몰아내고 델리를 점령했다.[220][223] 이들은 무굴 제국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로 삼고, 황제 복권을 선언하여 대영국 전쟁 개시를 표명했다.[220] 바하두르 샤 2세는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223] 그날 밤 “힌두스탄의 황제”로서 영국에 선전포고하는 칙령을 발표했다.[224]

이 반란을 계기로 구왕족, 구지주, 농민, 도시 주민 등 반영 세력이 종교·계급의 틀을 넘어 일제히 봉기했다.[225] 칸푸르에서는 나나 사히브와 그의 장군 탄티야 토페가, 잔시에서는 락슈미 바이가, 비하르에서는 대영주 쿤왈 싱 등의 지도자가 일어나 군대를 이끌고 영국군에 저항했다. 아와드에서는 캘커타로 추방된 번왕의 왕비 하즈라트 마할이 아들 빌지스 카돌을 앞세워 아와드 왕(나와브)임을 선포하고, 시파이, 농민, 영주 등의 지지를 얻었다.[226][227]

반란은 영국 직할령, 구번왕국령을 비롯하여 북인도를 중심으로 인도의 약 3분의 2에 가까운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전년에 합병된 아와드는 특히 반란의 기세가 거셌다. 델리에서는 7월 바흐트 칸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면서 반란군이 기세를 얻어 델리 방어전을 유리하게 이끌었다.[228] 델리에서는 무굴 제국의 국가 체제가 일시적으로 정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반란군은 결속력이 부족했고, 지배 지역 확장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시파이들은 고위 고관에 오른 경험이 없는 자가 대부분이어서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했다.[229] 영국은 주변 민족과 구 지배 계급을 회유하는 등 정치 공작을 실시하여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번왕국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네팔 왕국의 구르카 병사를 비롯한 용병을 투입하는 한편, 반란 세력 진압을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고 반란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1857년 8월부터 델리의 반란군은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9월이 되자 영국군의 델리 총공격이 시작되어 바하두르 샤 2세는 델리 성에서 탈출하여 영국에 투항했다.[223] 델리에서의 대반란은 4개월 만에 종결되었다.[230]

그 후, 대반란의 무대는 지방으로 옮겨졌다. 메라트 반란 후, 반란은 인도 북부(특히 갠지스 강 유역)를 중심으로 확대되었고, 칸푸르, 아와드, 비하르 등에서 반란 지역 정권이 영국과 대립했다. 잔시와 그왈리어는 유명한 격전지였으며, 기병을 이끌고 “인도의 잔 다르크”라고 불린 왕비 락슈미 바이의 저항에 영국은 고전했고, 1858년 6월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231]

3. 1. 항쟁의 발생과 확산

세포이 항쟁은 '''세포이 반란''', '''1857년 인도 항쟁''', '''제1차 인도 독립 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반란'이라는 명칭은 영국 측 시각을 반영한 것이고, 인도인의 입장에서 이 항쟁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었다.[235]

세포이 항쟁은 빠른 속도로 인도 각지에 확산되어 각계각층이 영국에 대항하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주요 교전은 주로 갠지스강 상류 삼림 지역과 인도 중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인도의 행정 구역으로 보면 우타르프라데시 주, 비하르 주, 마디아프라데시 주 북부, 그리고 델리 등지에서 교전이 있었다.[236]

세포이 항쟁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촉발되었고[237], 1858년 6월 20일에 과리오르가 함락되면서 절정을 맞았다.[236]

1857년 5월 1일 군대 배치 상황을 보여주는 인도 반란 지도


실제 반란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여러 사건들과 함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857년 2월 26일, 제19 벵골 원주민 보병대(Bengal Native Infantry, BNI) 연대는 새로 지급받은 탄약이 소와 돼지 기름으로 윤활 처리된 종이로 싸여 있어 입으로 뜯어야 하므로 종교적 감정을 건드린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연대장은 포병과 기병의 지원을 받으며 훈련장에서 이들에게 맞섰지만, 협상 끝에 포병을 철수시키고 다음날 열병식을 취소했다.[63]

1857년 3월 29일, 캘커타(Calcutta) 근처 바락포어(Barrackpore) 훈련장에서 34번째 벵골 토착군(BNI) 소속 29세의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는 동인도 회사의 최근 행동에 분노하여 지휘관들에게 반항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판데이의 행동을 알게 된 중사 제임스 휴슨(Sergeant-Major James Hewson)이 조사하러 갔으나 판데이가 그에게 총을 쏘았다. 휴슨은 경보를 발했다.[64] 그의 부관(Adjutant)인 헨리 보(Lt. Henry Baugh) 중위가 소란을 조사하러 나왔을 때, 판데이는 발포했지만 보 중위의 말을 맞혔다.[65]

존 허시(General John Hearsey) 장군이 훈련장에 나와 조사했고, 나중에 망갈 판데이가 일종의 "종교적 광기에" 빠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위병 제마다르(Jemadar) 이슈와리 프라사드(Ishwari Prasad)에게 망갈 판데이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제마다르는 거부했다. 셰이크 팔투(Shaikh Paltu)라는 병사를 제외하고는 근위병과 다른 시파이들이 망갈 판데이를 제지하거나 체포하는 것을 꺼렸다. 셰이크 팔투는 판데이가 공격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제지했다.[65][66]

동료들을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반란으로 선동하는 데 실패한 후, 망갈 판데이는 소총을 가슴에 대고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다치게 하는 데 그쳤다. 그는 4월 6일에 군사 재판을 받고 이틀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슈와리 프라사드 제마다르는 사형을 선고받고 4월 2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상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연대는 해산되었고 군복을 벗었다. 셰이크 팔투는 벵골군에서 하빌다르(havildar) 계급으로 승진했지만 34번째 BNI가 해산되기 직전에 살해되었다.[67]

다른 연대의 시파이들은 이러한 처벌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공식 해산 중에 보여진 불명예는 일부 역사가들의 관점에서 반란을 조장하는 데 기여했다. 불만을 품은 전직 시파이들은 복수심을 품고 아와드(Awadh)로 돌아갔다.

