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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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조선공산당은 1945년 10월, 일본 항복 이후 북한 지역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조직으로, 초기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과 국내파 공산주의자 간의 갈등이 있었다. 1945년 10월 북조선 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통해 김일성은 당내 권력을 강화하고, 1946년 5월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설치하여 제1비서가 되었다. 이후 북조선신민당과의 합당을 통해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되면서 해체되었으며, 김일성의 권력 집중과 북한 정치 체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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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공산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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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명칭 | 북조선분국 |
다른 명칭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선어: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북조선공산당 (조선어: 북조선공산당) |
소속 위원 | 14명 |
상위 기관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
하위 기관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
창립 | 1945년 10월 13일 |
해체 | 1946년 8월 30일 |
창립일 - 해체일 | () |
초대 서기 | 김일성 김용범 |
2대 서기 | 오기섭 |
총무부장 | 박정호 |
부서 | 9개 |
이전 기관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
다음 기관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
역사적 배경 | |
결성 배경 | 8·15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북한 지역 공산주의 세력 통합 필요성 대두 |
주요 사건 | 조선공산당 북부 5도 당원 및 열성자 대회 (1945년 10월 13일) |
해체 | 북조선신민당과의 통합으로 조선로동당 창당 (1946년 8월 30일)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김일성 김용범 오기섭 박정호 |
2. 배경: 해방 직후 공산주의 운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반도에는 여러 공산주의 조직들이 생겨났다. 8월 15일에서 17일 사이에는 최익한, 이용, 조동호, 현준혁 등이 주도한 "조선공산당 서울지구"가 결성되어 8월 18일에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장안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박헌영은 장안파의 제안을 거부하고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PCR-CPK)를 만들어 장안파 해체를 요구했다. PCR-CPK는 2단계 혁명 이론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에 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조선공산당(CPK) 주도로 인민 전선을 결성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
이후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 장안파, 적기파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박헌영은 공산주의 운동의 단결과 "지하 활동" 경험이 있는 인물들의 당 지도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투옥 중 공산주의를 포기한 이들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장안파를 비판했다.
결국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조선공산당 재건대회가 개최되었고, 박헌영이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지주, 자본가 계급과의 협력을 반대하는 강령이 채택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9월 15일 장안파 평안남도위원회가 조선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했는데, 이는 소련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9월 19일에는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 부대가 소련군과 함께 귀환했으며, 이들은 소련파로 불리며 김일성의 권력 장악을 도왔다. 소련은 김일성이 북한의 공산주의 조직을 장악하도록 지원했고, 결국 박헌영과의 합의를 통해 조선공산당 산하 북조선 분국(NKBB)이 설치되었다.
2. 1. 장안파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시도
1945년 8월 14일 일본의 항복 이후, 8월 15일부터 17일 사이에 "조선공산당 서울지구"가 결성되었고, 8월 18일에 공개 선언을 발표했다. 이 단체는 장안파로 알려졌으며, 최익한, 이용, 조동호, 현준혁 등이 지도했다. 박헌영은 장안파의 중앙위원회 가입 초청을 거절하고,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PCR-CPK)를 결성하여 장안파의 해산을 요구했다. PCR-CPK는 한국이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기 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거쳐야 한다는 2단계 혁명 이론을 지지했다. 또한 조선공산당(CPK)의 지도 아래 인민 전선을 결성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2. 2. 조선공산당 재건 대회 (1945년 9월)
