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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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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보인은 남제 무제의 사촌 소란의 아들로, 494년 건안왕에 봉해졌다. 502년 양 무제가 건강을 함락한 후 북위에 투항하여 제왕으로 봉해지고 남양장공주와 결혼했다. 이후 북위에서 여러 관직을 거치며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받았으나, 반란을 일으켜 실패하고 530년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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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보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소보인(蕭寶夤)
지량(智亮)
묘호없음
시호없음
생년485년 이후
몰년영안(永安) 3년 (530년)
부친남제 명제
모친명경황후
배우자원황후
정치
칭호황제
왕조
연호융서 : 528년 - 529년
재위 기간528년 - 529년
수도장안
가족 관계
형제소보권
자녀3남 1녀
기타
로마자 표기Xiao Baoyin

2. 생애

486년 남제 무제 치세에 태어난 소보인은 소롼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소롼의 아내 류후이돤(劉惠端)으로, 소보인이 겨우 두 살이었던 489년에 사망했다. 494년 아버지가 즉위하자 건안왕(建安王)에 봉해졌다.[3] 아버지 명제는 498년에 사망하고, 형인 소보권이 뒤를 이었다. 소보권은 폭력적인 통치자였지만, 형제들을 잘 대했으며, 소보인에게 중요한 관직이 주어졌다.

500년, 소연이 소보권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소연과 다른 반군 장군 소영주(蕭穎冑)는 강릉에서 소보인의 동생 소보융을 황제로 옹립하며 남제는 내전에 휩싸였다. 501년, 장군 장흔태(張欣泰)가 수도 건강에서 소보권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했고, 소보인을 붙잡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장흔태는 곧 패배했고, 소보권은 소보인이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믿고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502년 설 무렵, 소연이 건강을 포위하는 동안, 소보권의 장군 왕진국(王珍國)과 장기(張稷)는 소보권을 암살하고 소연에게 도시를 바쳤다. 소연은 도시에 입성하여 섭정 권한을 행사했고, 소보인의 작위는 파양왕(鄱陽王)으로 바뀌었다. 소연은 황좌에 눈독을 들였고,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수도를 정비하면서, 명 황제를 강제로 황위를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명 황제의 형제들을 처형하기 시작했고, 소보인은 환관 안문지(顏文智)와 시종 마공(麻拱)의 도움으로 양쯔 강에 배를 타고 탈출, 북위로 망명하여 변경 도시 수양(壽陽, 현대의 루안, 안후이)에 도착했다. 북위 선무제는 소보인을 귀빈으로 맞이했고, 소연이 502년 후반에 명 황제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후, 소보인을 양나라를 정복하는 도구로 사용할 것을 고려했다. 표면적으로, 양나라는 소보인이 반역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발표했다.[3]

503년 봄, 소보인이 며칠 동안 선무제의 궁궐 앞에서 엎드려 나라 공격을 간청하자, 선무제는 양나라 공격 계획을 시작했다. 소보인에게 군대가 주어졌고, 단양공(丹陽公)과 제왕(齊王)의 칭호를 받았으며, 양나라를 정복하고 남제(南齊)를 북위(北魏)의 속국으로 재건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선무제는 소보인이 책략가와 장군들을 자기 주변에 모으는 것을 허락했고, 누이인 남양공주를 소보인에게 시집보냈다.

소보인은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받았고, 효명제 치세 동안 여러 핵심 정부 관직을 거쳤다. 507년 종리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칭호를 박탈당했지만 곧 회복되었다. 511년, 북위군이 또 다른 참패를 겪었을 때, 소보인은 자신의 군대를 손상시키지 않은 유일한 장군으로 묘사되었다. 516년, 수양에 대한 양나라의 공격을 막는 데 참여했다. 소보인은 소연에게 제나라를 멸망당하고, 소보융 등 형제들을 살해당한 원한을 잊지 못하고, 분노하여 낙양 조정에 보고했다.

522년, 소정덕이 북위로 도망쳐 오자, 소보인은 소정덕을 심하게 비난하며 처형할 것을 요청했다. 북위는 소정덕을 처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 대우하지 않았고, 소정덕은 결국 양나라로 도망쳤다.