4월에는 아그라, 알라하바드, 암발라에서 소요와 화재가 발생했다. 특히 여러 부대가 연례 소총 사격 훈련을 위해 모여 있던 대규모 군사 주둔지였던 암발라에서는 벵골군 사령관 앤슨 장군에게 어떤 형태의 탄약 반란이 임박했음이 분명해졌다. 민간 총독부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총 사격 훈련을 연기하고 병사들이 이빨 대신 손가락으로 탄약을 찢는 새로운 훈련을 허용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벵골군 전체의 표준 관행으로 만드는 일반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잠재적인 문제를 해소하거나 위압하기 위해 암발라에 남아 있는 대신 많은 고위 관리들이 여름을 보내는 시원한 힐 스테이션인 심라로 향했다.

암발라에서는 공공연한 반란은 없었지만, 4월 말에 광범위한 방화가 발생했다. 병영 건물(특히 엔필드 탄약을 사용했던 병사들의 건물)과 영국 장교들의 방갈로가 불에 탔다.[68]

반란군의 공격을 받는 영국 장교와 그 가족들


1857년 8월 15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니니탈(현재 나이니탈)의 목판화와 관련 기사. 히말라야의 휴양 도시가 델리와 메루트에서 일어난 1857년 반란을 피해 도망치는 영국 가족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것을 설명하고 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인도 전체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대부분의 당시와 현대의 기록은 그가 시파이와 신하들에게 강제로 선언문에 서명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94] 전 세기 동안 무굴 제국이 상당한 권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은 여전히 인도 북부 전역에서 큰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84] 민간인, 귀족 및 기타 고위 인사들은 충성 서약을 했다. 황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제국적 지위를 주장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무굴 황제의 가담은 펀자브의 시크교도들을 반란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들은 무굴 지배자들과 많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이슬람 통치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벵골 지방은 전체 기간 동안 대체로 조용했다. 오랫동안 무굴 황제의 권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영국인들은 일반 사람들이 바하두르 샤의 전쟁 촉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놀랐다.[84]

초기에 인도 반군들은 동인도회사군을 격퇴하고 하리아나, 비하르, 중부 주 및 통합 주의 여러 중요한 도시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영국군이 증원되어 반격을 시작하자, 반란군들은 특히 중앙 집권적인 지휘 통제 체계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반란군들은 바크트 칸과 같이 몇몇 자연스러운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황제는 그의 아들 미르자 무갈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증명한 후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라자와 왕자들에게 지도력을 구해야 했다. 이들 중 일부는 헌신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했지만, 다른 일부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거나 무능했다.

1857년 7월 30일 루크노우의 레단 포대에 대한 반란군의 공격


메라트 주변 시골에서는 일반적인 구르자르 봉기가 영국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메루트 근처 파릭시트가르에서 구르자르들은 라오 카담 싱(쿠둠 싱)을 지도자로 선포하고 동인도회사 경찰을 축출했다. 카담 싱 구르자르는 2,000명에서 10,000명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었다.[95] 불란드샤르와 비즈노르도 각각 왈리다드 칸과 마호 싱의 지휘하에 있는 구르자르들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메루트와 델리 사이의 거의 모든 구르자르 마을이 반란에 참여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줄룬두르의 지원을 받았고, 7월 말이 되어서야 현지 자트족과 왕국들의 도움으로 영국은 그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95]

인도 제국 가제티어는 1857년 인도 반란 전반에 걸쳐 구르자르와 랑가르가 불란드샤르 지역에서 영국의 "가장 화해할 수 없는 적"임을 증명했다고 명시하고 있다.[96]

라호르의 저명한 학자 무프티 니잠우딘은 영국군에 대한 파트와를 발표하고 현지 주민들에게 라오 툴라 람의 군대를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그 후 나르나울(나시브푸르)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사상자가 많았다. 1857년 11월 16일 라오 툴라 람이 패배한 후, 무프티 니잠우딘은 체포되었고, 그의 형제 무프티 야킨우딘과 매부 아브두르 라흐만(별명 나비 박시)은 티자라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델리로 끌려가 처형되었다.[97]

메라트에서 세포이 반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857년)


1857년 5월 10일, 인도 북부 도시 메라트에서 시파이가 봉기하면서 대반란이 시작되었다.[220] 시파이(sipahi)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조직한 인도인 용병으로, 세포이(sepoy)라고도 불린다.