1945년 9월 8일,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PCR-CPK), 장안파, 적기파 대표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박헌영은 공산주의 운동의 단결과 "지하 활동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당 지도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투옥 기간에 공산주의를 포기한 사람들은 당의 지도적 지위를 맡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이는 장안파에 대한 비판이었다. 장안파의 최익한은 회의 제안을 "개혁주의적, 경제주의적, 아나키즘적"이라고 비판했다. 박헌영은 "혁명 이론을 숙달한 혁명적 지식인과 실제 운동 경험을 겪은 노동자를 결합한 위대한 볼셰비키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회의에서는 박헌영 보고서를 승인하고, 당 대회를 소집하고, 당 인사를 선정하는 최종 권한을 박헌영에게 위임하는 세 가지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장안파는 이에 반대했다.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조선공산당 재건대회가 열렸고, 박헌영이 31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회는 지주와 자본가 계급과의 협력을 반대하는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2. 3. 북한 지역 공산주의 운동과 소련의 역할
1945년 9월 15일, 북한의 장안파 평안남도위원회는 조선공산당 (CPK)의 정책에 대해 영국과 미국에 대한 태도가 모호하고, 소련이 이끄는 "민주 진영"에 대한 입장이 경솔하다고 비판했다. 정치학자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은 이 비판이 실제로는 소련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당시 북한의 주요 공산주의 조직이었던 현준혁 그룹을 통해 전달된 것이라고 분석한다.1945년 9월 19일,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 부대가 소련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고, 한국계 소련 공산당 당원 그룹도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나중에 소련파로 불리게 되었고, 김일성의 권력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자 백학순은 소련군이 현지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김일성이 북한의 공산주의 조직을 장악하는 데 모든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단계별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소련은 김일성이 9월 29일 또는 30일에 북한 도당 조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도왔고, 10월 1일 또는 8일에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회의를 주선했다. 이 회의에서 북한에 별도의 공산주의 조직을 설립할 가능성이 논의되었지만, 박헌영은 반대했다. 소련의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Andrei Romanenko)이 개입하여 김일성의 편을 들었고, 조선공산당 산하에 북조선 분국(NKBB)을 설립하라고 조언했다. 박헌영은 분국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 요구를 수용했다. 백학순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북한에 독립적인 당 기관을 설립하려는 소련군의 정책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3. 북조선 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1945년 10월)
1945년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협의에 따라 북조선 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북한 측에서는 조선로동당의 창당을 기념하는 것으로, 남한 측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립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내용 | 북한 측 주장 | 남한 측 주장 |
---|---|---|
회의 명칭 | 5개 북서부 도 당원 및 열성자 대회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결성 |
기간 | 1945년 10월 10일–13일 (4일) | 1945년 10월 10일–13일 (4일) |
의제 |
김일성이 조선공산당(CPK)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면서, 국내파로 분류되는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에서 김일성이 국내파와 오기섭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조선공산당과 박헌영과의 대립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3. 1. 전선 전략과 좌우 경향 논쟁

제1차 대회에서 오기섭은 인민 전선 전략을 옹호한 반면, 김일성과 그 지지자들은 민족 연합 전선 전략을 옹호했다. 김일성은 자본가 계급 및 지주와의 동맹을 명시적으로 요구했지만, 인민 전선 노선은 이에 반대했다. 김일성은 그러한 동맹에서 프롤레타리아 지도력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오기섭은 "통일되고 인민 스스로의 자립적인 공화국 건설"을 요구하며, 친일파, 친제국주의자, 반동분자를 인민 전선에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이는 김일성의 더 포괄적인 노선과 대치되는 것이었고, 오기섭은 "선별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1948년 제2차 당대회에서 오기섭의 입장을 비판하며, 민족 연합 전선 전략이 "당을 좌절시키고 당을 우경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오기섭과 김일성 모두 좌익 및 우익 공산주의를 비판했고, 특히 장안파가 트로츠키주의를 실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뉘우치고 과오로부터 배우려는 의지가 있다면 북조선노동당(NKBB)과 조선공산당(CKP)에 가입할 수 있다고 제안하며, 오기섭보다 더 유연하고 포괄적인 입장을 취했다.
3. 2. 조직 문제 논쟁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협의에 따라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중심지들의 지원을 받아 CKCPMEFNP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조선공산당(CPK)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국내파로 분류되는 토착 공산주의자들 간의 갈등이 김일성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 투쟁은 김일성이 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에서 국내파와 동료 공산주의자 오기섭을 직접 비판하는 연설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김일성은 앞서 언급한 협약에 따라 조선공산당과 박헌영과의 대립을 여전히 조심했다.