524년, 소보인은 주요 반군 중 하나인 모절념생(莫折念生)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25년, 모절념생의 형제인 모절천생(莫折天生)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 교착 상태에 빠졌다. 몇 달 후, 모기추노(莫岐醜奴)에게 큰 패배를 당했고, 부관 최연백(崔延伯)이 전사했다. 소보인은 호태후가 자신을 처벌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호태후는 그의 지위를 강등시켰지만, 군대 지휘권은 유지했다. 527년 부관 양간(羊侃)이 모절념생을 죽인 후 그의 칭호는 회복되었다.

소보인은 반역을 계속 고려하며, 호태후의 가장 신뢰하는 관리 중 한 명인 의양왕 원략(元略)이 양나라에서 잘 대우받았고, 거짓 구실로 그를 죽이라는 양 무제의 지시를 받았음에 틀림없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호태후가 강직한 관리 이도원을 소보인의 군대를 조사하도록 보내자, 소보인은 이도원을 암살한 후 527년 겨울, 스스로를 제(齊)나라 황제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반역은 부하들에게서도 큰 지지를 받지 못했고, 528년, 그의 장군 후종덕(侯終德)이 그를 매복 공격했고, 그의 군대가 무너지자 소보인은 아내 남양공주와 막내 아들 소개(蕭凱)를 데리고 모기추누에게 도망쳤다. 곧 황제를 자칭한 모기추누는 소보인에게 태부(太傅)라는 칭호를 주고 그를 주장군으로 임명했다.

530년, 효장제가 이주영의 조카 이주천광을 파견하여 서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이주천광은 먼저 모기를 방심시킨 후 기습 공격을 가해 그를 생포했다. 이주천광은 곧 모기의 수도 고평(高平, 현대의 구원시, 닝샤 회족 자치구)으로 접근했고, 고평의 군대는 소보인을 체포하여 항복했다.

소보인과 모기추누는 수도 낙양으로 끌려가 사흘 동안 전시되었다. 소보인의 추정 조카인 단양왕 소찬(蕭贊)이 그의 목숨을 구걸했고, 소보인과 친했던 관리 이신준(李神儁)과 고도목(高道穆)도 효장제에게 소보인의 반란은 호태후의 부패한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관리 왕도습(王道習)은 소보인을 사면하는 것에 반대하며, 소보인의 반란은 이전 정권 동안 일어났지만, "현재" 정권에서는 모기추누 아래에서 일했다고 주장했다. 효장제는 이에 동의하여 모기를 참수하고 소보인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그가 독약을 마시려 하자 남양공주와 그의 자녀들이 찾아와 슬피 울었지만, 소보인은 슬퍼하지 않고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나는 단지 제대로 된 신하가 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2. 1. 남제 시기

494년 건안군왕(建安郡王)에 봉해졌다.[3]

소보권이 즉위하자 도독, 영주자사(郢州刺史)에 봉해졌다. 501년 거기장군(車騎將軍), 개부의동삼사에 봉해져 석두성에 복무했다.[3]

같은 해 7월, 옹주자사 장신태(張欣泰)가 거사를 모의하고 태성의 주사(主帥)들을 죽이자 전 남초태수(南譙太守) 왕령수(王靈秀)가 석두성으로 들어가 성 안의 군인들을 통솔하고 소보인을 수레에 태워 태성(台城)으로 향했다. 이때 백성 수천 명이 빈손으로 뒤따라왔다.[3]

수레가 두씨의 저택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지자 성문이 굳게 닫히고, 성 위의 사람들이 활을 쏘아대자 백성 무리가 소보인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후 3일이 지나 초시위(草市尉)에 이르러 황제 소보권이 그를 궁궐로 맞이하였고 소보인이 눈물을 흘리니 소보권이 그의 작위를 회복시키고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임명하였다.[3]

선덕태후가 임조칭제를 할 시기에 소보인은 파양왕(鄱陽王)으로 개봉되었다.[3]