용병들은 상층 카스트에 속하는 힌두교도와 상류층 무슬림(이슬람교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에서 새로 채택된 라이플인 엔필드 라이플의 종이약통에 힌두교도가 신성시하는 기름과 무슬림이 불결하다고 여기는 돼지라드가 사용되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221][222]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총기 기술 혁신의 초기 성과였던 엔필드 라이플은 종이 약통을 사용했고, 이 약통에는 방습유로 기름이 발라져 있었다. 이 약통을 사용하여 엔필드 라이플을 장전할 때는 먼저 입으로 약통의 끝을 깨물어 화약을 총구로 흘려보내고, 탄환과 탄압을 밀어 넣어야 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전투 중에 종교적 금기를 어기게 되는 것이다.[220] 그들은 이것을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기 위한 음모로 간주하고 탄약 수령을 거부하는 등의 행위를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긴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소와 돼지 기름 사용설을 부정했지만, 시파이들은 여전히 이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꺼림칙하다면 입으로 깨물지 않고 손으로 개봉해도 된다고 통지했지만, 불신은 해소되지 않았다. 힌두교도에게는 신성한 소가 그러한 목적으로 도살된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무슬림에게는 돼지 기름을 손으로 만지는 것조차 불결한 행위였다.[220]

결과적으로 시파이는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계기일 뿐이며, 반란 발발의 원인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들 반란군은 소와 돼지 기름이 발라져 있다고 여겨지는 종이 약통밖에 없을 때, 주저 없이 그것을 깨물었다고 한다. 힌두교도에게는 그들이 종이 약통을 깨무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소는 도살되었던 것이고, 무슬림에게는 긴급한 상황이라면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메라트의 반란군은 이듬해 11일 델리에 도착하여, 델리 주둔 시파이 부대를 자기 편으로 만들고 주둔 영국군을 몰아내고 델리를 점령했다.[220][223]

무굴 제국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로 삼고, 황제 복권을 선언하여 대영국 전쟁 개시를 표명했다.[220] 바하두르 샤 2세는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223] 그날 밤 “힌두스탄의 황제”로서 영국에 선전포고하는 칙령을 발표했다.[224]

이 반란을 계기로 구왕족, 구지주, 농민, 도시 주민 등 반영 세력이 종교·계급의 틀을 넘어 일제히 봉기했다.[225] 칸푸르에서는 나나 사히브와 그의 장군 탄티야 토페가, 잔시에서는 락슈미 바이가, 비하르에서는 대영주 쿤왈 싱 등의 지도자가 일어나 군대를 이끌고 영국군에 저항했다.

또한, 아와드에서는 캘커타로 추방된 藩王의 왕비 하즈라트 마할이 아들 빌지스 카돌을 앞세워 아와드 왕(나와브)임을 선포하고, 시파이, 농민, 영주(자민다르, 탈룩다르) 등의 지지를 얻었다.[226][227]

반란은 영국 직할령, 구藩王국령을 비롯하여 북인도를 중심으로 인도의 약 3분의 2에 가까운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전년에 합병된 아와드는 특히 반란의 기세가 거셌다. 델리에서는 7월 바흐트 칸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면서 반란군이 기세를 얻어 델리 방어전을 유리하게 이끌었다.[228] 델리에서는 무굴 제국의 국가 체제가 일시적으로 정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분도 있어 반란군은 결속력이 부족했고, 지배 지역 확장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3. 2. 주요 전투 및 사건

1857년 3월 29일, 캘커타 근처 바락포어(Barrackpore) 훈련장에서 제34 벵골 토착 보병 연대 소속 망갈 판데이가 동인도 회사의 명령에 불복하고 상관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69] 판데이는 체포되어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고, 명령을 거부한 인도인 사관도 4월 22일 처형되었다.[270] 이 사건으로 연대는 해산되었고, 불명예 제대한 세포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민간 항쟁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4월 동안 아그라, 알라하바드, 암발라 등지에서 소요와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271] 특히 암발라에서는 신형 탄약통 사용 교육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미루트는 세포이 항쟁의 주요 발발지 중 하나였다.[272] 4월 24일, 제3 경기병대 소속 세포이 85명이 신형 탄약통 수령을 거부하여 5월 9일 군법회의에서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5월 10일, 세포이들은 봉기하여 영국인 장교와 민간인을 살해하고, 코트왈 단 싱 구르자르의 도움으로 감옥을 열어 동료들을 구출했다.[274][275] 이 과정에서 약 50명의 유럽인이 살해되었다.[276]

미루트에서 델리까지는 불과 약 64.37km에 불과하여, 세포이들은 5월 10일 밤 델리 외곽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72] 5월 11일, 델리에 도착한 세포이들은 바하두르 샤 2세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델리 성 내의 영국인과 기독교 개종 인도인들이 살해되었다.[278][279] 델리 주둔 세포이들도 봉기에 가담하여 무기고를 점령했다.[280]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받아 항쟁을 용인했고, 5월 16일에는 유럽인 포로 50명을 처형했다.[281][282]

바하두르 샤 2세는 자신을 인도 아대륙황제로 선포했으나, 이는 세포이들과 각료들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295] 이 선포로 델리의 귀족과 고관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시크교도와 펀자브 지역인들은 영국 측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항쟁 초기 세포이들은 영국군을 격퇴하고 여러 지역을 획득했으나, 중앙 지휘 체계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다. 미르자 무굴, 바크트 칸 등이 지도자로 떠올랐지만, 대부분의 세포이들은 지역 귀족들의 지휘를 받았다.