회의에서 제시된 두 가지 노선 중, 박헌영 노선의 대표인 오기섭은 인민 전선을, 김일성과 그 지지자들은 민족 연합 전선 전략을 옹호했다. 박헌영의 전반적인 노선이 채택되었지만, 여러 분야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의 민족 연합 전선 전략은 자본가 계급 및 지주와의 동맹을 명시적으로 요구한 반면, 인민 전선 노선은 이에 반대했다. 이러한 노선이 소련 동맹국의 지지를 받아야 했지만, 김일성은 유격 투쟁 기간 동안 이 입장을 고수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이것은 단순한 전술이었고, 그러한 동맹에서 프롤레타리아 지도력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북한 공산주의 운동이 취약하고 자본가 계급이 강력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반면 오기섭은 "통일되고 인민 스스로의 자립적인 공화국 건설"을 요구했고, 친일파, 친제국주의자, 반동분자를 인민 전선에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선별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1948년 제2차 당대회에서 오기섭의 입장을 비판하며, 민족 연합 전선 전략이 "당을 좌절시키고 당을 우경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이 논쟁의 결과 "정치 노선의 확립과 조직의 확대 강화에 관한 결의"라는 문서가 나왔으나, 김일성의 제안 대부분이 담겼지만 그의 민족 연합 전선 전략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오기섭과 김일성은 좌익 및 우익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장안파가 트로츠키주의를 실천한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이들 공산주의자들이 뉘우치고 과오로부터 배우려는 의지가 있다면 북조선노동당(NKBB)과 조선공산당(CKP)에 가입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일성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장안파와의 투쟁에서 박헌영을 지원하기 위해 "좌익적 경향과 분파 활동에 대한 비판"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오기섭과 김일성은 모두 박헌영의 지도력과 업적을 인정했지만, 김일성은 조선공산당(CPK)을 "실패"로 간주하며 당내 파벌주의 문제를 비판했다. 김일성은 당의 민주적 규범과 구조에 관해서 민주집중제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든 문제를 논의하는 과도한 민주주의"에 반대하며 권력 집중을 요구했다. 반면 오기섭은 조선공산당을 비판한 적이 없으며, "조선공산당 만세"로 보고를 마무리했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주권 만세"를 외쳤다. 김일성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논의했다.
# 북조선분국(NKBB)의 설립;
# 당 규약 작성;
# 당원증 발급;
# 조선공산당의 전국대회 소집.
정치학자 백선기는 김일성이 회의에서 당의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조선공산당은 파벌주의에 시달리며 당 규약 제정, 당원증 제작, 당 구조 정비에 실패했다. 김일성은 "중앙에서 당원증을 인쇄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렵다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북조선에서 발급하자."라고 제안했다. 회의는 당 규약 초안을 통과시키고, 김일성의 제안에 따라 서울로 보내 조선공산당 지도부를 "돕도록" 했다. 회의는 "초안을 중앙에서 결정하고 인쇄 및 기타 기술적인 문제를 평양에서 처리하도록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안하여 서울의 작업을 지원"하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즉, 조선공산당의 산하 기구로 설립된 북조선분국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김일성은 신중하게 움직였고, 회의는 "개혁 등 개선의 필요성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인지할 때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에 따라 행동할 권한을 가지며, 지부는 이에 복종할 의무를 진다."라는 내용을 내부 규정에 추가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전국대회를 소집하여 "[당] 행동 프로그램, 당원증, 당 규약, 당 민주주의를 통해 선출될 [당] 간부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려고 했다. 그는 소련의 지지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당] 대회는 국제적인 형제 [공산] 당들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회의에서 김일성의 모든 제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으며, 이는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대표들조차 그의 회의 진행에 대한 지도력을 전적으로 지지했음을 의미한다.
3. 3. 북조선공산당 지부 집행위원회 선출
1945년 10월 13일, 평양과 5개 도에서 선출된 15명이 북조선공산당 지부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중 한 명의 신원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위원 10명은 국내파 출신이었고, 김일성과 안길은 전직 빨치산파였다. 그러나 이것이 김일성이 집행위원회에서 명확한 소수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김용범과 오기섭 외에도, 박정애와 김용범이 김일성과 소련의 노선을 지지했다. 집행위원회 위원의 71%가 국내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입장이 김일성에게 반대하거나 그를 비판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이후 열린 집행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상무위원회가 선출되었다. 같은 전체회의에서 김용범은 집행위원회 제1비서로, 오기섭은 제2비서로 선출되었다. 무정이 고위직에 선출되었다는 보고도 있지만, 그러한 소문은 사실일 것 같지 않다. 마지막으로, 9개의 집행위원회 부서가 설치되고 9명의 부서장이 임명되었다.
4. 북조선공산당 지부 전원회의
1945년 10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여러 차례 전원회의 및 확대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5. 평가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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