502년 설 무렵, 소연이 건강을 포위하는 동안, 소보권의 장군 왕진국(王珍國)과 장기(張稷)는 소보권이 포위를 풀지 못한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그를 암살하고 소연에게 도시를 바쳤다. 소연은 도시에 입성하여 섭정 권한을 행사했고, 소연이 왕 태후에게 건안공(建安公)의 작위를 받자, 소보인의 작위는 파양왕(鄱陽王)으로 바뀌었다.[3]

2. 2. 북위 망명과 활동

502년, 양무제가 건강을 함락한 직후, 소보인은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북위로 망명했다. 북위는 남제가 멸망하자 소보인을 서인으로 강등했지만, 곧 선무제에 의해 제왕(齊王)으로 봉해졌고, 북위 황족인 남양장공주와 혼인했다.

명제의 여덟째 아들인 소보인은 건무 원년(494년)에 아버지가 즉위하자 건안왕에 봉해졌다.[1] 영원 3년(501년) 1월, 거기장군, 의동삼사가 되어 석두에 주둔했다.[1] 같은 해 7월, 옹주 자사 장흠태와 전 남초군태수 왕령수 등이 소보인을 받들어 건강으로 향했으나, 성문이 닫히고 성벽 위에서 사격을 가하자 반란군은 도주했다. 소보인은 3일간 도주 후 붙잡혀 소보권에게 사죄하고 용서받았다.[1]

중흥 원년(501년) 3월, 소보인은 소연에 의해 강릉에서 옹립된 동생 소보융으로부터 위장군, 남서주 자사에 임명되었다.[1] 12월, 소보권이 살해되고 소연에 의해 건강성이 함락되자, 소보인은 파양왕으로 개봉되었다.[1] 502년 3월, 북위에 망명하여[1] 같은 해 윤 4월, 낙양에서 선무제를 알현하고, 낙양 서쪽의 귀정리에 저택과 의관, 수레를 하사받았다.[1]

503년 봄, 소보인이 며칠 동안 선무제의 궁궐 앞에서 엎드려 나라 공격을 간청하자, 선무제는 양나라 공격 계획을 시작했다. 소보인에게 군대가 주어졌고, 단양공(丹陽公)과 제왕(齊王)의 칭호를 받았으며, 양나라를 정복하고 남제(南齊)를 북위(北魏)의 속국으로 재건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선무제는 소보인이 책략가와 장군들을 자기 주변에 모으는 것을 허락했고, 누이인 남양공주를 소보인에게 시집보냈다.

소보인은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받았고, 효명제 치세 동안 여러 핵심 정부 관직을 거쳤다. 507년 종리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칭호를 박탈당했지만 곧 회복되었다. 북위의 양나라 공격이 반복적으로 실패하면서 남제를 재건할 기회는 거의 없어 보였다. 511년, 북위군이 또 다른 참패를 겪었을 때, 소보인은 자신의 군대를 손상시키지 않은 유일한 장군으로 묘사되었다. 516년, 수양에 대한 양나라의 공격을 막는 데 참여했다. 소보인은 소연에게 제나라를 멸망당하고, 소보융 등 형제들을 살해당한 원한을 잊지 못하고, 분노하여 낙양 조정에 보고했다.[1]

522년, 소정덕이 북위로 도망쳐 오자, 소보인은 소정덕을 심하게 비난하며 처형할 것을 요청했다. 북위는 소정덕을 처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 대우하지 않았고, 소정덕은 결국 양나라로 도망쳤다.

524년, 소보인은 주요 반군 중 하나인 모절념생(莫折念生)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25년, 모절념생의 형제인 모절천생(莫折天生)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 교착 상태에 빠졌다. 몇 달 후, 모기추노(莫岐醜奴)에게 큰 패배를 당했고, 부관 최연백(崔延伯)이 전사했다. 소보인은 호태후가 자신을 처벌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호태후는 그의 지위를 강등시켰지만, 군대 지휘권은 유지했다. 527년 부관 양간(羊侃)이 모절념생을 죽인 후 그의 칭호는 회복되었다.