미루트 주변의 구르자르들은 독자적으로 봉기하여 영국 경찰을 추방하고 민병대를 조직했다.[296] 불란드샤흐르와 비즈노르에서도 민병대가 조직되었고, 델리와 미루트의 구르자르들도 항쟁에 가담했다.

1857년 6월, 칸푸르에서 휴 휠러 장군 소속 세포이들이 봉기하여 영국 측 보루를 포위했다. 세포이 항쟁의 지도자 나나 사히브는 휠러에게 알라하바드로 안전하게 퇴각하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6월 27일, 영국 측이 강을 통해 퇴각하려 할 때 세포이들이 공격하여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300][301] 살아남은 여자와 어린이들은 비비가르로 끌려가 살해되었다.[302] 이 사건은 영국 내에서 큰 비난을 받았으며, 세포이들의 전쟁범죄로 여겨진다. 한편, 세포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영국 측의 보복 행위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304][305]

미루트 봉기 직후 아와드에서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판무관 헨리 로렌스는 러크나우의 거점을 요새화했지만, 세포이들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90일간의 공방전 끝에 영국 측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9월 25일 헨리 해브록이 지휘하는 영국 측 원군이 도착했다. 10월에는 콜린 캠벨이 이끄는 대규모 지원군이 도착하여 11월 18일 세포이들의 포위를 물리쳤다.

잔시는 마라타 왕국의 수도였다. 1853년 영국은 라프스 선언을 근거로 이 지역을 직할지로 선언했다. 라자의 아내 락슈미 바이는 이에 반대하여 봉기했다.[311] 1857년 7월, 이 지역 벵골 군 대부분이 항쟁에 가담했고, 락슈미 바이는 이들을 규합하여 영국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1858년 3월 영국군이 잔시를 점령하자 후퇴하여 항쟁을 계속했고, 1858년 6월 제8 아일랜드 국왕근위 기병대와의 교전에서 전사했다.[312]

3. 3. 진영의 분열

세포이 항쟁이 발생하자 인도의 각 지역은 세포이 반군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 회사를 지지하는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일부 지역은 중립을 지키거나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채 지나가기도 하였다.

반란 당시의 주들


델리에서 일어난 항쟁의 소식은 급속하게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많은 세포이들이 항쟁 소식을 듣고 항쟁에 합류하였으며 영국의 지배력이 마비되는 지역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델리에서 날아온 전보를 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간부들은 자신의 가족을 안전 지역으로 대피시키는 데 급급하였다. 델리에서 250km 떨어진 아그라에서는 비전투원을 포함한 6천 명 이상의 영국인이 아그라 요새에 집결하였다.[283] 항쟁이 발생한 지역의 영국인들은 근무지를 급히 벗어났고, 근무지에 남아있는 영국인은 무방비 상태에서 약탈을 당하거나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군대 역시 혼란에 빠졌는데 일부 영국인 장교는 자기 휘하의 세포이들을 믿고 병력을 유지하였고, 상당수의 영국인 장교들은 세포이들의 무장 해제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바라나시와 알라하바드에서는 세포이에 대한 무장 해제 시도가 오히려 항쟁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284]

조지 프랭클린 애킨슨이 1859년에 그린 ''토착 동맹군''.


세포이 항쟁이 확산되어가는 동안 여러 세력들이 세포이와 결합하였다. 바하두르 샤 2세무굴 제국의 부흥을 노렸고, 마라타 왕국이나 아와드 역시 자신들의 통치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항쟁에 참여한 무슬림들은 이를 지하드로 선언하였다.[285] 이들 중에는 천년 왕국의 도래를 선포한 마후라나 카즐레하크 카이라바드와 같은 이슬람 지도자도 있었다. 한편, 이러한 종교적 움직임이 자칫 자신을 향한 봉기가 될 것을 우려한 바하두르 샤 2세는 이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와드수니파 무슬림들은 시아파의 지배로 회귀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바하두르 샤 2세의 봉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가 칸과 같은 이들은 영국의 편에 섰다. 영국은 이러한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아가 칸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타나 바완의 수니파 무슬림은 하지 임다둘라흐 무하지르 마키를 자신들의 아미르로 세우고 영국을 지원하여 1857년 5월에 벌어진 샴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펀자브 지역의 시크교와 파슈툰족들 역시 영국 편에 섰으며 델리 탈환에 참전하였다.[286][287]

약 1860년경 ''시크교 군인들이 반란군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나누는 모습''


1857년 당시 벵골 군의 규모는 총 35만 명 규모로 그 가운데 인도인 병사는 311,000 명, 유럽인 병사는 40,160 명 이었고 장교는 5,362명이었다. 인도인 병사들 가운데에는 16,000 명의 시크교도와 1,500명의 구르카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88] 75개의 벵골군 연대 가운데 54개 연대가 세포이 항쟁에 동참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봉기 직후 진압되었다. 21개 연대는 항쟁을 우려하여 무장 해제 되었기 때문에 영국 측 벵골군은 12개 연대로 재편되었다.[289] 한편 10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던 벵골 경기병대는 모두 세포이 항쟁에 동참하였다.