소보권은 제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모반을 일으켜 잠시 서인으로 강등당했으나, 527년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4월에 정서장군(征西將軍), 옹주자사, 대장군, 개부(開府), 대도독으로 복권되었다.

북위의 종실 원략(元略)이 남조로 도주하여 양무제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으나 영태후에 의해 북위로 돌려보내졌다. 소보인은 원략이 양무제의 지시를 받아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에 려도원과 원중경(元仲冏)을 죽였다. 이후 스스로 제제(齊帝)를 자칭하여 연호를 융서(隆緒)라 하고, 남양장공주를 황후로 임명했다. 이후 손봉(孫奉)이 그를 공격했고, 소보인은 만흘추노에게 의탁하여 황제 지위를 포기하고 그의 태부가 되었다.

530년, 이주천광은 하발악 등을 파견하여 안정에서 만흘추노를 격파하고, 만흘추노와 소보인을 생포하여 낙양으로 압송했다. 소보인은 3일 동안 대중 앞에서 죄를 밝힌 후 처형되었다.

2. 3. 반란과 최후

蕭寶夤|소보인중국어은 527년 사공(司空)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4월에 정서장군(征西將軍), 옹주자사(雍州刺史), 대장군, 개부(開府), 대도독으로 복권되었다.[1]

북위의 종실 원략(元略)은 남조로 도주하여 양무제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으나 영태후에 의해 양무제는 다시 그를 북위로 돌려보내 의양왕(義陽王)에 봉해졌다.[1] 소보인은 원략이 양무제의 지시를 받아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에 두려워했고, 자신을 감시했을 것 같은 역도원을 사람을 보내 암살하였으며 원중경(元仲冏)도 죽였다.[1] 이후 스스로 제제(齊帝)를 자칭하여 연호를 융서(隆緒)라 하고, 남양장공주를 황후로 임명했다.[1] 이후 손봉(孫奉)이 그를 공격하였고, 소보인은 당해내지 못하자 묵기추노에게 의탁하여 황제 지위를 포기하고 그의 태부(太傅)가 되었다.[1]

530년, 이주천광은 하발악 등을 파견하여 안정군(安定郡)에서 묵기추노를 격파하고, 묵기추노와 소보인을 생포하여 낙양으로 압송한 다음 3일 동안 대중 앞에서 그들의 죄를 밝혔으며, 이후 소보인은 사사당했다.[1]

소보인은 반역을 계속 고려하며, 호태후의 가장 신뢰하는 관리 중 한 명인 의양왕 원략이 양나라에서 잘 대우받았고, 거짓 구실로 그를 죽이라는 양 무제의 지시를 받았음에 틀림없다는 구실을 내세웠다.[2] 호태후가 강직한 관리 이도원을 소보인의 군대를 조사하도록 보내자, 소보인은 이도원을 암살한 후 527년 겨울, 스스로를 제(齊)나라 황제라고 선언했다.[2] 그러나 그의 반역은 심지어 자신의 부하들에게서도 큰 지지를 받지 못했고, 부하들이 그를 상대로 일어섰다.[2] 528년, 그의 장군 후종덕(侯終德)이 그를 매복 공격했고, 그의 군대가 무너지자 소보인은 아내 남양공주와 막내 아들 소개(蕭凱)를 데리고 모기추누에게 도망쳤다.[2] 곧 황제를 자칭한 모기추누는 소보인에게 태부(太傅, "황실 교수")라는 칭호를 주고 그를 주장군으로 임명했다.[2]

530년, 527년에 효명제를 살해하고 효장제를 즉위시킨 이주영이 서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카 이주천광을 파견했다.[3] 이주천광은 빠르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먼저 모기를 방심시킨 후 기습 공격을 가해 그를 생포했다.[3] 이주천광은 곧 모기의 수도 고평(高平, 현대의 구원시, 닝샤 회족 자치구)으로 접근했고, 고평의 군대는 소보인을 체포하여 항복했다.[3]