또한, 벵골 군은 29개의 비정규 기병대와 42개의 비정규 보병대를 운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아와드와 과리오르에 주둔하고 있었다. 세포이 항쟁이 발생하자 해당 지역의 통치자가 영국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비정규군의 대부분은 항쟁에 가담하였다. 비정규 군 가운데 영국 측에 잔류한 병사들은 대부분 시크교도와 구르카인들이었다. 영국은 잔류 비정규 군사들을 펀자브 비정규 군으로 재편하였다.[290][291]

1858년 4월 1일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 측에 잔류한 세포이의 규모는 80,053 명이었다.[292][293] 이것은 벵골 군의 대다수 세포이들이 항쟁에 가담하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편, 29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던 마드라스 군에서는 3개 연대만이 항쟁에 가담하였고, 52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던 마드라스 군에서는 항쟁에 가담한 연대가 없었다. 다만, 마드라스 군의 1개 연대는 벵골지역 복무를 거부하였다.[294]

‘바렐리 전투 전 가지 전사들과의 충돌’, 1857년


세포이 항쟁 기간 동안 남부 인도는 간헐적인 봉기 이외에 특별한 군사 행동이 일어나지 않은 채 중립을 유지하였다.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의 수장인 니잠은 영국의 직접적 지배를 받지는 않았으나 항쟁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3. 4. 항쟁의 진압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붙잡힌 세포이 반군은 무굴 제국의 법에 따라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대포 앞에 매달아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이었다.[313]

바하두르 샤 2세양곤으로 추방되었으며 1862년 그곳에서 사망하였고, 무굴 제국은 역사로 사라지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를 정부가 직접 관할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 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더하게 되었다.

인도 내의 영국 병력 역시 재편되어 인도인 부대에 모집된 병사는 대부분 시크교인과 쿠르카로 구성되게 되었다.

1857년 8월 15일, 쿠르코우다에서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제5 벵골 유럽 기병대


메라트와 델리에서 발생한 사건 소식이 빠르게 퍼지면서 시파이들의 봉기와 많은 지역에서의 혼란을 야기했다. 많은 경우, 영국 군대와 민간 당국의 행동 자체가 혼란을 가중시켰다. 델리 함락 소식을 접한 많은 동인도회사 관리들은 자신들과 가족, 그리고 하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서둘렀다. 델리에서 160km 떨어진 아그라에서는 6,000명이 넘는 다양한 비전투원들이 요새로 모여들었다.[76]

군 당국 또한 분열된 방식으로 대응했다. 어떤 장교들은 시파이들을 신뢰했지만, 다른 장교들은 잠재적인 봉기를 막기 위해 그들을 무장 해제하려고 했다. 베나레스와 알라하바드에서의 무장 해제는 서투르게 진행되어 지역 반란으로 이어졌다.[116]

1857년 벵골군은 8만 6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1만 2천 명은 영국인, 1만 6천 명은 시크교도, 1,500명은 구르카였다. 인도에는 총 31만 1천 명의 토착 병사가 있었고, 영국군(영국 육군 부대 포함) 4만 160명과 장교 5,362명이 있었다.[77] 벵골군의 74개 정규 토착 보병 연대 중 54개 연대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일부는 즉시 진압되거나 해산되었고, 시파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20개 연대 중 상당수는 반란을 예방하거나 방지하기 위해 무장 해제되거나 해산되었다. 원래 벵골 토착 보병 연대 중 새로운 인도군에 편입된 것은 12개 연대에 불과했다.[78] 벵골 경기병 연대 10개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다.

벵골군에는 29개의 불규칙 기병 연대와 42개의 불규칙 보병 연대도 있었다. 이들 중 최근 합병된 아와드 주의 상당수 부대가 집단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왈리어의 또 다른 대규모 부대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주의 국왕인 자이지라오 신디아는 영국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나머지 불규칙 부대는 다양한 출처에서 모집되었으며 주류 인도 사회의 우려에 덜 영향을 받았다. 일부 불규칙 부대는 회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3개의 구르카 보병 부대와 6개 중 5개의 시크교 보병 부대, 그리고 최근 창설된 펀자브 불규칙군의 6개 보병 부대와 6개 기병 부대가 그러했다.[79][80]

1858년 4월 1일, 회사에 충성하는 벵골군의 인도 병사 수는 8만 53명이었다.[81][82]

봄베이 군대는 29개 연대 중 3개 연대에서 반란이 발생했지만, 마드라스 군대에서는 반란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52개 연대 중 하나의 일부 요소가 벵골에서의 복무를 거부했지만 말이다.[8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남부의 대부분은 수동적이었고, 간헐적인 폭력 사태만 발생했다. 그 지역의 많은 부분은 니잠이나 마이소르 왕족에 의해 통치되었고, 따라서 영국 통치를 직접 받지 않았다.

델리의 반란을 일으킨 시파이 대부분은 힌두교도였지만, 반란군 상당수는 무슬림이었다. 포위 공격이 끝날 무렵 가지의 비율은 현지 전투 부대의 약 4분의 1에 달했고, 그중에는 그왈리어 출신의 자살 가즈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다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영국군의 손에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84] 그러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영국 행정부에 대한 반란군의 반감을 공유하지 않았고[85] 그들의 율마지하드를 선포할 것인지 여부에 동의할 수 없었다.[86] 마울라나 무함마드 카심 나나우타비와 마울라나 라시드 아마드 갱고히와 같은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식민 통치에 맞서 무기를 들었지만,[87] 수니파와 시아파 양파의 율마를 포함한 많은 무슬림들은 영국 편에 섰다.[88] 다양한 아흘이 하디스 학자들과 나나우타비의 동료들은 지하드를 거부했다.[89] 델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흘이 하디스 율마 회원인 마울라나 사이이드 나지르 후세인 델비는 반란군의 지하드 촉구 압력에 저항하고 영국 통치를 지지했으며, 무슬림과 영국의 관계를 종교적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한 깨뜨릴 수 없는 법적 계약으로 간주했다.[90]