소보인과 모기추누는 수도 낙양으로 끌려가 사흘 동안 서커스 동물처럼 전시되었다.[4] 소보인의 추정 조카인 단양왕 소찬(蕭贊)(소보권의 후궁이자 나중에 소연의 후궁이었던 오씨의 아들로, 자신이 소보권의 아들이고 소연의 아들이 아니라고 믿었다)이 그의 목숨을 구걸했고, 소보인과 친했던 관리 이신준(李神儁)과 고도목(高道穆)도 효장제에게 소보인의 반란은 호태후의 부패한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고 호소했다.[4] 그러나 관리 왕도습(王道習)은 소보인을 사면하는 것에 반대하며, 소보인의 반란은 이전 정권 동안 일어났지만, "현재" 정권에서는 모기추누 아래에서 일했다고 주장했다.[4] 효장제는 이에 동의하여 모기를 참수하고 소보인에게 자결을 강요했다.[4] 그가 독약을 마시려 하자 남양공주와 그의 자녀들이 찾아와 슬피 울었지만, 소보인은 슬퍼하지 않고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나는 단지 제대로 된 신하가 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 뿐이다."라고 말했다.[4]

3. 가족 관계


  • 아버지: 샤오롼
  • 어머니: 류후이돤(劉惠端)
  • 형제:
  • 샤오바오쥐안
  • 샤오바오쉬안
  • 샤오바오룽
  • 아들:
  • 장남: 소열 (효명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여 부마도위에 임명되었다. 아버지가 북위에 반기를 들자 처형당했다.)
  • 차남: 소권 (동생 소개와 활쏘기를 하다가 동생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삼남: 소개 (사도좌장사에 올랐다. 동위천평 연간에 아내 장손씨(장손치의 딸)의 사주로 어머니 남양장공주를 살해했기 때문에 거열형에 처해졌다.)

4. 평가

북위 선무제는 소보권을 애도하는 소보인의 형제애에 감탄하여, 503년 봄 소보인이 며칠 동안 선무제의 궁궐 앞에서 엎드려 량에 대한 공격을 간청하자 량 공격 계획을 시작했다. 소보인은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받았으며, 선무제와 효명제 치세 동안 여러 핵심 정부 관직을 거쳤다. 507년 그와 또 다른 주요 장군인 중산왕(中山王) 원영이 량의 장군 위예에게 큰 패배를 당한 후 잠시 칭호를 박탈당했지만, 곧 그의 칭호는 회복되었다. 511년 북위군이 또 다른 참패를 겪었을 때, 그는 자신의 군대를 손상시키지 않은 유일한 장군으로 묘사되었다. 516년 그는 수양(壽陽)에 대한 량의 공격을 막는 데 참여했다.

524년 북위는 국경 전역에서 농민 반란으로 시달렸다. 525년 소보인은 모절천생(莫折天生)에게 큰 승리를 거두어 모절념생(莫折念生)의 세력을 상당히 약화시켰지만, 곧 모절념생과 교착 상태에 빠져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의 부관 양간(羊侃)이 527년 전투에서 모절념생을 죽인 후 그의 칭호는 회복되었다.

528년 그의 장군 후종덕(侯終德)이 그를 매복 공격했고, 그의 군대가 무너지자 소보인은 아내 남양공주(南陽公主)와 막내 아들 소개(蕭凱)를 데리고 모기추누(莫岐醜奴)에게 도망쳤다. 530년 이주천광은 모기의 수도 고평(高平, 현대의 구원시, 닝샤 회족 자치구)으로 접근했고, 고평의 군대는 소보인을 체포하여 항복했다. 소보인과 모기추누는 수도 낙양으로 끌려가 사흘 동안 서커스 동물처럼 전시되었다. 소보인과 친했던 관리 이신준과 고도목(高道穆)도 효장제에게 소보인의 반란은 호태후의 부패한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관리 왕도습(王道習)은 소보인을 사면하는 것에 반대하며, 소보인의 반란은 이전 정권 동안 일어났지만, "현재" 정권에서는 모기추누 아래에서 일했다고 주장했다. 효장제는 이에 동의하여 모기를 참수하고 소보인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참조

[1] 서적 Book of Wei
[2] 서적 Book of Wei
[3] 서적 Nan Qi Shu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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