펀자브와 북서부 국경 지방의 시크교도와 파탄족은 영국을 지원했고 델리 탈환에 도움을 주었다.[91] 특히 시크교도들은 인도 북부의 무굴 통치의 부활을 우려했다.[92] 그들은 무굴 제국에 의해 박해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벵골군의 ''푸르비야'' 또는 '동방인'(비하르와 아그라와 아우드 합중주)에 대해 경멸감을 느꼈다. 시크교도들은 제1차제2차 영국-시크 전쟁(칠리안왈라와 페로제샤)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영국군에 의해 승리한 반면, 힌두스타니 시파이들은 시크교도들과 전투를 거부했다고 생각했다.[93] 힌두스타니 시파이들이 펀자브에서 주둔군으로 매우 눈에 띄는 역할을 맡고 펀자브에서 이익을 창출하는 민간 직책을 받았을 때 이러한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다.[92]

바실리 베레시차긴(Василий Верещагин)이 1884년에 그린 그림. 반란군 병사들을 대포에 묶어 나무 탄환을 발사하는 영국군의 보복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의 군복은 당시의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것이다.


영국은 반란의 원인이 된 엔필드 소총을 대량으로 배치하여, 부정확한 명중률과 짧은 사거리를 가진 구식의 평활강총을 사용한 반란군을 사거리 밖에서 정확하게 사격함으로써 압도했다.

또한, 포로로 잡힌 반란군 병사들을 대포의 포구에 묶어 나무로 만든 포탄을 발사하여 시신을 흩어지게 하는 잔혹한 처형을 보복으로 행하여, 공포로 반란군과 인도 민중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

무굴 제국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지도자로서 역량 부족이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고, 락슈미 바이 등의 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이 부족했던 반란군은 결국 개별적으로 제압되어 소멸했다. 그렇지만 1859년 중반까지 바흐트 칸, 탄티야 토페 등의 게릴라 세력의 저항은 계속되었다.[232]

4. 결과 및 영향

세포이 항쟁은 '''세포이 반란''', '''1857년 인도 항쟁''', '''제1차 인도 독립 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영국측 시각에서는 '반란'으로,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받는다.[235]

항쟁은 인도 전역을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벵골, 뭄바이, 마드라스와 같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펀자브시크교 제후는 오히려 영국 동인도 회사를 지지하여 병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236]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트라반코르, 카시미르, 라즈푸탄 등과 같은 다른 많은 지역의 토후국들은 항쟁에 가담하지 않았다.[238]

아와드[239]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항쟁이 유럽 국가 전체에 대한 배격운동 양상을 띄었다.[240] 락슈미 바이와 같은 항쟁의 지도자들은 항쟁 이후에도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236] 그러나, 세포이 항쟁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관적인 이념을 공유하지는 않았다.[241]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붙잡힌 세포이 반군은 무굴 제국의 법에 따라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대포 앞에 매달아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이었다.[313]

바하두르 샤 2세양곤으로 추방되었으며 1862년 그곳에서 사망하였고, 무굴 제국은 역사로 사라지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를 정부가 직접 관할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 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더하게 되었다.

인도 내의 영국 병력 역시 재편되어 인도인 부대에 모집된 병사는 대부분 시크교인과 구르카로 구성되게 되었다.

토머스 존스 바커의 ''룩나우 구원''


양측 모두 민간인들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11] 아우드(Oudh)에서만 전쟁 중 사망한 인도인이 15만 명에 달하며, 그중 10만 명이 민간인이라는 추산도 있다.[149] 네일 장군은 수천 명의 인도 반란군과 반란을 지지한 혐의가 있는 인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150]

카운포어에서 영국 여성, 어린이, 부상당한 병사(영국 편에 선 시파이 포함)를 반란군이 살해한 사건이 영국 신문에 보도되면서 많은 영국 병사들이 분노하여 복수를 갈망했다. 영국군은 반란군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 외에도 "대포로 날려 죽이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사형 선고를 받은 반란군을 대포 입구에 묶어 대포를 발사하여 산산조각냈다.[151][152] 카운포어에서 영국군이 저지른 특히 잔혹한 행위로는 많은 무슬림이나 힌두교 반란군에게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도록 강요하고, 이후 공개 교수형에 처하기 전에 죽은 자들의 피로 새로 칠한 건물을 핥게 하는 것이 있었다.[152]

고문 방식에는 "붉은 뜨거운 쇠로 지지기, 희생자가 반쯤 질식할 때까지 우물과 강에 담그기, 고환 짜기, 눈에 후추와 고추를 넣거나 남녀의 성기에 넣기, 수면 방해, 핀셋으로 살을 꼬집기, 나무 가지에 매달기, 석회를 저장하는 방에 가두기" 등이 포함되었다.[153]

영국 병사들은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저지르기도 했다.[154][155] 시파이로부터 도시들을 함락시키면서 영국 병사들은 인도 민간인들에게 보복하여 인도 여성들에게 잔혹 행위와 강간을 저질렀다.[156][157][158][159][160]

순전히 숫자 면에서 보면 사상자는 인도 측이 훨씬 많았다. 델리가 함락된 후 ''봄베이 텔레그래프''에 실리고 영국 언론에 재생산된 한 편지가 인도 사상자 규모를 증명했다.

''탈환 후 영국군이 룩나우의 카이사르 바그를 약탈하는 모습''(1850년대 후반 스틸 삽화)


바하두르 샤 2세(마지막 무굴 황제)가 1858년 5월 영국군에 의해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는 모습.


1858년 11월 1일 빅토리아 여왕이 발표한 "인도의 왕공, 수장, 백성에게 보내는 선포".


이 반란은 인도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 종식을 가져왔다. 1858년 인도 통치법에 의해 회사의 인도 통치권은 영국 왕관으로 이양되었다.[172] 인도 통치를 담당하는 새로운 영국 정부 부처인 인도청이 설립되었고, 그 장관인 인도 국무장관에게 인도 정책 수립 권한이 주어졌다. 인도 총독은 인도 총독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었고, 인도청에서 고안한 정책을 시행했다. 해협 식민지와 같이 이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토 일부는 독립적인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 식민 행정부는 인도 고위 카스트와 통치자들을 정부에 통합하고 서구화 시도를 폐지하려는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총독은 토지 탈취를 중단하고 종교적 관용을 선포했으며, 인도인들을 공무원으로 임명했지만, 주로 하급직이었다.

1858년 콜리 요새 공격에서 전사한 호프 그랜트 장군 부대의 C. 스콧 대위 (마드라스 연대). 마드라스 성 마리아 교회의 기념비


요크 대성당 내부의 기념비


세포이 반란으로 인한 불만으로 인해 영국은 벵골 군대에 대한 펀자브 지역의 모병을 증가시켰다.[174]

이 반란은 영국 인도의 토착 군대와 영국 군대 모두를 변화시켰다. 1857년 초에 존재했던 74개의 정규 벵골 토착 보병 연대 중 12개 연대만이 반란이나 해산을 피했다.[175] 벵골 경기병 연대 10개 모두가 손실되었다. 따라서 옛 벵골 군대는 전투 서열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이들은 영국이 그때까지 활용하지 않았던 계급과 소위 "용감한 종족"이라고 불리는 소수 민족, 예를 들어 시크족과 구르카족으로부터 새롭게 모집된 부대로 대체되었다.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

반란 기간 동안 영국군과 영국 인도군 구성원들에게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을 받은 182명의 명단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도의 항쟁 메달(Indian Mutiny Medal)

29만 개의 인도의 항쟁 메달(Indian Mutiny Medal)이 수여되었습니다. 델리 공방전과 룩나우 공방전 및 구원에 대해서는 별장이 수여되었습니다.[176]

인도 공훈 훈장(Indian Order of Merit)

영국 인도의 군사 및 민간 훈장인 인도 공훈 훈장(Indian Order of Merit)은 1837년 동인도 회사가 처음 제정했으며,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1858년 왕실이 인계받았습니다. 인도 공훈 훈장은 1837년부터 1907년까지 원주민 병사들에게 수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공훈장이었습니다.[177]

여왕 자리를 탐내는 빅토리아 여왕을 풍자한 풍자화. 인도인 복장을 한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빅토리아 여왕과 인도 황제관과 영국 왕관을 바꾸고 있다.


반란의 실패로 무굴 제국은 명실상부로 멸망하고,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유죄 판결을 받고 폐위되어 버마유배되었으며, 반식민지 운동은 쇠퇴하였다. 영국 정부는 한 회사에 광대한 인도 영토를 맡기는 것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 반란의 모든 책임을 지우는 형식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해산하고,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233]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하는 영국령 인도의 성립을 선포하여, 형식적으로도 본국 정부가 인도를 통치하게 되었다.[233]

5. 평가

세포이 항쟁은 '''세포이 반란''', '''1857년 인도 항쟁''', '''제1차 인도 독립 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반란'이라는 명칭은 영국 측 시각을 반영한 것이며, 인도인의 입장에서 이 항쟁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었다.[235]

세포이 항쟁은 인도 전역을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벵골, 뭄바이, 마드라스와 같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펀자브시크교 제후는 오히려 영국 동인도 회사를 지지하여 병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236]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트라반코르, 카시미르, 라즈푸탄 등과 같은 다른 많은 지역의 토후국들은 항쟁에 가담하지 않았다.[238]

아와드[239]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항쟁이 유럽 국가 전체에 대한 배격운동 양상을 띄었다.[240] 락슈미 바이와 같은 항쟁의 지도자들은 항쟁 이후에도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236] 그러나, 세포이 항쟁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관적인 이념을 공유하지는 않았다.[241]

세포이 항쟁은 인종, 종교, 카스트의 구별 없이 광범위한 계층이 규합된 최초의 반영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인도 독립 운동사에서 의의를 가진다.[319]

마이클 아다스(Michael Adas)는 역사 서술을 인도 민족주의적 관점,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전통주의적 반란으로서의 반란 관점, 그리고 지역적 봉기의 집중적 연구라는 네 가지 주요 접근 방식으로 조사했다.[188]

토머스 R. 메트칼프(Thomas R. Metcalf)는 에릭 토마스 스톡스(Eric Thomas Stokes)의 업적, 특히 ''The Peasant and the Raj: Studies in Agrarian Society and Peasant Rebellion in Colonial India''(1978)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킴 A. 웨그너(Kim A. Wagner)는 현대 인도의 역사 서술이 아직 식민지 시대 기록의 "편견"에 대한 반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웨그너는 또한 윌리엄 달림플(William Dalrymple)의 ''The Last Mughal: The Fall of a Dynasty, Delhi 1857''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857년 7월 영국 하원(British House of Commons)에서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세포이 항쟁을 '민족 반란'이라고 규정했지만, 팔머스턴 경(Lord Palmerston)은 이 사건을 '단순한 군사 반란'으로 축소하려고 했다.[197] 찰스 볼(Charles Ball)은 저서 제목에 '반란'(mutiny)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본문에서는 "국민으로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이라고 규정했다.[198] 역사가들은 반란을 인도 독립 전쟁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199]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여겨진다.

반란을 인도 독립 전쟁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 당시 인도는 정치적, 문화적, 민족적으로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 이 반란은 마드라스 군, 봄베이 군, 시크교 연대 등 다른 인도 병사들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 동인도 회사 군대의 80%는 인도인이었다.[200]
  • 많은 지역 통치자들이 영국에 맞서 연합하기보다는 서로 싸웠다.
  • 많은 반란 시파이 연대는 싸우기보다는 해산하여 귀향했다.
  • 모든 반란군이 무굴 제국의 부활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 델리 왕은 반란군을 실제로 통제하지 못했다.[201]
  • 반란은 주로 인도 북부와 중부에 국한되었다.
  •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역에서 토착 통치자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 반란은 종교적, 민족적, 지역적 갈등으로 분열되었다.[202]


반란을 인도 독립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 반란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반란 시파이들은 옛 무굴 제국(Mughal Empire)을 부활시키기 위해 델리로 향했다.
  • 아와드(Awadh), 분델칸드(Bundelkhand), 로힐칸드(Rohilkhand) 등에서 광범위한 대중적 반란이 일어났다.
  • 시파이들은 지역 왕국을 부활시키려 하지 않고,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무굴 제국의 "전국적인 통치"를 선포했다.
  • 일부는 아와드 외부에서 모집되었지만, 반란군들은 공통된 목표를 보였다.[203]

6. 대중문화


  • 《망갈 판데이》 (2005년 제작)
  • '''인도의 빛(Light of India)''' – 엘머 클리프턴(Elmer Clifton)이 감독한 1929년 미국 단편 무성 영화(Technicolor로 촬영)로, 인도의 반란을 묘사한다.
  • '''벵골 여단(Bengal Brigade)''' – 1954년 영화: 세포이 항쟁 발발 당시의 이야기. 영국군 장교인 클레이번(Claybourne) 대위는 명령 불복종 혐의로 연대에서 파면되지만, 그의 부하들에 대한 의무는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 '''마니람 데완(Maniram Dewan)''' – 1964년 사르베스와르 차크라보르티(Sarbeswar Chakraborty) 감독의 아삼어 영화. 아삼에서 반란을 이끈 마니람 데완(Maniram Dewan)의 삶과 시대를 묘사한다.[206]
  • '''샤트란즈 케 킬라리(Shatranj Ke Khilari)''' – 1857년 세포이 항쟁 직전의 사건을 기록한 1977년 인도 영화.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 감독. 아우드(Oudh)의 영국 병합과 19세기 인도 귀족들의 정치적 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주눈(Junoon)''' (1978년 영화) – 샴 베네갈(Shyam Benegal) 감독. 항쟁 중 파탄(Pathan) 봉건 지도자와 그의 가족이 보호하는 영국 소녀의 연애를 그린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영화.
  • '''망갈 판데이: 더 라이징(Mangal Pandey: The Rising)''' (2005) – 케탄 메타(Ketan Mehta) 감독의 힌디어 영화로, 망갈 판데이의 삶을 기록한다.
  • '''경기병 연대의 돌격''' (1936) – 코운푸르(Cawnpore) 학살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이 등장한다.
  •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 허구의 판콧 궁전(Pankot Palace)에서의 만찬 장면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블럼버트(Blumburtt) 대위가 궁전이 "반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언급하고, 챗타 랄(Chattar Lal)은 "영국인들은 1857년 반란을 결코 잊지 않는 것 같다"고 불평한다.
  • '''인도 세포이 반란의 한 사건, 마지막 카트리지(The Last Cartridge, an Incident of the Sepoy Rebellion in India)''' (1908) – 반란 중 포위된 영국 요새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
  • '''빅토리아 앤 압둘(Victoria & Abdul)''' (2017) – 빅토리아 여왕은 압둘(Abdul)이 자신에게 들려준 일방적인 인도 반란 이야기를 법정에서 이야기하며 스스로 곤경에 처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흔들리고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한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그에게 머물 것을 요청한다.[207]
  • '''마니카르니카: 잔시의 여왕(Manikarnika: The Queen of Jhansi)''' – 2019년 힌디어 영화로 라니 락슈미 바이의 삶을 기록한다.
  • ''1857: 에크 사파르나마'' – 자베드 시디키(Javed Siddiqui)가 쓴 희곡으로,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를 배경으로 델리의 푸라나 킬라(Purana Qila)에서 공연되었다.[208]

아삼 지방의 여러 민요는 마니람 데완(Maniram Dewan)을 기리는 의미에서 작곡되었으며, "마니람 데와노르 게엣(Maniram Dewanor Geet)"이라고 불리며 차 산업과 반란에서 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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